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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情談 스크랩 지난 세월(13) - 직업 훈련원
산적 주정필 추천 0 조회 81 15.12.19 20: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세월(13) - 직업 훈련원


( 이번 글에는 전산 전문 용어들이 많이 등장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가급적 전문 용어를

쓰지 않으려 하지만 어쩔수 없군요. 죄송~ )


아마도 내가 학원장이었어도 고개를 갸우뚱 했을꺼다.

과연 상대를 믿을수 있을까?

고작 6개월 경력의 무자격자에게?


일주일후에 연락을 주겠단다.

나는 떨어졌구나 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한대로 일주일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일주일동안 이력서를 받아 보았는데 아무도 오질 않았다나?

내일부터 출근할수 있냐고 한다.

나야 좋치~!


당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울수 있는 곳은 숭실 전산원 2년 과정이 유명했다.

서울 화곡동에 위치한 학원을 가보니 그곳 출신 여 강사 두명이 BASIC을 가르켰는데 초등학교 

상급학년이나 중학생들은 이미 1-2 년씩 배운터라 더이상 배울게 없었고 그래서 그 학원에서는 

좀 독특한 언어를 가르킬 강사를 찾았던 거다.




나는 혼자 공부한 스타일 대로 일단 BASIC의 기초적인 개념을 강의 했고 어려워 하는 부분들에

대해 예제와 FLOW CHART( 순서도 )로 설명하며 가르켰다. 그간 배웠던 방식과 차원이 다른 

방법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덕에 애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게다가 PEEK, POKE 명령어를 이용해서 직접 8 비트 애플 컴퓨터의 깊숙한 부분을 건들어

컴퓨터에서 소리가 나고 화면 디스플레이에 확실한 효과를 볼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그동안

컴퓨터를 다 배웠다고 학원 강사들을 잡아 먹으려 했던 애들이 무척이나 신기해하고 몰두했다.


열흘쯤 지나니 학원장의 눈빛이 달라지고 강사들마저 내 강의에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계어란 보통 어려운게 아니다. 일단 개념 잡기가 무척 힘들었다.

당시 기계어를 가르치는 곳은 단 한곳도 없었고 나는 독학 체질이라 혼자 곯머리 앓아가며

시행착오 반복하며 터득한거다.




일본의 신조어가 있다. 오다꾸~!

내가 이해하는 오다꾸는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전심 전력으로 투구해서 자신만의 영역을 

갖춘 이들을 일컬는 말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 신조어가 생겨 나기 전에 이미 오다꾸의 영역에

들어간거다.


배운지 고작 6개월 밖에 안된 신출내기가 자유 자재로 영역을 넘나들며 구사를 하니 학원 강사들 

마저 애들을 가르키다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내게 자문을 구하러 오곤 했다. 

3개월 동안 애들을 가르켰는데 호기심에 찬 애들의 눈빛은 정말 나를 열정적인 강의를 하도록 

부추켰다.


그때쯤 새로운 욕심이 생겨났다.

당시 구로동에 있던 생산 기술 연구소 산하 직업 훈련원에서 2년 과정의 훈련생 모집 공고가

나왔다. 보다 더 배우고 싶은 욕구가 앞섰고 울각시를 설득해 2년만 나를 위해 돈을 벌어 달라

요청했다.


합격 통지서를 받고 학원장 이하 학원 강사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애기를 하니 다들 아쉬워 

했다. 심지어 방학때라도 틈이 나면 강의를 맡아주고 2년 과정을 마치면 다시 학원에 돌아와 

강의를 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는 1989년에 메카트로닉스( MECHATRONICS )과에 입학했다.

mechanism과 electronics의 합성어이다. 말하자면 기계 공학과 전자 공학을 매칭시켜

전자 내지는 컴퓨터 두뇌로 기계를 제어하는 학문이다. 요즘 로봇 공학이 대표적인 개념이다.


