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무율악기 ‘깽께미’에 얽힌 사연들
(작성중 : 민속 타악기 시리즈 1회)
친애하는 카페 회원 여러분!
어느 듯 혹한(酷寒)도 힘이 빠지고, 봄기운을 잠 깨우는 입춘(立春)도 다녀갔습니다. 그리고 그 입춘의 뒤를 따라 잡기라도 하듯 ‘대보름’명절이 ‘부럼 광주리’를 내려놓지도 않고 ‘쪼치바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리가든, 저리가든 ‘보름 밥 단지’조차 사라진 삭막한 세태에다 신명나게 치고 추던 ‘풍물놀이’마저 종적을 감춘 지금의 현실은 너무나 안타깝고 애달파집니다.
정월대보름날 앞동네, 뒷동네 몰려다니며, ‘깽께미’치고, ‘벅구’치던 그 시절을 반추하면서 이번 파일에는 그 시절 우리들의 민속악기 시리즈의 첫 번째 타악기(打樂器) 얘기로 [‘깽께미’에 얽힌 사연들]을 게재하여 다 함께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올해도 복되고 기분 좋은 ‘대보름’ 명절(名節) 만끽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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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깽께미’라는 무율타악기(無律打樂器)가 있다. 표준어로는 ‘꽹과리’를 말한다. “껭께미 소리가 가까버 오능 거 보이 ‘지신발끼’ 패덜이 우리 집 짝으로 몰래오넌 모얭이다”라는 용례가 있다.
“꽹과리 소리가 가까워 오는 것 보니 ‘지신밟기’ 패들이 우리 집 쪽으로 몰려오는 모양이다”라는 뜻이다.
‘꽹과리’는 지역에 따라서 매구, 소금(小金), 재금, 동고, 쟁, 깽께미, 깽매기, 깽매구, 깽쇠, 꽝쇠, 광쇠, 꽹메기 등으로도 부르며, 요즘은 이것저것 다 빼고 간단히 ‘쇠’라고 만 부르기도 한다.
깽께미(꽹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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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구’라는 말은 경상도(慶尙道) 일대에서 많이 쓰이는 편인데, ‘매구’는 ‘꽹과리’만을 지칭(指稱)하기도 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풍물을 치는 자체, 또는 대동의 풍물 굿판을 말하기도 한다.
‘매구’라는 말은 또 ‘매귀(埋鬼 : 귀신을 땅에 묻음)’가 변한 말로, ‘꽹과리’를 치는 행위에는 귀신(鬼神)이나 사악한 어떤 존재를 막아내고 쫓는 주술적(呪術的) 힘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앞에서 말한 ‘무율타악기(無律打樂器)’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회원님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타악기에는 진동체를 ‘채’로 쳐서 소리 내는 악기로 음높이가 없는 ‘무율타악기(無律打樂器)’와 음높이가 있는 ‘유율타악기(有律打樂器)’가 있다.
깽께미 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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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율타악기(有律打樂器)’는 음높이가 일정하거나, 여러 음을 내는 타악기(打樂器)로 편종·편경·방향·운라 등이 있고, ‘무율타악기(無律打樂器)’는 음높이가 일정하지 않은 타악기(打樂器)로 꽹과리·징·바라·장구·북·소고·좌고·진고·용고 등이 있다.
‘무율타악기’는 다양한 음색(音色)의 타악기(打樂器)들로 이루어지는데, 금속(金屬)으로 만든 악기, 나무로 만든 악기, 가죽으로 된 ‘북’ 종류의 악기들이 있다.
이들 악기(樂器)의 역할을 보면, ‘꽹과리’는 천둥을 의미하고, ‘징’은 바람, ‘북’은 구름, ‘장구’는 비를 의미한다. 음양(陰陽)을 나누어 구분하면 가죽으로 만든 ‘북’과 ‘장구’는 땅의 소리를 나타내고, 쇠로 만든 ‘징’과 ‘꽹과리’는 하늘의 소리를 나타낸다.
