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전 날
전날 밤까지 고민했다. 이틀 동안 시간을 내야하는 일이라 부담스러웠다. 27일 월요일까지 보내야하는 원고도 한 편 있었고, 설 아래 학급 문집도 마무리해야 했다. 안 가자니 마음이 불편했고 가자니 해야 할 일들이 마음을 붙들어 맸다. ‘의롭고 고통받는 자를 돕는 힘을 나는 믿는다. 함께 손을 잡자. 우리 어르신들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다오. 같이, 손을 놓지 말고 함께 걸어가자! 누구든, 살아있으라.’라는 말로 끝맺은 녹색평론 1•2월호 <밀양 송전탑의 어떤 하루>이계삼 선생님의 글을 읽고는 그날 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더랬다. 지난 번 1차 희망버스 때는 둘째 날까지 온전히 함께 하지 않은 것이 마음이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안 가도 되는, 가지 말아야하는 핑계도 숱하게 떠올랐다. 순간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결국 식구들에게 선언했다. “내일 아침에 눈 떴을 때 내가 없으면 밀양 간줄 알아라.” 그렇다. 내일 아침에 눈 딱 떴을 때 마음가는대로 하자. 그러고는 잤다.
1월 25일
9시 30분까지 원주 공영주차장에 갔다. 그곳에 가면 희망버스를 탈 수 있다고 했다. ‘교육공동체 벗’에 희망버스 알림 글을 보아둔 터였다. 시간 맞춰갔지만 눈에 띄는 버스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한참 둘레를 서성거리다 보니 부부로 보임직한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차림이 딱 밀양행이었다. 배낭에 침낭, 등산화까지. “저, 밀양 희망버스......” “아, 네 저희도 거기 갑니다.” 그러더니 어딘가 연락을 해보더니 모이는 곳을 손짓으로 알려주고는 같이 갔다. 너댓 사람이 와 있다. 아는 사람 없다. 어색하게 인사 나누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 저 사람. 아는 사람이 오고 있다. 속초 이은영 선생님 제자라며 원주 글쓰기 모임에 처음 한두 번 나왔지. 지난 번 엄기호 선생님 강의 때도 인사 나눈 적 있었다. 박형환 선생님이다. 무지 반갑다.
버스가 왔다. 춘천서 사람을 태우고. 버스가 미끄러지며 서는데 보니 맨 앞 자리에 임금록 선생님이 딸래미랑 나란히 타고 있네. 반갑다. 스무 명 남짓?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간단히 인사만 나누고 밀양까지 줄창 달렸다. 밀양 들머리에서 갑자기 차가 섰다. 조류독감 방역을 한댄다. 자다가 일어나 차에서 내려 우린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방역을 당했다. 젠장, 외부세력이 조류 독감을 퍼뜨리러 온대나 뭐래나. 그럼 우리가 조류? 난 무슨 새지?
시청앞 집회
2시에 밀양 시청앞에서 집회 시작이었다. 거리 곳곳에 빼곡한 경찰차와 경찰들. 워메, 대체 얼마나 온겨? 온통 경찰 천지여. 시청 앞 마당에는 미리 온 사람들이 질서 없이 여기저기 모여 인사를 나누고 있다. 노란 투쟁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어? 삼척 핵폐기장 반대 투쟁이네. 삼척에서 온 분들이구나. 다가가보니 아는 얼굴들이 여럿이다. 삼척 있을 때 투쟁의 현장에서 자주 만나온 공무원 노조 동지들이었다. “주순영 동지, 얼마 만이오.”그러면서 어찌나 반갑게 인사하시던지. 지금도 삼척에서는 핵발전소 건설 반대 투쟁을 위한 촛불집회, 1인 시위, 미사가 열리고 있다. 남편 스마트폰 페이스 북으로 보아왔다. 볼 때마다 미안함, 죄책감이 들었다. 삼척에서 원주로 온 것이 괜스레 나만 도망 나와 버린듯한 느낌이었다. 옆을 보니 탁동철 선생님이다. 부부가 함께 왔다. 또한 반갑다. 사모님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10년이 넘었지 아마. 속초, 강릉, 동해, 삼척이 한 버스로 왔다고 했다.
