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오늘을 낳았듯
지금 이 시간은 내일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오늘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내일이라고 했던 오늘을 맞이하게 될
오늘에 있어서의 지금은 달라질 것입니다.
바라는 지금이 되기 위해
부족함이 없는 날이 되소서.
오늘도 맑고 향기롭게
연꽃 같은 사람이 되소서..()
2007. 05. 19 07:23 칠통 조규일
공부 목차
1. 스펀지처럼 받아들여 수행의 경지를 높이는 방법 / 칠통 조규일
2. 바르게 아는 앎이란 / 칠통 조규일
3. 아는 것을 행하며 행하는 행을 통하여 버리며 가라. / 칠통 조규일
4. 현재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수행과의 관계 / 칠통 조규일
5. 나를 벗기고 버리는 것이 수행이다. / 칠통 조규일
스펀지처럼 받아들여 수행의 경지를 높이는 방법 / 칠통 조규일
잠재의식 무의식 속에도 없는 세계를 이해하거나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의식할 수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의식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이해할 수 있고 의식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을까?
그것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흡수하는 방법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
스펀지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인가?
그것은 말하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받아들여서,
받아들인 그대로의 그러한 사실을 알고, 알고 있는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알고 있는 그러한 사실을 가지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인식하며 행하는 것이다.
너 나 없이 자기 자신이 아는 것,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행하는 현재의식이 있는 것과 같이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알고,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안 사실을 바탕으로 행할 때 그것이 몰랐던 것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서 안 사실을 바탕으로 행하는 순간부터 현재의식이 되어간다.
행하는 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식이 되고 잠재의식이 되고 무의식이 되어 자기 자신을 이룬다.
스펀지처럼이란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있는 그대로 그렇다고 믿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고 의심도 없이 바보처럼 믿고 바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고 받아들이기를 순백의 하얗고 하얀색 그대로 이어야 한다.
여기에 미진의 티끌이라도 개입되거나 묻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받아들인 사실을 알고,
받아들여서 안 사실을 바탕으로 안의행 이의행 비의행 설의행 신의행 의의행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받아들이고 행할 때 현재의식은 받아들이고 행하는데 있게 된다.
이와 같이 행하고 행하면 현재의식은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된다.
현재의식을 높이고 싶다면 스펀지처럼 받아들여 받아들인 사실을 알고,
알고 있는 것을 행하면 쉽게 현재의식을 높일 수 있다.
스펀지처럼 받아 들이다보니 바보처럼 믿어야 하고 바보처럼 행해야 하지만
바보가 되지 않고서는 스펀지가 될 수 없다. 철저하게 바보가 되어야 한다.
남들이 바보라고 해도 멍청하다고 해도 왜 그것을 모르느냐고 해도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바보라고 보일 정도로 순수해야 한다.
바보라고 할 정도로 믿어야 한다.
바보라고 할 정도로 행해야 한다.
아니고서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가 없고 스펀지처럼 받아들일 수 없다.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는다.
행해야 의식이 되고 인식이 된다.
의식이 되고 인식이 되어야 내 것이 된다.
내 것이 되어야 이루었다 할 것이다.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알고 안 사실을 의식하고 의식한 것을 인식하고 있고
이것을 행한다면 인식하고 의식한 사실은 현재의식이 된다.
이것이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수행의 경지를 높이는 방법이다.
본인은 수행초기부터 그랬던 것 같다.
이렇다고 하거나 이렇다고 알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바탕으로 의식 인식하며 올라왔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세계를 밝혀 드러내고 밝혀 드러낸 것을 사실 그대로 의식 인식하고 행하기 때문에
밝혀 드러낸 세계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본인이 밝혀 드러내고 밝혀 드러낸 사실을 의식 인식하지 않거나
밝혀 드러낸 사실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본인이 밝혀 드러내고 밝혀 드러낸 사실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의식 인식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면 올라갈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이 올라올 수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이글을 읽는 그대도 그대가 행한 것에 대하여,
그대가 안 사실에 대하여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알고 행하는 것이 현재의식인 것과 같이
비록 자기 자신이 체험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그러한지를 알고 그러한 사실 안에서 행한다면
스스로 체험하고 경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안 사실만은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스스로 체험 내지는 경험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알고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이 행한 것은 스펀지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남이 하는 말은 스펀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받아들이는데 있어 자기 자신의 관념과
습관, 습벽, 업에 의하여 굴절되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관념과 습관, 습벽, 업과는 상관없이
진리와 법을 있는 그대로 스펀지처럼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행한다면 이미 그대는 체험하고 경험한 것이나 다름없이
무의식이 되고 잠재의식이 되고 현재의식이 된다.
