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일 오늘의 역사
2022년 경기 포천 육군 부대에서 훈련 중이던 수리온 헬기 2대가 190m 높이에서 충돌
2021년 이스라엘에서 세계 최초 머리가 붙은 샴 쌍둥이 분리 성공
2021년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유해 사후 200여 년만에 발견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이어진 박해로 순교한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사후 200여 년 만에 발견됐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올해 3월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초남이성지의 바우배기에서 성역화 작업을 하던 중 순교자로 추정되는 유해와 유물이 출토됐다"며 "유물을 연구하고, 유해를 면밀하게 검사한 결과 세 복자의 유해로 판명했다"고 밝혔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전주 남문밖(전동성당 터)에서 참수됐다. 두 사람은 조선교회에 내려진 제사금지령을 따르고자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 장례를 치렀다가 모진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신앙을 지키고자 목숨을 내놓은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로 기록됐다.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윤지충 바오로의 동생이다. 형이 순교한 10년 뒤인 1801년 신유박해 때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했다.
세 사람 모두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2020년 방탄소년단 한국최초로 빌보드 메인싱글챠으 ‘핫100’ 1위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 1위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 가수 중에서는 최초의 기록이다.
빌보드는 31일 방탄소년단의 신곡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핫100' 에서 1위로 데뷔했다고 발표했다.
빌보드는 "7인조 한국 그룹이 이들의 첫 번째 영어 싱글로 '핫100'을 지배했다"고 전하면서 한국 가수가 이 차트 정상에 오른 경우 역시 처음이라고 밝혔다.
방탄소년단은 지난 3월 노래 '온(On)'으로는 빌보드 '핫100' 4위를 기록했다.
가수 싸이도 2012년 '강남스타일'로 '핫 100'에서 7주 연속 2위를 달성했지만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다.
한편 방탄소년단은 전날 미국 대중음악 시상식 '2020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도 베스트 팝, 베스트 안무, 베스트 그룹, 베스트 케이팝 등의 분야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
2018년 한국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결승에서 일본 꺾고 우승
2017년 마라토너 강명구(62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유라시아 횡단 평화마라톤 출발, 1년 4개월간 17개국 16,000km 달림
2009년 '이지스함의 아버지' 웨인 메이어 전 미국 해군 소장 사망
미국 ‘이지스함의 아버지’로 불리는 웨인 메이어(83) 전 해군 소장이 2009년 9월 1일 심장질환으로 워싱턴D.C.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메이어 전 소장은 이지스 시스템의 개발과 초기 함정 건조과정을 진두지휘, 미 해군의 대공방위에 혁명을 가져왔다. 구 소련과 대치하던 냉전시절 미 해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가미카제 공격처럼 전함으로 날아드는 미사일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지를 고민한 끝에 요격시스템 개발에 나섰고, 그 책임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이지스함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렸던 메이어였다.
메이어는 17살이던 1943년 해군예비대에 들어가 처음으로 해군과 인연을 맺었으며, 5년 후 정규 해군으로 편입돼 활동하다가 1970년 이지스함 개발 프로젝트 팀장으로 발탁됐다.
미 의회가 이지스함 1척당 10만달러 이상의 예산이 소요된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으나, 그는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지스함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마침내 1983년 첫 이지스 순양함 ‘타이콘데로가’를 탄생시키는 결실을 보게 된다.
미 해군은 지난 2006년 이지스 무기시스템 개발에 힘쓴 그의 공로를 인정해 알레이버크급 유도미사일 이지스 구축함을 ‘웨인 메이어’로 명명한다고 발표했고, 2년후 메이어와 그의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메인주에서 ‘웨인 메이어’함 취역식을 가져 화제를 낳았다.
2009년 영화배우 장진영(37세) 위암으로 세상 떠남
2004년 체첸 반군, 러시아 북오세티아 공화국 베슬란시 초등학교에서 인질극
2004년 9월 1일 오전 9시(현지시각) 무장괴한들이 러시아 남서부 체첸 공화국 접경인 북오세티아 공화국 베슬란시(市)의 초등학교를 기습, 250여명의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다. 무장괴한은 17명으로 알려졌고, 괴한 중 일부는 몸에 폭탄을 붙인 채 러시아 군경의 진압에 대비했다.
