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내린 후 온 골짜기가 소란스럽다.
물은 정암사 담장을 쓸어 버릴 기세로 세차게 쏟아져 내린다.
장마가 잠깐 멈추고 햇살이다.
새벽에 화절령을 넘어왔다.
숲도 고갯마루도 풀섶에도 온통 안개 세상이었다. 여름 깊은 숲에서의 신비한 체험이었다.
안개가 끼면 날씨가 쾌청하다. 과연 아침나절에 파랗게 열리는 하늘, 그리고 쏟아지는 햇빛.
그리고 정암사.
정선 살 적에 어쩌다 손님이 오면 구경시켜 주는 곳이 아우라지와 이곳 정암사였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지은 사찰로서 어쩌고저쩌고...
수마노탑은 마노로 쌓아 올린 탑으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어쩌고저쩌고...
이런 건 별로 재미없다. 그저 담장을 덮은 이끼라던가 경내의 고요한 적요감 따위가 나는 좋았었다.
오랜만에 찾은 정암사는 그러나,
그간 많은 불사가 있어 예전의 호젓한 사찰이 아니었다.
전각 당우도 몇 개 더 들어섰고 그 외 잡다한 시설물들이 들어차 답답했다.
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이다.
불상 대신 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신 법당 적멸궁. 거기 기단 아래 서서 삼배합장을 한다. 절에 가면 늘 하는 일이다. 삼배합장을 하는 그 짧은 시간은 내게 가장 엄숙한 시간이다.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내가 정암사를 자주 찾았던 이유는 부처님을 알현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왜 중요한 보물인지 내 안목으로선 알 수 없는 수마노탑을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선배의 지우인 덕진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아니다.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그 오솔길을 걷고 싶어서 정암사를 찾는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면 나의 가슴은 침잠해지고, 곧이어 사라진 감성들이 되살아난다.
“난 정태춘 노래를 들으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겨요”
언제던가 이 길을 걸으며 동행한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지극히 서정적인 그의 노래는 시들해진 내 정서도 살아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 노랫말은 얼마나 멋진 문학작품인가.
하지만 그에게 정태춘을 들먹인 건 거짓말이었다. 실은 호젓한 도량과 오솔길을 걸으면 나는 문학에의 욕구가 강렬하게 생기는 것이다. 정작으론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지만 그 충동만으로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다.
혼자서 걷는 길.
내 앞에 또 내 뒤에도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혼자 유유자적 고독하게 걸었으면 좋겠다.
물소리는 내내 세차게 들려온다.
수마노탑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온통 푸른 빛이다.
나무말미에 보는 햇빛이라 고맙고 대견하다.
첩첩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막막하기도 하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어디로 갈까.
문득 눈에 들어오는 생명.
노린재 두 마리가 제법 재밌게 얼려 논다.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짝이 있어 우리가 한낱 미물이라 업신여기는 노린재도 저리 어울려 사는걸.
볕이 좋아서 저렇게 뙤약볕에 나와 노니는 걸까.
지금은 저리 한가롭지만 다시 비가 내리면 어디로 숨어들까.
목덜미가 뜨거워지도록 앉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문을 나올 때 점심공양을 알리는 범종이 울렸다.
로난 하디만 : Heaven
첫댓글 이곳도 제가 가보고 싶은곳인데
다녀오시고 후기 남겨주셨네요.
탑으로 오르는 길이 좋다 하셨는대 전 수마노탑을 보고싶어 꼭 방문하고 싶네요.잘보았습니다^^
지난 겨울에 다녀왔던 곳!
수마노탑 보러 갔는데 길이 미끄러워 통제해서 멀리서만 봤던 탑!
가을에 한번 가 보고 싶네요
설리님의 글을 읽으면 나도 그 곳을 가보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생겨납니다.
저 음악을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그래도 이런 곳이 있구나,알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번 음악은 연속 플레이가 되지 않네요.
계속 듣고 싶은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