본인이 위 세계의 에너지를 끌어다 쏴주면
무의식은 있는 그대로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그러한 사실을 아는데,
현재의식은 자기 자신의 업과 습, 습벽과
습관, 고정관념 때문에 스펀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이러한 사실에 걸려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만큼 알고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 때문에 무의식은 변해도 현재의식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무의식도 변하고 현재의식도 변하고 싶으냐.
그러면 법과 진리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그대 현재의식이 되게 하라.
스펀지처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예를 들면 이는 이와 같다.
누군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이렇다고 말했을 때 그렇게 말한 사실을
진실이니 거짓이니 생각하지 않고 말한 그대로 그렇게 받아들여서 그렇게 말한 사실을 알고,
안 사실을 바탕으로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서 대할 때는
그 사람이 말한 사실 대로 알고 대하는 것과 같다.
말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는지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말한 사실만을 바탕으로 그 사람을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는 이와 같다. 잘 아는 사람이 나 1억 원이 있다고 말했을 때 이를 들은 사람은 말한 사람이 1억 원이 있다고 믿고
이 사람을 의식 인식할 때는 1억 원이 있다는 사실에서 행하는 것과 같다.
테스트할 줄 아는 분들은 테스트 해보라.
스펀지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100이라고 했을 때
칠통은 깨닫기 전에 깨달음에 대한 진리나 법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인 것은 100에 몇이나 될까?
칠통은 칠통이 지금 밝혀 드러내고 있는 사실들에 대하여 얼 만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제 자기 자신을 테스트 해보라.
자기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한 것은 100에 어느 정도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있나?
나는 진리와 법에 대한 말들에 대하여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100에 몇이나 되나?
칠통이 밝혀 드러내 말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하여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100에 몇이나 되나?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행의 경지는 빨리 높게 올라올 것이며
스펀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면 못하는 만큼 수행은 더딜 것이다.
수행이 더딘 게 아니라 수행이 되지 않는다.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100이라고 했을 때
100에 가깝게 스펀지처럼 받아들인다면
높으면 높을수록 수행은 잘 되는 것이고 수행의 경지는 더 없이 높아지고 경지 또한 높아질 것이다.
자기 자신이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 100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면 100의 스펀지처럼 받아드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라.
그래서 법과 진리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위로 올라오라. 수행이 경지를 높여라.
법과 진리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현재의식이 되게 하라.
수행의 경지가 높아졌다가 떨어지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지만
진리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면 받아들이는 만큼 빨리 수행이 이루어질 것이니 스펀지가 되라. 100% 진리의 스펀지가 되라.
2014. 04. 24. 22:37 칠통 조규일
바르게 아는 앎이란 / 칠통 조규일
의식이 성장하고 의식이 깨어나는데 좋은 방법이 있는가?
의식이 변화하는데는 이것이 최상의 방법이랄 것이 있는가? 달리 방법이 없다.
생각을 바꾸고 의식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업(業)과 습(習)에 의하여 살아오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업과 습으로 살아온 관성(慣性)이 업과 습으로 살아가도록 하고 있어서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바꾸지 않고서는 깨어날 수 없고 빛으로 갈 수 없고 피안의 언덕을 넘어갈 수 없으니 바꾸어야 한다.
바꾸는데 있어 먼저와 나중이 없다.
그냥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있는 그대로 바르게 받아들이며
생각에 닿으면 생각을 바꾸고 의식에 닿으면 의식을 바꾸고
마음에 닿으면 마음을 바꾸면 바꾸는 그곳으로부터 바뀌게 된다.