‘징(큰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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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과리’는 이들 무율악기(無律樂器) 중에서 덩치가 가장 작으면서도 소리는 가장 도드라져서 ‘풍물놀이’에서 지휘자(指揮者)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징’은 천을 뭉툭하게 감은 ‘채’로 치기 때문에 소리가 여운(餘韻)이 길고 푸짐하다. 사물(四物)들 중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고도 한다. ‘장단’의 ‘머리박’에 한 번씩 쳐 주어 전체 가락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장고’는 양손에 ‘채’를 들고 치는데, 높은 음이 나는 쪽을 ‘열편’ 혹은 ‘채편’이라 부르고, 낮은 음이 나는 쪽을 ‘궁편’ 혹은 ‘궁글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채’를 ‘열채’, ‘궁채’라고 한다.
장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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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과리’는 풍물놀이에서 지휘(指揮)를 맡기도 하지만, 박자(拍子)의 빠르기나 시작, 그리고 끝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북’은 ‘꽹과리’와 ‘장구’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터를 만들어 주고, 든든한 기둥을 세우는 역할(役割)을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꽹과리’ 등 무율타악기(無律打樂器)가 총동원되는 우리 민족 전통가락으로서의 ‘풍물놀이’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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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짝짝 짝짝’, 이 다섯 박자의 응원 장단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 국민 모두를 하나로 뭉치는 촉매제(觸媒劑)의 역할을 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나라 응원문화(應援文化)의 한 부분으로 정착된 이 장단은 다름 아닌 우리 전통 풍물가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상대대로 전래되는 ‘풍물놀이’ 가락의 흥취(興趣)가 우리 몸 속 깊은 곳으로 전해져 왔다는 얘기다. 마치 DNA 유전자(遺傳子)로 우리에게 이어져 온 듯한 살가운 우리의 ‘풍물놀이’, 그 문화(文化)의 맥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기로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응원단 아가씨
(우리나라 처녀들은 이때부터 ‘배꼽티’를 입기 시작했다)
우리 고유의 음악적(音樂的) 장르인 ‘풍물놀이’는 민족의 토속적 삶 속에서 생성되었고, 변형과 발달을 거쳐 지금의 문화적 결정체(結晶體)를 이루었다.
‘풍물놀이’는 ‘굿’이라는 이름 하에 풍물굿, 풍장굿, 두레굿이라 하기도 했고, 행사의 주체(主體)나 목적에 따라서는 마을굿, 당산굿, 걸립굿, 판굿, 마당밝기라고도 했으며, 행사시기에 따라 대보름굿, 백중굿, 호미씻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어져 왔다.
‘풍물놀이’를 ‘굿’이라고 하여 ‘세시놀이’와 함께한 것을 보면, ‘풍물놀이’에는 놀이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각종 세시명절(歲時名節) 가운데 행해져 액운(厄運)을 쫓고, 경사(慶事)를 기원하며, 한 해 풍년에 감사의 뜻을 올리는 민간신앙(民間信仰) 행사라고도 볼 수 있다.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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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풍물놀이’는 우리 민족의 토속적(土俗的) 삶의 뿌리와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 고유의 미적(美的) 감각에서 창출된 민속놀이의 기본 토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풍물놀이’는 일반적(一般的)으로 ‘농악(農樂)’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불리어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지은 우리말이 아니고,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시절 우리민족의 민족의식(民族意識) 말살을 획책하던 왜놈들이 만든 말이다.
1931년 일본인(日本人) 학자 ‘오청’이 지은 『조선의 연중행사』라는 책에 우리의 ‘풍물놀이’를 폄하(貶下)하여 ‘농사일에만 쓰는 음악’이라는 의미의 ‘농악(農樂)’이라고 명명한 것이 지금까지 전래되어 굳어진 것이다.
들판에서의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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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한 데도 우리나라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과 국악교육협의회에서는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이를 방치(放置)하고 있다가 1993년 국악 교육내용 통일안을 마련해 ‘농악(農樂)’이란 이름 대신 ‘풍물놀이’로 고쳐 부르기로 했으나, 이제는 우리 국민들조차 이에 따르지 않고 있다.
여기에다 ‘풍물놀이’는 흔히 ‘사물놀이’로도 인식이 되어 있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사물놀이’는 1978년 2월 네 사람의 ‘잽이’들이 풍물악기 중 꽹과리·징·북·장구의 네 가지 타악기(打樂器)로 만들어 낸 최초의 실내 무대극(舞臺劇) 가락인데, 이 말이 마치 전래의 ‘풍물놀이’인양 인식되어 있다.
