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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공원의 창업자 송봉규(宋奉奎)회장은 1956년 20대의 약관(弱冠)에 제주도의회 의원 생활을 거치면서 지역사회의 개발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10여년간의 한림읍 개발위원장을 지내는 동안 일찌기 제주도의 발전은 관광산업이 열쇠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관광산업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실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1970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각지의 고적과 관광지를 샅샅이 조사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왔다. 이때부터 그는 제주도내의 적지를 선정하여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개발하고 지역사회의 발전에 일생을 투신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그의 고향인 한림읍내의 적지를 찾아 여러곳을 탐색하던 끝에 협재, 금릉, 비양도 일대야말로 신비로운 동굴이 있고, 아름다운 해변과 비양도의 낚시터 등 자연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개발하기에 따라서는 외국의 어떤 유명관광지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자연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다고 판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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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회장은 이 지역을 개발하려면 우선 토지를 확보해야 했다. 때마침 협재리에 있는 모래밭을 당시의 소유주인 오현학원에서 팔려고 수차에 걸쳐 경매에 부쳤으나 불모의 땅을 사겠다는 응찰자가 없어 팔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망설임 없이 부친의 유산을 정리하여 1971년 6월 15일 오현학원으로부터 이 불모의 모래밭을 사들였다. 여러차례의 경매에도 불구하고 살 사람이 없었던 모래밭이 비로소 새 주인을 맞게 된 것이다. 당시 이 모래밭에는 가시덤불이 얽혀있고 바위와 돌멩이 등이 깔려 있었으며, 곳곳에 무덤이 있는가 하면 북서계절풍에 날린 모래가 동산을 이루어 사막지대 그대로의 황무지였었다. 더구나 한라산 중턱의 황무지를 개간하다가 갖가지 애로에 봉착하여 중도에서 좌절하고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가 불모의 모래밭에 개척사업을 시작하자 가족은 물론 친지들의 만류가 극심했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조소 또한 끊이지 않았다. "모래밭을 파서 어쩌자는 것이냐 "는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드디어 개척의 삽질을 시작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으니 이때부터 그의 전 인생을 건 모험이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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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규회장은 개척사업에 앞서 협재굴의 원형보존에 착수했다. 1971년 부지 매입 당시 협재굴 내부는 몰지각한 자들이 종유석과 석순을 마구 채취하여 훼손돼 있었다.
그는 1971년 7월 1일부터 종유석과 석순의 제자리 갖다 놓기 운동을 전개하여 학교, 기타 공공단체 또는 소장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동굴보호의 중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19점의 종유석과 석순을 사들이거나 다른 물건과 교환하여 동굴내의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이러한 동굴 보호운동은 지상(紙上)에 보도되어 협재굴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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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송봉규회장은 협재굴·해수욕장·비양도 일대를 하나로 묶는 관광단지를 조성 하려는 원대한 구상아래 5개년 계획으로 「한림지구 종합관광개발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관광산업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투자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것」만을 보여줘서 이삭이나 주워 보자는 것이 관광업계의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광개발 계획은 제주도에서는 초유(初有)의 임해관광단지 조성계획이어서 중앙지에도 일제히 보도되었고, 도행정당국으로부터도 고무적인 반응을 얻어 자금지원까지 약속을 받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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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송봉규회장은 사업의 출범을 앞두고 만반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중 첫번째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으니,행정당국으로부터 뜻밖의 통첩이 날아 들었다.
개발계획지구는 「사방림지구인데다, 문화재보호법 및 학교 보건법과 도시계획법 등의 적용을 받게되어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한 인간이 마련한 개발계획은 법의 적용이란 큰 암벽에 부딪혀 그 시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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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관광개발계획이 벽에 부딪히자 새로운 구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확보한 토지는 전부 사막지대일 뿐 아니라 대부분이 사방림지구였기 때문에 관계법에 저촉되어 개발할 수 없었다.
사방림지구가 아닌 개발 가능한 곳은 불과 33,000㎡뿐 이었으며 그것도 곳곳에 무덤이 있고 암석과 돌맹이들이 깔려 있으며 가시덤불이 얽혀 있는 불모의 황무지였었다. 그는 우선 가시덤불과 바위, 돌멩이등의 제거작업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이에 호응해서 일을 해주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호미와 낫을 번갈아 쥐어 가시덩굴을 파헤치다가도 비바람이 치면 비를 피할 나무 한그루가 없었고 북서계절풍에 의하여 바닷가에서날아오는 모래는 눈을 뜰 수 없게 하였다. 이러한 외로운 작업을 하던 중 그는 이 불모의 땅을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옥토로 만들어 아열대식물원을 조성해 보자는 구상을 하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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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2월 송봉규회장은 10여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그가 직접 호미와 낫을 들고 지 게를 지거나 리어카를 끌면서 모래밭을 덮고 있던 가시덩굴·띠풀·암석·돌멩이를 말끔히 치웠다.
