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정리 목차:
서두: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이든 자신의 도리를 다하라.
1. 마음 어떻게하면 쉴 수 있는가?/ 칠통 조규일
2. 지금 여기에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칠통 조규일
3. 무념(無念)과 무심(無心)이 어떻게 다른가?/칠통 조규일
4. 역관(逆觀)은 어떻게 하는가?/ 칠통 조규일
5.
지난 생각의식들이 오늘을, 오늘의 내가 미래를 창조한다. / 칠통 조규일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던 누구와 있던 있는 그곳에서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자신의 도리를 다할 때
편안하고 안락할 것이다.
그곳이 이생이든 저생이든
자신의 일을 다하고 자신의 도리를 다할 때
가장 편안하고 그것으로 행복하다.
오늘도 자신의 일을 다하고 자신의 도리를 다하며
바른 진리 속 일심 일념 수행 정진하는 날이 되소서()
2007. 06. 07 07:13 칠통 조규일
구하는 마음 어떻게하면 쉴 수 있는가? / 칠통 조규일
질문:
제게 필요한 것은 체험과 믿음 그리고 확신인 것 같습니다.
무심이 부처이며 하나님의 자리라는 것을
체험하고 믿어야 하고 확신을 가져야 하는데
아직도 의심하고 의심합니다.
답변:
무엇보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고 나아가서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체험을 통하여 의심은 사라질 것입니다.
의심하는 것은 체험이 없기 때문이고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되 의심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 가운데 여여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구하지 않고 쉴 수 있는 마음,
놓고 비우고 버리는 마음이 필요하나
저는 아직도 끊임없이 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쉴 수 있을지요?
선사님 답변:
구하되 구함을 다해야 놓을 수 있고
놓는다 하되 놓는 행이 있어야 합니다.
놓고 비우고 버린다 하나
놓고 비우고 버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하고
어디에 있는 것을 어디로 놓고 비우고 버리는 지 알아야 하고
그것을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알아야
놓는다 하되 놓을 것 없고
비우고 버린다 하되 비우고 버린 것 없고
구한다 하나 구할 것이 없이
그 자체로 여여한 지를 알아야 쉴 수 있을 것입니다.
구하고 놓고 비우고 버리고...하는 모든 것이
작용에 있는 지를 알고 그 작용을 일으키는 체 실체를 알면
실체의 체에서 작용을 보니
작용을 따라 작용에 있게 되지 않고
실체에서
작용은 작용대로 일어나는 것을 보되
체에 있게 되니
체에서 작용을 보고 체에서 작용을 보니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작용하는 작용과 함께 했던 작용을 떠나 있게 되니
이러한 관계로 작용으로부터 쉴 수 있게 된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쉬게 하기 위해서는
작용에 있지 말고
실체 체에 있어야 한다할 것입니다.
이는 무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일으키고 마음을 쓰되
체에서 일으키고 쓰는 작용을 보고 관하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2004. 5. 9 칠통 조규일
지금여기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 / 칠통 조규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먹고 자고 숨쉬고 행동하는 ....
이 모든 것이 道이고 도술(道術)의 연속 아닌가?
바람의 장난인가?
보면 본대로 들으면 들은 대로 그냥 그러면 될 것을..
사족을 붙여 태풍을 일으키고
태풍의 눈에서 바라본 것은 무엇인가?
태풍 안팎이 하나 인 것을...
이름이 태풍이고
그 중심 본성이 태풍의 눈인 것을...
태풍이 그치니.
하늘은 맑고 깨끗하고
만물은 정적 속 흐르고 변하는 것을 ..... .
자신을 버리고 자기 자신이 없는
무아(無我) 속에서
무엇이 남아 있나 바라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바라보았다면 그 곳에 무엇이 있던가?
무아 속 무심으로 자신을 바라 본 일이 있는가?
그 곳에 무엇이 있던가?
그곳을 벗어난 듯 그것과 함께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은
그것과 무슨 연관관계를 갖고 있기에 현재의 자기 자신은 그러한가?
한 번 생각해 보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면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들어보자.
그곳에 무슨 소리가 있는가?
고요한 정적 속에 흐르고 변할 뿐 . . ...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잊고
안, 이, 비, 설, 신, 의, 모두가 없는
색, 수, 상, 행, 식이 없는 자신을 바라보면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이제 다시 눈을 뜨고 바라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이제 다시 귀를 열고 들어보자.
무엇이 들리는가?