바뀐다고 했으나 바뀐다는 말은 모르는 것을 돌이켜 바르게 아는 앎을 말한다.
바르게 아는 앎이란 업이나 습이 대응하지 않은 맑고 깨끗한 일체의 하나에서 있는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서 의식과 마음이 바뀌기도 하고, 의식이 바뀌면서 생각과 마음이 바뀌기도 하고,
마음이 바뀌면서 생각과 의식이 바뀌기도 한다. 무엇이 먼저 바뀌어야 바뀐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곳(것)에서든 바뀌면 다른 것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업과 습으로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관하고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르게 아는 앎이란 우리 모두는 절대자로 자등명이며 본래 성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앎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통(通)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통한다는 것은 바르게 보고 바르게 관하고 바르게 안다는 것으로
나는(여기서 나는 우리들 저마다의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절대자이며 자등명이고 자등명으로 본래 성불해 있어서 부처님이고 하나님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사실에서 보고 관하고 아는 것을 바르게 아는 앎이라 한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관하고 바르게 아는 만큼 우리들 저마다는 의식이 깨이고 의식이 성장할 것이다.
우리들이 의식적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의식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바르게 보지 못하고 바르게 관하지 못하고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업과 습 때문이다.
업과 습이 있기 때문에 업과 습에 가려서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과 습으로 보고 업과 습으로 관하고 업과 습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는 본래 무명에서부터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업과 습으로 생각하고 의식하고 마음을 쓰기 때문에 변화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물든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든 마음 때문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들지 않은 마음을 쓰지 못하고 물든 마음을 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라고 하는 마음에 자주 자극되는 것이다.
양심(良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 마음을 말한다.
두 가지 마음이란 무엇인가? 물든 마음과 물들지 않은 마음이다.
물들지 않은 마음이 무엇인가로 인하여 물들려고 할 때
물들지 않은 마음에 자극되어지는 것을 우리들은 양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관하고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업과 습으로 보지 말고 바르게 보는 것이 중요하고,
업과 습으로 생각하지 말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업과 습으로 말하지 말고 바르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고.
업과 습으로 행동하지 말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고,
업과 습으로 노력하지 말고 바르게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고,
업과 습으로 물든 마음을 챙기지 말고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바르게 챙기는 것이 중요하고,
업과 습으로 수행 정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수행 정진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것들이 원만하게 자기 자신 안에서 이루어질 때
생각이 바뀌고 의식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알고 육체적으로 느끼며 생각하되
업과 습으로 인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를 살펴 보라.
의식하되 업과 습으로 인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를 살펴 보라.
그리고 마음 챙김에 있어서 물든 마음인지 물들지 않은 마음인지 살펴 보라.
보되 업과 습으로 보지 않고 바르게 보는 것이 중요하고
바르게 관하는 것이 중요하고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관하고 바르게 알 때
바르게 보는 만큼 바르게 관하는 만큼 바르게 아는 만큼 의식은 깨어 의식은 성장할 것이다.
의식이 깨이고 성장하여 모든 것을 바르게 다 알 때 비로소 깨달음을 증득하게 될 것이다.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바르게 아는 앎이 중요하다.
바르게 아는 앎은 모르는 것보다 지식적으로라도 아는 것도 중요하고,
지식적으로 아는 것보다는 지혜로 아는 것이 중요하고,
지혜로 아는 것보다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
바른 수행은 업과 습으로 인한 관성으로 인한 무명을 하나하나 벗으며
바르게 보고 바르게 관하고 바르게 알아 가는 것이다.
바르게 알아서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2010. 1. 19 09:21 칠통 조규일
아는 것을 행하며 행하는 행을 통하여 버리며 가라. / 칠통 조규일
머리로 알았으면
그 다음에는 행이 이루어져야 행한 만큼
아는 것에 이를 수 있고 또한 올라 설 수 있다.
아는 것에 올라서 이르러야 그 다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단계를 올라설 수 있다.
그 다음 단계 알아서 행으로 올라서야 그 다음 단계 또 알 수 있다.