이번 인질극은 체첸 반군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가 국제 테러집단인 알 카에다의 체첸지역 책임자인 아랍인 아부 오마르 아세이프의 재정 지원을 받아 계획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번 인질 사태의 희생자는 어린이 156명을 포함해 모두 323명으로, 부상자는 540명 이상이였다
그러나 AFP통신은 희생자들의 시신이 안치된 수도 블라디카브카스의 시체보관소 관계자의 말을 인용, 확인된 희생자는 최소 394명이라고 보도했고, CNN방송 또한 700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전해 전체 사상자 수는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됐다.
2002년 중국 ‘한 가정 한 자녀’ 정책 법제화-공식 시행
지난 20년 동안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을 실시해온 중국 정부가 이 정책을 구체적으로 법제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는 그동안 법적 근거 없이 가혹하게 시행돼온 산아(産兒)제한 정책이 비인도적이라는 국제여론을 의식, 정책을 양성화하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새로운 ‘인구 및 가족 계획법’은 기존의 ‘한 가정 한 자녀’ 정책 기조를 유지하되 이 정책을 준수하는 가정에는 각종 혜택을, 위반하는 가정에는 불이익을 주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982년부터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을 시행해왔으나 관련 법률이 정비되지 않아 위반자에게 근거 없이 과도한 벌금을 물리고 재산을 압류하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2002년 중국 공안국, 조선일보 베이징지국 사전통보나 영장없이 심야수색
2001년 세계 최초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한 크리스천 버나드 박사 사망
세계 최초로 인간의 심장이식 수술을 집도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크리스천 버나드(Christian Barnard·78) 박사가 1일 키프로스의 휴양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남아공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버나드 박사는 케이프타운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네소타대학에서 심장병학을 전공했다.
주로 개를 대상으로 심장이식을 연구하던 그는 1967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이식수술을 받은 루이스 워슈칸스키(당시 55세)는 이식 거부반응을 일으켰고, 결국 18일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2000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국가 미사일방위체제 (NMD) 배치 결정 연기
1999년 파나마 첫 여성대통령 미레야 모스코소 취임
1999년 5월 2일 집권 민주혁명당의 마르틴 토리호스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파나마의 첫 여성 대통령 미레야 모스코소(53)가 1999년 9월1일 취임했다. 모소코소 대통령은 이날 파나마 시티 교외 국립 야구경기장에서 거행된 취임식에서 가난한 사람에 봉사하고 국가 단결을 유지하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선거 공약을 내걸었다.
모스코소는 세차례나 당선됐지만 그때마다 쿠데타로 물러나야했던 고(故) 아르눌포 아리아스(1901-1988)대통령의 부인으로 수도 파나마시티 빈민가에서 교사의 딸로 태어나 일곱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자라나 17세때 여비서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1년 뒤 아리아스 소유의 주식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아리아스는 대통령을 두차례나 지낸 뒤, 쿠데타로 물러난 노정객이었다. 모스코소는 45세 연상의 아리아스와 1969년 망명지인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88년 아리아스가 플로리다에서 심장마비로 숨진 뒤 파나마에 돌아온 모스코소는 아르눌피스당에 입당해 당권을 장악하고 남편인 아리아스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난 지 31년만에 군사정권과 독재의 전통을 깨고 파나마를 통치하게 됐다
1996년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2차 공사 통수식
1996년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군함 2척, 2차대전후 처음으로 부산항에 입항
1995년 한국-브라질, 범죄인인도협정-투자보장협정 체결
1994년 지하철 분당선 개통
1993년 과학관측로켓 `과학2호`발사 성공
1992년 여성대표단,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3차 토론회 참가차 평양 도착
1989년 과천경마장 개장
1986년 외국산 담배 국내판매 개시
1984년 수도권과 영동 지방 큰비 사망 139명 실종 47명 이재민 20만 7천여 명 재산피해 771억여 원 농경지피해 9만9천여 정보
1983년 일반인 무선전화기 사용 허가
1983년 KAL 007기 소련기에 피격(탑승자 269명 전원 사망)
9월1일 미국 뉴욕을 출발해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 점보여객기가 사할린 남서쪽 모네론섬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여객기가 일본 자위대의 레이더 스크린에서 사라진 것은 오전 3시38분이었다.