천당이니. 극락이니. 하나님 나라니. 불국토니. ....하는 것들과
너, 우리라 ....하는 모든 것들이
지금 여기를 떠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념(無念)과 무심(無心)이 어떻게 다른가요?
/ 칠통 조규일
수행을 하다보면
마음이 가라앉아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있는 것과는 틀린 것 같습니다.
종종 그런 상태에 머물곤 합니다.
만약에 제가 그런 상태를 생활을 하면서도 유지할 수 있다면
전 그것이 무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무념과 무심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답변:
대답에 앞서 묻겠습니다.
어떤 이 묵언 침묵하는데 생각이 많고
어떤 이 많은 말을 함에도 자신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하면
이 둘 사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무념(無念)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끊어진 것으로
생각이 있고 없고를 떠나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생각을 보고
생각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생각을 보며
안으로의 대상(對相)을 놓아버림으로
여여(如如)한 가운데
여래(如來)로 드러나는 연기의 인연을 보는 것입니다.
즉 무념은
안(內)의 대상이 없는 사라진 상태라기보다는
유무(有無)의 이분법에서 보면
무(無)한 가운데... 또는 유(有)한 가운데...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한 가운데 본성의 속성에서
연기에 의한 인연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을 보는 것으로
중도(中道)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심(無心)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까요?
님은 마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님에게 있어 어떤 것들을 님의 마음이라고 하는지요?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들의 작용은 어떻게 작용하는가요?
님이 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전부 사라졌을 때...
전혀 없을 때...
님은 마음이 있다 하겠습니까? 없다하겠습니까?
무심(無心)은
마음이라고 명명한 이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즉 마음을 내지 않는 것,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
마음이 가라앉아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명명한 이름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것들이 내 마음이라고 생각한 것(대상)들이
마음 안(즉 안의 대상)에 사라진 없어진 가운데
평상심의 여여 본성의 속성에서 연기의 의한 인연을 보되
그것들에 빠지지 않고... 얽매여 있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즉 마음이란 것(대상)들을 완전히 놓아버려진 상태로
안팎의 대상들이 있고 없고를 떠나 있는 마음으로
안팎의 대상들에 마음을 내지 않고
본성의 여여(如如) 평상심(平常心)에서 여래를 바라보는 마음을
연기에 의한 인연을 바라보는 마음을 무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란 것들을 ...
안의 대상들을...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님 안의 수많은 님이라고 할 수 있는 님의 마음들을...마음들이...
서로 엉키고 섞이게 하는 것은 관심으로 인한 집착과 사랑의 욕(慾)이고
느슨함 놓아버림은 무관심으로 인한 무집착과 사랑의 무욕이라 할 수 있으나
유무(有無)의 이분법에서 보면
무(無)한 가운데... 또는 유(有)한 가운데...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한 가운데 느슨해지고 놓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안의 대상들을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무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본성, 그 속성의 진공묘유(眞空妙有)
진공묘유에서의 이분법(二分法)....유무...생멸...연기의 인연법...
이분법에서의 무념, 무상, 무아, 무심....이 아니라
이분법 이전의 중도(中道)에서 유무(有無)를 떠나
본성의 속성에서
있는 그대로 여여한 가운데
여래를 보는 것, 연기의 인연을 보는 것,.... 을
무념, 무상, 무아, 무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념 무상 무아 무심....염(念), 상(相), 아(我), 심(心)은
본성의 속성 진공묘유에서의 이분법에서는
서로 각기 다르나
이분법을 여의고 진공묘유 속 본성의 속성에서 보면
이들은 각기 서로 다른 이름으로 명명되어 불리어지나
이들 사이 차이가 없다 하겠습니다.
이분법에서의 그 차이를 살펴보면
무념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생生)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이 생(生, 일어)하든 하지 않든
안의 대상과 밖의 대상 사이를
오고가는 것이 아닌 것,
또는 뒤섞이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고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일어(生)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이 생(生)하든 생(生)하지 않든
마음 안의 대상들
즉 마음작용이라고 하는 것들이 작용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무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여기 분주한 구청 내지는 동사무소가 있습니다.
마음이란 이름을 동사무소란 이름으로 바꾸어 생각해 봅시다.
마음이 곧 동사무소입니다.
동사무소 안에는 여러 가지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등초본.. 인감증명... 및 ... 주민등록 발급...등
그 동(洞)에 사는 사람들의 신상명세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평일에 동사무소에는
직원들이 있으며 동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동사무소 안에서 일들을 봅니다.
여기서 무념과 무심을 살펴봅시다.