모여 있는 무리 가운데 뻥 뚫린 데가 있어 가보니 바닥에 천에 인쇄된 판화 그림이 여러 장 놓여 있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색칠을 하고 있었다. 마을마다 하나씩 갖고 갈 판화그림이었다. 너무 곱다. 밀양 할매들이 환하게 꽃으로 피어나는 그림이다. 이윤엽 화가 작품이다. 이윤엽 화가는 물감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색칠이 잘 되도록 도움말을 해준다. 깡 말랐네. 저 눈빛, 그래 예술가의 웅숭깊은 눈빛이다. 나도 붓칠에 끼었다. 물감을 칠해 바짝 마르면 좋겠는데 바닥이 젖어있어서 걱정이었다. 결국 행진 때 그림을 보니 모두 번져있었다. 훌륭한 작품이 그만 제 빛을 못내고 말아 안타까웠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간단히 집회를 하였다. 밀양 농민회 회장님이 진행하셨는데 말씀이 참 재미나고 구성졌다. 방역을 모두 통과한 집회 참가자 우리는 멸균 상태이고 경찰들은 세균 상태라고. 세균 경찰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밀양출신 노래하는 사람 공연, 당대표들의 인사말, 몇몇 사람들의 투쟁 발언이 있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장면. 장하나 의원과 김재연 의원. 역시나 장하나 의원은 밀양 싸움에 깊은 관심과 진정어린 연대의 말로 힘을 주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김재연 의원을 보노라니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슬픔이 일었다. 통합진보당, 얼마나 얻어맞았나. 정말 겨우 죽지 않을 만큼 잘근잘근 밟아놓았지 싶다. 우리 사회의 야만적인 폭력 앞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물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지만……. 떨고있는 작은 아이 같아 보였다.
들썩 들썩 거리행진
3시 무렵 행진이 시작되었다. 방송차와 풍물패가 앞장 서고 펼침막과 그림을 든 사람들이 뒤를 이었다. 백기완 선생님과 김진숙 지도위원도 보인다. 방송차 위에서 아까 사회를 보시던 농민회 회장님이 줄곧 말씀하셨다. “오늘 아침 한전 직원차량이 밀양 어르신 한 분의 다리를 치고 으깨었습니다. 두 분 어르신이 목숨을 끊었고 많은 분들이 다쳤습니다. 이제 이런 비극은 멈추어야 합니다.” 회장님, 목이 다 쉬었다. 행진 참가자들은 ‘송전탑 필요 없다 한전은 물러가라’외치며 걷고 또 걸었다. 주황색 풍선을 들고 예쁘게 만든 판화 스티커를 거리 곳곳에 붙이며 나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었다. 걸으면서 뒤를 보았는데 끝이 안 보여 건물 높은데서 올라가 보았는데도 역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 이렇게나 많이들 왔구나.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밀양의 눈물을 닦아주러 왔구나. 세 살 어린 아이부터 초중고생, 대학생, 청년, 아저씨, 아줌마,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사는 곳은 모두 달라도 모인 곳은 같았다. 힘이 났다.
시청에서 내디딘 발걸음은 영남루 아래 마련된 유한숙 어르신 분향소에 닿았다. 분향소 옆 밀양교에 흰색 꽃종이로 만든 국화를 매달았다. 어르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밀양 시내가 이렇게 넓은 줄 몰랐다. 다리가 아프다. 하지만 힘들진 않았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 지난 번 밀양 할매들이 불러 힛트 친 곡 ‘내 나이가 어때서’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흥겹다. 특히 마지막 부분 ‘~ 데모하기 딱 좋은 나인데~’는 정말 맘에 들어서 꼭 따라 부르게 된다.
한전 건물 앞에 닿았다. 와~ 놀랍다. 경찰이 한전을 꽁꽁 싸매 놓았다. 차벽도 모자라 방음벽 같이 생긴 거대한 쇠가람막으로 한전을 보호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 경찰들도 엄청난 인원이 깔려있었다. 우린 그곳에서 잠시 집회를 가졌다. 유한숙 어르신 유족인 유동환씨는 “아버지가 경찰에게 765 때문에 죽으려고 했다는 진술을 분명히 했음에도 경찰은 복합적 요인이라고 발표했다”며,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억울하고 분통하다. “한전은 밀양에 송전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심장에 송전탑을 꽂는 것”이라며 송전탑 건설 중단을 요구했다. 모두 선 채로이야기를 듣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구호를 외쳤다. ‘한전을 비호하는 폭력 경찰 물러가라!’, ‘생명이 전기보다 소중하다. 송전탑 고마해라’ 색분필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 아름다운 낙서였다. 경찰차와 가림막에는 예쁜 판화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였다.
