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3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스가 일본총리 사임 발표
2019년 통계청 8월 소비자물가상승율 -0.038%로 사상 첫 마이너스 물가 기록했다고 발표
2017년 북한 6차 수소탄 핵실험
2017년 9월 3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실행된 북한의 6번째 핵실험이다.
출력은 TNT 약 100~300kt 규모로 세계에서 6번째로 수소폭탄(열핵폭탄)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3일 6차 핵실험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장착용 수소탄 시험을 감행했다.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오후 12시29분쯤 북한 풍계리 일대에서 발생한 규모 5.7의 인공지진은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북한 핵무기연구소는 실험을 감행한 지 3시간이 지난 오후 3시쯤(평양시간) 조선중앙TV 중대 보도를 통해 "오후 12시 북부핵시험장에서 대륙간탄도로케트(ICBM) 장착용 수소탄 시험을 성공적으로 단행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이번 수소탄시험을 대륙간탄도로케트 전투부에 장착할 수소탄제작에 새로 연구 도입한 위력조정기술과 내부구조설계방안의 정확성과 믿음성을 검토·확증하기 위하여 진행됐다"고 전달했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 중국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 참석
2014년 걸그룹 레이디스 코드 빗길 교통사고 고은비와 권리세 세상 떠남
2014년 2014 광주비엔날레 열림, 주제='터전을 불태우라'(Burning Down the House)
2013년 구한말 호조태환권(戶曹兌換券) 인쇄원판 한‧미사법공조수사 통해 62년 만에 돌려받음
호조태환권은 1892년 화폐개혁 때 구화폐회수를 위해 발행한 교환표, 대한제국에서 최초로 인쇄한 근대지폐, 한국전쟁 중 미군이 불법반출
2012년 문선명 통일교 총재 세상 떠남
2011년 제주 강정의 평화 기원하는 1차 평화비행기, 온 나라에서 2천명 강정에 모임
2011년 ‘노동자의 대모(代母)’ 고(故) 전태일 열사 모친 이소선 여사 별세
노동운동가 고(故)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가 3일 오전 11시45분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
병원 측은 이날 오전 8시께 고인의 혈압이 없어지고 모든 장기의 활동이 중단됐으나 가족들의 요청으로 임종 예배를 마친 11시45분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1929년 대구시 달성군(당시 경북 소재)에서 태어난 이씨는 아들 전태일 열사가 지난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여생을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바쳤다.
전 열사가 숨진 직후에는 아들의 요구 사항을 해결하라며 장례식 치르기를 거부, 노동청장으로부터 노조 허가 약속을 받았다. 이후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하고 고문에 추대됐다.
1986년에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1998년에는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422일간 천막 농성을 벌였다. 이같은 사회운동 공로로 4월 혁명상과 만해대상 실천 부문상 등을 받았다.
2005년 윌리엄 렌퀴스트 미국 제16대 대법원장 사망
윌리엄 렌퀴스트(81) 미국 제16대 대법원장이 3일 밤(현지시각) 워싱턴 교외의 버지니아주 알링턴 자택에서 숨졌다.
스탠퍼드대 법과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렌퀴스트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시절인 1972년 대법관이 됐고, 1986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때 대법원장이 됐다. 그는 1999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탄핵 재판을 주관했고,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주 재개표 논란에서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낙태와 동성애, 총기 소유, 소수인종 우대조치, 사형제도 등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2004년 원로 서양화가 홍종명씨 별세
원로 서양화가 홍종명(82)씨가 3일 오전 9시15분 위암으로 타계했다.
1922년 평양에서 출생한 홍씨는 1944년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적 토속미를 품은 작품을 선보이며 경희대, 숭의여자전문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국전초대작가·심사위원, 미술협회 고문을 지냈다.
이중섭미술상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국민훈장모란장, 예술문화상 등을 받았다.
2002년 탈북자 15명, 베이징 내 독일 학교 및 외교관 숙소에 진입해 망명 요청
탈북자 15명이 3일 베이징(北京)시 차오양(朝陽)구의 독일 학교 및 외교관 숙소 단지에 진입, 한국 망명을 요청했다.