또한 이곳에서 15Km 거리에 있는 한림읍 금악리에서 비옥한 흙 2,000트럭을운반하여 모래밭에 깔고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농토를 만들었다.
1차 복토 작업이 끝나자1,000㎡단위로 방풍림을 조성하고 가뭄에 대비하여 제주도에선 처음으로 스프링쿨러를 시설하여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기반을 다져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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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972년 4월에 처음으로 소철종자 1만개를 비롯한 와싱톤야자·카나리아야자· 당종려·로베리니 등의 종자를 일본에서 수입하여 파종하였다. 그러나 원래 불모의 땅이었기 때문에 이식한 묘목의 활착(活着)이나 파종한 종자의 발아(發芽)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새벽부터 직접 물을 주고 등짐을 지는 등 정성을 기울인 결과 드디어 묘목의 활착과 종자의 발아에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집착과 피땀 어린 노력은 마침내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불모의 황무지를 옥토로 탈바꿈 시키는 기적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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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일본동경의 느티나무 가로수를 보고 난 후에 제주도에 옛적부터 심어져 도민의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바닷바람에도 강한 느티나무를 도민에 보급시켜야겠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느티나무 종자는 파종하더라도 발아시킬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생각이었다.
그는 식물학자를 찾아 다니며 자문을 얻어 확신이 서자 느티나무 종자를 파종하여 끝내 그 발아에도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1만 그루의 느티나무 묘목을 도내의 곳곳에 가로수와 조경수로 공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곳 모래밭은 중성인데다 배수와 통풍이 잘 되므로 각종 채소류의 재배도 가능하리라는 착안 아래 마늘·딸기·토나토 ·참외등을 재배하여 성공하였고 소나무 사이에 심은 감귤나무와 복숭아나무에서 알은 굵지 않지만 당도가 높은 열매를 수확하게 되자 유실수 재배에 대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송봉규회장에게는 채소재배가 본래의 목적일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종합관광지로 도약하게 될 때를 기다리며 개발계획서를 하나씩 손질해 나갔다. 1973년 4월에는 장차휴게소가 들어설 자리와 동굴진입 예정로를 확정지어 그곳에 와싱톤야자·카나리아야자·선인장 등을 심어 아열대식물군을 조성하면서 그는 쉴 때도 꿈 꿀때도 나무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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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 문화재보호를 위한 울타리축초·도로보수 ·관상수의 식수 등 치밀한 계획 아래 그는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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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규회장이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관광단지 조성의 기회는 왔다. 즉 1982년 공원법이개정되어 관청이 아닌 개인도 공원을 조성할 수 있게된 것이다.
그는 즉시 행정당국에 공원조성사업을 신청하여 1982년 9월 15일 한림도시공원조성사업의 허가를 받았다. 이제 의욕적으로 관광단지 조성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는 망설임 없이 사제를 털고, 제주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하나씩 공원 조성을 진행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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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재굴·쌍용굴 지대가 천연기념물 236호로 지정된 후 일반에게 공개한 것은 협재굴 109m 뿐이었다. 그것도 카바이트로 불을 켜서 관람객에게 구경시켰으며, 1981년 9월에야 비로소 동굴내부에 전등을 가설하였다.
1982년 송봉규회장은 이미 그가 발견하고 탐사한 바 있는 미공개의 동굴을 발굴하여 협재굴과 연결시키므로서 관람객의 편의를 도모해야하겠다는 생각 아래 매몰된 쌍용굴의 발굴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국의 허가없이는 발굴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문화재 관리국장의 승인을 받고 동굴내의 모래 제거와 입출구의 정화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헬멧을 쓰고 직원들의 선두에 서서 직접 괭이와 삽을 들고 낙반 등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한 발자국씩 모래를 파헤쳐 나갔다. 작업도중 지하의 대석주를 발견하였다. 이 곳은 옛날에 사람의 지혜를 높여주는 지혜의 신이 살고 있었으며 17세기 중엽에 생존했던 월계진좌수(月溪秦座首)도 그 신으로부터 의술을 배워 명의가 되었다는 전설에 의하여 이 석주를 지(智)의 석주(石柱)라 불렀다. |
그리고 이 동굴은 동굴내부의 형태가 두마리의 용이 빠져나온것 같다고 하여 쌍용굴이라 이름지었다.