알고 있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알고 있는 곳이나 것에 이를 수 없고
이르지 못하고서는 그 다음 단계를 알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단계를 올라 설 수가 없다.
아는 것을 버리고 다음 단계를 올라서고자 한다면
아는 것을 행하여야 행하는 행을 통하여
아는 것의 아래 단계가 버려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이나 습은 아는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을 행했을 때 버려지는 것이다.
단순히 글을 쓰고 쓴 글을 다른 사람이 본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글로 씀으로 해서 다른 사람이 보고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이 쓴 글을 보았으니
자기 자신이 쓴 글에 대한 것에 대하여 옳다는 뜻과 의지로
자기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하여 행으로 옮겨진다.
이것이 자기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다.
자기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했을 때
자기 자신의 언행은 말과 글, 아는 것에 대한 올바른 행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버려지는 것이다.
버려진다고 하되 버려지는 것은 아는 것을 통하여 실천했을 때
아는 것을 실천하는 행을 통하여 전에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게 되고
또한 아는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실천하지 않고 버릴 수는 없다.
버리는 행의 실천이 따라야 버리지는 것이다.
한 생각 돌이켜 전에 자기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잘못된 지를 알았을 때
한 생각 돌이켜 안 것에 대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전에 알고 있던 잘못된 것을 지속적으로 행한다면
이는 한 생각 돌이켜 아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 아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고 걸림이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 업이 될 뿐이다.
흔히들 한 생각 돌이켜 깨어나 행했을 때
의식은 성장하게 되는 것이지 행하지 않고서는 의식이 성장할 수 없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행이 없다면
이는 아는 것 식에 빠져 있게 될 뿐
아는 것으로 도달하지 못하고
업과 습의 관성에 의하여 굴러간다 있다고 할뿐이다
업과 습의 관성으로 굴러가는 속에서
업과 습의 관성에서 뛰어 내리는 행 없이 머리로 알아봐야 업만 가중시킨다 하겠으며
업만 가중시켜서는 바뀌지 않을뿐더러 수행에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알았으면 아는 것을 통하여 실천궁행하며 가야 한다.
아는 만큼 알아진 만큼 행하지 못한다면 아는 것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는 것으로 장애와 걸림만 가질 것이며
도달하지 못할 것 같으면 더 이상 높이 경지를 높여갈 수 없는 만큼
아는 만큼 행하여 가면서 아는 만큼 행하여 도달해 가야
아는 것을 다 행했을 때 비로써 아는 것에 도달하게 되고
아는 것을 다 행하여 도달해야 지만 그 다음 단계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머리로 마음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행으로 실천해야만 아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
행하고 실천해서 도달해야만 도달한 곳을 발판으로
한 계단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이지요.
저 위에 계단에 대하여 안다고 하여
알고 있는 계단에 올라선 것이 아니며
알고 있는 계단에 올라서야 그 다음의 단계의 계단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지
알고 있는 계단에 올라서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의 계단에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아는 것으로 업과 습을 더하며
업과 습의 관성으로 굴러가지 말고
아는 것으로 업과 습의 관성으로부터 굴러가는 곳으로부터 뛰어내려서
아는 것으로부터 행을 하여서는 아는 것의 계단에 오르고
아는 것의 계단에 올라서는 다음 단계의 계단을 올라서야 한다.
이는 말로 아는 것으로 마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이 되어야 행으로 도달할 수 있고 오를 수 있다.
아는 것을 행하지 않고서는 버릴 수 없으며
아는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더 높이 올라설 수가 없다.
올라서고 싶고 깨달음을 증득하고 싶다면
알아야 하겠고 알아서는 행으로 올라서야 하겠으며
행으로 올라서서는 버려야 위에 걸을 알 수 있고
위에 것을 알아서는 아는 것을 통하여 행해야 또 다시 올라설 수 있다.
이와 같이 수행은 알아야 하고
알아서는 행해야 하고
행하고서는 행한 것을 버려야 올라설 수 있다.
마치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것과 같이
그렇지 않고서는 한 단계도 제대로 올라설 수 없으니
행하라. 아는 것을 행하라.