탈북자들은 이날 오후 3시20분(한국시각 오후 4시20분)쯤 싼리툰(三里屯) 외교 단지에서 약 1.5㎞ 떨어진 이곳 경비가 허술한 틈을 이용,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들은 탈북자들이 약 2m 높이의 학교 담을 뛰어넘어 진입했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후 이 일대에는 중국 공안(경찰) 수십명이 증원돼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독일 대사관 측은 탈북자들이 진입한 장소가 대사관 구내는 아니지만 독일 대사관이 운영하는 학교와 숙소이므로 대사관과 마찬가지로 불가침권이 적용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이번 사건이 상당히 오래 전 준비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사건 외에도 탈북자들의 외교부 건물 앞 시위 사건과 에콰도르 대사관 진입 시도 사건 등 탈북자 관련 사건이 잇따라 발생해 베이징 경찰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2002년 법원, 이승복君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는 오보가 아닌 사실이라고 판결
1968년 12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화전민촌에 침입한 무장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참살당한 이승복군의 `용기있는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를 특종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는 `소설`이나 `작문`이 아니라 사실 보도였음이 2002년 9월3일 법원의 판결로 확인됐다.
서울지법은 조선일보의 당시 보도에 대해 1998년 `오보전시회`와 `미디어오늘` 등 일부 언론들이 "기자가 현장에도 가지 않고 작성한 소설"이라는 허위 사실을 유포, 조선일보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주언 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과 김종배 당시 미디어오늘 기자에게 각각 징역 6월과 10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1999년 7월부터 3년여 동안 진행된 재판의 쟁점은 1968년 12월 9일 밤 이승복군이 무장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는지, 다음날 오전 조선일보 기자들이 사건 현장을 찾아가 취재했는지 등 두 가지였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발언이 실재했으며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한 점이 인정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이승복군의 발언에 대한 진위는 유일한 현장 생존자인 승복군의 형 학관씨와 당시 마을 주민 등 관계인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진술하고 있어 이제는 더 이상 따질 수 없는 문제"라고 했으며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했다는 사실을 뒤집을 만한 반증이 없다"고 밝혔다.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건의안 국회통과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건의안이 2001년 9월 3일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공조 아래 찬성 148표, 반대 119표로 국회에서 가결됐다. 이로써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3년7개월 간 유지돼 온 민주당과 자민련 간의 공조체제가 붕괴되고, 정계도 여소야대 체제로 재편되는 등 정치권에 일대 격변이 몰아쳤다.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민주당에서 이적했던 장재식, 송석찬, 배기선, 송영진 의원 등도 탈당하고 민주당에 복귀함으로써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잃었다. 국무위원 해임 건의안이 가결된 것은 헌정사상 4번째였으며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이후 30년만의 일이다.
한편 북한은 임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이 상정되기 하루 전에 갑작스럽게 남북 당국간 대화를 재개하자고 제의, 표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2000년 이형택 선수, US오픈테니스 16강에 올라
한국 남자 테니스의 간판스타 이형택 선수가 한국 남자 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US오픈테니스 16강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형택은 2000년 9월 3일 오전 미국 뉴욕 플러싱 메도에서 열린 대회 남자단식 3라운드에서 라이너 슈틀러를 3대1로 꺾어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형택은 8강전에서 세계 최강 피트 샘프러스에 0대3으로 패해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테니스를 시작한 이형택은 라켓 살 돈이 없을 정도로 집안형편이 곤란했으나 타고난 소질로 고교시절에는 최고권위의 소강배에서 2년 연속 MVP로 선정되며 두각을 나타냈다. 1m78, 76kg의 탄탄한 체격을 갖춘 그는 1994년 건국대 1학년때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에 이어 99하계유니버시아드 단-복식을 석권했다
1998년 만도기계 노사분쟁에서 최루탄 마지막 사용, 정부 ‘최루탄 무사용’ 선언
1998년 태고종 종정 보성 스님 열반
불교 태고종 제15세 종정 보성 스님이 1998년 9월 3일 봉원사에서 열반했다. 세수 92세, 법랍 79세였다.
