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쉘 드 노트르담(Michel dwe Nostredame)
노스트라다무스는 대에언가이자, 역사학자 점성술가 명의(名醫)였다.
1503년 프랑스 서남부 상레미에서 유태인 가문에 태어나, 그를 아끼던
외조부로부터 수학, 천문학, 점성술, 약초제조법, 고전문학, 희랍어 등을 배웠다.
그의 어릴 적 최대 관심은 별자리 연구였다고 전해진다.
노스트라다무스는 20세에 아비뇽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한 뒤,
몽펠리에 대학 의대를 졸업했다. 새로운 치료법을 창안해 기성 교수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염병 퇴치에 능력을 보여「신비의 의사」란 명성을 얻었던 그가,
31세에 결혼한 부인과 자녀 두 명을 흑사병으로 잃은 것은 아이러니였다. 그후 6년간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로 방랑길에 올랐다.
그는 재혼한 뒤 1554년 프랑스 살롱에 정착했으며, 이 무렵부터 신과 교감하는 예지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1555년, 1000여편의 예언시를 수록한 예언 시집 12권을 출간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모든 세기'라는 제목으로 12권의 책을 남겼으며
그 중 11, 12권의 상당부분은 소실되었다. 그의 예언은 이해할 수 없는 시로 표현되어 있고
예언의 시대적인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일관성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분에 많은 석학들이
그의 시를 연구하고 있으며 프랑스에는 그의 시집을 연구하는 연구소만도 10여 곳이 넘는다고
한다.
이중 특히 논란이 된 것은「99년 종말론」에 대한 해석 방식이다. 그의 4행시중「고독」
「홀로」같은 표현이 빈번한 것은 특정 교파에 의존한다는 비난을 살 것을 두려워 했기 때
문이란 설명도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64년 국왕 찰스 9세로부터 시의(侍醫)로 임명됐다. 1566년 임종 하루
전날『내일 뵙겠습니다』란 제자들의 하직 인사를 받고,『해가 떠도 나는 깨지 않을 걸세』
란 마지막 예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적중한 예언들...
『입구에서, 그리고 두 도시에서 / 일찍이 보지 못한 두 개의 재앙이 닥치리라 / 철(鐵)이
아닌 것에 강타당한 사람들이 기아와 전염병을 만나 / 불멸의 신에게 호소하리라.』
노스트라다무스의 4행시는 압축된 선답(禪答)이다. 심오한 뜻이 녹아든 자구(字句) 들을 조
합한 탓에, 그의 통찰력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경우도 많다.
1 945년 동방의 입구(일본) 두 도시(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전례없는 재앙(원자폭탄)이 닥치
고, 철이 아닌 것(우라늄)에 공격받은 이들은 불멸의 신(천황)에게 읍소한다는 내용에서 수
백년을 꿰뚫은 혜안을 느낀다. 가슴 서늘한 예언은 그뿐 아니다.
『세 물줄기가 겹치는 곳에서 태어나 / 목요일에 축제를 벌이리라 / 그의 소문, 찬사, 치세
가 힘으로 강대해지리니 / 육지로 바다로 동방에 폭풍이 몰아치리라.』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페르시아만의 합류 지점에서 태어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은 목요일(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반미성전(聖戰)을 선언한 후세인은 중동과
아랍권에서 부시, 클린턴 등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을 이겨낸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건재를
과시하고 잇다.
그가 적중한 예언들은 다양한 시공에 걸친다 프랑스 앙리 2세 기마시합중 사망(1559년), 영
국 찰스 1세 처형과 크롬웰 섭정(1649),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0), 나폴레옹 출생(1769),
히틀러 출생(1889), 제1차 대전 발발(1914),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1917), 2차대전 발발
(1939), 연합군 승리(1945), 이란 회교혁명(1978), 프랑스 미테랑 사회당 집권과 사다트 이집
트 대통령 암살(1981), 영국-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1982), 체르노빌 원전 사고(1986), 베
를린 장벽 붕괴(1989), 공산주의 와해(1991)등으로 그는 자신의 예지력을 입증했다. 또 세기
의 역병(疫病)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 출현을 예고하기도 했다.
추상적 표현은「빗나간 예측」이란 비난을 샀고, 광의(廣義)의 시어가 자의적 해석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예언의 범주는 분쟁과 대립, 기아와 전염병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도
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들 중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들 중에서 종말과 관련있다고 알려진 시들을 정리해 보았다.
불어는 못하기 때문에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번역했다. 참고한 자료는 이토가와 히데오씨의
저서 '노스트라다무스'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실현된 예언
예언은 간접적이다. 결코 직접적이지 않다.
