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파키스탄, 재앙에 가까운 홍수로 국토 3분의 1 침수
파키스탄이 재앙에 가까운 홍수로 국토 3분의 1이 물에 잠긴 것으로 밝혀졌다. 파키스탄에는 지난 6월 중순부터 내린 몬순 폭우로 현재까지 1136명이 사망했고 이재민 3천 3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유럽우주국이 코페르니쿠스 위성이 촬영한 사진을 살펴보면 동부 도시인 데라무라드 자말리부터 남쪽 신드 주 라카르나 지역이 인더스 강의 범람으로 침수돼 파란 색으로 표시돼 있고 인더스 강 근방에 수십 km에 달하는 큰 호수가 생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세계보건기구 WHO에 따르면 "파키스탄의 154개 행정구역 중 75%인 116곳이 이번 폭우로 피해를 봤다"고 발표했다.
수해로 이재민들의 일상 생활도 불편함이 큰 상황이다. 오염된 물로 식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콜레라, 세균성 이질(시겔라균이 포함된 오염된 식수, 비위생적인 음식물 섭취 시 변으로 배출되는 감염 질환)같은 전염병과 고인 물로 인한 말라리아, 뎅기열 같은 모기 관련 질병 확산 우려도 커지고 있다.
파키스탄 국토 3분의 1이 잠겨 피해 상황이 심각한 만큼 국민들은 국제 사회에 더 많은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2021년 여고시절 부른 가수 이수미 사망
2021년 뉴욕시 아이디 허리케인으로 역대 최대의 폭우로 도시 마비
30일 허리케인 아이다가 역대 최대인 5시간의 폭우에 미국 뉴욕시가 마비됐다. 뉴욕을 비롯한 미 북동부 일대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 교통이 마비되고 정전 피해가 속출하면서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뉴저지에는 시속 241km의 바람을 동반한 EF3급 토네이도가 상륙했다. 이는 뉴저지에 상륙한 토네이도도 중 1990년대 이후 가장 강력했다. 메릴랜드주에는 최소 6개의 토네이도가 발생했는데, 그중 하나는 최대 풍속이 시속 125마일(201km)에 달하는 EF2급 토네이도였다
뉴욕·뉴저지·펜실베이니아주에서만 최소 49명이 숨지고 15만 가구 이상이 여전히 정전 상태다. 뉴저지·펜실베이니아·매사추세츠·로드아일랜드주에서는 9인치(약 22.9㎝) 이상의 비가 내렸다 뉴욕시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센트럴파크에서는 7.19인치(약 18.3㎝)의 비가 쏟아져 1869년 기상 관측 이래 최대 강수량을 기록했다. 시간당 강수량도 최대 3.15인치(약 8㎝)로 지난달 21일 열대성폭풍 헨리 때 세운 종전 기록 1.94인치를 불과 11일 만에 갈아치웠다.
맨해튼 FDR드라이브와 브롱크스 리버파크웨이 등 주요 도로가 물에 잠겨 강으로 변하자 운전자들은 차를 버리고 대피해야 했다. 뉴욕시 지하철 46곳에서 침수 피해가 발생했으며 타임스스퀘어역에서는 지하철이 멈춰선 전날 저녁 9시45분께부터 승객들이 폭우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지하철역 안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2018년 방탄소년단 앨범 ‘러브 유어셀프 결-앤서’ 빌보드200 차트 1위 오름, 빌보드 역사상 열아홉 번째로 한 해에 두 장의 앨범을 1위에 올림
2018년 200년 된 브라질 리우 국립박물관 불 소장품 2천만 점 중 대다수 불탐
2014년 증평 제13공수특전여단 예하 부대서 하사 2명 포로체험 훈련 중 질식사
2010년 '사랑의 교회' 옥한흠 원로목사 별세
개신교계 원로 옥한흠(玉漢欽·72) 사랑의교회 원로목사가 2010년 9월 2일 별세했다.