1906년 함경남도 이원 태생인 스님은 13세 나이에 출가, 1933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박한영 대종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동국대총장 역임후 1979년 종정에 취임 했으며 1923년 건봉사에서 안거를 시작한 이래 20안거를 실천하였다
치악산 보림사에서 주석해오던 스님은 며칠 전 열반을 예견한 듯 신촌 봉원사로 주석처를 옮겨, 종단 간부들과 제자들을 불러 다시 승단 화합과 불교발전을 당부하는 유훈을 남겼다.
1998년 5대그룹, 8개업종 구조조정안에 최종합의
1998년 스위스 항공기 추락 탑승객 전원사망(229명)
1997년 베트남기 프놈펜에서 추락, 한국인 21명 포함 탑승객 65명 사망
베트남 호치민 공항을 출발한 베트남 항공 815편 여객기가 1997년 9월 3일 오후2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프놈펜 시내에서 약 10km 떨어진 포첸통 국제공항에 착륙하려다 실패한 뒤 2차 착륙을 시도하던 중 활주로 남쪽 1km 지점의 논바닥에 추락했다. 여객기는 추락과 함께 기체 대부분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한시간 동안 불길에 휩싸였고 꼬리부분만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고 여객기는 80석 규모의 러시아제 투폴레프(TU) 134기로 탑승객은 한국인 21명을 포함한 승객 60명과 승무원 6명 등 66명이었으나 태국 어린이 한명을 제외한 65명이 모두 사망했다.
이번 사고는 여객기가 기상악화로 활주로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착륙 시도를 강행하다 사고가 난 것으로 밝혀졌고 추락지점이 논바닥이어서 거의 맨땅 같은 곳에 떨어지는 바람에 피해가 컸다.
1996년 박재홍 선수,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30(홈런)-30(도루)` 달성
현대 유니콘스의 박재홍 선수가 국내 프로야구 15년사상 첫 `30-30` 고지에 등정했다. 박재홍은 1996년 9월 3일 잠실 LG전에서 1-1동점이던 3회초 1사 1-3루서 김용수의 초구 130km 슬라이더를 그대로 좌측펜스로 넘겨 대망의 기록을 달성했다.
96시즌 계약금 4억3천만원, 연봉 2천만원으로 신인야수중 최고금액을 받고 입단한 박재홍은 시즌 개막후 3일 뒤인 4월 16일 한화전서 첫 홈런을 날린뒤 4개월여 만에 대기록을 달성했다. 박재홍은 이후 1998년과 2000년에도 `30-30`을 달성했다. `30-30`은 우리보다 수준높은 미국, 일본에서도 나오기 힘든 기록 역사가 깊고 한 시즌에 162경기를 치르는 미국에서는 총 25차례, 일본에선 10차례 작성됐다. `40-40`은 미-일야구 통틀어 호세 칸세코(42홈런 40도루)가 유일하다.
1995년 원로배우 석금성 여사 별세
`토월회`의 유일한 생존자인 석금성씨가 1995년 9월 3일 별세했다. 석씨는 우리 연극 영화의 태동과 발전을 한 눈에 굽어보았던 원로배우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진명여고를 졸업한 석씨는 1925년 토월회에 입단. 무대인생을 시작했다. 1937년 무성영화 `심청전`으로 영화계에 데뷔 `춘향전` `단종애사` `장화홍련전` 등 2백여편의 작품에 주로 악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미수(88세)를 앞두고도 SBS드라마 `분례기` 등에 출연하는 등 영원한 배우로서 남고자 했다.
배우로서 성공한 그였지만 무대 밖 인생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20세 때 경성방송국 아나운서이며 무용가 최승희의 친오빠인 최승일과 결혼, 맏딸 로사 등 4남매를 두었지만 남편과 자녀들은 광복 뒤 월북, 그는 이후 50년 가까이 홀로 살아왔다. 1991년 시인이 된 딸 로사와 무용가로 성장한 막내아들 호섭과 극적으로 서신이 닿아 자녀와의 상봉을 손꼽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말년에는 생활고를 겪으며 서울시 남영동 여관을 전전하다가 1991년 드라마 `분례기` 출연으로 알게된 아역배우 홍보경양의 부친 홍무씨의 집에서 지난 4년 동안 함께 살아왔다.
