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 오늘의 역사 2019년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13세 미만 어린이의 개인정보 불법수집한 유튜브에 1억7천만$(약 2050억원) 벌금 부과 2019년 홍콩정부, 반대시위 3개월 만에 범죄인인도조례(송환법) 공식 철회 발표 2018년 태풍 제비 일본 상륙, 11명 사망, 재산피해 4조원 2013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 국회가결, 국정원 구인영장 집행 2009년 나토군,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에 공습 2009년 9월 4일 오전 2시쯤,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쿤두즈주(州)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소속 독일군 전술운용센터. 게오르기 클라인(Klein) 독일군 사령관은 미군 F-15E 전투기가 보내오는 비디오 화면을 보고 있었다. 전날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집단인 탈레반에 탈취된 2대의 유조차량 주변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화면이었다. 무장(武裝)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현장의 아프가니스탄인 제보자는 독일군 센터의 정보장교에게 "모두 탈레반 반군"이라고 강조했다. 오전 2시30분 클라인 사령관은 이 말에 따라, 현장의 F-15E 전투기에 500파운드의 위성유도폭탄 투여를 명령했다. 결국 유조차량 주변에 있던 최대 125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나토 진상조사팀의 5일 실사(實査) 결과, 사망자 속에는 20명이 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단 한 건의 제보에 의존해, 수십 명의 민간인이 공습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번 공습으로 가뜩이나 막대한 민간인 피해로 공격을 받는, 미군과 다국적군의 아프가니스탄 치안지원군(ISAF) 활동이 비판 대상에 올랐다. 2009년 김상택 전 중앙일보 화백 별세 김상택(55) 전 중앙일보 화백이 2009년 9월 14일 오후 6시10분 별세했다.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1977년 상지전문대 미술과를 졸업한 뒤 1988년부터 경향신문에 '김상택 만평'을 게재했다. 1999년 중앙일보로 옮긴 김 화백은 2007년 위암수술을 받고 1년간 연재를 중단하기도 했다. 김 화백은 1995년 한국언론학회 언론상, 1996년 관훈언론상, 2001년 서울언론인클럽 언론상 등을 받았으며, 작품집으로는 '김상택 만화세상', '10센티 정치' 등이 있다. 2007년 파키스탄 국방부 출근버스 노린 연쇄폭탄테러 사망 24명 2001년 이용호 게이트 공개 검찰이 2001년 9월 4일 부실기업 구조조정 자금 450억여원을 횡령하고 주가조작으로 150여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G&G그룹의 이용호(43) 회장을 구속하였다. `이용호 게이트`는 2000년 5월 서울지검 특수2부의 `이용호 봐주기 의혹`에서 출발, 검찰 간부들의 비호설, 조직폭력배 출신 사업가 여운환씨의 로비스트 활용설, `이용호 리스트`와 관련한 정·관계 직접 로비설, 이권사업 확장 과정에서의 금융권의 비호설, 국정원 간부의 비호설 등 각종 의혹이 혼재된 사건으로, 이씨가 불과 3년여 만에 1000억원대의 거부로 성장한 배경에는 지연·학연 등으로 얽힌 폭넓은 정·관계 인맥의 조직적인 비호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었다. 검찰은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특별감찰본부(특감)를 설치하고 조사에 착수했지만, 발표된 수사결과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켜주지 못해 다시한번 국민과 검찰간의 불신의 골만 깊게하는 결과를 낳았다. 검찰조사와 국회 국정감사를 통해 이씨가 신승남 검찰총장의 동생을 계열사 사장으로 영입하고, 임휘윤 부산고검장, 김영재 금감원 부원장보의 친척을 취직시켜주고, 이씨가 민주당 박병윤 의원에게 2000만원의 정치후원금을 제공해 준 사실이 밝혀졌지만, 검찰은 이를 입증하지 못한 채 단지 문제가 됐던 고위직 검사 3명에 대해서만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2000년 동아시아 여성포럼, 대만에서 개막 동아시아 8개국 비정부기구(NGO) 여성단체들이 모이는 `제4차 동아시아 여성포럼`이 2000년 9월 4일 대만 타이베이시에서 `새로운 세기-새로운 여성`을 주제로 7일까지 나흘간 열렸다. 대회에는 주최국 대만을 비롯, 한국-일본-홍콩-몽골-러시아에서 300여명이 참석했다. 중국은 대만을 자국 영토로 표기하지 않는 데 항의해 불참했다. 4일 개막식에 이어 5일부터 1.여성과 개발 2.