그리고 아는 것을 행한 행마저도 버려라.
그래야 올라설 수 있고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올라야 백척간두 진일보해서
대사일번하고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다.
아니고서는 깨달을 수 없나니
행하라. 아는 것을 행하라. 깨어난 만큼 아는 만큼 행하라.
행했다는 생각마저도 잊고 행하며 아는 것을 버리며 가라.
2010. 6. 30 07:14 칠통 조규일
현재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수행과의 관계 / 칠통 조규일
수행자에게 무의식이 알고 있는 단계는 매우 중요하다.
무의식이 어느 단계까지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수행을 어느 정도에서 그치느냐
또는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여 가느냐의 기로에 있는 것이다.
무의식이 깨달음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깨달음 의식이 될 때까지는 수행 정진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기 자신이 무의식에서 인식하고 있는 단계까지만 수행을 할 뿐
더 이상 수행하려고 하지 않고, 수행의 정진을 멈추고 안주하려고 한다.
그런 만큼 무의식이 인식하고 있는 단계가 어디까지인가? 매우 중요하다.
무의식이 자등명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유령(출신)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빛의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법계(法界:법운지)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우주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깨달음의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몇 단계까지 무의식이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수행의 고지는 각기 저마다 다르다.
다시 말한다면 무의식이 인식하고 있는 의식의 세계가 높으면 높을수록 낮은 단계에서 수행을 멈추지 않으며
낮으면 낮은 만큼 높은 단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무의식 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의식 세계만큼만 공부하려고 할 뿐,
더 이상 공부하는 것에 부담으로 느끼거나
또는 더 높은 단계에 대한 것을 받아들이 못하고 자기 자신 안에서 안주하기 쉽다.
억지로 무의식이 높은 단계로 변하여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이생에 태어났을 때 이미 가지고 온 무의식만을 인식해서는 이생에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인식된 높은 단계의 무의식을 현재의식으로 받아들이기 이전까지는 무의식에서 인식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육체와의 인연이 다하여 새로운 몸을 받았을 때
무의식의 높은 단계를 인식하게 되는데 그때야 비로소 높은 무의식의 단계를 인식하여 받아들이고, 새로운 몸을 받은 상태의 현재의식에서 무의식이 높은 단계의 의식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되기까지는 현재의식에서의 인식이 필요하고
현재의식이 인식되지 못할 경우 육체와의 인연이 다하고 새로운 몸을 받음으로
높은 단계의 무의식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높은 단계의 무의식을 인식하고 높은 무의식의 단계를 갖게 된다.
무의식이 3단계인 사람은 현재의식이 3단계를 넘기가 쉽지 않고,
무의식이 8단계인 사람은 현재의식이 8단계를 넘기가 쉽지 않으며,
무의식이 깨달음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현재의식으로 깨달음 의식을 넘기가 어렵고, 무의식이 우주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현재의식으로 우주의식을 넘기가 어려우며,
무의식이 법계(법운지)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현재의식으로 법계(법운지)의식을 넘기가 어렵다. 무의식이 빛의 의식, 유령의식, 자등명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역시도 가지고 있는 의식을 현재의식으로 넘기가 쉽지 않다.
하심과 겸손, 8정도의 실천 없이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심과 겸손 8정도의 행을 통하여 공부인의 자세가 바르게 되었을 때
바른 공부인의 자세를 가지고 공부할 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단계를 뛰어넘어 수행 정진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행을 하지 않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무의식에 깨달음 의식 이상의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의 단계가 낮으면서 수행을 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영계 그 이상의 단계에서 왔다기보다는
지옥세계에 있다가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났으니 지옥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 정진하는데,
어느 정도 수행해서는 더 이상 수행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수행한 것으로 못된 짓을 하게 된다. 그렇다보니 마이너스의 단계를 갖게 되는 경우들을 많이 본다.
이와 같이 무의식이 알고 있는 인식하고 있는 단계의 의식은
인생에 있어서나 영적 세계에 있어서나 수행 정진함에 있어서나 매우 중요하다.