여기서 무념이란
평일임에도 동사무소를 출입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고
직원들도 할 일이 전혀 없는 것,
즉 일 보러 오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동사무소 직원들도
전혀 할 일이 없는 상태를 무념이라 하고
여기서 무심이란
평일임에도 동사무소를 출입하는 사람들은 있으되
동사무소 안에서 이루어져야할 일
즉 주민등록등초본.. 인감증명... 및 ... 주민등록 발급...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를 무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마음이란 그릇 방..사무실에서 보면
마음이란 그릇 안에는...
안의 대상... 업의 오온(五蘊=색수상행식)이 있고
마음이란
방 그릇 사무소를 출입하는 문이 6곳(6처)이 있고
마음이란
방 그릇 사무소를 출입하는 이가 6사람(6근)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작용은
밖의 대상에서 6근이 6처를 통하여 안의 대상(오온)에 닿았을 때
작용하는 오온의 작용을 마음작용이라 하니.
마음작용이 없는 것, 무심(無心)은 오온의 작용이 없는 것,
안의 대상들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무심이라 하는 것이고
안의 대상들이 작용하든 하지 않든
6근과 6처를 통하여 출입하는 것이 전혀 없을 때
이때를 무념(無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분법에서의 무념과 무심의 차이는
무념은
안의 대상과 밖의 대상 사이를 오가는 이가 없어
6근과 6처가 쉬는 것이고
무심은
안의 대상이 쉬는 것이니
이 둘 사이 위와 같이 다르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처음 6근과 6처를 쉬게 하여 무념(無念) 속에서
안팎으로 상을 내지 않도록 하여 무상(無想)에서
안의 대상이 쉬는 무심(無心) 속에서
업의 종자 오온(五蘊)을 하나 하나 놓아버려야 할 것입니다.
2002. 12. 14 칠통 조규일
역관(逆觀)은 어떻게 하는가? / 칠통 조규일
문의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주시와 역관의 차이는 선생님의 글을 보고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역관의 방법(?)이랄까 하는 면에서는 확연하지 못합니다.
역관을 명상이나 좌선의 경우에만 쓸 수 있는지, 아니면
일상생활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가슴에서 자각하면 느낌과 감정이 잘 보여지며
상단전 쪽에서 자각하게되면 생각이나 사념이 잘 보여집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할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역관(逆觀)은 어떻게 보면 될런지요.?
선사님 답변:
역관(逆觀)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언행으로 나온 것을 쫓아
바로 역관(逆觀)하여 나온 자리로 들어가는 쉽지 않습니다.
역관(逆觀)하는 훈련이 필요하지요.
역관의 훈련에 들어가기 앞서
일상생활을 주시하여 관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시(注視) 관(觀)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함은
생활하는 중에 늘 빈번히 행하는 언행을 늘 주시하여
행해진 언행을 자각하는데 있어 점점 확연하여질 때....확연해져갈 때
즉 나오고 들어감이 또렷할 때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로 나오는지...????...
즉 6근(六根)이 6처(六處)를 통하여 오온(五蘊)에 들어가고
오온이 6처를 통하여 6근으로 나오는 것을 역관(逆觀)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역관(逆觀)하는 것인가?
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할 때....
일어난 한 생각이 단순히 머리에서만 이루어졌는지
또는 가슴에서 이루어졌는지
가슴을 통하여 머리에서 이루어졌는지.
또는 가슴을 통하여 머리로 머리에서 다시 가슴으로 해서 이루어졌는지.
어떻게 언행(言行)으로 옮겨졌는지를 봐야할 것입니다.
언행으로 옮겨졌다면
말이나 몸짓일 테니...????...
이해하기 쉽게 말(언어)이라고 합시다.
말을 했습니다.
누가? 내가 했습니다.
그럼 말이 나온 곳을 찾아 들어가 봅니다.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럼 말을 입이 했습니까? 입술이 했습니까?
아니면 혀가 했습니까?
목구멍이 했습니까?
누가 말을 했습니다. "내가"
난 어디에 있는데...난 어디에 있습니까?
말(언어)은 성대의 자극으로 인한 떨림의 소리입니다.
무엇으로의 성대 안으로는 혈액과 함께
바로 옆에서 흐르는 기(氣)의 자극으로
성대 밖으로는 바람으로의..단순히 바람으로...
바람은 ..무엇을 바람이라고 하는지요.
무엇이 바람이 됩니까?
바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운이 강해야합니다.
기운이 강하게 움직이는 것이 바람입니다.
기운(氣運)은 무엇이 움직여 기운이 됩니까?
