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거짓의 두 기둥을 박아놓고 (그 기둥들 안쪽에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국민들 가두어 왔다.
하나는 천조(天照. 왜어[倭語]로는 ‘아마테라스’ - 옮긴이)의 상속권 주장인 ‘만세일계’요, 다른 하나는 현인신(現人神. ‘사람[人]으로 나타나신[現] 신[神]’ - 옮긴이)으로 왕을 치장한 신도(神道)다.
각일각(刻一刻. 각각[刻刻]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 옮긴이) 변화하는 생명과 만상(萬象. 온갖 사물의 현상 – 옮긴이)의 원리를 어기고, 어찌하여 일문(一門. 한 집안/한 가문 – 옮긴이)이 만세(萬世. 아주 오랜 세대 – 옮긴이)에 걸쳐 (바뀌지도 않고 – 옮긴이) 군림할 수 있을까.
(사실, 왜왕[倭王] 집안은 아주 보수적으로 따져도 세 번은 왕조가 바뀌었다는 게 정설이고, 어떤 학자는 여덟 번 이상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만약 메이지 왜왕 때와 히로히토 왜왕 때 혈통이 또 다시 바뀌었다는 증언이 옳다면, 왜국[倭國]을 다스린 집안이 열 번 정도는 바뀐 셈이다 – 옮긴이)
나고 죽는 우주 질서에서 일왕(왜왕 – 옮긴이)도 예외가 아니거늘, 어찌하여(왜국은 그런 그를 – 옮긴이) 신(神)으로 칭하는 걸까.
거짓은 만사를 거짓으로 만든다. 그곳은 그러나 진실을 추구하는 철학과 예술, 창조를 이룩할 수 없는 허방(구덩이/함정을 일컫는 전라도 사투리 – 옮긴이)인 것이다.
그 체제를 변호하는 한, 그 체제가 존속하는 한 일본에 지성인은 존재하기 어렵다. 지성인은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상이 약하고(나아가 철학이 없으며, 종교나 이상주의는 외면당하거나 비웃음을 사는 – 옮긴이) 유리알 속의 유희 같은 탐미주의가 예술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일본이 진실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며(그런데 요즘은, 아니 몇 해 전부터는 청소년이거나 젊은 한국인들이 이런 왜국 국민들의 경향을 따라하고 있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 옮긴이), (잘못된 과거를 – 옮긴이) 청산하는 독일(도이칠란트 – 옮긴이)과 청산하지 않는 일본의 차이점도 바로 그곳에 있다.”
- 69쪽
“일본인은 집단적 심리에의 경향이 짙다. 그것은 집단에 대한 복종을 뜻하며, 따라서 권력에 약하고 강자 숭배는 거의 생리적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일부 한국인들은 ‘매우 바람직한 장점’으로 꼽는 것 같다.
사실 복종은 단결이며, 민족(또는 사회 – 옮긴이)의 역량을 한곳으로 모아 발전으로 몰고 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부정 못 한다. 그러나 연약한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생존해 가는 것과는 다르게, 인간의 경우에는 생존의 한계를 넘어선 욕망이 있기 때문에, 왕왕(往往. 이따금/때때로 – 옮긴이) 그것은 ‘화약고’가 되어 폭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 욕망은 – 옮긴이) 이웃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깊은 화상을 입고 재기 불능한 경우가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은 바로 그와 같은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일본[왜국]>은 그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일어섰잖아?’하고 물으리라. 내 대답은 간단하다. 그 전쟁이 끝난 지 다섯 해 만에 일어난 6.25 전쟁과, 6.25 전쟁이 멈춘 지 열다섯 해 만에 일어난 비엣남[Vietnam] 전쟁 때문에 왜국이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되살아났지, 만약 그 두 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2차 대전 때 폭격과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되었던 왜국은 다시 일어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박 선생님의 설명은 틀린 것이 아니다 - 옮긴이).