오래된 일이지만 스님들의 무의식을 테스트해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여러 스님들을 해보았는데 18단계를 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거의 다 18단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니 그 분들에게는 법념처가 마지막 단계이었을 것임이 자명한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었다.
반면에 본인은 아주 오래 전부터 법념처를 넘어 대광념처 빛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질문에 또한 그와 같이 대답하며 수행 정진해 왔었다.
그 당시 대답을 들은 사람은
“그러면 칠통 네가 석가모니부처님보다 높다는 말인가?” 라고 묻고는 본인을 외면했었다.
본인은 대광념처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나서도
수행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전생 어느 때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출신(出神)을 했다가 죽은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만큼 본인의 현재의식에서는 알지 못했지만 무의식에서는 높은 단계를 알고 있으니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머무를 수 없었으며 또한 대광념처로 나아가야 한다며
수행 정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본인에게 공부하러 오시는 분들의 경우
본인이 무의식을 녹여주고 무의식 단계를 높여주었기 때문에
현재의식에서는 비록 알지 못한다할지라도 무의식에서는 높은 단계를 인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생에 태어나기 이전에 무의식이 어느 단계까지 인식했으냐의 문제인데,
이생에 태어나기 이전의 무의식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되 그 이상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인연이 깊은 사람들은 본인과 함께 하면 반신반의하며 공부하되
무의식은 계속해서 본인의 수행된 만큼 시술을 해주는 만큼 올라가 있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이러한 관계로 근자에 본인의 회상에 오시는 분들의 무의식은 자등명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앞서 말했듯 무의식은 한 번 올라가면 흔들림 없이 그냥 그대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현재의식에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현재의식은 자기 자신이 인식하고 의식한 만큼 받아들이고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현재의식인 만큼
현재의식이 우주의식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흔들릴 것이다.
평상심의 우주의식이 되기까지
깨달음 의식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높고 낮음은 크다고 할 것이며
우주의식에 근접에 있을수록 평상심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의식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우주의식이 되었을 때 그 흔들림이 없고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하기 이전에
깨달음의 의식 및 그 아래 단계로 내려갈수록 흔들림의 폭이 넓고 깊다.
반면에 무의식은 어느 단계를 인식하고 의식하고있느냐의 문제일 뿐,
인식하고 있는 의식 안에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전혀 흔들림이 없는 무의식이 흔들림을 갖게 되는 것은 더 높은 단계의 의식을 만났을 때이다.
더 높은 단계의 의식을 접했을 때 무의식 속에서 저것을 받아드려야 하나?
받아들지 않아야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쳐서는 흔들리게 된다.
일반 받아들여서 녹아내려져서는 무의식의 단계가 높아진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게 된다.
이렇게 변화된 무의식은 현재의식과 공동의 의식을 갖게 된다.
예전에 본인이 시술을 하고도 무의식이 높아진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의식만 테스트했을 때 본인의 회상에 있는 분들의 의식이 높게 나오게 되는 것을 관찰해 보고, 그 다음부터는 현재의식만을 테스트해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무의식은 본인의 시술에 의하여
깨달음,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넘어
유령의식의 출신을 넘어 본성의 빛 자등명을 넘어 자등명 의식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식은 깨달음 의식도 갖지 못한다. 이런 경우 이분들은 육체와의 인연이 다했을 때 어느 곳으로 갈까?
무의식의 자등명 세계로 가는 것도 아니고 현재의식만큼 가는 것도 아니면
시술해준 자등명 의식과 현재의식을 통털어서 의식되어지는 의식단계에 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시술해주다보니 현재의식에서는 알지 못하지만
무의식은 이미 시술을 받아서 높은 단계, 즉 자등명 의식이 되어있는데 반하여
현재의식은 깨달음 의식도 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본인이 회상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경우 현재의식과 무의식의 단계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어느 단체 어느 종교단체의 최고 최상의 무의식에 있는 사람보다 무의식은 더 높다.
아니 그냥 높은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이 높다.
반면에 현재의식은 그들이 더 높다.
현재의식은 낮으면서 현재의식이 높은 사람보다 더 무의식은 높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한 사람의 무의식보다도 더 무의식은 높다.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한 사람이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의식은 높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식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흔들림이 많다.