1993년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유명우, 현역에서 은퇴
1989년 쿠바 여객기 악천후 속 마르티 공항 이륙직후 추락 사망 150명
1988년 북한 및 공산권자료 공개
1988년 북한 서울올림픽 불참 확정
1988년 지학순 주교 등 2백여 명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발기창립대회
1984년 온 나라 큰 비 서울 망원동 풍납동 침수 사망·실종 190명
1981년 남부지방 큰 비 사망·실종 89명 가옥 4천동 파괴
1980년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협상 재개 합의
1978년 신현확 보사부장관 한국각료로서 첫 소련 입국, WHO회의 참석
1978년 요한 바오로1세 교황에 즉위
1977년 왕정치 756홈런으로 세계신기록 수립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 대 야쿠르트 스왈로즈전이 벌어지고 있던 1977년 9월 3일 일본 도쿄 고라쿠엔구장. 요미우리 공격인 3회말 1사후 5만여 관중의 박수 속에 37세의 왕정치가 등장했다.
그는 볼카운트 2-3에서 야쿠르트 선발 스즈키의 제6구를 강타, 오른쪽 스탠드 중단에 꽂히는 라이너성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시즌 40호이자 생애 통산 756호. 미국 행크 아론이 세운 홈런 세계기록 755호를 경신하는 순간이었다.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친 통산 868호 홈런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1976년 미국 바이킹2호 화성에 연착륙
1975년 부안, 고창지역 무장공비사건
1974년 원신희, 아시안게임 역도 3관왕
1974년에 열린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중국과 북한이 처음 참가해 체제경쟁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메달경쟁이 어느때보다 뜨거웠다.
한국은 대회개막 사흘이 지나도록 금메달 한 개가 없어 남북간 첫 스포츠경쟁에서 패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이 중압감을 일거에 날려보낸 선수가 역도의 원신희(元信喜)였다. 그는 선수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때까지 13년간 한국신기록을 30여차례나 갈아치운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力士)였다.
9월3일, 라이트급에 출전한 원신희는 인상에서 130kg, 용상에서 165kg을 들어올리며 순식간에 2개의 금메달을 거머쥐더니 토탈점수에서도 295kg을 기록, 또 다시 금메달을 추가해 한국인으로서는 아시안게임 출전사상 첫 3관왕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쾌거는 금메달 한 개차로 북한을 제치고 종합 4위를 달성하는 기폭제가 됐다.
1971년 카타르,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1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베를린 협정 조인
미·영·불·소 4개국이 1971년 9월 3일 베를린에서 지난 23년간 유럽의 냉전을 마무리하고 협력과 화해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동서관계를 알리는 역사적인 베를린 협정에 조인했다. 서독주재 케네트 러쉬 미대사, 로저 재클링 영대사 및 장 사우바나르게스 불대사와 동독주재소련대사 표트르 아브라시모프는 이날 밤 8시57분 서베를린에 있는 전연합군관리위원회 건물회의실에서 프랑스대사 주재하에 제34차 4대국 대사회담을 열고 베를린 협정 본문서와 그 부속문서에 조인했다.
이 협정의 주요골자는 서방측이 독립된 서베를린에 방해 없이 왕래할 수 있는 보장을 받고 서베를린 시민들이 베를린장벽을 통과하여 동베를린과 동독을 방문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한편 서베를린과 서독간의 정치적 유대관계를 인정받는데 있었다. 반면, 소련은 서베를린시가 서독연방의 일부가 되는 것을 막고 서독인들이 서베를린시에서 벌이는 정치적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한편 서베를린에 소련영사관을 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됐다.