입학해서 보니 몇몇 예비역을 제하면 다들 나와 띠동갑이었다. 더군다나 교수님들이 내 또래

였다. 나는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영어  일어 잘하지 컴퓨터도 

잘해 그친구들이 아지도 못하는 기계어도 잘하니 띠동갑 "돌탱이"들은 나를 따라 올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돌탱이"들은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재수하기 싫어 떠밀려 훈련원에 온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 "돌탱이"들을 위해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영문 원서로 된 Z-80 CPU 1권을

사게 한 다음 영어 번역해주며 CPU의 개념을 공부 시켰다. 이런 스터디 그룹을 할때는 나도 어려워

하는 분야를 택하여 "돌탱이"들에게 가르키다 보니 내 스스로 공부가 되었고 당연히 내 실력이

일취월장 향상된다는 이점을 노린거다.


1학기 종합 평가 결과 학년 석차 1위다. 거의 모든 과목을 만점 맞다 시피 했다.

기계 공학, 전기 공학, 전자 공학, 영어, 수학, 재료 역학, etc,.

나는 장학생이 될수 있었고 정말 좋았던 것은 연구소 산하 자료실에는 영어, 일어로 된 기술 서적이 

엄청 많았다는 점이다. 연구원들을 위한 서적들이었고 대부분 아직 번역 되지 않아 시중에

번역되지 않은 따끈 따끈한 것들이었다. 자료실 이용자중 연구원이 아닌 훈련생으로는 유일했다.




2착기 부터는 전공 과목이 더 늘어나 자동제어 이론이며 일본어, C 언어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어 시간에는 노 교수님이 원서를 자유자재로 독해하는 내 실력을 인정해 주셨다.

새로 등장한 16 비트 XT 컴퓨터로  C 언어를 배우게 되었고 8086 매크로 어셈블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자동제어 과목에서 나오는 라플라스 변환은 무척이나 어렵고 까다로웠다. 나보다 두살 어린 교수였

지만 나는 깍듯이 교수님 하며 나름 열심히 했고 오픈북으로 시험을 치르는데 대다수가 답을 못쓰고

빵점을 맞았는데 40점 만점에 32점을 취득한 내 점수를 기준으로 다들 8점씩 올려 주었다.


2학년에 되자 교수님들은 내 실력을 인정하고 연구 기자재들을 마음대로 쓸수 있게 배려 해주셨다.

그래서 시중에서 볼수 없는 수많은 기자재들을 마음껏 주물럭 거리며 배울수 있었다.




하루는 일본의 sony 제품에 들어가는 정밀한 소형 모터를 연구 개발한 유명한 다까시 겐쪼 박사가 

연구원들 상대로 세미나를 여는데 교수님은 나를 그자리에 불러 주셨다. 일어로 진행되는 세미나가 

끝나자 박사의 국내 관광 가이드로 나를 추천해주셨다.


나는 수업을 빠지고 박사를 위해 용인등 몇몇 관광지를 돌아 다니며 통역 가이드 역할울 했다.

그런데 나는 골수 한국인인 모양이다. 마지막에 박사의 투숙 호텔에서 저녁을 먹으며 한국인들은 

일본과의 과거사 때문에 많은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는 애기를 꺼내자 박사의 얼굴을 굳어 지고 

어색하게 헤어지게 되었다.




2학년 졸업반이 되어 졸업 작품전을 여는데 나는 "돌탱이" 애들을 진두 지휘하여 공압 실린더로 연주되는

오르간,  마이크로 프로세서에서 합성시킨 음악 연주( 이건 내가 1학년때 8085 CPU 실습 과제로 제출

했던 당시 유행한 담다디 노래였다. ), 이리저리 물건을 옮기는 로봇팔등 다양한 작품들로 많은 박수를

얻어낼수 있었다.


나는 졸업도 하기 전에 8 비트 애플 컴퓨터로 이루어진 차량 계근 장치( 먼저 빈차 중량을 달고 다음에

짐을 실은 차의 중량을 달아 짐의 무게를 산출하는 대형 저울 )를 당시 등장한 16 비트 XT 컴퓨터로 

바꾸는 조그만 회사에 투입되었다. BASIC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을 그래픽 구사해가며 C 언어로 작성을 

해서 납품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날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생겨 났다.



오늘은 여흥 삼아 오늘 오전 광주 상무지구의 무각사 앞에서 길거리 노점을 하며

삼뽀냐로 연주한 직녀에게를 올린다.

작사자는 올해 타계하신 나의 고등학교 3학년때 국어 선생님이셨던 문병란 시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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