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7. 고난주간 특별 큐티
이사야 51:12 ~ 23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을 마시지 못하게 하리라
관찰 :
1)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 12절.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 이스라엘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언제나 위로가 필요한 존재였으나 그 위로의 필요를 망각했습니다. 더구나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된 이들은 철저히 위로가 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실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여호와 한분 뿐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시면 다른 도움은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다른 그 어떤 많은 도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그들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도우시는데, 하나님 외의 다른 존재, 어차피 죽을 존재인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의 염려를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 13절.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실수이자 실패는 하늘을 포함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창조자,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자 세상의 염려가 그들에게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압제자의 누름에 대해 하루 종일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학대자의 분노가 있을 지라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런 것들을 없애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 14절.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 => 하나님은 포로 된 유다를 풀어주실 것을 다시 약속하십니다. 죽지도 아니하고, 구덩이 곧 함정에 빠지지도 않고, 먹을 것이 떨어지지도 아니하도록 도우실 것을 언약하시고 있습니다. “결박된 포로”(צֹעֶה, 초예)의 문자적인 뜻은 ‘한 쪽으로 치우친 것’ 혹은 ‘기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담겨진 액체를 따르기 위해서 기울어진 그릇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포로가 되어 허리를 구부린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희화한 표현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속히 놓이게 되는 구원의 약속은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승리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기도 합니다.
- 15절.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는 직역하면 ‘그 물결이 뛰는 바다를 나눈 자’이고, ‘꾸짖어 뛰는 파도를 잠잠케 한 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바다가 흉용하게 미쳐 날뛰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것을 잠잠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인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물이 불어 미쳐 날뛰는 홍해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그 사이에 길을 내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יְהוָה צְבָאֹות, 여호와 체바오트)이십니다.
- 16절.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 이사야는 세 번째 종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천지를 지으신 큰 창조의 권세를 가지고 그들을 특별히 보호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다시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 이어지는 메시지로서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이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는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2) 비틀 걸음 치게 하는 잔을 거두리라
- 17절.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 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 유다는 하나님 여호와의 분노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권하신 잔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마시게 된 잔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분노의 잔을 마심으로 받게 된 하나님의 진노에서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비틀거리게 만드는 그 진노의 잔의 취기를 헤어 나와 순종의 자리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 심히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잔을 드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주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구원의 은혜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 18절.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 진노의 잔을 마신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후손 중에 누가 나오게 되더라도 그들을 구원할 이가 나오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음을 입고, 포로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은 그렇듯이 누구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예언하신 가운데 성취되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 19절.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 “이 두 가지 일”은 정확히는 ‘이 두 가지들의 일들’입니다. 즉 두 쌍이 되는 일들입니다. 곧 네 가지의 일들이 유다에 닥쳤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의 한 쌍은 땅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황폐와 멸망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기근과 칼입니다. 유다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환란에 직면하게 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20절.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 => 유다가 포로가 되어 꼼짝없이 잡혀있는 모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분노이고, 하나님의 책망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만 그 환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취한 하나님의 분노의 잔으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 21절.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포도주에 의해서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역하는 그 악에 취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역하는 악독은 마치 술과 같이 유다를 천천히 잠식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과 같이 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할 때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게 하여 술 취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게 한 것이라는 비유입니다.
- 22절.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 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다시는 바벨론 포로와 같은 시련과 재난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로마의 침공으로 더욱 혹독한 재난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약속은 그렇기 때문에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곧, 남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시련과 재난을 겪을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시는 이러한 고난과 재난이 따르지 않도록 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 23절.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 바벨론이 유다를 정복할 때 잔인하게 대우한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다를 압제하던 자들이 이제 그대로 하나님이 보응하시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들이 세상을 압제하고, 자신들의 뜻과 생각대로 잘 먹고 잘 사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은 향후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망하는 길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잘 살아서 하나님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르침 :
1)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하나님 앞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명령에는 온전히 순종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반항하는 자들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이 이치이라면 하나님의 권세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그것이 만군의 여호와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다고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지하고, 순종하고자 애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과 변별력이 없어지고, 그냥 그렇게 섞여서 살아가게 될 따름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잊은 자들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하나님이 권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스스로 마신 잔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부러워하며 교묘히 들어온 부러움과 시기심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넘어서서 세상의 풍요도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마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씩 마셔도 결국에는 취하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길을, 천로역정을 비틀거려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 세상의 탐욕의 잔을 피하고, 그 숙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그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더 이상 마시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세상의 달콤한 포도주,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
1)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백성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들도 환란과 고난을 겪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일단 하나님의 백성들 스스로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 던져지게 되는 것도 이유가 됩니다. 그것이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저주가 되지 않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환란 날에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도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자 합니다.
2) 세상의 풍요를 탐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늘 유의하겠습니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내 옆에 있고, 내 속에 언제든지 들락날락하는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