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난로 가리개 앞의 성모자
로베르 캉팽
플레말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5)은
15세기 초에 플랑드르에서 고딕양식과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회화를 등장시켰다.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금빛 찬란한 천상의 화려한 장식을 버리고,
일상의 소품들과 풍경을 성화에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신성한 것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어 내린 것이다.
물론 14세기 말에 이탈리아 화가들도 황금색 배경을 포기하고
‘겸손의 어머니’에 어울리는 새로운 사실적인 배경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성모자의 배경으로 ‘실내형(Domestic Type)’과 ‘정원형(Enclosed Garden)’을 선호했다.
그러나 성모자의 배경으로 도시 풍경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사실주의 풍경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초기 플랑드르의 화가들이다.
그 중 플레말의 대가는 북유럽 최초의 혁신적 미술가의 한 사람이다.
그가 1430년경에 그린 <벽난로 가리개 앞의 성모자>는 신앙과 현실이 결합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하느님 중심의 그림에서 인간 중심의 그림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또한 이 그림은 서양미술사에서 사실주의 도시 풍경화가 성모자의 배경으로 그려진 최초의 작품이다.
그는 겸손의 마리아를 표현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실내형’ 성모자 유형을 도입했다.
그리고 부유한 플랑드르 상인의 저택을 실내 배경으로 삼았다.
그는 왼쪽 상단의 열려 있는 창을 통해 플랑드르의 도시풍경을 그렸다.
성모자의 창 안에 세상을 담는다는 게 얼마나 성경적인가?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성모님은 세상의 구원을 전구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 창은 사실주의 회화의 개념을 반영한다.
사실주의 회화란 열려 있는 창을 통해 보이는 외부 세계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화면 구성의 측면으로 보면, 이 창은 화면의 어두운 부분과 함께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주지만,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당시 번영했던 한 도시의 풍경을 재현했다.
광장 중앙에 고딕양식의 성당이 보이고, 박공벽의 상점 앞으로 말을 탄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그런데 이 작은 그림 안에도 선 원근법의 원리를 사용하여 공간의 깊이를 표현했다.
또한 플레말의 대가는 일상의 친숙한 생활소품들로 그리스도교의 복잡한 상징들을 표현했다.
우선 마리아의 머리 뒤에서 빛나고 있는 벽난로 가리개는 성모의 후광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왕골을 엮어 만든 둥근 가리개는 벽난로 앞에 있는 생활소품이지만,
그는 성인들의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후광으로 대신한다.
그는 일상의 소품으로 종교적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앉아 계신 의자도 어좌가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평범한 의자이다.
그러나 의자의 모서리에 장식된 사자장식으로 인해
이 의자가 초라하지만 솔로몬이 앉은 사자의 권좌와 같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다윗과 솔로몬의 후손이고, 왕 중의 왕이시며,
성모님은 그분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또 붉은 쿠션 위에 있는 성경책은 창밖의 세상과 성모자를 연결해준다.
이것은 창밖의 도시 풍경으로 암시되는 세상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로 대변되는 자모이신 성교회가 구원의 연결고리임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께서 귀를 기우리는 곳에 제대가 있고, 제대 위에는 미사 때 쓰이는 성작이 놓여 있다.
교회는 미사를 통해 예수님과 세상을 연결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과 성작 사이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께서는 자모이신 성교회의 품에 계시다.
그런데 성모님의 모습이 보통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 거룩한 교회도 평범한 가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초대된 세상을 향해 구원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출처] 벽난로 가리개 앞의 성모자 - 로베르 캉팽|작성자 말씀과 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