그러면 꽃다운 소년들의 자폭 행위(예 : 가미카제 공격/인간 어뢰인 ‘가이텐’/수류탄을 품고 적군의 전차로 뛰어드는 일 – 옮긴이)나 전원 옥쇄, 그 같은 용기는 무엇에서 오는 걸까. 그것을 ‘숭고한 것’으로, ‘일본인의 정신적 기조’로 삼는 연유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만세일계’와 ‘현인신’이라는 헛된 멍에, 바로 그것이다. 그것을 옹위(擁衛. 끌어안고[擁] 지킴[衛] - 옮긴이)하는 군국주의, 군국주의를 존속하게 하는 것 또한 현인신(왜왕 – 옮긴이)이라, 두 개인 동시에 불가결(不可缺. 깨뜨릴[缺] 수[可] 없는[不] : 옮긴이)의 동체(同體 : 같은[同] 몸[體] → 한 몸 : 옮긴이)다.”
- 71 ~ 72쪽
“칼은 물리적으로 육신을 구속하고, 현인신은 정신을 사로잡고, 이같이 옥죄이는 공간을 상상해 볼 것 같으면 참 이상하다. 괴기한 것들이 떠오르니 말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이 있고, 손바닥만 한 연못에는 성냥개비 같은 다리가 걸려 있고, 생명을 일그러뜨린 분재가 보이고, 세련된 포장, 장 종지(간장 종지 – 옮긴이) 같은 작은 술잔, 손가락 끝에서 노는 앙증스러운 우산 하며, 기능으로 갈고 닦으며 달려온 역사(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의 비극을 소름 끼치게 느끼게 한다.
비상(飛上. 날아[飛]오름[上] - 옮긴이)을 꿈꿀 수 없는 사로잡힌 영혼에게 깃드는 것이 허무주의다. 그리고 쾌락이다. 남경(南京. 북경어/보통화[普通話]로는 ‘난징’ - 옮긴이) 학살, 백주(白晝. 흰[白] 낮[晝] → 대낮 : 옮긴이)의 난행(亂行. 난폭한 짓 – 옮긴이)은 일본군의 전략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의 여실한 참극, 절망 없이 그 짓을 했을까.”
- 72쪽
“일본 문학에서(그리고 만화나 만화영화나 게임이나 노래 같은 왜국의 다른 대중문화에서도 – 옮긴이)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이 글은 <자살>을 대신할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이 나타나기 서른 해 전에 쓰였다 – 옮긴이)’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포장해 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 72 ~ 73쪽
“(이른바 – 옮긴이) ‘현인신을 위하여 꽃처럼 떨어지는 아름다움’이란 환상이며 최면술이다. 그 같은 죽음들은 죽음으로 내몰려 죽음에 직면한 공포를 죽음으로 ‘극복’하려는, 비명과 울부짖음과 몸부림, 고통까지 경직되어 버린 가장 약한 자의 현실이다.
절대적 암흑을 향하여, 그곳에 눈송이같이 휘날리는 벚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심(無心. 마음이 텅 빔/아무런 감정이나 생각이 없음 – 옮긴이)이다.”