추락한 여객기에는 한국인 승객 81명을 포함해 269명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망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미국 하원의원 래리 맥도날드는 극우 단체인 존 버치 협회의 회장이기도 했다.
비무장 민간항공기를 공격해 끔찍한 참사를 초래한 소련 군부에 대해 즉각 국제적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한국과 국교가 없던 중국까지도 소련군의 민항기 격추를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라고 비난했다.
다수의 자국 승객들이 희생된 미국. 일본과 소련의 관계는 크게 냉각됐고, 민간 차원에서는 국제조종사협회연맹이 60일간 모스크바 취항을 중단한다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은 보잉 747기가 항행등을 켜지 않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항로를 바꾸라는 여러 차례의 경고를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는 여객기가 소련 영공으로 들어온 것이 단순한 실수는 아닐지 모른다는 함축이 담겨있었다.
그 즈음 국제 저널리즘 일각에서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의 방공(防空) 태세를 시험해보려는 미국측의 비밀 작전에 승객들의 목숨을 담보로 동원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주장이 가정하고 있는 미국 군사정보기관의 비윤리성이 평균인의 상상을 훌쩍 초월하는 것이어서, KAL기의 첩보 활동설은 사람들을 거의 설득하지 못했다.
첩보 활동의 개연성을 지지하던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는 미국의 대표적 언어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인 노엄 촘스키도 포함돼 있었다.
1981년 서울지하철공사 발족
1981년 중앙아프리카 군사쿠데타, 다코대통령 실각
1980년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
1979년 파이오니어 2호 토성서 자장(磁場)확인, 토성 2만2000km까지 접근, 토성테두리 사진 등을 지구에 전송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 가진후 6년 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1975년 9월 1일 준공됐다.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국회의사당은 여의도공원에서 바라보아 정면에 의사당 본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국회도서관, 왼쪽에는 의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의사당 본관은 화강석으로 된 너비 50m의 대계단과 기단 위에 세워진 높이 32.5m의 대열주(大列柱) 24개, 대열주가 받쳐주는 처마와 밑지름 64m의 돔으로 이루어진 지붕으로 구성되어있다. 열주는 경회루의 석주를 본뜬 것으로, 24절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상징하는 것이며 돔은 원만한 결론을 지향하는 의회정치의 본질을 상징하는 것이다.
총 대지면적은 33만평방미터제곱(10만평)이고, 지하2층 지상6층의건물로 지반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69.19m, 연건평은 8만1444평방미터제곱(2만4680평)이다.
1975년 이스라엘, 이집트간 시나이 격리협정 가조인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설립
1969년 리비아 카다피 쿠데타로 집권
1969년 9월 1일 새벽,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비밀 청년장교단체 ‘자유통일장교단’이 정권을 장악했다. 병 치료를 위해 해외에 체류 중이던 이드리스 국왕 대신에 하산 황태자가 방송을 통해 퇴위를 선언함으로써 18년간의 왕정도 붕괴됐다. 곧 발족된 혁명평의회는 국명을 ‘리비아·아랍공화국’으로 개칭하고 거사 목적이 “자유주의적·사회주의적인 통일 달성”임을 분명히 했다.
13일이 지나서야 청년장교단의 중심에 27세 카다피 대위가 자리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이날 중동의 한 언론이 “카다피가 혁명평의회 의장·총리·국방장관·육군사령관을 겸임한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카다피는 베일에 쌓인 인물이었다.