1969년 호지명 베트남 초대 대통령 사망
초대 베트남 민주공화국 대통령 호지명이 1969년 9월 3일 재임 중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1890년 중부 베트남의 게친주에서 태어난 호지명은 21세 때인 1911년, 견습요리사로서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 땅을 처음 밟았다.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 당원으로 프랑스에서 식민지 해방운동을 시작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 ‘베트남 인민의 8개 항목 요구’를 제출한 일화로 유명하다.
1921년 프랑스 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고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참석, 동방부 상임위원이 되었으며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립했다. 1941년 베트남에 잠입, 베트민(월맹-베트남 독립동맹회)을 결성했고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총봉기를 지도하여 구엔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주석으로 취임했다.
1967년 월남 대통령선거에서 웬반티우 당선
1963년 자민당 창당 (위원장 김준연, 송요찬, 김재춘 등 참여)
1962년 소련 스탈린파 재숙청 개시
1960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발기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민주민족청년동맹 천도교 등 혁신계 정당 단체 참가, 민자통은 9월 30일부터 자주 평화 민주의 3대 원칙 아래 남북통일 실현을 위한 국민운동 전개를 결의하고 실현방안으로 즉각적인 남북정치협상·남북민족대표에 의한 민족통일 건국최고위원회 구성·외세배격·통일 후 오스트리아 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 주장
1959년 서울 당인리 화력발전소 발전 개시
1954년 중공군, 금문-마조도에 포격
1952년 미국 B29 폭격기 편대 청진(淸津)발전소 폭격
1952년 뇌염으로 학교, 극장 등 폐쇄
1952년 중국 지린성 옌벤에 조선족자치구 설립, 1955년 12월 자치주로 승격
1952년 9월 3일 중국 지린 성[吉林省] 동남부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다.
연변지역은 조선시대말부터 조선족이 개척해 정착한 곳으로,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8월 20일 소련군과 동북항일연군은 간도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중국공산당은 간도 임시정부를 해산시키고 '연변행정독찰 전원공사'를 설치했다.
이후 이 지역은 1948년 3월 '연변전구'로,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구'로 바뀌었다.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되어 중국 내 유일한 조선족자치주가 되었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 일본재무장불가 담화
1950년 유엔군 낙동강 교두보에서 반격 개시
1949년 엘살바도르 한국을 정식 승인
1948년 미군정, 경찰권 이양
1947년 한국방송 호출부호 `HL`로 할당
1947년 보선(普選)법 공포
1943년 연합군, 이탈리아에 상륙
1943년 이탈리아, 항복문서 조인(8일 연합국 발표)
1941년 연극배우 추송웅 출생
1941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독가스 처형 시작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제11블록 지하실에서 소련군 포로 600명과 유태인 250명이 독가스에 의해 처형됐다. 이것은 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최초의 독가스 처형으로 이후의 유태인 대량학살에 대비한 실험적인 성격을 갖는다.
1941년 9월 3일 독가스 처형에 앞서 9월 1일, 나치스 당국은 6세이상의 유태인에 대해 이른바 ‘다비드의 별’을 달지 않고는 공공장소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경찰령을 발표했다. 독가스 처형은 밀실 징벌구금실에서 행해졌다. 처형은 통상 1회에 약 2000명씩을 대상으로 했다.
유태인들은 마이다네크, 베르겐-벨젠, 다하우, 웨스터보르크, 푸아쇼프 등 수 십 군데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수백 만에 이르는 유태인들이 굶어서, 맞아서, 찔려서, 병에 걸려, 가스실에서, 생체실험으로 죽어갔다.
나치는 비행사들이 입을 비행복을 개발하기 위해 유태인들을 얼음물에 집어넣었고, 인간이 기압에 어느 정도 견디는지를 실험하기 위해 고압실에 넣어 코피가 터지고 뇌가 부서지면서 죽게 했으며, 온수(溫水) 목욕을 시켜준다고 목욕탕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샤워기에 독가스를 분사하여 유태인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손가락 끝이 문드러지도록 출입문을 긁어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치에 의해 몇 명의 유태인이 죽었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2차 대전 전․후 유럽 각국의 유태인 숫자를 파악한 결과 희생자는 약 6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330만에 이르던 유태인중 90%가 학살되어 30만 명만 남았고, 헝가리에서도 80만 명중 60만 명을 화물기차에 짐짝처럼 실어와 모두 가스실 앞에 내려놓았다.