그러나 무의식은 시술 받은 만큼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흔들림이 없다.
다만 현실을 살아가는 현재의식이 낮음으로 인하여 현재의식이 언제나 흔들리게 되고
흔들려서는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현실적인 부분에 더 많은 무게 중심을 주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무의식은 자등명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앞으로는 본인의 회상에 참여하는 참여도에 따라서 시술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본인의 시술로 인하여 무의식이 높아진 만큼 현재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 있어서 합쳐서 드러나게 되는 단계가 높은 만큼
육체와의 인연이 다한 연후에는 꼭 무의식의 단계까지는 가지 못할지라도
현재의식과 무의식의 합쳐져서 드러나는 높은 단계로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현재의식이 높으면 높은 만큼 머리에 생각이나 의식이 혼란하지 않음으로
생각이나 의식이 편안하고 마음까지 편안해서 좋을 것이지만,
비록 현재의식이 낮고 무의식이 높으면 높은 만큼 무의식이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은 편안해질 것이지만
현재의식이 낮은 관계로 머리에 생각이나 의식은 기폭의 높낮이가 심하여 혼란할 것이다.
현재의식도 낮고 무의식도 낮다면 생각이나 의식의 높낮이로 심하게 흔들리고
무의식 또한 그와 같아서 한 번 흔들리면 심하게 흔들리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이러한 관계로 무의식이 자등명 의식을 가지고 있게 되면
비록 현재의식이 낮아 현실 생활에서의 생각이나 의식의 폭은 넓어서 심하게 흔들리지만
마음만큼은 편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무의식이 자등명 의식을 가지고 있는 만큼 현재의식이 비록 낮을지라도
무의식이 자등명 의식 어디까지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비록 현재의식은 낮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의식은 높아서 높은 단계로 가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본인의 회상에 꾸준히 참석하시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을 드러내 보면 자등명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수행에 있어서나 육체와의 인연이 다하고
새로운 몸을 받는 입장에서 보면 무의식이 높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수행에 있어서는 멈춤 없이 수행 정진해 가야하는 것을 알아서
언제나 하심과 겸손 속 8정도에 의지하여 수행 정진하게 되고,
육체와의 인연을 다해서는 좋은 곳 높은 단계로 가게 되는 만큼 매우 중요하다.
그런 고로 본인의 시술로 무의식이 높아진다는 것은
단계가 높아지는 것으로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나 비록 수행을 하지 않을지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기뻐할 일이 아닌가 싶다.
2012. 7. 24 10:13 칠통 조규일
나를 벗기고 버리는 것이 수행이다. / 칠통 조규일
수행은 나를 통하여 나를 닦으며
진아(眞我)를 찾아가며
진아가 아닌 가아(假我)를 벗기고 벗기며
가아를 버리고 진아를 찾아가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이 이러함에도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는 ‘나는 어떠하다.’ ‘나는 이것이 좋다.’ ‘그것이 나하고 맞지 않는다.’ ...등등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을 강조한다.
나를 버리려고 수행하는 사람이
말로는 나를 버리고 깨달으려고 수행한다고 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해주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바른 길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내가 철웅성이라고 되는 듯 ‘나는 어떠하다.’ ‘
나는 그것이 좋다.’ 또는 ‘싫다.’
‘그것은 나와 맞지 않는다.’ ‘이것이 나와 맞는다.’ 자기 자신을 나를 지키기 위해 실사적이다.
때에 따라서는 자기 입맛에 맞으면 그것은 옳고 맞지 않으면 그것은 틀렸다. 또는 맞지 않는다며 자기 주장하기에 바쁘다.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깨부수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람이
이처럼 자기 자신을 깨부수기보다는 지키기에 더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경우 자기 자신의 경계를 깨부술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이 나라고 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또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기하고 맞는 것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에게
습이 되고 업이 되어 있는 것을 보호하고 주장하며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를 버리고 나라고 자성경계를 깨거나 또는 부수기 위해서 적게 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습과 업을 보호하려고 하며
자기 자신의 입맛 즉 자신의 자성경계에 맞는 것을 하면서 어찌 자성경계가 거역하는 것을 깨려고 하는가?