그 전에는 ‘웃다리 풍물 앉은 반(班)’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민속학자 심우성이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붙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앉은 반’이란 풍물을 칠 때에 앉아서 연주(演奏)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웃다리 풍물 앉은 반(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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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웃다리’란 사당패들이 전국 풍물굿의 판도(版圖)를 ‘웃다리’와 ‘아랫다리’로 구분하는 지역기준을 말하는 것인데, 충청도(忠淸道) 일대를 ‘웃다리’로, 그 이남인 호남좌우도(湖南左右道)와 영남(嶺南) 등지를 ‘아랫다리’로 부른다.
‘웃다리’는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고,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라서 전국(全國)의 풍물패들이 이곳을 지나다니게 되는 지역적(地域的) 특성으로 다양한 풍물가락을 접할 수 있는 곳이고, 또한 뛰어난 예능인(藝能人)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했었다.
어쨌든 ‘사물놀이’는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傳統文化)에서 벗어난 아류(亞流)에 불과하다. ‘풍물놀이’의 기본악기(基本樂器)인 꽹과리·징·장고·북과 소고(법고)·호적(태평소, 날라리) 등을 모두 다루지 않고 있기도 하고, 그 구성원(構成員)부터가 전혀 다른 부류(部類)이기 때문이다.
취지(趣旨)와 동기가 전혀 다르고, 돈을 벌기 위한 그룹이거나, 그 목적 또한 ‘풍물놀이’가 지향하는 인보협동(隣保協同)과 주민통합의 괘(卦)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물놀이 '선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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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사물놀이’는 문자 그대로 4명이 사물(四物 ; 꽹과리, 징, 대북, 장구)만을 사용하여 ‘풍물놀이’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전래의 ‘풍물놀이’는 그 구성인원(構成人員)이 무려 40여명에 이른다는 점이다.
나팔 앞잡이 1명, 포수 1명, 기수(큰기)1명, 영기 2명, 집사 1명, 양반 1명, 파계승 1명, 각시 1명, 호적 2명, 꽹과리 4명, 징수 3명, 대북 4명, 장구 4명, 소고(小鼓) 12명으로 편성된 것이 ‘풍물놀이’의 기본인원이다.
그리고 이들 풍물패의 늘어서는 순서는 나팔·포수(砲手)·기수(旗手)·영기(令旗)·집사·양반·파계승(破戒僧)·각시·호적(號笛)·꽹과리·징·대북·장구·소고(小鼓)의 순이다.
풍물패의 기본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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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론하지만, ‘사물놀이’는 조상전래(祖上傳來)의 이름도 아니고, ‘풍물놀이’ 악기 중 꽹과리·징·북·장구 등 네 가지의 악기만 있을 경우나, ‘풍물놀이’를 할 인원이 네 사람일 경우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할 수 있는 놀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른 악기(樂器)와는 달리 무대나 바닥에 앉아서 연주(演奏)할 수 있는 악기가 이들 꽹과리·징·대북·장구 등 네 가지, 즉 ‘사물(四物)’이었기 때문에 별 의미도 없이 지은 이름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느 사물놀이패에서는 어떤 사람이 눈에 보이는 대로 숫자놀이 이름을 짓기 전에 당초의 이름을 ‘웃다리 풍물 앉은 반’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었다. 풍물을 서서 연주(演奏)하는 풍물굿의 다른 형태를 지칭하는 ‘선 반’의 반대되는 이름이었다.
앉은 반의 사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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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떻게 탄생되었든, 그 성격의 적절성(適切性) 유무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만들어진 ‘사물놀이’ 등 ‘풍물놀이’의 아류(亞流)들은 다양한 문화적(文化的) 형태로 뻗어갈 수 있는 창조성(創造性)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는 했었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에서 그런 것들은 결코 조상전래(祖上傳來)의 ‘풍물놀이’라고 할 수도 없고, 특히 양반과 파계승(破戒僧)을 통한 사회병폐의 고발과 민주적(民主的) 사회풍자 역할을 배제(排除)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 아니할 수 없다.
사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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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풍물놀이’의 편성(編成) 내용을 소개한다. ‘풍물놀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체계(體系)와 질서라고 할 수 있다.