- 73쪽
“일본에도 사슬을 끊을 기회는 몇 번 있었다. (근세인 일본의 전국시대, 그러니까 서기 16세기에 – 옮긴이) 천주교가 들어오고 (그로부터 1세기 뒤 – 옮긴이) 소위 ‘후미에(踏繪[답회. <그림[繪] 밟기[踏]>라는 뜻. 의역하자면 <천주교 신자에게 거룩한 그림으로 여겨지는, 마리아 부인이 아기 예수를 안은 그림을 발로 밟기를 강요하는 의식>이라는 뜻이다. 의식에 썼던, 그림이 새겨진 나무판/금속판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일한 뒤,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썼던 방법인데, 만약 이 의식을 거부하면 천주교 신자로 간주되어 고문당하고 사형에 처해졌다 – 옮긴이])’에 의해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을 때,
그러나 ‘시마바라의 난’으로 (에도 막부의 군사가 – 옮긴이) 교도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임으로 끝나버렸고(사실은 – 적은 수이긴 하지만 - 살아남은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막부의 억압과 천민인 ‘에타’[오늘날의 ‘부락민(部落民)’]들의 감시/천대를 견디며 2세기 반 동안 몰래 믿음을 지키다가, 페리 제독의 강요로 막부가 개항을 했을 때 서양인 천주교 사제들 앞에 나타나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 옮긴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전토(全土 : 국토의 전체 – 옮긴이)에 만연(蔓延 : 널리 퍼짐)하여 (근대 왜국의 – 옮긴이) 국체(國體. ‘나라[國]의 몸[體]’ → 국가 체제 : 옮긴이)를 부정했던 사회주의(해방정국 당시의 충돌이나 6.25 전쟁이나 비엣남[Vietnam] 전쟁이나 냉전이나 남북 대립 때문에, 한국에서는 사회주의를 비롯한 좌파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으나, 한국인들은 서양이나 아랍 세계나 일본의 좌파들[자유연합주의자(自由聯合主義者 : ‘아나키스트’)/공산주의자/공동체주의자(‘코뮨’주의자) 포함]이 자기 나라의 제국주의/침략전쟁/인종주의/남성우월주의 문화/착취/국수주의/광신/인습과 악습에 맞서 싸우며 짓밟힌 사람들이나 중요한 것을 빼앗긴 사람들과 손을 잡았음을 알아야 한다. 한 예로, 서기 192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일본의 노동단체는 한국인 노동자와 손을 잡고 일본인 자본가와 공장주의 착취/인종주의/민족차별에 맞서 싸웠으며, 일본의 좌파들은 [똑같은 좌파 계열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대한 독립군 가운데 일부를 지지하는 시를 쓰거나, 근대 왜국의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을 반대했다 : 옮긴이)도 만주사변(‘만주 침략’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을 기점으로 권부(權府. 권력[權]을 행사하는 관부[官府] → 정부 : 옮긴이)에 의해 궤멸했다(오늘날에도 일본에 공산당이 남아 있기는 하나, 지지자가 적고 큰 영향을 끼치지도 못한다 – 옮긴이).”
- 73쪽
“어느 역사건 절대 권력과 절대 복종은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수없이 변화하여 흘렀다(예를 들면, 권력을 지닌 정부가 망하고 새 정부가 들어선다든지, 한 때는 사회를 지배했던 종교나 사상이 물러나고 다른 종교나 사상이 그 빈 자리를 차지하는 식으로 – 옮긴이).
다만 일본만은 고착(固着. ‘굳게[固] 들러붙음[着]’ → 상태나 현상이 굳어져 변하지 않음 : 옮긴이)하여 변할 줄 모르고 시간을 멈추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니더라도 그 체제 속에서 굳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왜국 같은 체제/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 어느 누구라도 – 옮긴이)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축소지향에다 창조력이 고갈되고 기능만을 능사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유전자나 생김새나 핏줄이 아니라, 어떤 체제, 어떤 사회, 어떤 문화 안에서 사느냐에 따라 인간집단의 기질이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왜국 사회의 문제는 유전자나 핏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의 제도/틀/문화/관념이 만들어내는 문제점들인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흑인이나 백인을 아기일 때부터 일본 사회 안에서 키워도, 그들은 기질이나 근성이나 성격이 북방 황인종인 ‘순혈’ 일본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본인’으로 자랄 것이고, 그 반대로 핏줄과 유전자와 어버이는 ‘순혈’ 일본인일지라도, 아기일 때부터 브라질이나 타이[Thai]나 캐나다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그의 문화나 말이나 행동이나 기질은 브라질 시민이나 타이 국민이나 캐나다 국민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 옮긴이)”
- 73 ~ 74쪽
“참고가 될까 싶어서 ‘와타베 료조[渡部 良三(도부 양삼)]’라는 분이 쓴 글을 발췌하여 소개할까 한다. 그는 전쟁(2차 대전 – 옮긴이) 말기 학도병(學徒兵. 학생 신분으로 군대에 들어간 병사. 또는 그 군대 – 옮긴이)으로 전선에 나갔다가, ‘신병 훈련용’으로 살아 있는 사람(근대 왜군에게 붙잡힌 전쟁 포로 – 옮긴이)을 세워놓고 십여 명의 신병이 차례차례 돌격하여 찌르는데, 그러고 나면 인간은 걸레 조각같이 되고 마는 것을 목격했다. 와타페 씨는 그 훈련을 거절한 탓으로 고초를 겪다가 패전을 맞이한 사람이다.”