수행은 순응이나 순리적이지 않다.
수행은 역동적이고 역관적이며 역순적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본래 온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자신 자신도 모르게 습이 되고 업이 되어 있는 것을 순응하며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나하고 맞다. 틀리다. 또는 내 취향이 아니다 기다. 라고 하기 전에
한 번 자기 자신을 살펴보라.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업을 보호하고 습을 보호하며 자성경계를 깨며
나를 버리기 위한 수행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고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수행한다고 하는 것을 보고
그러면서 자신의 경계를 깨고 안팎없이 하나가 되어 깨달음을 증득하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수행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를 버리지 않고서는 수행 경지의 단계를 한 단계도 올라갈 수가 없다.
수행 경지의 단계를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해서는 나를 버려야 한다.
나를 하나 버리면 한 단계 올라가고 또 버리면 올라가고
그렇게 무아가 될 때까지 나를 버리고 올라가는 것이 수행이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 살펴보라.
나는 수행한다고 하면서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서, 나를 어느 정도 버리고 있는가?
수행한다고 하면서 내 것 나의 아집, 아만만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살펴보라.
자성경계를 깨는 것도 나를 버리지 않으면 깨달 수 없으며
또한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 역시도 나를 버리지 않고서는 증득할 수가 없다.
수행 경지의 단계를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해서는 나를 하나하나 버려야 한다.
나를 지키고 보호해서는 깨달음을 증득할 수도 없고,
또 수행 경지의 단계를 올라설 수도 없으며 무아가 될 수도 없다.
수행하는 사람이 나라고 보호하고 나를 지키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수행을 그만 두는 것이 좋다.
이런 사람 수행 해 봐야 수행한 것으로 아만과 아집 아상만 높아질 뿐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나를 보되 진아가 아닌 가아를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부딪침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믿되 자기 자신을 불신하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부딪쳐 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 안에서 부딪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이 말을 할 때 나는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거나 의식하거나 인식하게 되면
이때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옳고 상대방이 틀리게 된다. 이래서는 수행이 되지 않는다.
내가 잘못된 것이 없고 옳은데 쉽게 말해서 걸림과 장애가 무엇으로 수행한단 말인가?
수행은 걸림과 장애로 하는 것이다. 편안하면 수행이 되지 않는다.
걸림과 장애가 없으며 수행이 되지 않는다.
즉 순응하고 순탄해서는 물처럼 흘러가서는 수행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자기 자신을 역관해 들어가고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이 옳고 내가 바르지 않을 때
바르지 않은 내 안에 있는 것을 통하여 걸림과 장애를 가지고 수행 정진해 가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많은 수행하는 사람들이 내가 너무 강하다.
나를 앞세우기에 바쁘다.
다른 사람의 말은 귀담아 듣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주장이 강하다.
자기 자신의 주장이 강하다고 하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는 밖으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안으로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다.
성격상 밖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격상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또는 성격상 드러내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어쩌거나 내가 없어야 한다.
내 주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수행에서 멀어져 가며 또한 자기 자신의 나를 보호하려고 하고 지키려고 하면 하는 만큼 수행은 멀어져 갈 것이다.
수행한다고 해 봐야 흉내를 낼 뿐이고 그래봐야 수직적이라기보다는 수평적 수행이 되고 식만 키운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상 아만 아집만 강해진다. 그런 고로 나를 버려라.
나를 지키려고 나를 보호하려고 하지 말고
부딪쳐 오는 걸림과 장애를 통하여 역관해 수행 경지의 단계를 올라가라.
그렇지 않고서는 단 한계도 올라갈 수 없나니.
나를 버리고 올라가라.
나라고 할 것이 없을 때까지 무아가 될 때까지를 나르 버리고 올라가라.
이는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자기 자신 밖으로 이어져야 하고,
자기 자신 밖에서부터 자기 자신 안으로 이어져야 한다.
2011. 06. 14 07:13 칠통 조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