‘풍물놀이’의 구성형태를 보면, 지역에 따라 그 인원과 편성법(編成法)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기본적(基本的)으로는 깃대․나발․꽹과리․징․장구․북과 소고(小鼓)․잡색(雜色)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꽹과리’를 치는 ‘쇠잽이’는 1~5명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대표자(代表者)를 ‘상쇠(上釗)’라고 부른다. ‘상쇠’는 직접 놀이에 출연하면서 연출자(演出者)와 지휘자(指揮者)의 역할을 겸함으로써 전체 ‘풍물놀이’를 이끌어간다.
쇠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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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쇠(上釗)’의 보조역할에는 ‘징’을 다루는 ‘징수’가 있는데, 대개 1~2명인 이들은 놀이 중 가락이 흩어지지 않도록 잡아 주는 역할(役割)을 한다.
그리고 ‘장구’를 치는 ‘장구잽이’는 2~6명 내외로 구성되어 ‘상쇠’의 지휘에 따라 가락을 연주(演奏)하고, 다양한 춤동작을 보여주면서 ‘진놀이’를 한다.
그리고 ‘북’을 치는 ‘북수’는 1~4명 내외로 구성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풍물패의 인원수(人員數)가 적을 경우로 이때는 ‘장구’와 ‘장구잽이’가 ‘북’과 ‘북수’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북수’가 1명인 경우는 주로 ‘사물놀이’의 경우다.
장구잽이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다른 지방에 비해 ‘북수’가 가장 발달되어 그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가락에 있어 ‘징수’처럼 기교적(技巧的)인 가락을 연주하지는 않지만, 악기의 무게가 가벼워 활동적(活動的)이고 다양한 춤동작을 보여준다.
필자도 향리(鄕里)에 살 때는 정월대보름 ‘풍물놀이’ 때 ‘북수’가 되어 신명나게 ‘북춤’을 춰본 일이 있다. 제법 잘 춘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북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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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고(小鼓)’, 즉 ‘벅구’는 보통 4~8명으로 구성(構成)되는데, 이들을 ‘소고잽이’라 부른다. 이들도 가락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진법을 행하지만, 가락보다는 주로 다양(多樣)한 춤동작과 ‘진풀이’에 비중을 둔다.
필자가 고향에 살 때는 이 부문에서는 가히 ‘질나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기량(技倆)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질나이’란 ‘질난이’ ‘질란이’ ‘질나니’라고도 하는데, 외동읍(外東邑) 북부지방에서는 주로 ‘질나이’라고 했었다.
‘벅구’잽이
‘질나이’란 ‘어떤 일에 대해 완전히 통달(通達)한 사람’ 또는 ‘그 분야의 능숙(能熟)한 전문가’를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질나이’란 뜻은 그 분야에 완전한 전문가(專門家)인 ‘길이 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늠 아너 다른 거너 몰래도 ‘벅구’ 하나너 진짜 ‘질나이’다”라는 용례가 있다. “그놈 애는 다른 것은 몰라도 소고(小鼓) 하나는 진짜 전문가다”라는 뜻이다.
원래의 어원은 여성들 중 성경험(性經驗)이 많은 기혼녀(旣婚女)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미 ‘질(길)’이 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질(膣)’을 사용한 경험이 많아 ‘질(길)’이 난 전문가(專門家)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그리고 옛적의 한량(閑良)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처녀보다는 성경험(性經驗)이 많은 ‘질나이’를 선호하는 예가 많았다.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는 ‘질나이’를 일본어(日本語)인 ‘긴자꾸’와 혼용(混用)하기도 했었다.
‘질나이’
어쨌든 이와 같은 체계 속에서 ‘풍물놀이’는 ‘상쇠(上釗)’를 중심으로 기수(旗手)와 풍물악기를 든 ‘앞치배’, 그리고 소고(小鼓)와 잡색(雜色) 등의 ‘뒷치배’가 함께 어우러지는 놀이로 정착되어 왔다.
‘앞치배’가 주로 악기(樂器)를 들고 선두에서 가락을 치면, 이에 맞추어 ‘뒷치배’는 후미(後尾)에서 춤과 노래로 받쳐준다.
놀이가 무르익을 쯤에는 장구, 북, 소고(小鼓) 등의 ‘잽이’들이 조화(調和)로운 질서 속에서 저마다의 장기(長技)를 보여주며 그 흥을 더하기도 한다.