1972년 목사안수를 받은 옥 목사는 1978년 서울 서초동에 사랑의교회를 개척해서 강남의 대표적인 교회로 키웠다. '평신도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취지로 '제자훈련'이라는 평신도교육 프로그램을 정착시키며 한국복음주의 교회를 이끌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등 개신교 목회자 단체를 이끌면서 개신교의 갱신·일치·섬김 운동을 주도했으며,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1984년)를 비롯해 '하늘행복으로 살아가는 작은 예수' '안아주심' 등 1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2009년 신라 문무대왕비 상단부 발견
2009년 9월 2일 신라 문무왕릉비의 상단부가 발견됐다. 조선시대 때 발견됐다가 다시 사라졌던 신라 제30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의 한 부분이 200여년 만에 다시 발견된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2일 경북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 수돗가에서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신라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이 비석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여성 수도검침원이다. 지난 1일 저녁 이 여성은 야학에서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김 부회장이 “최근 포항 중성리에서 ‘신라 최고(最古) 비석’이 발견됐다”며 “여러분 주변에 중요한 비석이 널려 있을지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했다. 순간, 번쩍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검침했던 집 수돗가에 박힌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는 곧바로 김 부회장에게 알렸고 김씨의 제보를 받은 국립경주박물관이 현지조사를 했다. 박물관은 “비편(碑片)은 높이 66㎝, 너비 40㎝ 크기로, 앞면에만 200여자의 글자가 확인된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은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의 조각들을 1796년(정조 20년)에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의 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비문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비석의 실물은 그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가 1961년 아랫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그 윗부분이다. 오영찬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번에 비석 윗부분이 발견된 장소는 아랫부분이 있던 지점에서 불과 120m 떨어진 곳”이라며 “애초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비석이 경주 관아로 옮겨졌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문무왕릉비 윗부분은 표면이 훼손되고 가장자리 등 일부가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박물관측은 덧붙였다. 박물관은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실제 비석과 비교하면 추가로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마당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상태도 주목된다”고 말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 비편을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하기로 했다.
2007년 북미관계정상화 실무그룹회의 테러지원국 및 적성교역법 지정해제 합의
2001년 쿠마라퉁가 스리랑카 대통령 좌익정당과 공조 결정
2000년 비전향장기수 63명 북한으로 송환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간의 6.15 공동선언 합의에 따라 비전향장기수 63명이 2000년 9월 2일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송환됐다. 이들은 이날 오전 북악파크호텔을 출발, 통일대교를 지나 유엔사령부 관할지역에 도착, 송추위와 민가협 관계자 30여명과 마지막 이별을 나누고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를 통해 북으로 보내졌다.
북송 절차 등은 모두 1993년 이인모씨 송환때의 전례에 따랐다. 정부는 현행법에 북한 거주를 허가할 근거가 없어 이들에게 방북 형식을 취했고 박재규 통일부장관 명의의 ‘방북 증명서’를 발급했다. 정부는 대신 ‘1년6개월 이내’로 제한돼 있는 방북 기간을 본인의 요청이 없어도 자동적으로 연장해 주는 방식으로 ‘북한 거주’를 합법화시켰다.
한편 이날 오전 납북자 가족과 6·25전몰군경유자녀회, 6·25참전전우회 등 소속 회원 150여명은 통일대교 남단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즉각 송환을 촉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1999년 북한,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효 주장하며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선포
북한은 1999년 9월 2일 인민군 총참모부 발표를 통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조선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선포한다고 밝히고 이 분계선에 대한 자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주장한 해안 분계선은 황해도와 경기도 경계선-강령반도 등산곶과 굴업도의 등거리점-옹도와 서격렬비도 등거리점-한반도와 중국간의 해상경계선을 잇는 선으로, 백령도 연평도 소-대청도 등 우리측 서해 5도를 모두 북측 수역에 포함시켰다. 이에 군 당국은 서해상에서의 어선 나포나 우리 함정에 대한 해안포 발사 등 북한의 예상되는 각종 군사도발 가능성에 대비, 이 지역에 고속정을 추가 배치하는 등 경계 및 감시태세를 강화했다.
정부는 9월 3일 오전 국가안전보장회의(NSC)상임위를 긴급 소집해 대책을 협의하고 북방한계선 고수입장을 재확인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북한이 선포한 해상경계선은 인정할 수 없고 현재의 북방한계선을 확고히 지키며, 새로운 해상경계선 문제는 남북기본합의서에 명의된대로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 협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합동참모본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결과를 토대로 이날 오후 성명을 내고 북한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할 경우 강력대응하는 한편 예상되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상황별 대응 시나리오를 통해 대처키로 했다.
1998년 언론인 유건호씨 별세
조선일보사 부사장과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을 지낸 유건호씨가 1998년 9월 2일 별세했다. 유씨는 조선일보 40년 근무, 최장수 사회부장(10년)이란 보기 드문 기록을 가진 언론인이었다.
그는 경복중, 일본 와세다대 출신으로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일전쟁에 참가했다가 부대를 탈출, 광복군에 편입한 후 고국땅을 밟았다. 1946년 조선일보 속간 후, 방응모 사장이 발탁,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초년 기자시절에는 정치부에서 중앙청과 경무대를 출입했으며,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나자 종군기자로 취재, 필명을 얻었다. 2년 만에 사회부차장, 다시 4개월 후 부장으로 승진했다.