여성과 인권 3.여성의 정치참여 4.여성과 교육 5.여성과 건강 6.여성과 문화 7.여성과 환경 8.청년포럼 등 8개의 이슈를 다루는 워크숍이 열렸다. `동아시아 여성포럼`은 동아시아 8개국 여성 NGO들이 2년마다 모여 여성지위 향상을 논의하는 대회로 1993년 `북경 세계여성대회`(1995년 개최) 준비과정에서 만들어졌으며, 한국-중국-일본-대만-홍콩-몽골-러시아-마카오가 회원국이다. 2000년 한국-몽골 환경협력약정 체결 1999년 동티모르 주민투표 결과 78.5%가 독립에 찬성 1999년 무궁화 3호, 케이프 커네버럴에서 발사 한국통신은 무궁화 위성 3호가 남미 기아나의 쿠루 발사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고 말했다. 무궁화 3호 위성은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상승해 오는 10월 중순께부터는 목표 지점인 동경 116도에 안착, 약 12년간 통신방송 위성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궁화 3호 위성은 통신용 중계기를 탑재하고 있어 내년부터 초고속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제공하며 6개의 방송용 중계기로는 약 48개 채널의 디지털 위성방송을 송신하게 된다. 또한 무궁화 3호 위성은 한반도 지역에 국한된 1,2호 위성과 달리 가변빔 안테나를 이용, 동남아, 호주지역까지 서비스가 가능해 외국의 위성방송 사업자에 대응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된다. 1995년 북경 세계여성회의 개막 제4차 북경 세계여성회의가 1995년 9월 4일 평등, 발전, 평화를 주제로 개막되어 21세기에서 여성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북경 중심가 북쪽의 국제회의센터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명예단장 손명순 여사와 김장숙 정무제2장관 등 50여명의 우리 정부 대표단을 비롯, 1백85개 가입국 가운데 소말리아, 유고슬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도미니카 등 7개국을 제외한 1백78개국 정부대표들과 각종 유엔 산하기구 대표 1만여명이 참석했다. 꼭 20년 전인 1975년 멕시코 시티에서 열렸던 1차 세계여성회의 GO 회의 참가자가 2천여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무려 다섯배에 이르는 수적 팽창이다. 이번 회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제 권한의 강화에 초점이 주어진 것. 여성들이 정치, 경제면에서 실제 권한을 가져야한다는 것이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했다. 이번 대회의 또 다른 특징은 성과 임신 출산에 대한 여성들의 건강 결정권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점. 여성이 자신의 성생활과 자녀수 결정에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바티칸과 회교권 국가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1994년 태권도,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한국 태권도가 마침내 2000년 시드니 하계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등장했다. 우리말 “차렷” “겨루기” 구령에 따라 흰 빛 태권도 도복을 입은 외국선수들이 태극기에 경례를 하며 세계 60억 인구가 지켜보는 올림픽 무대에서 한국의 고유 무도로 메달을 겨루는 시대가 온 것이다. 3일 IOC 임시 집행위원회를 통과하기까지 한국 태권도는 험난한 30년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61년 태수도란 이름으로 창립된 협회는 65년 대한태권도협회란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72년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영동 벌판에 국기원을 설립하면서 비로소 세계 진출을 꾀하게 됐고 73년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19개국 2백여명이 출전한 가운데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한국 태권도는 아프리카 및 유럽-미주지역에 사범들을 파견하며 세를 확장시켰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린지 8년 후 국제올림픽위원회는 태권도를 승인종목(recognized sports)으로 인정했다. 