드디어 1983년 3월 전장 400m의 쌍용굴과 이미 공개중인 협재굴을 연결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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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방문객의 편익을 도모하기 위한 주차장(1983년),쌍용각휴게소(1983년), 다화원휴게소(1984년), 공원안내소(1985년), 야자수식당(1986년), 안내방송시설(1986년)을 갖춰나가는 한편, 식물재배를 위한 물 문제 해결을 위해 지하수를개발하여 고가수조를 설치(1985년)하고, 아열대식물원 내에 유리온실로 열대식물관을 신축(1985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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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사라져 가는 제주 전통 초가의 보존을 위하여 송봉규 회장은 허물어버리는 초가를 공원안에 이설할 구상을 하고 총 10동, 건평 2백평으로 계획하여 행정당국의 건축승인을 받았다.
낡은 초가를 구좌 평대, 한림, 애월 봉성 등의 농가에서 매입하고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10동중 9동의 건평이 도합 120평으로 나머지 1동은 80평으로 해야만 하게 되었다. 제주도의 실정상 초가집은 보통이 16평 이하이기 때문에 80평짜리 초가집은 상상도 할 수 없는상황인지라 군청에 허가 내용을 변경하여 줄 것을 요구했으나 군에서는 애초에 승인된 건축허가사항에 부합되게 하지 않으면 준공검사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난감한 상황에서 당시 총무부장이었던 송상훈 사장의 명안(名案)으로 한국 전력에서 불하(拂下)하는 폐전주를 사다 초가의 대들보와 기둥으로 삼아 80평 초가집을 짓기로 하고 공사를 계속 진행하게 되었다.
뜯어버린 고가(古家)를 매입하고 이설하는 데는 나무조각 하나, 돌담 하나 빠짐없이 운반해왔다. 재건축과정에서 낡은 것은 교체해가며 일을 하자니 새 집짓기 보다 오히려 어렵고 공사진척도 또한 느렸으나 끈질긴 노력으로 1987년 12월에 총 10동의 민속촌이 준공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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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부터 야자수 씨앗을 파종하여 15년간 정성들여 가꾸어 온 아열대식물원 조성이완료되었다. 워싱턴야자원, 카나리엔시스원, 종려원, 제주산야초원, 재래종 감귤원, 키위과수원, 향토의 숲, 관엽식물원, 분재원, 화초원, 선인장원, 열대식물관 등 16개 정원으로이루어진 식물원에 식물마다 이름표를 만들어 붙이고 드디어 1987년 9월 1일 일반에 공개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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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놀이시설 5종 신설(1988년), 돌하르방식당 영업허가(1988년), 전선지중화 작 업(1988년), 버드하우스휴게소 신축(1989년), 기사휴게소 신축(1990년), 관리사무소 신축(1990년), 전시관 및 실내사격장 신축 (1991년)등 공원시설을 설치 운영하는 한편 주요 관람로 인트로킹블록 포장 공사(1995년)를 완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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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화산폭발시 형성된 다양한 형상의 현무암, 화산탄과 각종 용암석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한데,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제주특유의 수석과 국내·외의 다양한 수석 등 500여점을 상설 전시하는 재암수석관을 1996년 10월에 개관하게 되었다. 대부분이 송봉규회장이 평소 소장해 오던 수석들로서, 송회장의 아호(雅號)를 따서 재암수석관(財巖水石館)이라 명명(命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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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열대 식물원내에 분재정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작품의 수도 늘어나고 수폭도 커져 전시 공간이 점점 비좁아질 뿐만 아니라, 분재를 잘 배치하여 관광객들에게 한층 나은 미적 감각을 제공해주기 위해서는 공간의 확대는 필수였다.
그리고 제주도는 석다(石多)의 고장이므로 명석(名石)을 골라 분재와 함께 전시하면 멋진 전시장이 될 것으로 여겨 '제주 석·분재원'이라 이름 짓고 공사를 진행하기 시작하여 분재원터를 결정한 후 소나무 간벌과 전정을 해 주변 정리를 말끔히 마친 후 분재를 진열하게 되었다.