입사 3년이 채 안 돼 27세의 사회부장이 된 셈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그는 부산분실장으로 부임했다. 1962년, 1974년 두 차례에 걸쳐 편집국장을 맡았고, 조선일보 상무-전무-부사장(발행인 겸 인쇄인)을 거쳤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헌법개정심의위원, 대한체육회 이사,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 감사, 전국재해대책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98년 스위스 여객기 대서양에 추락, 탑승객 229명 전원 사망
승객과 승무원 229명을 태운 스위스항공 소속 MD11 여객기가 1998년 9월 2일 밤 캐나다 노바 스코샤주 핼리팩스 인근 대서양에 추락,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여객기는 이날 오후 8시 30분쯤 뉴욕의 JFK공항을 이륙, 제네바로 향하던 중 오후 10시 30분쯤 핼리팩스 공항에 비상착륙을 시도하기 위해 무전교신을 한 뒤 레이더에서 사라진 후 추락했다.
사고기인 MD11 여객기는 스위스 항공이 1991년 도입한 비행기로 1993년 같은 기종의 항공기에서 엔진 블레이드 내 균열이 발견돼 관련 부품을 교체한 적이 있지만 비교적 안정성이 높은 기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스위스 정부는 3일 비상각의에서 테러 가능성을 논의했으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스위스 항공 관계자들도 당초 기체 결함 가능성을 부인했으나, 테러의 징후가 없었다는 경찰과 법무부의 의견이 나온 이후 사고 원인이 기술적인 문제였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1996년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 사망
1993년 국내최초 다목적 경비행기 `창공91호` 개발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경비행기인 `창공91호`가 교통부의 사상 첫 항공기 형식승인을 받아 실용화에 돌입했다. 다목적 5인승 프로펠러기인 창공91호는 대한항공, (주)삼선공업, (주)한국화이버 등 3개 사가 지난 1988년 6월부터 5년동안 순수 우리기술로 36억원을 들여 개발한 것이다. 교통부는 1992년 7월부터 1년2개월동안 기체구조 강도에 대한 안전성 검증과 시험비행 등을 거친 후 합격 판정을 내렸다. 1994년부터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갔으며, 대당 가격은 2억원 정도로 당시 국내-외에서 50여대의 주문상담이 있었다. 창공91호는 동체길이 7.7m, 폭 10.2m, 무게 8백30㎏, 최고비행속도 시속 2백42㎞이며, 서울~일본 도쿄간을 논스톱으로 비행할 수 있다.
1991년 배우 이혜숙 ‘은마는 오지 않는다’(감독 장길수)로 제15회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1990년 이라크 인질 7백여 명 석방 외국공관 폐쇄 취소
1989년 제30회 국제기능올림픽 폐막. 한국 8연패
1987년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 내한
1984년 필리핀에 태풍 아이크 강타 사망 1,000여명 이재민 20만 명
1981년 미국, 중성자탄 생산 시작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새 내각 구성
1980년 남덕우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75년 학도호국단 발단식
1969년 최초의 패킷교환방식 ‘아르파넷(ARPANET)’ 등장, 인터넷의 효시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자 미국은 소련의 핵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만일 소련의 핵 공격에 미국의 통신 시스템이 파괴될 경우 국방과 관련된 모든 통신수단이 일시에 마비된다는 두려움도 그중의 하나였다. 국방부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동안 민간 연구진에서는 관련 기술들이 하나둘 개발되고 있었다.
레너드 클라인록(Leonard Kleinrock))은 1961년 7월 다발 단위로 데이터를 교환하는 패킷교환방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랜드사 연구원 폴 배런은 1964년 하나의 루트에만 의존하지 않는 분산 형태의 새로운 컴퓨터 통신 시스템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
분산시스템은 중앙에서 통제하는 단일 루트망이 아닌 수많은 노드(네트워크의 분기점이나 단말장치의 접속점)로 구성되기 때문에 시스템 내의 모든 노드에서 메시지를 보내고 받는 작업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되면 일부 노드가 파괴되더라도 다른 노드들은 기능을 계속 수행할 수 있어 통신망 전체가 일시에 마비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이런 민간 연구 결과를 현실화하기 위해 1969년 국방부가 설립한 것이 ‘고등연구계획국(ARPA)’이다. 국방부가 UCLA를 개발의 전초기지로 삼은 가운데 1969년 9월 2일, UCLA 교수 레너드 클라인록이 컴퓨터를 스탠퍼드대 컴퓨터와 연결하고 ‘LO’라는 단어를 최초로 전송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ARPA의 네트워크 즉 ‘아르파넷(ARPANET)’이 비로소 세상에 태어났다. 클라인록은 당초 ‘LOG IN(접속)’을 전송하려다가 ‘LO’ 두 글자만 보내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말 캘리포니아대와 유타대까지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ARPANET은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다가 ARPANET을 위성 및 무선 네트워크와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킹 프로토콜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TCP/IP’ 통신 프로토콜이 개발되어 TCP/IP가 산업표준으로 자리잡았다.