34세에 쓴 자서전 ‘그린북’에 의하면 카다피는 방랑생활을 하는 배두인족 유목민의 아들로 리비아 사막의 한 천막에서 태어났다. 엄격하고 금욕적인 원칙주의자였던 카다피에게 아랍통일을 추구하는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의 눈에 민주주의는 허상이고 법은 비논리적인 것이었다. 집권 후 카다피는 리비아 내의 모든 외국인 소유 석유재산을 국유화하며 서방국가와의 대립각을 세워나갔다. 이 때문에 그는 아랍인들에게는 반미 항전을 부추기는 영웅이지만 미국 등에는 중동지역에 반미 지도를 더욱 넓히려는 테러리스트로 비치고 있다.
1966년 서울 무장공비사건
1966년 동파키스탄에 대홍수 피해주민 500만
1966년 영국 여객기 유고서 추락 95명 사망
1965년 파키스탄, 대(對) 인도 전쟁상태를 선포. 양국 전면전 상태로 돌입
카슈미르의 귀속문제를 놓고 분쟁중인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이 1965년 9월 1일 전면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전차 70여대를 동원한 파키스탄 보병부대는 이날 아침 카슈미르의 참브지구 정전경계선을 격파, 인도령내로 진격해 인도군전차부대와 교전을 벌였다. 인도측에서는 4대의 비행기를 출동시켰지만 파키스탄 공군에의해 격추됐다. 양국은 상대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서로를 비난했다.
분쟁의 원인은 1947년 영국령 인도는 힌두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인도 연방(공화국),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파키스탄으로 하여 분리 ·독립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카슈미르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이슬람교도인 반면 번왕(藩王)은 힌두교도였으며 인도 ·파키스탄 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이므로 그 귀속이 문제가 되었다. 번왕은 인도 귀속을 표명하였으나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 귀속을 요구하여 폭동이 발생, 인도 ·파키스탄 양국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후 18년동안 양국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65년 군수지원사령부 십자성부대 창설
1964년 월간 ‘신동아’ 28년 만에 복간
1963년 미국, 소련 직통전화 개통
1963년 노동청, 철도청 발족
1962년 이란 서북부에 대지진 2만명 사망
1961년 제1차 비동맹국 정상회담
1958년 미국 해병대 제1진 대만도착
1958년 제1회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 개막
1955년 전국 인구조사 실시
1953년 국군의 방송 발족
1952년 징병제 실시
1952년 중석불 사건 수사 본격화
1951년 태평양안전보장조약(ANZUS) 조인
1951년 9월 1일 오스트레일리아(A), 뉴질랜드(NZ), 미국(US)의 3국간의 태평양안전보장조약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됐다. 3개국의 머리글자를 따서 앤저스조약(ANZUS)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을 통해 조약국은 조약 당사국 중 한 나라가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서명국 모두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하고 공동 안보를 위한 원조를 제공한다.
이 조약과 관련, 뉴질랜드 대사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를 보호함으로 지켜진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번 동맹 조약으로 북극에서부터 베를린,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역에 동맹망을 구축하고 있다.
회의에 참석한 애치슨 국무장관은 "아시아 두 나라와 체결한 이 조약은 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침략에 대한 방어의 확고한 결의이며, 평화에 대한 우리의 굳은 공통의 신조를 의미한다."고 언급했다.
1950년 미국 의회, 국방생산의 경제통제법 의결
1948년 중국공산당 화북정부 수립
1948년 서독 제헌의회 개최
1948년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칭
한국의 육군은 1945년 12월 5일 서울에 설치된 군사영어학교에서 비롯되었다. 이 학교는 1946년 4월 30일까지 110명의 장교를 배출했는데, 이들이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주역을 담당했다. 1946년 6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개칭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 1일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칭되었다. 한국의 육군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10만 명에서 60만의 대군으로 성장했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정예군으로 단련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꾸준한 현대화 계획 이행에 따라 새로운 체제로 크게 바뀌었다
1947년 한국의 국제무선부호를 `HL`로 결정
1946년 노동신문 창간
1946년 9월 1일, 북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창간됐다. 원래는 1945년 11월 1일에 창간된 ‘정로(正路)’가 기관지였으나 ‘정로’를 개칭하고 조선신민당 기관지 ‘전진(前進)’을 흡수하면서 노동신문으로 다시 출발했다.