‘일본인이 피해자라는 의식을 가진다면, 원폭 피습보다 천황(왜왕 – 옮긴이)의 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층, 특히 구(舊 : 옛 – 옮긴이) 군부(軍府. 군대 – 옮긴이)와 관료 중에서 사법 관료, 일본 자본주의 자본, 천황 일족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이 지상에 없다. (중략) <사랑이 있는 군비(軍備. 전쟁을 위한 준비 – 옮긴이)>/<자유가 있는 전쟁> 같은 것은 없다.’
‘<천황(왜왕 – 옮긴이)은 신(神)에게 기도드리며 일본과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분입니다. 그것이 일본의 전통입니다(왜왕이 자기 나라의 평화야 당연히 신도[神道]의 신들에게 빌겠지. 하지만 그가 "세계의 평화"를 바라며 신들에게 빌까?
그의 집안은 서기 9~10세기에 일본 혼슈[본주本州] 동북[도호쿠] 지방에 군대를 보내 그 지역의 원주민인 '에미시[한자로는 하이(蝦夷)]'족의 평화를 짓밟았잖아? 그의 집안은 중세 말기에 왜구[倭寇]를 후기 고리[高麗]로 보내 해적의 약탈과 침략을 부추겼잖아? 그의 집안은 서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근세조선 침략전쟁[6년 전쟁]을 일으킬 때, 그 전쟁을 반대하지 않았잖아? 그의 집안은 도요토미가 명나라와 여송[필리핀]과 천축[인도]을 침략하고 정복하고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을 때, 그 계획에 어떤 반대도 하지 않았잖아? 그의 집안은 유구[琉球. 현지 발음은 '루추'] 왕국이 서기 17세기 초 사쓰마 번의 침략을 받았을 때, 유구의 "평화"가 망가지는 것을 비통해하지 않았잖아?
그의 집안은 서기 16세기와 서기 17세기에 야운쿠르['아이누'족의 다른 이름]족이 왜국의 침입과 착취와 탄압을 참다 못해 창칼을 들고 일어났을 때, 그리고 왜국 번주[영주]의 군사들이 그들을 죽이고 탄압해서 야운쿠르 족의 "평화"가 짓밟혔을 때, 그들의 "평화를 기원"하기는커녕 군사들이 하는 짓을 묵인했잖아?
그의 집안은 근세조선과 대한제국과 대만과 청나라를 침략할 때, "평화를 기원"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을 지지하고 부추겼잖아? 서기 1920년대에 근대 왜군이 시베리아를 침략할 때, 그의 집안은 그 일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집안이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입증했잖아?
서기 1930년대 초에 시작된 '만주' 침략에 그가 반대했어? 할힌골 전투에 그가 반대했나?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은? 그때 몽골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평화"가 위협받았잖아? 자치 공화국이던 필리핀의 "평화"도 위협받았잖아? 2차 대전 이전부터 독립을 유지하던 타이[Thai]의 "평화"도 위협을 받았잖아? 상황이 이런데, 도대체 어떻게 왜왕이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분"이라는 말이 나오지? - 옮긴이).> → 이따위 말을 일류 대학의 교수가 했지만, 소화(昭和/왜어로는 쇼와 – 옮긴이) 천황(본명 히로히토 : 옮긴이)이 전쟁을 선포했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인 사실은 지울 수 없다.’