이제 보인다. 저기가 바로 밀양역. 거의 세 시간을 걸었네. 5.5Km라고 했지. 이제 다 왔다.
밀양역에 도착해서는 저녁을 먹었다. 4천 여명 정도가 먹어야하는 밥의 양은 어느 정도일까? 이렇게까지 많이 올 줄 몰라 밥이 모자랄 것 같다고 했다. 2500명 분의 국밥을 준비했단다. 광주에서 가래떡을 해 왔고 김밥, 컵라면도 준비했단다. 아무튼 넉넉하게, 배불리 먹었다. 김밥도 먹고 어묵도 먹고 국밥도 먹고 따뜻한 청주도 한잔했다. 바랄 게 없다.
밀양역 문화제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문화제에는 서산 팔북면, 당진주민, 여수 봉도마을, 경북 청도 삼평리 등 전국의 송전탑 주민대책위에서도 오고, 민주노총을 비롯 울산현대자동차,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50여개의 단체에서 참가했다고 소개했다.
백기완 선생님이 앞에 나와 말씀을 하셨다. “박근혜 정권의 실체는 거짓말이 소름끼치는 독재정권으로 요약된다”며 “박근혜 정부는 정든 땅에서 살겠다는 밀양주민에게 송전탑이라는 칼을 가슴에 박아 죽이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모는 정권은 지구상에 박근혜 정권뿐”이라고 비난하면서 “송전탑 반대투쟁은 박근혜 정권의 만행을 뿌리 뽑는 것”, “송전탑이라는 비수를 제거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들의 양심”이라며, 우리들의 양심이 불타오를 때 박근혜 정권의 만행을 철폐할 수 있다고 했다. 언제나 한결같은 백기완 선생님이시다. “나도 한때 사랑을 해봤노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여기에 쓰지 말아야지. 집회 참가자의 특권으로 남게 해야겠다.
와, 놀라운 공연을 봤다. 극단 ‘꼭두광대’와 소리꾼 양일동, 극단해풍 이상우. 이들이 펼친 소리 춤극은 밀양의 현실을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감동이었다. 특히 소리꾼의 소리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렇게 시작된 문화제는 밀양송전탑 주민의 투쟁을 담은 영상상영, 활동가와 밀양할매가 함께하는 토크쇼, 밀양 할매 합창단 노래, 마지막 ‘스카이 웨이커스’ 음악밴드의 광란의 시간까지.
마을로
에고 다리야. 버스를 타고 마을로 들어갔다. 시골의 밤길은 어둡다. 지난 1차 때 보니 밤에도 논두렁 밭두렁 곳곳에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들이 도깨비불처럼 보여 기겁을 하겠더니 이번엔 어째 안 보인다. 춘천, 원주는 고정 마을 회관이 숙소다. 차에서 내리니 마을 회관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어르신들이 모여 계셨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마을 회관 바닥이 짤짤 끓는다. 아, 따숩다. 좋다. 이내 상을 펴고 막걸리, 두부, 김치, 돼지고기를 올렸다. 마을 어르신들과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이장님을 비롯해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12시가 조금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그냥 바로 곯아 떨어졌다.
1월 26일
새벽 5시 45분. 일어나랜다. 아, 몸이 무겁다. 더 자고 싶다. 하지만 벌떡 일어나 앉았다. 회관문을 열고 나서서 하늘을 보았다. 북두칠성도 보이고 초승달도 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별님과 달님이다. 어둠 속에서 버스를 타고 마을 삼거리에 도착해 아침밥을 먹었다. 다른 마을에서 묵었던 분들도 같이 모여들었다. 집에서는 아침밥을 안 먹는데 박형환 선생님이 챙겨주시니 안 먹을 수가 없지.