이 말은 곧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라는 우리의 속담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 예언의 직접성을 무시할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가 바로 노스트라다무스의 경우일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전세계를 상대로 무제한의 전쟁에 돌입했던 1939년 여름, 선전상 요셉 괴벨스의 아내는 이미 400년전에 행해진 일련의 경악스러운 예언을 주목하도록 남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노스트라다무스라는 프랑스인이 쓴 예언은 히틀러의 출현을 예고한 것 같았고 독일의 지도자를 지칭함에 있어서도 '히스터'라고 씀으로써 이름마저 비슷하게 맞히고 있었다.
히틀러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예언을 아무리 잘 풀어봐야 제3제국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으로는 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전상은 가짜 예언을 조작해 냈다. 1940년 독일 공군은 독일이 승리할 것이며 프랑스의 남동부에는 전화(戰禍)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수 천장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을 프랑스와 벨기에 상공에 투하했다.
피난민으로 파리에 이르는 길과 영국 해협에 면한 항구에 이르는 길이 막힐까 두려워 그걸 미연에 방지하려는 게 그 목적이었다. 그에 맞서 영국의 정보부에서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만들었는데, 물론 그것은 추축군에 대한 연합국의 승리를 예언한 내용이었다.
혁명적인 의사 미셀 드 드 노스따르담은 1503년 프로방스 지방의 셍 레미에서 출생했다. 그는 후에 이름을 라틴식으로 노스트라다무스로 고쳤다. 그의 가문은 유태계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했고 어린 미셜도 가톨릭교도로서 양육되었다.그는 두뇌가 비상한 의학도였고 흑사병 환자를 다루는 능숙한 의사로서 처음에는 유명해졌다.
의료 부문에서 그가 거둔 성공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다른 의사들과는 달리 환자들의 '피를 뽑기를' 거부했던 것에 기인했으며, 그것은 16세기 초엽으로는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그는 다른 분야에서도 당대 사람들보다는 선각자였다 노스트라다무스는 갈릴레오가 자동설을 주창한 것보다 100년 앞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다.
그가 예언의 재능을 처음 보인 것은 그저 [세기 (世紀) ]라는 제목이 붙은 10권의 전집중 1권을 출간한 1551년이었다. 이 전집은 각 권마다 100개의 예언이 담겨 있으며, 예언은 시처럼 운문으로 되어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비결을 절대로 밝히지 않았다. 그는 금속 삼각받침대 위에 물 한그릇을 떠 놓고 마치 서양 점장이가 수정수(水晶球)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점을 치듯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때때로 예리한 섬광과 같은 직관에 의해 예언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청년시절의 어느날,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그는 펠리테 뻬레띠라는 지나가던 수도승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그 수도승과 행인들이 놀랄 만한 발언을 했다. '교황님 앞에 무릎 꿇나이다. ' 그 수도승은 1585년에 정말 교황이 되었으니 식스투스 5세가 바로 그였다.
또 언젠가 왕비 까떼린 데 메디치가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왕비의 수행원 중의 한 소년에게 나중에 프랑스의 왕이 될거라고 예언함으로써 소년을 당황케 했다. 그 소년은 앙리 드 나바르로서 후에 앙리 4세가되었다.
자신의 죽음과 예언
언젠가 프랑스의 한 귀족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능력을 시험해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집안에서 키우는 돼지 두 마리의 운명을 예언해 보라고 그에게 요구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검은 놈은 귀족이 먹게 될 것이고 흰 놈은 늑대가 먹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귀족은 즉시 흰 놈을 잡아 저녁 식탁에 대령하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 노스트라다무스와 함께 식사하던 귀족은 집안에서 기르고 있던 길들인 늑대가 흰 돼지의 고기를 물고 가 버려서 검은 돼지를 잡아 식탁에 올렸다는 얘기를 듣고 대경실색했다. 예언자는 1566년에 자기가 죽으리라는 것도 미리 내다보았다.
죽기 전에 그는 작은 금속판에 어떤 숫자를 조각케 하고 자기가 죽으면 관에다 그걸 넣도록 지시했다. 1700년에 더 눈에 잘 띄는 좋은 장소로 옮기기 위해 그의 관을 134년만에 무덤에서 파냈다. 금속판은 예언자의 해골 위에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1700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종교재판소가 그를 마법사로 낙인 찍는 걸 피하기 위해 노스트라다무스는 예언 속의 연대와 날짜를 일부러 뒤섞어 버렸고 어구(語句)의 묘한 배치와 기호, 고대 프랑스어, 라틴어 또는 기타 외국어를 써서 난해하게 표기했다. 이 같은 의도적인 혼란때문에 그의 예언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예언으 대부분은 사실과 기막히게 접근되어 있으며 유럽이 낳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는 명성이 실로 당연하다 할 만큼 절묘한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그의 예언은 현대적인 어투로 고쳐 번역한 것이지 만 그 안에 쓴 고유명사들은 원본과 똑같은 것이다.