- 74 ~ 75쪽
“<에토 준[江藤 淳(강등 순)]>이라는 평론가는 ‘천황[昭和(소화. 왜국식 발음으로는 쇼와. 히로히토의 연호다 – 옮긴이)]은 아마도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안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히로히토가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안>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미국과의 전쟁인 2차 대전에서 지고도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어? - 옮긴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늘(서기 1989년 이전. 히로히토는 서기 1989년에 죽었다 – 옮긴이)까지 계속 살아 계시지 않았나 싶다.’라고 말했다.
감상에 흠뻑 젖어서, 눈물 콧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이 헛소리 – 옮긴이), 도시(都是. 도대체/도무지 – 옮긴이) 그들 (왜국의 – 옮긴이) 지식인들은 왜 그 많은 동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히로히토의 – 옮긴이) 책임을 묻지 않는 걸까. 그 많은 죽음의 책임자, 한 인간(히로히토 – 옮긴이)의 장수를 어찌 그토록 눈물겹게 감격해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왜국이 그 나라 우익들의 주장대로 – 옮긴이) ‘신국(神國. 신의 나라/신이 다스리는, 영원하고도 완전한 나라 – 옮긴이)’이며 (왜왕은 – 옮긴이) ‘현인신’이기 때문일까. (그 왜왕이 – 옮긴이) 세속적 정치에 무관한(사실은 관여는 하지만 겉으로는 무관한 ‘척’ 하는 – 옮긴이) 것도 ‘신’이기 때문일까.
에도 시대, 신도(神道)의 일파(一派. 한[一] 갈래[派] - 옮긴이)인 ‘후소교[扶桑敎(부상교)]’, ‘짓코교[實行敎(실행교)]’가 제창한 소위(所謂. 이른바 – 옮긴이) ‘일본은 만국의 종주국’이며, ‘후지산은 지구의 정신이요, 진수’라. 이 황당한 생각은 속으로야 믿을 리 없겠으나, 오히려 (왜국의 – 옮긴이) 지식층에서 부활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박 선생님이 이 글을 쓰신 때가 서기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다. 그 뒤 상황은 더 나빠졌다. 내가 예전에 신문 기사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서기 2012년 ~ 2013년에, 왜국 우익들은 자기 나라 『 역사 』 교과서에 『 일본서기 』 「 신대[神代] 」 의 초기 기록에 나오는 신들의 계보를 ‘있는 그대로’ 실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왜국 정부는 이 요구를 반박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요구가 나온 지 열 해나 열한 해가 흐른 지금은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봐야 한다 – 옮긴이).”
- 75쪽
“그들(대다수 왜인[倭人]들 – 옮긴이)은 조선(한국 – 옮긴이), ‘만주’, 타이완(대만[臺灣] - 옮긴이)을 ‘(원래의 주인인 원주민들에게 – 옮긴이) 반환했다.’는 말 대신 ‘잃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이 말인즉, 왜국은 언제든 ‘억울[?]하게 잃어버린 우리 땅들’ 가운데 하나인 한국과 조선 공화국[수도 평양]과 간도와 흑룡강성과 요동반도를 ‘되찾기 위해’ 총칼을 들고 다시 쳐들어가려고 벼른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대만을 ‘친일국가’로 묶어두는 것을 넘어, 언제든 다시 식민지로 삼고 싶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2차 대전이 끝난 뒤, 한국 땅 안에서 살던 왜인들은 자신의 집 벽이나 자신의 동네 담벼락에 ‘우린 언젠가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오겠다!’라는 글을 갈겨 쓰고 나서 왜국으로 철수했고[내가 해방 당시를 살았던 사람의 증언을 적은 글을 읽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 왜국 정부는 <교련> 과목을 되살려 10대 남학생들이 다시 총검술을 훈련하게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왜국 정부가 자기 나라 국민인 남성들을 병사로 만들어서,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르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그 전쟁은 한국과 조선 공화국이 ‘주 무대’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 옮긴이).