기(氣)입니다.
기는 무엇을 기라고 합니까?
생명, 생체, 에너지, 힘.....모든 것의 속성입니다.
이렇듯 역(逆) 관(觀)하여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 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한 생각이 일어났는지 역관(逆觀)하여 봅시다.
듣고 또는 보고, 아님 느끼고...
어디서... 맨 처음 작용이 일어났나요?
머리에서 생각이 일어났나요?
아님 가슴 즉 마음에서 동요를 일으켰습니까?
머리에서 지금 막 한 생각을 쫓아 골몰하고 있습니다.
즉 생각을 정리한다고 할 수 있고
또는 한 생각을 쫓아간다 할 수도 있을 것이며
한 생각을 쫓아 명상한다고
또는 한 생각을 밝히는 즉 철학(哲學)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생각이 일어난 과정을 역관(逆觀)하여 봅시다.
처음부터 머리에서 작용하여 생각했습니까?
머리로 오기 전 즉 머리로 생각하기 전 어디서 작용을 했습니까?
어디서 작용하여 머리로 전달되어 머리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맨 처음 작용한 곳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맨 처음 작용한 곳을 모르니
누군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할 때 했을 때
귀로 듣고 들은 것이 어디로 갑니까?
머리로 갑니까? 어디로 갑니까?
들은 것이 어디로 가서 작용을 합니까?
작용하는 곳을 찾아갑니다.
안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는 작용하고 되돌아 나옵니다.
어디까지 가서는 되돌아 나옵니까?
되돌아 나오는 곳 어디입니까?
귀로 듣기 전에 받아들이는 곳이 있습니다.
보고 받아들이는 곳이 있습니다.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접촉하지 받아들이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어디입니까?
이곳은 귀로 듣기 전에 작용하고 들은 후 작용하고
눈으로 보기 전에 작용하고 본 뒤 작용하고
접촉하기 전에 작용하고 접촉 후 작용합니다.
찾아서는 ...작용한 곳(것)이
가슴이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무엇이 있기에 작용하는 것일까요?
흔히 우리가 내가 아니 자기 자신이
"내 마음"이라고 할 때
어떤 것들을 두고... 가지고.. 가졌다고 생각하고.. "내 마음"이라고 하는지.
"나"라고 하는데 있어서의 "내 마음"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물으면 가슴을 가르칩니다.
마음 안의 대상과 밖의 대상이 작용할 때
안의 대상이 밖으로 나오는 맨 처음이 이곳의 작용입니다.
밖의 대상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접하는 곳이 6근입니다.
밖의 대상이 6근을 통하여 6처로 들어옵니다.
어디까지 오온이 있는 곳까지...
오온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마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님의 마음은 어떤 것을 님의 마음이라고 합니까?
무엇을 두고 마음의 그릇이 크다 작다하는가? 를 비교 생각하며
마음을 찾으면 찾기가 쉽습니다.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는지.
무엇을 두고 마음의 그릇이 크다 작다 하는가를 알아야
마음을 제거하든지 놓던지 할 것 아닙니까?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마음을 내려놓던가 제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마음이라 하는구나. 생각 들면
모든 근본이 마음에 있고
모든 주체의 뿌리...즉 원인이 마음에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생각은 순간적 순간적으로
가슴과 머리로...끊임없이...오갑니다.
무엇이 업장이....어떤 업장이..."나"라는 업장이...
무엇이 되어 있어서....오온이 되어...
오온으로 제 7식 알라식, 제8 아뢰아식으로 있어서...
어떻게 본성의 빛 즉 무량광이 오온의 자성경계를 비집고...
어떤 식으로 전등이 켜졌을 때
늘 켜져 있는 것 갖지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가 바뀌어가며
불이 켜졌다 껴졌다 하지만 늘 켜져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 또한 그러합니다.
가슴에서 자각하면
느낌과 감정이 잘 보여지며
상단전 쪽에서 자각하게되면 생각이나 사념이 잘 보여집니다.
하단전은
기해(氣海)는 온몸에 혈액이 돌 듯
혈액과 함께 기(氣)가 따라 온몸을 돕니다.
그러면서 우리 몸의 중심 핵심적인 곳 가슴으로
많은 기운을 보내 보호하고..
그럼으로 그 전달적 체계가
중단전 가슴으로 안팎으로 드러납니다.
하단전이 온몸으로의 기해(氣海)라면
중단전은 자기 자신의 밖으로의 중심이고 핵이며
이를 밝혀 드러나게 하는 것이 상단전입니다.