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임시 집행위원회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을 포함한 11명의 위원들은 한국의 태권도를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4일부터 벌어지는 총회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한편,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키로 한 국제올림픽위원회 집행위원회의 소식이 전해진 3일 밤. 태권도인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에서 일반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벅찬 감격과 “금메달밭이 열렸다”는 흥분, 그리고 기대감으로 환호했다. 시민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무예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고 이에 따라 한국어가 국제어로 도약하는데 대해 자긍심을 감추지 못했다. 1994년 일본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 개항 1994년 9월 4일 개항한 간사이국제공항은 일본이 21세기를 대비해 세계로 가는 일본의 새 관문으로 조성한 최첨단 공항이다. 일본공항 최초로 24시간 운영체제를 갖추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거점공항을 지향하고 있다. 오사카 동남쪽 5Km 해상에 건설된 공항은 도로와 철도 선박 등 모든 교통수단과 연결돼 있다. 육지를 잇는 길이 3.75Km의 연육교는 상단은 왕복 6차선도로, 하단은 복선 철도가 배치돼 있다. 특히 국내선과 국제선이 같은 청사를 사용함으로써 연결탑승이 쉽다. 그러나 간사이공항은 바다를 매립했기 때문에 사용료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공항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다. 간사이공항이 제1의 경쟁상대로 꼽는 곳은 우리나라의 인천국제공항이다. 1991년 소련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발트3국 독립 승인 1990년 한국-잠비아 국교 수립 1990년 강영훈 총리 - 연형묵 북한총리, 서울서 남북한 첫 총리회담 1990년 9월 4일 남북고위급 제1차 회담이 서울에서 열려 7일까지 계속되었다. 1989년 2월 8일부터 여러 차례의 예비회담과 실무대표 접촉을 가진 끝에 성사된 본회담이었다. 1991년 12월까지 모두 5차례의 본회담이 열렸다. 제1차 회담에서 남한은 8개항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안, 10개항의 '다각적인 교류협력 실시방안', 8개항의 '정치적·군사적 신뢰 구축방안'을 비롯해 남북한 군비감축을 위한 5개항의 방안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7·4남북공동성명의 '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남북한간 정치적·군사적 대결상태의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면서 6개항의 정치적 대결상태 해소 방안과 9개항의 군사적 대결상태 해소 방안을 제시했다. 제1차 회담은 다각적인 교류와 정치적·군사적 문제해결의 병행을 제시한 남한측 주장과 먼저 정치적·군사적 문제를 해결하고 그 기초하에 다각적으로 교류하자는 북한측 주장이 맞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상대측의 입장만을 확인하는 선에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제5차 회담에서는 남과 북이 한 걸음씩 양보해 서문과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협력, 수정 및 발효 등의 4장 25조로 구성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합의가 이루어졌다. 남북고위급회담의 개최는 한반도 문제가 비로소 남북한의 책임 있는 당국자간에 공개적·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989년 추리소설작가 조르주 심농 사망 20세기 최고의 인기 추리소설작가 중 한 사람인 조르주 심농이 4일 스위스 로잔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 조르주 심농은 벨기에 리에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열여섯의 나이로 ‘가제트 드 리에주’지의 기자가 된다. 이 신문사에서 1922년까지 일하는 틈틈이 쓴 첫 소설 ‘아르슈 다리에서(Au pont des Arches)’가 조르주 심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다. 그는 1922년 파리 북역에 발을 디딘 후 20여 개의 필명으로 대중소설들을 써내며 작가적 입지를 굳혀 나간다. 