얼마 전(서기 1980년대 말 – 옮긴이) 독도 망언이 있었을 때, ‘반환’이 아닌 ‘잃었다.’는 그들의 발상을 생각하며 쓰게 웃은 일은 있었지만, 사람의 일로서는 설명이 안 되고, 오로지 ‘만사형통인 신의 세계’에서만이 있을 수 있는 일. 왜냐하면 그것에는 설명이 필요 없으니까.
그렇다면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이나 지식인’이 뭣에 필요하단 말인가. 와타베 씨의 말이지만, 전쟁을 ‘성전(聖戰)’이라는 세계사적 신어(新語. 새로 생긴 말 – 옮긴이)를 만들어서 정당화하는 것, 그것 역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에서는 신을 모셔 오는 것이다.”
- 75~76쪽
“<전쟁은 문화의 어머니>요 어쩌고 하는 말도 생각이 난다(내 솔직한 생각을 말하라면, 전쟁은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자, ‘사회가 바뀌는 까닭들 가운데 하나’이며, '파괴'고, ‘필요악’이고, ‘마지막 선택’이지, 절대로 ‘문화의 어머니’는 아니다 – 옮긴이).
일본(왜국 – 옮긴이) 지식인들의 대부분은(사실은 일반 국민들 가운데 대다수도 – 옮긴이) 한국인의 분노를 지겹고 불쾌하고 귀찮아한다(그러니, 서양 여러 나라의 정부나, 친일국가 출신인 ‘사냥개들’[예 : 마크 램지어 교수]이나, 새로운 친일파들[서기 1945년 이후에 태어나 왜국 정부와 우익에 무릎꿇은 ‘한국인’들]과 원조 친일파들[개항기부터 서기 1945년까지 날뛰었던 친일파들, 이완용이나 송병준이나 서정주나 이광수나 최규하나 노덕술이나 백선엽이 좋은 예다]의 후손/제자/친척들이 한국인을 비롯한 갈마의 피해자들에게 강요하는 ‘<일본>과의 우호’는 ‘이룰 수 없는 꿈’임을 알 수 있다. 피해자가 피해자의 분노를 지겨워하고, 귀찮아하는 가해자와 어떻게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 옮긴이).
(이 자리를 빌어 왜국 국민들 대다수에게, 그리고 나루히토 왜왕과 다케다 쓰네야스에게 솔직담백하게 말하겠다.
“한국인인 나는 넷우익과 재특회와 일본회의와 『 산케이 신문 』 의 기자들과 혐한 서적을 쓰는 왜국 작가들과 그 모든 것들을 묵인/지지하는 대다수 왜구[倭寇]들의 한국을 향한 혐오[줄여서 ‘혐한’]가 ‘지겹고, 불쾌하고, 귀찮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 혐오를 온 누리에 퍼뜨리며 한국인을 비난하고 중상모략하는 것도 불쾌하다. 솔직히 말해, 의열단을 본받아서 총 들고 그것들을 죽여버리고 싶다!”
→ 난 국제연합[UN]의 관리가 와서 내게 물어도, <알자지라> 같은 외신의 기자가 와서 내게 물어도, 친일국가의 시민/국민이 와서 내게 물어도 이렇게 대답할 거야! 여긴 자유국가고, 내겐 ‘언론의 자유’/‘표현의 자유’/‘진실을 말할 권리’가 있다! - 옮긴이)
‘언제까지 이럴 것이냐?’ 하면서도 철도를 놓아주었느니, 학교를 세워주었느니, 아무도 그것을 부탁한 바 없는 일을 좀스럽고 쩨쩨하게 늘어놓는 데 대해서는 (반박하는 – 옮긴이) 말이 없다.