상단전이 드러나게 하는 것 기틀이 중단전이며
중단전이 있게 하는 것이 하단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기(氣)적으로 해석할 때 양초를 비유하는데
양초에 있어 하단전은 양초의 몸통이며
중단전은 양초의 불꽃
상단전은 양초의 빛입니다.
"가슴에서 자각하면 느낌과 감정이 잘 보여지며..."
잘 보여지는 느낌과 감정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작용했는지
작용하게 된 원인과 이유를 찾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에서의 작용이
"상단전 쪽에서 자각하게 되면 생각이나 사념이 잘 보여집니다."라고 했으나
중단전 가슴과 별개로 상단전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면밀히 관하여 보면
중단전의 작용으로 상단전 쪽에서 자각하게 되고
그럼으로 생각이나 사념이 일어난 것입니다.
상단전에서 일어난 생각 사념을 자각하는 것을 쫓아가 보면
자각의 시작은
중단전 가슴에서 느낌과 감정으로 일어나
상단전으로 전이된 것을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역관(逆觀)한다하면
상단전에서 한 생각 일어났다고 할 때
한 생각이 일어나게 한 곳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중단전에서의 상황 상태의 작용이 전이된 것일 수도 있고
밖의 대상으로부터 바로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가슴으로부터 먼저 느낌과 감정이 일어나
이것이 상단전에서 한 생각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다시 역관(逆觀)한다면
한 생각을 쫓아 일어난 곳으로
가슴으로 와서 가슴에서의 느낌과 감정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이유를 찾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할 것이 있는데...
어떤 것에는 작용하고 어떤 것에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느낌과 감정을 가지게 하는지
느낌과 감정을 가지게 하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으면 느낌과 감정을 가지게 했던
그것을 다시 찾은 것이 있게 된 동기의 원인과 이유를 찾아야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본성에 이를 때까지 ...하나 하나...
이렇듯 일상생활의 언행을 통하여
6근과 6처, 오온, 마음...
이중 어느 하나를 통하여 나온 자리로 되돌아
찾아 들어가는 것이 역관(逆觀)입니다.
하나 하나...찾아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점차적으로 점진적으로 ,...
그럼으로 하나 하나 깨우쳐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이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나무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니.
마음가는 대로 행한다 하고...무심 속에서 행한다 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마음을 제거하거나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가는 대로 행한다함은 소가 달구지를 끌고 길을 가는데
소가 달구지 끌고 어디로 가든 상관하지 않는다는..않겠다는 말이 되니
이는 마음을 제거하거나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마음을 잃어버리고 싶다는 말이 되고...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제거 내지는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심 속에서 행한다함 역시 비슷합니다.
무심이라 했으나 무심은 유심 즉 마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마음을 상관하지 않고 건드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으니
말은 무심이라고 하고 있으나 언제나 마음을 의식하고 마음속에서
행하고 있다는 말이 되니.
이는 공(空)하여 무(無)라 하나 유(有)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진공묘유(眞空妙有) 속
공(空)한 무(無) 속 유(有)의 도리가 있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지요.
마음을 제거 내려놓기 위해서는
마음이 있되 마음이 없는 마음을 내지 않는
즉 제거 내지는 내려놓는 유(有)하되 무(無)한
진공묘유 속 있는(유(有)) 가운데(속)
아무 것도 없는(무(無)) 도리를 확연히 알아야합니다.
그럼으로 여여한 가운데 여래의 모습을 따라 오가는 인연을 보는 것입니다.
법을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진리 속 진리로...
진리의 순리를 보는 것입니다...
2002. 11. 20 칠통 조규일
오늘이 있기까지
생각과 의식의 행위를 통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오늘이 되었다.
지난 생각과 의식으로 인한 생각들이
오늘을 만들어 낸 것과 같이
10년 후 20년 후도 마찬가지로
오늘의 생각과 의식이 행위로 이어져서
아주 조금씩조금씩 변화해서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 있을 것이다.
10년 후 20년 후...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변화하고자 한다면
오늘이란 오늘을 생각과 의식으로 행위를 통하여
조금씩조금씩 집을 짓듯 창조해 가야한다.
창조의 씨앗은 생각과 의식에 있고
창조의 시작은 행위에 있다.
자기 자신은 누가 창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자신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창조주는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무엇을 창조하고 싶습니까?
창조하고 싶은 것, 이루고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실천궁행(實踐躬行) 하시는데 부족함이 없는 날이 되소서...()
2007. 11. 16 07:56 칠통 조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