이제 도곡 마을로 갔다. 송전탑 112호기가 세워지는 곳. 날이 밝아진다. 도곡 저수지가 보인다. 길 위 상황이 심상찮다. 버스가 멈춰 섰다. 경찰버스가 한쪽 차선을 막고 한쪽 차선은 인간 방패를 만들어 길을 막았다.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한다. 숱한 말들과 몸들의 부딪힘들. 점점 격해지고 험악해진다. 안되겠다. 도로 옆 산위를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길 위에서 대치하고 있느니 험하지만 산길을 택했다. 마을 할매가 숨을 헐떡이며 앞서 가신다. 뒤를 따랐다. 할매들은 나무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마른 나무와 풀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셨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포장길을 따라 올랐다. 대치 상황은 언제까지나 계속 될 듯싶었다. 우리끼리라도 가야한다. 할매, 할배들만 있을 때 송전탑 공사하는 현장에 한번 올라가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했다. 한 사람에 네다섯의 경찰들이 붙어 어르신들을 에워싸고 들어내고 팔을 꺽고 손목을 접지르고 손가락을 뒤로 제끼고. 온갖 야비한 방법으로 밀어붙이니 당할 수가 없다고 했다. 경찰 없이 한전만 있었다면 이 싸움은 벌써 끝났을 거라고 했다. 경찰! 국가 폭력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자본가의 충견이 되어버렸다. 민중을 억압하는 압제자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우리 버스에 탔던 사람들 예닐곱이 그래도 송전탑 세워지는 산에 같이 오르게 되었다. 할머니도 세 분. 길 없는 산이어서 속도를 맞춰 함께 갈 수 없었다. 다만 우리가 가야할 곳만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게릴라전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산 속 나무들 사이로 형광색 경찰들이 군데군데 빼곡하다. 참 기가 찰 노릇이다. 그 옷 색깔이 우리가 가야할 곳을 안내해 주었다. 할매가 “꽃 피면 얼마나 이쁜데 참꽃 나무들을 이래 다 꺾어놓고.”안타까워 하신다. 공사장 가까이 갈수록 나무들이 숱하게 베어지고 뽑혀있었다.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올라가니 산 속 경찰 셋과 맞닥뜨렸다. “이 추운 날 아침 여기 왜 이러고 계세요? 안 추우세요?” 아무 말 없다. 경찰들 뒤로 반질반질한 초록색 철망이 처져있다. 좀 더 올라가보니 공사현장이 훤히 보인다. 아, 저기가 송전탑 112호기가 세워지는 곳이구나. 터는 닦아놓았다. 한전 공사직원 너댓이 보이고 포크레인과 터를 닦는 장비들이 보인다. 공사터 둘레에 철망 팬스를 이중으로 쳐놓고 그 둘레 빼곡이 경찰들이 서있다. 참말로, 이게 뭐하는 지랄들이냐. 경찰들이 이렇게나 할 일이 없더냐. 철망을 들어올리고 들어가려 했더니 협박한다. 들어오면 처벌을 받는다느니, 사유지라 무단 침입하면 안 된다느니. 내 뒤에 따라 온 분이 “사유지를 경찰이 왜 지켜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허, 참 기가 막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 할머니 세 분은 주저앉아 숨을 고른다. 지팡이로 바닥을 수도 없이 내리치신다. “내 오늘 여기서 죽어 뿔란다. 니들이 뭐 할라꼬 여기 와서 우리를 이렇게 쫓아낼라 카는데.” 약봉지를 보여주신다. 땅이 움푹 파인 곳에 누우며 내 죽으면 이 낙엽으로 파묻으라 하신다. 더 이상 못 살겠다 하신다. 철망 저쪽에선 경찰들이 카메라로 우리를 찍고 또 찍는다. 가는 데마다 경찰이 졸졸 따라 온다. 공사 현장에 대고 소리쳤다. “한전은 좋겠다. 경찰들이 지켜줘서.” “송전탑 필요 없다 한전은 물러가라.” “주민 삶터 짓밟는 한전과 경찰은 물러가라.” 곁에 선 사람 한 둘이 따라서 외친다. 아, 무기력하다. 할매들하고 주저앉아 같이 욕하고 노래하고 구호를 외쳤다. 금단의 땅이 따로 없다. 할매들이 이제 내려가자 하신다. 이래 보시고 내려가면 괜찮겠냐 물으니 올라와 본 것만으로도 됐다 하신다. 현장 절반까지도 못 와보고 늘 내처져버렸다고 하셨다. 희망버스가 왔으니 여기까지 이렇게 올라와 볼 수 있었다고, 다행이라 하셨다. 아, 여기까지구나. 그냥 내려가면 안 될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작업은 하지 않고 있고 경찰들만 그득하니 빈 터를 지키고 있으니. 착잡하다.