TCP/IP는 1983년 1월 ARPANET의 기본 프로토콜로 정해진 후 짧은 시간에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한편 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노드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호스트 이름과 주소를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83년 위스콘신대에 네임 서버가 구측되었고 1984년 ‘DNS(도메인 네임 시스템)’가 도입되었다. ARPANET은 1983년 군사전용 네트워크인 ‘MILNET’과 연구용 ARPANET으로 분리된 후 연구용 ARPANET은 1986년 미 국립과학재단(NSF)에 흡수되었다가 1990년 폐지되었다.
미 국립과학재단(NSF)는 1987년 ARPANET과는 별도로 다양한 교육기관을 서로 연결하는 ‘NSFNET’을 구축했는데, ARPANET보다 사용이 쉬워 컴퓨터 산업 종사자나 연구원, 공무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인터넷을 일반인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민간용 정보망이 점차 활성화되면서 인터넷의 주도권도 자연스럽게 ARPANET에서 NSFNET으로 넘어갔다.
TCP/IP 덕분에 네트워크끼리 소통이 가능해지자 놀랍게도 수많은 네트워크가 자발적으로 묶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얽히고 설킨 거대한 그물망이 만들어졌다.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속속 민간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프로그램과 서비스들이 생겨났다.
1964년 제1차 대전 영웅 미국의 알빈 요크 사망
1962년 소련-쿠바 군사경제원조 협정 조인
1957년 정부, 말레이지아연방 정식 승인
1949년 중국 중경에 대화재 1,700명 사망
1948년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 의장 허헌 부의장 이영 김달현 선출 헌법심의 1947년 미주(美洲) 19개국, 미주 상호원조조약 조인 (리오조약)
1946년 소년 노동법 제정
1945년 일본이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 조인, 2차 대전 공식적으로 끝남.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연합국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묵살하고 소련에 ‘조건부 항복’ 중재를 요청했다.
소련이 시간만 보내며 분명한 뜻을 밝히지 않는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곧 소련마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천황궁에서 열린 어전(御前)회의는 ‘천황제 존속’을 조건으로 항복을 결정하고 이를 연합국에 알렸다. 연합국은 이 조건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일부 장교단이 항복을 거부하며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대세를 거스를수는 없었다.
1945년 8월15일 정오,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일본 전역에 울려퍼졌다. 패전과 항복의 조곡(弔哭)이었다.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이 남았지만 아무도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아 난항을 겪었다. 결국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장관이 악역을 떠맡았다. 그는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었던 외교관이었다.
마침내 9월2일, 요코하마에 정박중인 미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쓰가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태평양전쟁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45년 일본 연합군총사령부(GHQ) 육해군 해체와 군수생산을 중지하는 지령1호 발표
1945년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 선언
1945년 9월 2일 베트남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호치민이 50만 명의 시민들이 운집해 있는 하노이의 한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큰 소리로 읽어나갔다. 베트남은 과거 80여년 동안의 프랑스 식민지배를 겪은 후 1940년부터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이중고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베트민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해방세력이 일제히 봉기했다. 군사적·정치적 조직을 확립해 온 베트민은 호치민의 지도하에 결집, 이 해 3월 일본군이 수립한 바오 다이 국왕 등 괴뢰정권을 타도, 군주제에 종지부를 찍고 민주공화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베트남 재정복을 목표로 1945년 10월에 남부를 점령하고, 익년 11월에는 북부로 무력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발전했다.
1945년 연합군최고사령부, 미국-소련 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책 발표
1945년 9월 2일 연합군최고사령부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의 한국분할점령을 발표했다.
8월 8일 대일선전포고를 내리고 침공한 소련군은 이미 북한에 진주해 있었고 미군은 9월 8일 남한에 진주하였다.
일본이 8월10일 연합군측에 항복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미 국무성 육해군합동조정위원회는 8월 13일 포츠담회담에 의거 38도선 분할점령안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그날로 소련에 통보했고 소련도 즉각 수용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소간의 한반도 분할점령 합의는 7월 26일 포츠담회담에서 미소간에 이미 밀약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이 점점 짙어가던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들이 회담을 열었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 한국의 독립 확인, 앞으로의 전후(戰後) 처리 등에 대한 원칙을 담은 선언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 인류와 일본 국민에게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했다.