풍물놀이 장기자랑
‘상쇠’의 리드 하에 한 사람씩 원진(圓陣)의 가운데로 나와 자신이 가진 최고의 풍물 기량(技倆)을 선보이는 것이다. 필자도 어느 해 대보름날 ‘지신밟기’에서 ‘벅구’실력을 유감없이 발휘(發揮)한바 있었다.
이처럼 ‘풍물놀이’는 ‘상쇠(上釗)’를 중심으로 공연자들이 각자의 역할(役割)에 충실하며, 그들의 마음을 모아 신명나는 한마당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풍물패의 각 구성원(構成員)은 전체의 조화를 생각해서 ‘상쇠(上釗)’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며, ‘상쇠’는 구성원들이 각자의 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공평(公平)하게 기회가 부여되도록 이끌어 간다.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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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놀이’의 근본 취지이기도 한 화합(和合)은 이처럼 이끄는 이와 구성원 사이의 배려(配慮)에 의한 체계와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상에서 얘기한 ‘풍물놀이’의 용어와 편성표(編成表)를 요약하면 아래 표와 같다. 표에서와 같이 민족전래(民族傳來)의 ‘풍물놀이’와 최근에 만들어진 ‘사물놀이’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풍물놀이’의 용어와 편성표
역할 명칭 |
개 요 |
기수(旗手) |
깃대를 드는 사람 |
농기(農旗) |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적은 기 |
영기(令旗) |
영(令)자를 적은 기 |
잽 이 |
악기를 다루는 사람 |
치 배 |
악기를 치거나, 극놀이를 하거나, 춤을 추며 풍물놀이를 구성해 나가는 전체 풍물패를 일컬음 |
앞 치 배 |
징, 꽹과리, 장구, 북 등 악기를 들고 가락을 치며, 춤놀이를 하는 사람 |
뒷 치 배 |
‘앞치배’의 뒤에 서서 춤이나 극놀이 또는 노래로 흥을 돋우는 사람 |
잡색(雜色) |
굿판(춤판)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관심과 참여 폭을 넓히고, 춤을 추며 흥을 돋우며, 풍물판을 대동판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 무동(舞童), 중, 각시, 양반, 포구 등 희극적인 역할 |
무동(舞童) |
잡색 중 아이 |
다음은 옛적부터 우리들의 선대들이 세시(歲時)의 흐름과 함께 절기별(節氣別)로 어떠한 이유와 목적에서 ‘풍물놀이’를 가졌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풍물놀이(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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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놀이’는 열두 달, 한 해의 흐름 속에서 그 기본 형태를 바탕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공연된다. 아래의 세시 연행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풍물놀이’는 정해진 한 해의 주기를 따라 순환(循環)하면서 정기적으로 공연일정(公演日程)이 채워져 있다.
풍물놀이 세시 연행표
월(음력) |
행사명칭 |
개 요 |
1월
(정월) |
마당밟이 굿 |
정초부터 거의 한 달 정도 마을의 호(戶)를 순방하면서 풍물놀이를 한다. 이때 곡식이나 현금을 모아서 당산제(堂山祭) 비용이나 마을의 공공기금을 마련한다. |
줄다리기 굿 |
정월 대보름에 줄다리기를 하면서 풍물놀이를 한다. |
기 세배 |
이웃 마을끼리 형제를 맺어 서로 세배(歲拜)하고 술을 마시며, 풍물놀이를 한다. 이때 서로 세배를 먼저 받으려다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
달집태우기 |
정월 보름 경에 달집을 태우며, 춤을 추고 노래하며, 풍물놀이를 한다. |
2월 |
머슴 날 |
겨울동안 쉬던 머슴들이 2월이 되면, 농사준비를 해야 하므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풍물놀이로 하루를 즐겁게 놀게 한다. |
3~4월 |
화전놀이 |
부녀자들이 꽃잎을 따서 화전(花煎)을 부쳐 먹으며 노는 몰이인데, 이날 남자들은 ‘풋잔치’라 해서 풍물놀이를 하며 따로 논다. |
5~6월 |
단오놀이 |
여자들은 그네를 뛰고, 남자들은 풍물놀이와 함께 씨름을 하면서 논다. |
모 내기 |
모심기를 하면서 상사소리를 부르며 풍물놀이를 한다. |
써레씻이 |
모심기를 모두 끝내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풍물놀이를 한다. ‘써레’도 더 이상 쓸 일이 없으므로 깨끗하게 씻어 벽에 걸어둔다. |
7~8월 |
풍 장
(백중놀이) |
김매기를 할 때 김매기소리를 부르며, 풍물놀이를 한다. 김매기가 끝나고는 농사장원을 뽑아 술과 닭죽을 먹으며, 밤새 풍물놀이를 한다. |
추석놀이 |