내려가는 길은 포장길이다. 공사 차량 오가느라 길을 잘 닦아 놓았다. 이 멀쩡한 길을 막아서서 못 가게 하다니. 산 아래 내려오니 마을 어귀에서는 아직도 경찰과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대치중이다. 경찰들 사이를 비집고 내려갔다. 문규현 신부님과 수녀님들도 여러 분 오셨다. 얘기는 안 통했다. 집회참가자들 짐이 마을회관에 있어 갖고 와야 한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길을 안 터주었다. 11시에 마무리 집회가 있는데. 짐 가지러 트럭만 한 대 올라가는 조건으로 길을 터주었다. 우리 팀은 버스에 탔다. 배가 고프다. 아까 아침 든든히 먹어둘 걸. 새벽부터 기운을 너무 뺐다. 아까 올 때는 어두워 못 봤는데 비닐 움막이 있다. 움막 앞에는 장작불이 피워져있고 둘레에 어르신들이 있다. 잘 가라며 하염없이 손을 흔들어주신다. 이 싸움은 언제 끝이 날까?
마무리 집회
분향소 아래 밀양교 다리 밑 잔디밭에 사람들이 그득하다. 모두들 다시 모여드는구나. 하늘은 맑고 강물은 평화로이 흐르고 모여든 사람들은 아름답다. 대책위 신부님이 말씀하시고 희망버스 16개 지역 담당자들이 나와 인사를 했다. 성명서를 낭독하고 박터뜨리기를 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경찰과 한전 직원들 역을 맡아 밀양 할매들을 방해하는 포퍼먼스였다. 할머니들은 온갖 방해 작전을 막아내고 콩주머니로 박을 터뜨려 송전탑을 물러가게 하는 거였다. 박은 이내 터졌고 풍물장단이 신명나게 울려퍼졌다.
할매, 할배들 손잡고 인사하는 시간이었다. 안아드리고 힘내시라 했다. 어제 어르신들이 말씀하셨다. 이래 한꺼번에 와주는 것도 좋지만 언제든지 자주 와서 우리랑 밥 먹고 놀아달라고. 외롭고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어르신들. 부디…….
이 땅 곳곳이 밀양이다. 현재 진형형이다. 골프장, 핵발전소, 해군기지, 인권이 유린되는 작업장들. 퇴로가 없다.
주저 앉아있을래, 일어나 싸울래? 네, 싸우겠습니다. 저항이, 싸움이 엄숙한 기도임을 믿습니다.
첫댓글 "저항이, 싸움이 엄숙한 기도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생하셨습니다.
희망버스 다녀 간 뒤 바로 뒷날 전쟁을 선포하듯 내팽개쳐진 밀양이었습니다. ㅠㅠ...어르신들이 욕을 참 잘하시더라고요. 남은 건 악밖에 안남았다며,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야지 않겠냐며.....
깨알 지적질 하나. 여수 봉도 마을이 아니고 여수 봉두 마을입니다. 제 고향이거든요. 중학교 다닐 때 그 동네에 모내기 노력봉사 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중국 갔다가 오느라고 함께 못 했는데 봄방학 하면 한 번 가 봐야겠습니다.
네, 꼭 한 번 시간내어 들르세요. 그렇게 그렇게 찾아가 손 한번 잡아드리는게 큰 힘이 되신다고 하셨어요.
좋은 소식 하나! 비공식적이란 토가 달렸지만 밀양시장 사과, 시민분향소는 오리배선착작공영주차장에 전기시설 컨테이너 설치로 합의^^ 주더덕의 맘이 빛을 발하다~~
어제 경찰에 포위되어 맨바닥에 주저 앉아 밥 먹는 어르신들 보며서 슬픔과 분노로 어찌할 바 몰라했는데....나쁜 시키들.
연대만이 희망이요, 행동이자 저항이다......아~이 전쟁같은 시대는 끝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