독일에서는 20만 명, 루마니아에서는 28만 명, 네덜란드에서는 10만 명의 유태인이 나치의 총칼에 죽었다.
이밖에도 프랑스, 소련,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에서 유태인들을 끌고 가 이러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1940년 미국, 영국 방위협정 조인
1939년 호주-이집트, 대(對)독일 선전포고
1939년 영·프, 獨에 선전포고…2차대전 발발
히틀러가 군비확장에 힘을 쏟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내심 불안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오스트리아를 합병(1938년 3월)할 때는 모르쇠였고 체코의 일부 지역을 점령(1938년9월)할 때는 전쟁회피를 위해 오히려 거들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 히틀러는 외교적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39년 여름까지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거나 친선서약을 맺어 혹시모를 배후의 위험을 제거했다. 무엇보다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8월23일)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때 독ㆍ소 양국은 폴란드를 양분한다는 비밀의정서까지 체결해 1개월 후에는 폴란드를 반토막내며 서로의 이익을 챙겼다.
1939년 9월1일, 마침내 히틀러의 야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격전(電擊戰ㆍblitzkrieg)으로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다. 미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고 영국ㆍ프랑스도 쉽게 전쟁에 뛰어들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9월3일, 영국과 프랑스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유럽은 21년 만에 다시 죽음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몰렸다. 개전초기 영국은 독일의 군항을 폭격하고 프랑스는 서부국경의 요새를 공격했지만 더이상의 적극적인 참전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전투다운 전투없이 소강상태가 계속되자 한때는 ‘가짜 전쟁’이라고도 불렸지만 수년내 1700만명이 전사하고 2500만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20세기판 살육대전으로 발전했다.
1928년 플레밍, 페니실린 발견
1928년 9월 영국 런던대학 세인트 매리 실험실. 유행성 독감을 연구하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는 세균 배양 접시에서 특이한 곰팡이를 발견했다.
다른 박테리아를 다 죽인 채 혼자 남은 이 푸른 곰팡이균은 이후 페니실리움 노타툼으로 명명됐다. "수 천가지 곰팡이와 세균 중 푸른 곰팡이를 찾아낸 것은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플레밍 박사는 회고했다.
탁월한 항생제인 페니실린은 1940년 치료용 주사제로 만들어져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십만 군인들의 목숨을 건졌다. 플레밍 박사는 페니실린 농축과 정제에 성공한 옥스퍼드 대학의 피오리, 체인 두사람과 함께 인류의 질병치료에 공헌한 업적으로 1945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페니실린 등 현대 의약학의 발전으로 세균이나 바이러스 감염증은 상당 지역에서 잊혀진 질병이 되어가고 있다. 20세기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독감, 기관지염, 급성폐렴 등 일단 걸리면 사형선고나 다름없던 호흡기 감염증은 대폭 줄어들었다. 금세기 초 50세에 불과했던 인류의 평균 수명이 최근 80세 안팎까지 높아진 것도 페니실린을 필두로 한 항생제와 각종 예방백신 개발의 기여가 컸다.
1923년 박열, 일왕 암살음모로 피검
1923년 9월 3일 박열이 일왕을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견돼 체포됐다. 박열은 경북 문경출신으로 1919년 일본에 건너가 무정부주의운동에 뛰어들었고 1921년 사회주의 비밀결사 흑도회를 조직했다.
1922년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1923년 일본인 애인이자 동지인 가네코와 함께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실행하려다 체포되어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은 후 같은해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가네코는 그해 7월 옥중에서 자살했고, 박열은 1945년 해방과 함께 22년 2개월만에 석방되어 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재일거류민단 단장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귀국, 1950년 6.25전쟁때 납북되어 1974년 북한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이 있다.