추석날 여러 가지 놀이와 함께 풍물놀이를 한다. |
12월 |
매구 굿 |
섣달 그믐날에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돌며 액(厄)을 물리치고, 새해에 복을 가져오기를 기원하며 풍물놀이를 한다. |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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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놀이’가 이렇게 세시(歲時)의 주기에 따라 연행된 것은 우리나라가 농경사회(農耕社會)이며, 그에 따라 제의와 풍속이 주기적(週期的)인 농경행사에 따라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의의 깊은 우리의 ‘풍물놀이’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와 6.25전쟁 등을 겪는 과정에서 많은 지역에서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진주 삼천포풍물’, ‘호남우도 이리풍물’, ‘호남좌도 임실 필봉풍물’, ‘경기 안성풍물’ 등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지역에 따라 명절이 되면, 평상복(平常服) 차림에 간이 풍물패를 만들어 술자리 뒷풀이 형식으로 엉성한 ‘풍물판’을 벌이기는 하지만, 그 절차와 방식이 모두 해적판(海賊版)에 불과하여 민족전래의 ‘풍물놀이’와는 거리가 멀다.
엉터리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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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 ‘풍물놀이’에 쓰이는 악기(樂器)들은 예나 지금이나 각자가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음색(音色)이 경쾌한 것과 무거운 것,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 음의 높이가 높거나 낮은 것 등 어떻게 보면, 서로가 달라 어울리기 어려울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풍물패의 경우 이들 악기(樂器)를 다루는 이들이 체계(體系)와 질서 속에서 화합(和合)하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너무나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있다.
조화로운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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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놀이의 리더가 포용(包容)하는 넓은 마음으로 구성원(構成員)들을 이끌어 그들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게 하고, 구성원들은 리더를 축으로 어울리는 가운데 그들의 역할을 성실(誠實)하게 다해내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합이라는 교훈(敎訓)으로 다듬어진 우리 민족의 ‘풍물놀이’는 세대 간의 벽과 지역간의 벽을 넘어 정신적 융합(融合)을 이끌어 내는 국민통합의 촉매제(觸媒劑)가 되기도 한다.
60대의 상쇠와 40~50대의 장구잽이, 30~40대의 북수, 20대의 벅구잽이, 6~7세의 무동(舞童) 등 전체 세대(世代)가 어우러져 춤추고 연주(演奏)하는 놀이판이 ‘풍물놀이’라는 것이다.
여성 벅구잽이
여기에다 이제는 옛적에는 무녀(巫女)들이나 하던 ‘풍물놀이’를 가정집 여성들은 물론 초등학교(初等學校) 여자아이들까지 동원하여 풍물단을 만들고 있다.
나아가 지금의 ‘풍물놀이’는 ‘진풀이’나 연극(演劇) 등의 요소를 가미(加味)하고, 표현영역(表現領域)을 최대한 넓힘으로써 세계를 향한 우리 문화로 발돋움하고 있기도 하다.
‘화합, 하나됨’의 기치(旗幟) 속에서 인종, 국가, 성별, 연령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한데 어울리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우리의 문화(文化) ‘풍물놀이’ 속에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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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필자의 풍물놀이 이력을 잠시 소개드린다. 필자는 우선 앞서 소개한 사물(四物)은 기본적(基本的)으로 다룰 줄 아는 편이고, ‘북춤’과 ‘벅구춤’은 한때 ‘질나이’ 수준에 이르기도 했었다.
필자는 이 외에도 ‘뒷치배’ 중 ‘각시’ 역할에도 일가견(一家見)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앞서 어느 파일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제법 인기를 누린 경험(經驗)도 갖고 있다.