심농은 처음으로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여 1931년에만 ‘수상한 라트비아인’, ‘갈레 씨 홀로 죽다’와 ‘생폴리앵에 지다’,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 등 10편 이상의 매그레 시리즈를 펴내며, 이 작품들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총 103편(장편 75편, 단편 28편)의 이야기에 등장하여 독특한 심리 게임으로 사건을 풀어 가는 매그레 반장은 셜록 홈스, 아르센 뤼팽과 더불어 추리 문학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주인공으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1932년에는 심농 작품 가운데 ‘교차로의 밤(La Nuit du carrefour)’이 장 르누아르에 의해 최초로 영화화되었다 1985년 북한 허담, 비밀리에 서울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과 비밀 회동 북한 노동당 중앙위 비서 허담이 1985년 9월 4일부터 6일까지 김일성의 친서를 들고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허담을 수행한 인물은 한시해, 최봉춘, 안병수, 여규채 등 4명이었다. 이들이 묵은 숙소는 외부인의 시선에 잘 노출되지 않은 쉐라톤 워커힐 호텔 빌라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5일 오전11시 경기도 기흥에 있는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별장에서 허담 일행을 맞아 밀담을 나눴다. 이 별장을 청와대의 별장인 양 `영춘재`라고 소개했다. 비밀접촉장소를 최회장의 별장으로 정한 것은 우선 보안상의 이유였고 또하나는 이들 북한밀사에게 경부고속도로를 보여주려는데 있었다. 이날 회담은 박철언 당시 안기부장 특보가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북한의 한시해와 3번의 비밀회담 결과 합의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1984년 동독 호네커 수상 서독방문 취소 발표 1982년 27회 세계야구대회 서울 개막 - 한국 우승 1981년 델라마르 레바논주재 프랑스대사 베이루트서 피살 1981년 태풍 애그니스 사망·실종 736명 재산피해 920억원 장흥 655mm 1981년 상공부, 제5차 5개년 상공부문 계획 발표 1981년 부마고속도로 개통 1981년 9월4일, 부산∼마산을 잇는 길이 43.5km의 부마고속도로가 착공 3년4개월 만에 개통됐다. 이로써 마산은 대구∼마산을 잇는 구마고속도로(1977년 12월)에 이어 두번째 고속도로 기착지를 갖게 됐다. 마산에서 냉정 인터체인지까지는 기존 2차선 남해고속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고, 냉정에서 부산 사상까지는 20.6km에 이르는 4차선을 새로 건설했다. 이날 개통으로 그동안 과밀현상을 보였던 남해고속도로의 차량이 이곳으로 분산처리되고 부산항과 마산ㆍ창원 공업단지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물동량을 신속히 수송할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콘크리트 포장도로이며, 중앙분리대를 콘크리트벽으로 가설해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과의 충돌을 방지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1980년 북한 휴전선 11개 지역에서 대남비방방송 재개 1980년 보사부 전국의 호화묘지 모두 정리키로 결정 발표 1978년 인도 최악의 대홍수 계절풍의 영향으로 해마다 겪는 인도의 홍수 ! 1978년 9월4일 인도를 휩쓴 홍수는 20세기 들어 최대규모였다. 홍수로 실종되거나 사망한 사람은 3천여명 ! 이재민도 2백만명을 넘었다. 이재민 5천여명이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적십자사등 구호의 손길도 엄청난 피해 앞에서는 한계를 느낀 홍수였습니다. 1975년 이스라엘-이집트, 2차 시나이협정 조인 1974년 미국-동독, 워싱턴서 대사급 수교 조인 1972년 일본-중공, 해저케이블 설치에 합의 1972년 전국의 거목 노목 진귀목 영구보호수로 지정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대통령으로 선출 1970년 태풍 빌리 강타 인명피해 53명 재산피해 60억 2,500만원 1965년 슈바이처 사망 1965년 9월 4일 ‘20세기의 성자’ ‘최고의 휴머니스트’ ‘인류애의 화신’ 등으로 불려진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사망했다. 