1914년 한말의 개화사상가 유길준 사망
1912년 마포에 경성감옥 설치, 종전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개칭
1896년 호구조사규칙 반포
1883년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 사망
“9월 중순의 어느 가을날, 나는 자작나무숲속에 앉아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가랑비가 조금씩 오고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이따금씩 따스한 햇살도 비추는, 그런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하늘 전면이 떠다니는 하얀 구름으로 덮이는가 했더니, 갑자기 아주 잠깐 동안에 군데군데 구름이 흩어져 밀려난 그 뒤에서 아름다운 눈동자 같이 맑디맑은 온화한 하늘이 나타난다. 바로 머리 위에서 나뭇잎이 가냘프게 한들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듣기만 해도 계절을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즐겁고 소곤소곤 웃는 봄의 몸부림도 아니고, 여름의 부드러운 속삭임이나 긴 대화도 아니며, 늦가을의 초조하고 추워하는 투덜거림도 아니고,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정도의 졸음 섞인 재잘거림이었다.”-『사냥꾼의 일기』(29세부터 이 글 쓰기 시작, 4년 만에 전25편(당시 22편) 완성, 훗날 알렉산드르 2세가 이 작품을 보고 농노해방의 결의 굳힘)
뚜르게네프는 독일 프랑스 등을 전전하면서 매년 조국 러시아에 들렀는데, 친구에게 “고향에 안부를 전해 달라.”는 편지가 마지막. 편지를 많이 써서 1960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완결된 그의 소련판 전집28권 중 13권이 편지
1879(조선 고종 16) 콜레라 만연 부산항 무역중지
1878년 영국 앨리스공주호 템스 강 침몰 사망 700명
1877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창시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티에르 사망
1875년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공학자 포르셰 출생
1868년 일본, 강호(江戶)를 동경(東京)으로 개칭
1859년 프랑스 정치가 장 조레스 출생
1856년 미국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설리번 출생
1832년 현대신문의 효시「The Sun 」미국에서 창간
1783년 영국, 파리조약으로 미국 독립을 승인
1783년 9월 3일 미국독립전쟁의 결과로 미국과 영국 사이에 파리 평화조약이 조인 되었다.
1763년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낸 영국은 식민지 주민들을 억압하는 갖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식민지 주민들은 대륙회의를 구성해 영국의 조치에 대항했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식민지 주둔군을 늘리자 1775년 봄 전투가 벌어졌다.
대륙회의는 군대를 모집하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새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연합헌장을 제정했다.
내전 형식으로 시작된 전쟁은 1778년에 프랑스, 1779년에 스페인, 1780년에 네덜란드까지 식민지측에 가담함으로써 국제전으로 번졌다.
1781년 10월 19일 영국은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전투를 끝으로 항복했으며, 그 결과 1782년 미․영 예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예비조약은 이듬해 9월 3일 조인된 파리 평화조약에 포함되었다.
파리 평화조약으로 같은 해 11월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미국의 국경은 서쪽으로 미시시피 강까지 확대되었다.
1658년 국왕 찰스 1세 처형하고 공화정 수립한 영국 정치가 크롬웰 사망
세계 열강으로서 영국의 입지를 확립시킨 정치가 올리버 크롬웰이 1658년 9월 3일 사망했다. 1642년 국왕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의 무력 항쟁인 영국내란이 시작되자 의회 진영의 유력한 장군으로 찰스 1세에 맞섰다. 1648년 국왕이 스코틀랜드와 밀약을 맺어 제2차 내전이 일어나자, 국왕군을 무찌르고 스튜어트 왕가를 전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1653-1658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포괄한 공화국의 호국경을 지내며, 왕의 지위는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권력을 누렸다. 죽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고 장례도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찰스 2세의 즉위로 왕정이 복고되면서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죄수들이 처형되던 타이번에 내걸렸다.
1596년 이탈리아 현악기 제작자 니콜로 아마티 태어남
1574(조선 선조 7) 임진왜란 중 진주 남강에서 왜장 케야무라와 함께 빠져 죽은 논개 태어남
931년 일본의 59대 천황(887-897) 우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