지난 1960년 정월대보름, 필자가 ‘각시’로 분장(扮裝)하여 참여한 풍물패가 괘릉리(掛陵里) ‘웃말’과 ‘샛말’을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할 때는 온 동네 진짜 각시들과 예비각시들(처자들)로부터 대단한 인기(人氣)를 얻기도 했었다.
그 시절 필자의 풍물놀이 ‘각시’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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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람들이야 웃기는 얘기라고 하겠지만, 당시의 필자의 향리(鄕里) 초당방 멤버와 ‘풍물패’ 중에서는 필자가 유일하게 중학교(中學校)를 졸업한 최고(最高) 학력자였다.
그리고 앞쪽 어느 파일에서 소개한 대로 필자는 지독한 염병(染病)을 앓다가 살아난 뒤라 유난히 희고 동그란 얼굴로 다소 여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코티분’을 바르고 여장(女裝)을 하고 나니 필자의 눈으로 봐도 그대로 여자였다.
‘10문7’짜리 여자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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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다란 댕기머리 가발(假髮)을 머리에 감아 엉덩이까지 늘이고, 고깔을 쓴데다 ‘문수(文數)’ 큰 여자 고무신까지 신고 보니 덩치 큰 처녀 뺨칠 정도였다.
그 당시 필자가 신었던 여자고무신은 ‘10문(文)7’짜리 흰 고무신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수(文數)’의 ‘문(文)’이란 고무신 치수의 단위를 말한다. ‘10문7’은 260mm정도 된다.
풍물판 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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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사내들이라야 ‘무지렁이’와 ‘머슴’투성이였던 ‘깡촌’인지라 인기(人氣)를 얻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 안에 만석꾼의 집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은 경주읍(慶州邑) 내에 거주하고 있어 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농투산이’에 ‘무지렁이’들뿐이었다.
필자의 ‘지신밟기’ 풍물패가 옮겨 다니는 집집마다 새댁들과 다 큰 처자(處子)들이 울타리 사이나, ‘정지문’을 닫은 부엌에 숨어 필자의 모습을 훔쳐보기 위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곤 했었다.
그 시절 처자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후쯤 필자의 무작정(無酌定) 상경(上京)으로 반세기(半世紀)가 지난 지금까지 그때의 그녀들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당시로서는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천리타향(千里他鄕)으로 ‘개쪼가리’를 했고, 그녀들도 모두 울산공단(蔚山工團)과 부산으로, 그리고 혼인을 하여 향리(鄕里)를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거의가 향리(鄕里)를 떠나버리기도 했지만, 많이 죽기도 했고, 어쩌다 동창회(同窓會) 자리에서 만나보아도 피차 너무 늙고 변해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 시절 필자와 그녀들이 서로 좋아했던 여자애들
(지금은 모두 필자보다 한두 살씩이나 많은 72세와 73세의 ‘할망구’들로
모두들 영감들과 사별한 과부들이다. 1년에 두번씩 개최하는 동창회에서
만나기만 하면, 꼴에 늙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하고 있다고 자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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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깽께미’ 얘기를 시작한다. ‘깽께미’는 놋쇠로 만든 작은 타악기(打樂器)의 한 가지로 풍악(風樂)놀이에서 중심악기로 쓰이는데, 실제의 놀이에서는 ‘깽께미’나 ‘깽께미를 치는 사람’을 ‘상쇠(上釗)’라고 하고, 그 다음 ‘쇠잽이’들은 부쇠(副釗), 종쇠(從釗), 끝쇠(막쇠)라고도 한다.
그리고 ‘상쇠(上釗)’는 땡땡한 음색(音色)에 높은 소리가 나는 ‘꽹과리’를 주로 사용하고, ‘부쇠(副釗)’ 이하 다른 ‘쇠잽이’들은 이보다 부드러운 음색에 소리가 낮은 ‘꽹과리’를 쓴다.
깽께미(꽹과리 ; 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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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樂學軌範)’에 의하면 ‘깽께미’는 용두(龍頭)를 새긴 채색한 손잡이를 끈에 메고 붉은 칠을 한 망치로 친다고 적고 있다.