독일인으로 태어났으나, 고향 알자스 카이제르스부르크가 1차 대전 후 프랑스령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프랑스인이 되었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목사와 대학강사로, 그리고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질을 보인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로 활약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슈바이처는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모교 의학부의 청강생으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1913년 의학박사 취득후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현재의 가봉공화국)로 건너가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인이라 하여 포로의 몸으로 본국에 송환되었고 그의 병원도 폐쇄되었으나 아프리카 생활을 회상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1921)가 출판되자 그는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슈바이처는 의사이기 이전에 칸트 연구가였고 신학자였으며 바흐연주자이자 탁월한 오르간 연주자였다. 1906년에 발표한 신학저서 ‘라이마루스에서 부레데까지’는 예수 전기 연구사의 결정판으로 그를 세계적인 신학자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생전에 괴테상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슈바이처는 정치적인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1950년대 이후의 말년에는 견해 표명을 자주 했다. 오슬로에서 행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제목은 `현대세계에 있어서의 평화의 문제`였다. 그는 또 1957년 버트런드 러셀, 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는 핵실험 반대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1964년 정부, 언론보복조치 철회 1964년에 제정된 ‘언론윤리위원회법’은 겉으로는 언론의 자율규제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관제(官製) 윤리위원회를 발족시켜 언론자유를 침해하려 한 대표적인 악법이었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8월2일)하고 공포(8월5일)되자, 분노한 전(全) 언론인들이 들고 일어섰다. 언론인들이 투쟁 강도를 높여가자 정부는 언론사 발행인을 직접 겨냥, 사주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이때문에 다수 언론사들이 투쟁대열에서 이탈했다. 8월28일. 이날은 각 언론사 대표가 신문발행인협회에 나가 윤리위 소집에 대한 찬반입장을 밝히는 날이었다. 정부의 압력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조선일보ㆍ동아일보ㆍ대구매일 등 5개사만 반대하고 나머지 21개사는 그새 찬성으로 돌아섰다. 정부는 이들 5개 언론사에 보복적 탄압을 가해 정부기관은 5개사 신문을 구독하지 못하도록 하고 은행은 융자회수를 무기로 압력을 행사했다. 심지어는 취재기자의 야간통행증까지 회수해갔다. 그러나 함석헌ㆍ장준하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까지 나서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결국 박대통령은 9월4일, 언론보복조치를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법 시행도 곧 보류돼 언론계를 뜨겁게 달궜던 언론윤리위법 파동도 막을 내렸다. 1964년 자유언론수호 국민대회 발기준비회의, 범국민운동 전개방침 결정 1962년 증권시장 개장 1953년 딘 소장 포로교환으로 귀환 1953년 9월4일 포로교환이 이뤄진 판문점 오전 11시반 나이 지긋한 미군 포로 한명이 판문점에 도착합니다. 유일한 장성 포로였던 미 제24사 사단장 월리엄 딘 소장 신사복에 운동화를 신고 중공군 모자를 쓴 53살의 딘 소장. 2개의 별이 빛나는 미군모를 받아 씁니다. 한국전 초기였던 1950년 7월 20일 대전 전투에서 포로가 된지 3년만의 석방입니다. 선두에서 로켓포를 메고 싸우다 포위돼 혼자 산속을 헤매다가 34일만인 8월 24일 공산군의 포로가 됩니다. 딘 소장은 평양 등에서 1주일동안 가혹한 고문을 받기도 합니다. 월리엄 딘 소장은 판문점에서 석방되자 동료들과 꿈같은 재회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1951년 유엔군 한국전쟁에 소련군 참가 발표 1950년 여자의용군교육대(여군학교 전신) 창설 1949년 소련, 동독 농지개혁 완료 발표 1944년 소련군 헝가리에 진입 1936년 마드리드에서 카바렐로를 수반으로 하는 인민전선정부 성립 1933년 쿠바 노동자 반란 1932년 오스트리아 빈서 세계평화회의 개막, 14개국 대표 80인 참가 1922년 독립운동가 이애라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탈출해 블라디보스톡에서 세상 떠남(28세) 1909년 간도협약 체결 간도(間島)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고조선ㆍ고구려ㆍ발해 때까지 우리의 영토였다가 오랫동안 미개척상태로 남아있던 간도가 우리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온 것은 1712년 청의 강희제가 조ㆍ청(朝ㆍ淸)간 경계를 분명히 할 것을 제의하면서였다. 