프랑스의 앙리 2세
그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프랑스 궁중에는 국왕 앙리가 어떻게 죽어가는가를 기술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악명높은 예언에 대해 아무도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
야전의 단 일격의 싸움에서 젊은 사자는 늙은 사자를 압도하리라.
황금투구안의 눈을 그가 찌르니 일격에 두 군데의 상처로 그는 비참하게 죽더라.
이 예언은 4년 뒤인 1559년에 현실이 되었다. 사자(獅子)의 문장(紋章)을 가진 앙리는 국왕 직속 의 스코틀란드 근위대 대장인 몽고메리라는 젊은 사관과 진선 마상(馬上)창시합을 겨뤘다. 그런데 우연히 몽고메리의 창이 앙리의 금빛 투구를 관동하여 눈과 목을 찌르게 되었다.
왕은 열흘이나 괴로와 신음하다 죽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은 앙리의 미망인 까떼린 데 메디치에게는 충격이었다. 왕비는 예언자를 철저히 믿게 되었고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노스트라다무스를 궁궐의 거울에 미래의 모든 프랑스 왕의 '환상'이 비치도록 했다.
아마도 옆방에 사람들을 배치해서 영상을 반사시키는 속임수를 쓴 것 같은데 미신을 잘 믿는 까떼린 왕비는 매우 감명을 받았고 그러써 왕비의 그에 대한 신임은 더욱 확고해졌다. 앞날을 보장받게 되자 비로소 노스트 라다무스는 전인류의 미래를 웅장하게 예언한 저작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또한 까떼린 왕비의 세 아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을 정확히 예언했다.
루이 16세
1791년에 바렌느로 도망쳤다가 결국 혁명군에게 잡힌 루이 16세와 앙뜨와네뜨 왕비의 운명은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기술되어 있다.
밤이 되자 렌느의 숲속에 이르러
도망길에 나선 두 사람은 헤메도다.
흰 보석으로 유명한 왕비와
바렌느에서 회색 사제복을 입은 왕
까뻬 왕가에서 선발된 그가 소란과 불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살륙의 원인이더라.
왕과 왕비는 탈출하여 밤이 되자 숲지대까지 도망쳤으나 길을 잃었고 하필이면 나쁜 길을 택했다. 흰보석이라 함은 왕비의 평판을 악화시킨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지칭한 듯 하며 실제로 왕비는 흰옷을 입는 습관이 있었다.
사제복의 왕이라 함은 한때 불임증에 걸렸던 왕을 은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체포되었을 때 회색옷을 입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은 까뻬 왕가의 일원이었으며 길로틴에 의한 처형법(피비린내 나는 살육)은 그가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왕은 혁명과 그에 따르는 폭력의 원인이었다. 연관된 구절에서 노스트라다무스는 왕과 왕비를 한 때 위기에서 피난시켰던 솔스라는 사람의 이름까지도 댔다.
나폴레옹
예언자는 나폴레옹의 출현을 예견했으며 그를 제 1의 반기독교적 인물이라고 썼다. ( 제 2의 인물은 히틀러,제 3의 인물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듯 한다 ) 나폴레옹의 권력 장악과 그가 통치했던 시대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탈리아 부근에서 황제가 탄생하리다.
그는 제국에 대해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르리라.
사실 나폴레옹은 몰락할 때까지 프랑스로 하여금 인력과 정치권력에서 값비싼 희생을 치르게 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또한 나폴레옹의 운명도 예언했다.
대제국을 곧 작은 땅과 맞바꾸게 되지만 작은 땅은 곧 커지리라.
그 좁은 땅 가운데에 그는 그의 홀(笏)을 내려놓게 되리라.
나폴레옹은 엘바라는 작은 섬에 유배되지만 탈출하여 100일동안 정권을 잡게 되며 그의 제국은 또다시 커진다. 그러나 남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라는 더 좁은 섬에 유배된 그는 모든 권력의 꿈을 잃게 된다.
찰스 1세
노스트라다무스는 찰스 1세에 대해 많은 예언을 했을 뿐 아니라 로드대주교와 크롬웰에 대한 예언도 했다.
잉글랜드 왕국에서
무책임한 자는 쫓겨날 것이로되
고문관은 분노 때문에 화형에 처해지리라.