이어서 자연석을 진열하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며 돌을 수집하던 중 이제는 제주석 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명석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브라질, 말레이시아, 중국 등 세계 각국의 돌을 구입· 전시하여 제주 석·분재원을 1997년 2월에 공개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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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어린이 놀이 시설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새가있는정원으로 새로 단장하여 1999년 12월에 개장하게 되었다. 놀이시설로 사용하던 시설물을 활용하여 울타리를 치고 그물을 씌워 회전보트가 있던 자리는 원앙새장으로, 모노레일 사이클이 있던 곳은 타조장으로, 관람차가 있던 곳은 꿩과 공작새장으로 변경하였다. 이외에도 백한, 황금계, 앵무새 등 여러 종의 새들을 들여와 새가있는정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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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에도 조그마한 연못에 몇 종의 수생식물이 있었지만 수생식물원으로서의 제대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규모있는 연못이 필요하였으며, 이에 연못공사를 진행하게 되어 2002년 1월에 완성하게 되었다.
통상적인 연못 공사는 땅을 파내고 바닥에는 콘크리트 타설, 방수 작업 등의 일련된 공사가 필요하겠지만 이 곳에 조성되어 있는 연못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천연 암반 위에 있는 모래를 걷어 내고 암반의 갈라진 틈새들을 일일이 손으로 메꿔서 방수작업을 한 후 물을 채워 놓는 방식으로 조성한 자연 친화적인 연못이라 할 수 있다.
연못 공사를 마친 후에는 연꽃, 수련, 어리연꽃, 꽃창포 등의 다양한 습지식물을 수집하여 재배하였고 이러한 결과 다양한 수생 생물들이 서식하는 새로운 자연 생태계가 마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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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큰 식물을 재배·전시하기 위하여 높은 온실을 신설(1998년)하였고, 우천시 동굴 바닥에 물이 고여 통행에 큰 지장을 초래함에 따라 관람객 통행에 도움을 주는 한편, |
관람로 이외 지역의 출입은 통제하기 위하여 문화재 관리 당국의 허가를 받아 동굴 관람로 제주석 깔기 작업(1999년)을 하였다. 또한, 우천시 노면 유실을 방지하고 관람객 통행에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배수가 잘 되는 제주석을 이용하여 민속촌 관람로를 포장(2001년)하였고, 다양한 묘목·화훼재배를 위하여 육묘장을 신설(2002년)하였고, 노후한 제주산야초원을 철거하고 새롭게 개축(2003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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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조성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풀한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한덩이에도 송봉규회장을 비롯하여 직원들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고 어느 한 구석에도 그들의 땀을 흘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30여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막지대였던 불모의 땅에 각종 수목이 풍성하게 자라서 이제는 국제적인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는 별천지로 탈바꿈하였으니 실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낳은 것이다.
한림공원이야말로 그들의 청춘을 몽땅 털어바친 피땀어린 노력의 대가라고 아니 할 수 없으며 한 인간의 집념에 찬 노력이 얼마나 위대한 결실을 가져오는가를 보여주는 산 증거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30여년 동안 송봉규회장은 시설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개인 재산을 매각처분해야 했고, 관람료 수입은 관리비에 충당한 후에 남은 돈을 모조리 시설에 재투자하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가정생활에서는 오히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뿐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만류와 비웃음을 견디어야 했고, 때로는 터무니 없는 오해와 중상을 물리쳐야 했으니 공원조성과정에서 사업추진을 포기하려고 망설였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천신만고(千辛萬苦)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직 우직하리만치 굳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집념과 의지가 있었기에 갖은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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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소암(素菴)현중화(玄中和) 선생의 친필 휘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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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림공원은 열대·아열대식물원, 협재굴·쌍용굴, 제주도 민속촌 재암민속마을, 제주 석·분재원, 재암수석관, 새가 있는 정원, 연못정원 등 다양한 볼거리를 갖추고 있다. 또한, 돌하르방식당(토속음식), 야자수식당(해산물), 버드하우스휴게소(경양식)등의 음식점과 가격정찰제로 제주특산기념품 쇼핑을 할 수 있는 쌍용각, 다화원휴게소가 있다. 봄에는 왕벚꽃, 튜울립축제, 새우란전시회, 여름에는 수국전시회, 수생식물전시회, 가을에는 국화축제 등 다양한 이밴트를 마련하여 년간 120만명에 달하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한림공원의 조성은 여기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중단없는 개척정신을 실천하여 방문객들에게 큰 감동을 선물하는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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