연중무휴로 하루 6면이 발행되고 발행부수는 150만부로 알려졌다. 현재 ‘노동신문’ 제호 아래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기관지’라고 표기돼 있고 제호 왼쪽과 오른쪽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한마음 한뜻으로 받들어 나가자!’는 구호가 적혀 있다.
2002년 12월까지는 제호 왼쪽에 ‘전세계 노동자들은 단결하라’라는 마르크스 ‘공산당선언’의 마지막 구절이 적혀 있었다. 사회면이 없고 속보성이 무시되며 기사제목에 동사(動詞)가 많이 쓰이고 컷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담배공급 부족으로 북한 주민들이 말아초(잎담배)를 말아 피울 때 지질이 제일 좋은 노동신문을 주로 이용하는데 이때 김일성의 얼굴이 실린 1·2면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46년 그리스 국민투표로 왕제(王制) 부활
1946년 6.6.4제로 학제변경
1945년 조선민주당 결성, 24일 국민당으로 개편(위원장 안재홍)
1945년 라오스 파테트라오 독립선언
1945년 조선학병(學兵)동맹 결성
1939년 독일군 폴란드 침공 (2차 세계대전 발발)
제1차 세계대전이 남긴 불씨는 20년 동안의 불안한 잠복기를 지나 1939년 다시 살아났다. 독일은 1차대전에서 패한 굴욕감, 베르사유조약이 가져다 준 가혹한 내용, 사회혼란 및 정치불안을 틈타 나치스 히틀러의 집권을 초래했다.
1933년 히틀러는 독일재무장에 들어갔다. 유럽국가들의 감시를 무시하고 히틀러는 1936년 베르사유조약을 어기고 라인란트를 점령했다.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이탈리아도 1936년 에티오피아를 점령해 버렸다. 이듬해인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로 결정한 후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소련과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폴란드 서쪽 1/3은 독일이, 동부지역 2/3는 소련이 접수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내 히틀러는 1939년 9월1일 폴란드를 전격 침공했다. 침략 전날인 8월 31일 밤, 나치스 SS대원들은 폴란드 군인으로 가장하고 폴란드 접경지역에 위치한 독일 지방방송국에 난입, 마치 폴란드 군인의 소행인 것처럼 날조하며 폴란드 침공 명분을 세웠다. 암호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였다. 히틀러는 이 대담한 사기극을 이용, 공개석상에서 `참을 수 없는 도발행위`로 간주, 이를 규탄하며 폴란드를 맹 비난했다. 새벽 4시 45분, 독일 군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호의 모든 포문에서 단치히 항구(현재의 그다니스크항)의 동쪽 해안을 향해 일제히 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포병부대도 폴란드 국경지대를 향해 일제히 포문을 열었고, 53개 사단 이상의 정예부대도 서부 국경을 넘어섰다. 20세기의 비극, 2차대전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를 본 영국과 프랑스가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대전은 본격화됐다. 히틀러의 광기가 전세계를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만드는 순간이었다.
1937년 일제, 고등보통학교의 조선어 과목 폐지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실업자 폭동
1923년 조선철도주식회사 설립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58분44초. 그때까지 일본인이 경험하지 못했던 대재앙이 일본 간토(關東)지방을 강타했다. 매그니튜드 7.9의 관동대지진이었다. 9만9300명이 사망하고 4만3500명이 행방불명됐으며, 가옥도 25만채가 파괴되고 44만7100채가 불에 탔다. 특히 도쿄는 피해가 심해 10만7500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도시의 4분의 3이 잿더미가 됐다.
방송과 신문마저 중단되자 근거없는 소문들이 사실인 양 떠돌아다녔다. “후지산이 폭발했다.” “오가사와라 제도가 바다 속에 잠겼다.”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그들을 더욱 흥분시켰던 것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시내 곳곳에 불을 질렀다”는 괴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도와 죽창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각지에 조직돼 통행인을 검문했다.
