2023년 10월 31일 (화) 촬영.
4호선 당고개역에서 10-5번 버스를 타고 약 10여 분이면 도착되는 덕흥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입니다.
이곳에서 버스가 오던 방향으로 뒤돌아 덕릉고개 방향으로 언덕길을 약 100여 m 오르면,
코너 길가에 '덕흥대원군 묘'라고 쓰여있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초입에 있는 특이한 형상의 바위를 지나면,
곧 숲에 있는 하얀 비를 만나게 되는데,
이 비가 덕흥대원군의 세 아들 중 장남인 하원군 이정의 신도비입니다.
차남은 하릉군 이인으로 금원군의 양자로 출가했으며, 3남이 조선의 14대 왕위에 오른 하성군 이균입니다.
하원군의 신도비 후면입니다.
신도비 전면에는 '하원군신도비명'이란 글씨가 새겨 있습니다.
신도비 좌측에 있는 계단으로 오르며,
하원군 이정의 신도비를 다시 한번 돌아 봤습니다.
언덕 위에 또 다른 비가 보이네요.
이 비는 덕흥대원군의 신도비입니다.
신도비 위에는 덕흥대원군(1530, 중종 25~1559, 명종 14) 부부의 묘가 있습니다.
덕흥 대원군 묘, 德興大院君墓 / 경기도 기념물,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 5-13
조선왕조 14대 임금인 선조의 아버지로, 대원군 제도가 처음 시작된 덕흥대원군 이초(李岧, 1530~1559)의 묘이다.
어머니는 창빈 안 씨이며, 9세 때 정인지의 손자인 하동 정씨 정세호의 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으며 30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덕흥대원군의 형이 13대 왕인 명종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1567년 덕흥 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였고 선조 2년(1569)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 현지 설명문 -
덕흥군 이초는 조선 왕실 최초의 대원군으로 선조의 아버지이다.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중종의 서자였는데 조선에서는 종친의 입각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음풍농월(吟風弄月 - 맑은 바람을 읊고 밝은 달을 즐긴다는 뜻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시로 노래하며 즐김을 이르는 말) 하며
세월을 보내다 일찍 죽었다.
선조가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다 사림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그에 대한 예우는 임금의 생부나 생모를 추존하는 방식의 선례가 되었다.
덕흥대원군 부부의 쌍묘 앞에 있는 팔각의 장명등입니다.
묘에는 팔각의 호석을 둘렀는데, 부부의 묘 둘 다 팔각의 호석은 같지만 호석의 모양은 다릅니다.
묘표에는 하동부대부인정씨지묘, 덕흥대원군지묘. 라고 새겨 있습니다.
묘의 뒤쪽, 잉에서 본 풍경.
이 사진을 보고 두 봉분에 두른 팔각의 호석이 서로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나요.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죠...
부인의 무덤 호석은 "ㄱ"자처럼 다듬은 돌 8개로 호석을 둘렀고,
덕흥대원군의 묘 호석은 "ㅡ"자로 다듬은 돌 8개로 호석을 둘렀습니다. 어느 쪽이 더 만들기 어려웠을까요?
별것이 다 눈에 들어오네요.. ㅎㅎㅎ 그렇지만 답사 때에는 사소한 것이라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왜? ...
묘표 앞에 작은 혼유석이 있고 그 앞에 상석, 그리고 향로석이 있습니다.
추존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묘 앞에는 무석인이 한 쌍 있습니다. 문석인은 없습니다.
우측에 있는 무석인과 망주석입니다.
묘표 앞에 참으로 작아 보이는 혼유석과 석물들을 바라보며, 무심한 세월을 돌아봤습니다.
제비꽃이 철없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덕흥대원군의 신도비. 귀부는 화강암, 비신은 대리석입니다.
이만큼 커요. 총 높이 350cm, 비 높이 196cm, 너비 80cm, 두께 27cm입니다.
비문은 홍섬이 지었고, 송인이 썼습니다.
신도비의 후면입니다. 글자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덕흥군이라고 새겨 있는 신도비.
덕흥대원군의 장남 하원군 이정의 부부 묘가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하원군 이정의 묘에서 본 덕흥대원군의 신도비와 묘소.
하원군 이정의 묘에는 문석인 한 쌍과 망주석 한 쌍, 그리고 묘표와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습니다.
먼데 산을 바라보고 있는 문석인의 어깨에 쓸쓸함이 내려앉아 있습니다.
덕흥대원군 묘역을 나와 다시 덕흥마을로 갑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선배님 역사
유적지 잘찾아서
기행문 으로
남겨주시여
넘좋아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