그의 신하들은 비겁하게 엎드려 굴복하리니
왕인 체하는 자가 왕위에 오를 뻔하리라.
찰스가 왕권을 잃은 것은 무책임한 성격때문이었다. 고문 로드 대주교는 1645년에 참수형(화형이 아님)을 당했다. 비겁하게 굴복했던 신하들이란 스코틀란드인들로서 1646년 그들의 왕을 의회에 팔아 넘겼으며, '왕인체하는 자'란 아마도 '호민관'으로서 거의 왕위에 오를 뻔했던 올리버 크롬웰을 뜻하는 것 같다.
찰스에 관한 가장 예리한 예언은 이렇다.
'런던의 의회는 그들의 국왕을 사형시킬 것이며...
그의 죽음은 의회의 체발(剃髮)한 무리들 때문이로다. '
예언자는 분명히 머리를 짧게 깎는 청교도의 원두당(圓頭黨)을 지칭하고 있었다. 예언자는 또한 '공포에 질린 도시, 부서진 다리의 도시'에 대해서도 썼다. 그것은 아마 다리(橋)를 뜻하는 라틴어 퐁스(pons)와 '부서진'을 뜻하는 라틴어 프락투스(fractus)에서 유래한 폰티프락트(Pomtefract)란 도시를 지칭하는 성싶다. 그 도시는 크롬웰파가 두 번이나 점령했으마 시민들은 찰스를 저항했다.
대화재와 페스트
노스트라다무스는 대개의 예언에서 정확한 날짜를 기술하지 않았지만 런던의 대화재만은 예외였다.
20의 3배에 6을 더한 해에
런던은 불타 정의로운 자의 피를 요구하도다.
그 참사는 1666년에 일어났으며 노스트라다무스는 이탈리아식 표기법을 써서 연대의 첫 두 수자는 생략했다. 다음은 1665년 런던에 만연된 '흑사병의 창궐'에 대한 데 대한 것이다. 흑사병은 런던이 칼스 1세를 시해한 데 대한 천벌이라고 그는 시사했다.
그 항구도시에 역병이 휩쓸어
죽음으로 보복하기 전까지는 그치지 않으리.
정의로운 자가 흘린 피 때문에
무고하게 처벌받은 자의 피 때문에
그리고 가짜 성인들이 유린한 고귀한 부인때문에.
'가짜 성인들'이란 청교도인 것 같고, '고귀한 부인'이란 런던 대화재때 파괴된 성바오로 성당으로 생각된다.
루이 파스퇴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최근에의 역사적인 일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여기서도 시대와 이름이 예언되고 있다.
파스퇴르는 신과 같은 명성으로 축복받으리니
때는 달이 태음주기를 끝냈을 때의 일이로다.
파스퇴르는 1889년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여 의학부문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지구의 태음주기는 19년이다. 1889년이 바로 이 태음주기가 완료되던 해였다.
히로시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에 관해서도 예언되었다.
항구 근처의 두 도시에서는
지금껏 유례가 없던 참화가 두 번 일어나리.
두 도시는 바다에 명해 있고 그 두 곳에서 있었던 핵폭발의 참화는 인류가 일찌기 경험한 바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
노스트라다무스는 나치 지도자에 대해 몇 가지 이례적인 예언을 남겼다. 다음의 한 귀절을 보면 히틀러의 생애와 1945년 베를린에서의 그의 죽음은 아무도 확인할 수 없게 되리라는 점까지 예언되어 있다.
라인 강변 오스트리아의 산중에서
한 인물이 이름없는 가정에서 태어나리라.
그는 폴란드와 헝가리를 지켜 주겠노라고 나설 것인즉
그의 최후는 아무도 알 수 없으리라.
또 다른 귀절에서는 독일군이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로 노도처럼 진격해 들어가던 2차 대전 초기의 상황이 그려져 있었다. 유럽의 대부분이 ('전장의 대부분') 그에 대항해 싸우는 연합군편이었건만 히틀러는 -또 그의 예언에서처럼 '히스터'는- 거칠 것 없이 진군했다.
굶주림으로 사나와진 맹수는 강을 건너리.
전장의 대부분은 히스터에 맞서 대항하리로다.
예언자는 또한 '공중에서 소리나는 무기들' 그리고 '비행하는 불의 기계들'애 대해 경고했으니 그것은 필시 항공기와 폭격기 그리고 초기의 V 로케트를 지칭한 것이었으리라. 노스트라다무스는 전투기 조종사가 산소마스크와 헬멧, 방풍안경을 착용한 모습을 '공중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그는 반은 돼지 같고 반은 사람 같다' 고 생생하게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