(더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왜국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 앞에서 이딴 식으로 “쩨쩨하게” 근대 왜국이 한 짓을 늘어놓는 게 정말 “지겹고, 불쾌하고, 귀찮다!”
서기 1990년대 중/후반에 나온 할리우드 영화인 <제로니모>를 보면, 아파치 족 족장이자, 끝까지 미국 백인들과 미국 정부에 맞서 싸웠던 ‘제로니모[본명 ‘고클라예’/‘고야슬레이’ - 아파치 족의 말로 ‘하품하는 남자’라는 뜻 - ]’가 미국 정부가 정해준 ‘보호구역[말이 좋아서 이렇지, 사실상 수용소였다]’에서 달아나 광산의 백인 광부들과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광부들 가운데 하나가 제로니모에게 화를 내며 “야만인들! 우린[미국 백인들 – 김박사] 이 땅을 [광산을 만들어서 – 김박사] ‘개발’했지만, 너흰 이 땅[미국 땅 – 김박사]을 버려놨어!”하고 떠들고, “우리가 오기 전에는 어떤 문명도 없었어, 건물도, 광산도, 그 무엇도 없었다고!”하고 덧붙인다.
제로니모는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문 채 그 광부의 망언을 듣다가, 이윽고 그 말이 다 끝나자, 말에 탄 채 총을 들고 그 광부를 뺀 나머지 백인 광부들을 다 쏴 죽여버린다.
제로니모는 겁에 질린 생존자에게 “꺼져라. 다음에 다시 마주쳤을 때에는 [다른 놈들은 놔 두고] 너부터 죽이겠다.”고 경고하고 말머리를 돌린다.
이 말을 왜 하냐고? 내가 영화 속의 제로니모, 아니 고클라예를 본받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고클라예가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과 같고, 망언을 지껄인 미국 백인 광부는 ‘<일본>이 조선 땅에 철도를 놓아주고 학교를 세워주었다. 그러니 <일본>은 조선에 은혜를 베푼 거야!’ 하고 지껄이는 대다수 왜국 지식인들 – 나아가 그 지식인들의 말을 믿는 대다수 왜구들 – 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클라예가 총으로 미국 백인 광부들을 쏴 죽였듯이, 나 또한 총을 들고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조선 출병[왜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근세조선 침략 전쟁을 이렇게 부른다]의 정당성’을 외치는 왜국 우익 지식인들을 죽여버리고 싶다!
모든 ‘식민지 근대화론’을 박멸하라! - 옮긴이)
(그 ‘지식인’들은 왜국 정계에서 – 옮긴이) 간간이 들려오는 (서기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과, 근대에 왜국이 일으킨 전쟁들이 – 옮긴이) ‘침략이 아니라는’ 망언에 대해서도 무반응이다.
그들(왜국 우익 인사들 – 옮긴이)의 계속되는 망언은 ‘괜찮아도’, 한국인의 분노는 왜 지겨운가. 사리를 명백하게 하지 않는 이상, 잘못은 되풀이된다. (그러니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왜국을 향한 분노와 반박과 비난은 – 옮긴이) 과거지사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데서 오는 근심이다.
장차 세계에서, 인류라는 차원에서 일본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그다지 긍정적인 모습으로 있지는 않을 것 같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만들어지는 방사능 오염수를 버리겠다고 고집하지 않는가?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고집하지 않는가? - 옮긴이).
인류에 속하는 일본인 역시 오늘 군비 확장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자결’하지 못하는 모친의 목을 조르는 아들의 비극이 없기 위하여.”
- 76쪽
“우리들 일본인은 소위 ‘역사적 교훈’을 배우려 하지 않는 민족이며, ‘역사는 역사로서 현재와 무관한 것’으로, (그것을 – 옮긴이) 방편으로 사용한다는 정신적 기술을 고도로 발전시켜 왔다.”