곧바로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소련마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일본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을 결정하고 이를 연합국에 통보했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선언이 전파를 타고 한국과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일본이 그날 항복 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항복의 공식 서명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도쿄(東京) 만 요코하마(橫濱)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미주리 선상에서 이뤄졌다.
당시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일본인은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상이었다.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었던 사람이었다.
실질적인 광복은 8월 15일이었지만 공식적인 문서상의 광복은 9월 2일이 되는 셈.
그런데 이 자리에서 놀라운 소식이 터져 나왔다.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점령한다”는 내용의 분할점령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독립이 곧 한국의 분단이 되어 버린 역사의 비극이었다.
이에 따라 9월 8일 한국에 미군이 들어왔다.
다음 날인 9월 9일, 서울의 조선총독부 중앙회의실에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이 미군 제24군단의 존 하지 중장과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한 번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곧바로 총독부 건물(1996년 철거)에서 일장기가 내려갔다.
1945년 동경에 GHO(연합군사령부) 설치
1945년 군정(軍政) 실시
광복 후에 바로 독립이 되고 정부가 수립될 것을 믿었던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38선이라는 국경 아닌 군사적 경계선이 생기고 남한에는 미군, 북한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여 각기 군정을 실시하였다.
북한의 소련군은 그의 앞잡이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 독재 정책으로 북한민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남한의 미군은 군정청을 설치하여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였으므로 우익, 좌익할 것 없이 많은 정당이 난립하여 한 때 그 수는 50여개에 달하였다
1937년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 사망
근대 올림픽 경기의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1937년 9월 2일 74세의 나이로 제네바에서 사망했다. 쿠베르탱은 유년시절 생시르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16세에 중퇴하고 정치가의 길을 선택했다.
쿠베르탱이 어려서 경험한 프러시아 전쟁은 그에게 프랑스 국민들의 나약성을 일깨워준 계기가 됐다.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주로 고전적인 교육을 받아온 그는 현재의 프랑스 교육이 현대 상황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 눈을 영국과 미국으로 돌린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통해 학교와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돌아온 그는 당시 잘나가던 대영제국의 국력이 스포츠 중심의 19세기 영국 공립학교 체제에서 기인했다고 판단, 스포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학생들에게는 종교도덕적 원리와 신사다운 행동, 지적인 능력을 가르쳤다.
쿠베르탱은 올림픽 구호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를 처음 주창했고 평생을 이의 실천을 위해 노력했다. 1894년 쿠베르탱은 올림픽 전통과 이념을 선양하고, 아마추어 경기를 권장하며, 근대올림픽 대회를 총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했다. 그는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대회를 아테네에서 열고, IOC 회장직을 맡으며 스포츠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1933년 이탈리아-소련, 불가침조약 조인
1920년 소련 바크서 제1회 동방민족대회 개최 (37 민족대표 참가)
1919년 강우규 의사, 조선총독에 폭탄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쯤. 신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 實)가 막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해 마차로 갈아타는 순간, 갑자기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군중 속에서 날아온 폭탄 1개가 마차 주변에서 폭발한 것이다. 사이토는 화를 면했지만 주위에 있던 일본인 37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그중 경찰과 일본인 기자 2명은 이때의 상처로 목숨을 잃었다.
거사의 주인공은 뜻밖에 강우규(姜宇奎)란 이름의 64세 노인이었다. 강 의사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가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이라며 이듬해 북간도로 이주해 교육사업에 진력하던 중 1919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영국제 폭탄 1개를 구입해 서울로 잠입했다. 마침 사이토의 부임소식을 들은 강 의사는 폭탄을 허리춤에 차고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거사 직후 현장을 빠져나와 이 집 저 집 숨어다니던 중 9월 17일 친일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돼 이듬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19년 미국 공산당 시카고서 창립
1912년 시인 노천명 출생
1911년 일본-중국간 경봉철도 연장에 관한 협약 조인
1906년 드레스덴서 범게르만회의(제1회) 개최
1900년 소설가 현진건 태어남
1890년 프랑스인 신부 뮈텔, 조선천주교 8대 주교에 임명
1879년 안중근 의사 출생
1813년 프랑스 장군 모로 사망
1792년 파리학살(프랑스혁명 지지자들이 파리 감옥들 습격 1,200여명 재판 없이 죽임) 1666년 영국 런던에 대화재. 주택 13,200호 성바오로교회 등 86교회 소실 (세계 5대 화재의 하나)
BC31년 옥타비아누스 악티움해전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