‘15엔(円) 15전(錢)’과 ‘ぱぴぷぺぽ(빠삐뿌뻬뽀)’를 발음하게 하거나 ‘교육칙어’를 암송하도록 해 조선인으로 보이면 칼과 죽창을 마구 휘둘렀다. 내무성에서 지방에 내려보낸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 단속’ 공문으로 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돼 학살을 부추겼다. 일주일 동안 6400명(일본의 공식발표)의 조선인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다.
1918년 한용운, 불교지 `유심(惟心)` 창간
1916년 김교헌 나철에 이어 대종교 제2대 교주 됨
1914년 독일, 오스트리아 대소(對蘇) 선전포고
1907년 한성에서 최초의 박람회 개최
1907년 한말의 의병장 손영각 사망
1906년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발간
1909년 등대 최초 등대 설치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1885년 3월에 농상공부 통신국 관선과가 항로표지(航路標識)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도록 법제화하였다. 하지만 예산의 어려움으로 인해 업무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1901년에 대한제국의 총세무사(總稅務司)인 브라운은 관세 수입 가운데 25만원을 등대 건축 자금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듬해 3월에 인천 차이나타운에 인천해관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이 설립되었고, 5월 16일부터 인천 항로의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 등 4곳에 등대를 건립하였으며, 1903년 6월 1일에 처음으로 점등하였다. 당시에 건립된 등대는 소월미도 등대를 제외하고 모두 현재까지 잘 유지되고 있다.
1896년 호구조사규칙 공포
1882년 한국 식물학의 개척자 정태현 출생
1876년 압둘 하미드, 오스만제국 술탄에 즉위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간의 스당 전투 발발. 프랑스군의 참패로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고 프랑스 제2제정이 몰락
1715년 루이 14세 사망
절대주의시대의 대표적 전제군주로 군림했던 프랑스 브르봉 왕조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1715년 9월 1일 눈을 감았다. 루이는 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어린나이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을 겪어야했다.
30년전쟁과 관련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지자 국민들은 점차 반항의 기미를 보였고, 여기에 대귀족과 불평분자의 책모가 작용, 내란인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다. 이로인해 루이는 어린 나이에 파리를 떠나 각지를 유랑하며 가난함과 불운함, 두려움과 굴욕감, 추위와 배고픔을 겪어야 했다.
재상 마자랭의 도움으로 반란이 진압되자 루이는 파리를 떠나 베르사유에 궁전을 옮겨 마자랭과 특별한 행정기구를 만들어 나갔다. 그 후 마자랭이 정치를 독단하다가 1661년에 죽자, 루이의 친정(親政)이 시작됐다. 루이는 자신 스스로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주의 시대의 대표적 군주가 되었다. 왕권 신수설로 대변되는 그의 왕권은 가히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로 대변되던 그 때 루이는 자신을 친히 ‘태양왕’이라고 불렀다. 이는 황제는 달이 아니라 태양 이라는 인식을 넣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가히 신에 대등할만한 권력을 가진 루이였지만 콜베르를 재상으로 등용, 중상주의를 펼쳐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던 중 무리한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의 패배, 베르사유 궁전 축조 등 과도한 지출과 사치 생활로 프랑스 재정의 결핍을 초래했다. 결국 절대왕정의 모순이 프랑스혁명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1592년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전선을 격파한 싸움.
이순신은 부산 부근의 서평포(西平浦)·다대포(多大浦)·절영도(絶影島) 등에서 왜군 전선 24척을 격파한 뒤,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과 일본 본국과의 연락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순신은 먼저 부산포 내의 왜군의 상황을 정찰하였고, 왜군 전선 470여 척이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선두로 하고 전함대를 동원하여 왜군을 쳤으며, 그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에 상륙하여 대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전선 100여 척을 격파한 뒤, 왜군과의 전투를 중지하고 여수(麗水)로 돌아갔다. 조선군이 육지에 올라간 왜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육전이 해전에 비해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