가와무라 씨 글 중의 한 대목이다.
(덧붙이자면, 내가 스물여섯 해 전에 읽은, 왜국을 다룬 책에 따르면, 근대에 왜국에 교사로 온 서양 백인 남성이 ‘<일본>의 갈마’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가르치는 왜인 학생들에게 그것에 대해 물어보자, 그들이 침통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안 하고 있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일어나서 교사에게 “우리에게는 말을 할 만한 <역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만들어나가야 하는 겁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소개한 이 이야기와, 가와무라 씨의 글을 보면, 왜인[倭人]들의 갈마를 다루는 태도가 배달민족의 그것과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옛날은 옛날이지, 오늘날과는 관계가 없어. 특히, 나한테 불리한 옛날이나 내가 잘못한 적이 있는 옛날은 더더욱 기억할 필요가 없어.’하고 생각하고, ‘설령 옛날을 기억한다 해도, 그건 교훈이나 깨달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익을 챙기거나 이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하고 생각하고 그걸 실천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들은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갈마[예를 들면, 흔히 ‘잉카’로 불리는 ‘타완틴수유’ 제국의 갈마나, ‘수메르’로 잘 알려졌지만 올바른 이름은 ‘키엔기르’인 문명권의 갈마나, 서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중세 왕국의 갈마나, 동로마 제국의 갈마]에만 ‘객관성’과 ‘통찰력’을 발휘하지,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갈마[예를 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이나, 2차 대전]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왜국과 대다수 왜인들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나쁜] 과거를 잊어버린 이들에게 그 과거는 되풀이”되는 법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나쁜 과거를 잊음으로써 그 과거를 되풀이할 가능성을 키우고 있고,
암베드카르 박사가 말했듯이 “갈마를 잊는 사람들은 결코 [새로운] 갈마를 만들어낼 수 없”는데,
왜인들은 갈마를 잊음으로써 – 그리고 어떤 “교훈”도 배우려 하지 않음으로써 – 갈마에서 긍정적인 요소[예를 들면, 「 빈궁문답가(貧窮問答歌)」 를 만들어낸 고대 일본인의 정신이나, 『 도연초(徒然草) 』 를 만들어낸 중세 일본인의 정신이나, 여러 민족의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화려하고 풍성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운 아케메네스 왕조 지배층의 정책이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보존하고 더 풍성한 철학을 만들어낸 압바스 왕조의 정책이나, 유가[儒家]사상을 받아들여 그것을 계몽사상으로 바꾸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럽을 바꾸려고 싸운 계몽사상가들의 활동이나, 중립국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수 세기 동안 나라를 지켰던 스위스의 방침이나, 무장봉기와 혁명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얻어낸 아이티 사람들의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에 참전하고 민권운동에 뛰어들어 인종평등이라는 관념을 인정받은 서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투쟁]를 얻어내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삶에 써먹지도 못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그들은 새로운 갈마를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자민 막부’로도 불리는 자민당 정권에 노예처럼 끌려다니면서 살고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이들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하고, 갈마로부터 “교훈”을 얻어내려는 시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
– 옮긴이)
“일본의 지배자는 조선인(한국인 – 옮긴이)에게 유화정책을 쓰기보다, 일본인에게 ‘식민지를 가진 일등국의 제국신민으로서의 자각’을 교육해야만 했다.”
- 이것은 「 소화(昭和)와 아시아 」 라는 글 중의 한 부분이다(이것이 대다수 왜인들의 솔직한 속마음이다. 상황이 이런데, 왜국과의 ‘화해’가 가능한가? ‘협력’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하다! - 옮긴이).
- 77쪽
― 이상 『 일본산고(日本散考) 』 ( 작은 제목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 ‘박경리’ 지음, ‘다산북스’ 펴냄, 서기 2023년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