이때 세워진 것이 ‘백두산 정계비’다. 이후 170여년간 잠복해있던 간도의 귀속문제는 1881년 청이 조선정부에 간도지역 조선인의 본국송환을 요구하면서 다시 표면화됐다. 흉년이 들어 조선 사람들이 대거 간도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양국 간 을유담판(1885)ㆍ정해담판(1887)을 열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조선정부는 간도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일제도 을사조약 후인 1907년에 ‘간도는 조선영토의 일부’라며 조선정부의 입장을 두둔하는 듯 했으나 사실은 2년뒤 간도를 높은 값에 팔기위한 술책이었다. 1909년 9월4일에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의 철도부설권과 탄광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챙기는 대가로 간도를 청에 넘겨준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100년이상 피땀흘려 개척했던 광대한 지역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우리 영토에서 사라져갔다. 1907년 노르웨이 민족음악파를 창시한 작곡가 그리그 사망 1904년 세브란스 병원 개원 1892년 프랑스 작곡가 밀로 출생 1890년 플라멩코 춤의 현대화에 기여한 스페인 무용가 라 아르헨티나 태어남 1882년 전기시대 개막 뉴욕에 처음으로 전등 켬 1882년 9월4일, 토머스 에디슨이 증기엔진의 스위치를 올렸다. 굉음과 함께 작동한 기계는 전기를 쏟아내 뉴욕 맨해튼의 가정으로 뿌렸다. 상업용 전기발전이 시작된 순간이다. 전기문명 시대를 연 이날의 전기를 받아 쓴 곳은 불과 59가구였지만 수요는 곧 크게 늘어났다. 그을음도 소리도 없이 밤새 일정한 빛을 내는 전등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디슨은 돈방석에 올랐을까. 반대로 돈만 까먹었다. 소비지 근처에 발전소를 세워야 하는 직류발전의 특성 탓이다. 2,300여개의 전등을 켜기 위해 에디슨은 중소형 발전소 85개를 지었다. 틈을 파고 든 것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발전 방식. 고압의 전류를 생산, 송전한 뒤 소비지역에서 변압기를 통해 전압을 낮춰 사용하는 교류발전은 장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석탄이나 용수 공급이 용이한 곳이면 어디든지 대형 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었다. 발전단가도 싸졌다. 에디슨은 경쟁에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사형용 전기의자가 등장한 것도 고압 교류전력의 위험을 부각시키려는 에디슨의 로비가 먹혔기 때문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살인집단’이라는 에디슨의 흑색선전에도 교류발전의 우수성이 부각되고 웨스팅하우스가 시카고 만국박람회(1893년 개최)의 전기공급권까지 따내자 에디슨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JP모건은행은 에디슨전기회사를 다른 회사와 합병해 대형 전기회사로 만들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체인 제너럴일렉스릭(GE)이 이렇게 탄생했다. GE의 주식 5%를 얻은 에디슨은 이때부터 전기사업에서 멀어졌으나 미국의 전력산업은 웨스팅하우스와 GE 간 경쟁과 협력을 통해 눈부시게 커나갔다. 현대 산업사회를 이끈 전력산업의 성장에는 창의력뿐 아니라 효율성과 시장선점을 위한 경쟁, 기업 간 협력이 깔려 있다. (권홍우 편집위원.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1870년 프랑스 제2제정(帝政) 폐지 1868(조선 고종 5) 창덕궁 선원전에 있는 역대 임금 영정 경복궁으로 옮김 1857년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 사망 1837년 모르스 전신기 발명 1789(조선 정조 13) 수원 읍치를 팔달산으로 옮김 1768년 프랑스 낭만주의문학 창시자 샤토브리앙(1768-1848) 태어남 1658(조선 효종 9) 대동법 시행한 김육 세상 떠남 대동법=현물로 내던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함. 지방특산물을 현물로 내면 납입 보관 운반에 어려움 많고, 방납(공물 대신 내주고 이익 붙여 받던 일)이 국가수입 축내고, 농민부담을 더해 주는 폐단 없애려 특산물 대신 쌀을 바치도록 함. 산간지방은 쌀 대신 돈이나 베로 받음 1460년 신숙주 여진 정벌 476년 서로마제국 최후의 황제 폐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