지방에 따라서는 음색(音色)이 강하고 높은 것을 ‘수깽매기’라 하여 ‘상쇠(上釗)’가 치고, 음색이 부드럽고 낮은 것을 ‘암깽매기’라 하여 부쇠(副釗)가 친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대나무의 뿌리에 붕대를 감고 그 위에 가죽을 씌운 뒤 다시 대 뿌리 위에 둥근 나무 판을 달아서 치는 것을 ‘꽹과리채’라고 하며, 여기에 삼색 또는 오색 천을 장식(裝飾)으로 다는 것을 “너설”이라 이름 한다.
꽹과리와 '채'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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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과리’는 다들 아시는 대로 놋쇠로 만든 둥근 모양의 악기(樂器)로 지름이 20cm 내외이다. ‘징’보다 크기만 작을 뿐 생김새는 똑 같은 모양이다.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에 쓰일 때는 ‘소금(小金)’이라 하고, ‘풍물’에 쓰일 때는 ‘깽과리’라고 한다.
예전의 군악(軍樂)에서 ‘꽹과리’는 ‘북’과 더불어 공격의 신호로 쓰이기도 했다. ‘꽹과리’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중국에서 만들어져 신라(新羅)시대에 건너왔다거나,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에 왔다는 등의 이야기들이다.
어쨌거나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서 쓴 것은 아니라는 말이겠지만, 우리 시골 동네마다의 할아버지들이 중국의 최고수(最高手)보다 ‘꽹과리’를 더 잘 친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니 굳이 ‘꽹과리’의 원산지증명(原産地證明)이나 신토불이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쇠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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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기에서 ‘꽹과리’의 종류(種類)를 알아보기로 한다. ‘꽹과리’의 명칭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10여 가지나 되나, ‘꽹과리’의 종류는 막쇠, 특매구(特釗), 은쇠(銀釗), 금쇠(金釗) 등 네 가지로 구분한다.
‘막쇠’와 ‘특쇠’는 값이 싸고 흔히 볼 수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꽹과리’의 안쪽 면에서 ‘전두리’의 안쪽이 시커먼 색이라 거기 손을 넣고 10초 정도만 치면, 손가락은 물론이고 손바닥까지 시커멓게 변하는 것이 ‘막쇠’나 ‘특매구’라 부르는 ‘꽹과리’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두리’는 둥근 그릇의 아가리에 둘린 ‘전’의 둘레 또는 둥근 뚜껑 따위의 둘레의 가장자리를 말한다. ‘주변(周邊)’이라는 말도 된다.
‘은쇠(銀釗)’는 은(銀)을 약간 넣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보통 안쪽 가운데쯤에 한글로 “은”이라고 쓰고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것이다. 그런 표시가 없다면 역시 ‘전두리’를 보고 구별한다.
은쇠(銀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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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쇠(銀釗)’는 ‘막쇠’와 달리 ‘전두리’ 안쪽 검은 부분도 깎아 내서 매끈하고 빛이 난다. ‘은쇠(銀釗)’가 나온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쇠의 재질(材質)이 약해졌다거나 얇아져서 쟁쟁거리는 것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금쇠(金釗)’는 쇠의 바깥 복판이 거무튀튀한 것과 ‘은쇠(銀釗)’와 비슷한 것의 두 종류가 있다. ‘전두리’ 안쪽은 ‘은쇠’처럼 깎아 냈는데, 두들겨서 만들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며, 좋은 것은 음색(音色)이 높아서 멀리 퍼져 나간다.
‘쇠’의 안쪽 복판을 보면 약간 붉은 빛이 보이는 것도 같아 장사치들은 정말로 ‘금(金)’을 넣어서 만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이라 쓰여 있다고 해서 틀림없이 ‘금쇠(金釗)’라고 믿을 수는 없다.
금쇠(金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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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장구’ 가죽에서 ‘품질보증 개가죽’ 도장이 찍힌 가죽은 90% 가짜이듯, 그보다야 덜하지만 도무지 ‘꽹과리’답지 않은 소리가 나는 실패작(失敗作)들의 안쪽에 ‘금’이라고 써서 비싸게 파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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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꽹과리’의 역할을 알아본다. ‘꽹과리’는 홀로 놀기도 하지만, 혼자 놀게 되면 놀이판을 망쳐버리기도 한다. 고음(高音)인 데다가 다른 악기(樂器)들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꽹과리’를 치는 ‘쇠잽이’는 판 자체를 이해하고 파악(把握)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맡길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꽹과리를 치는 쇠잽이 중의 ‘상쇠’는 다른 악기(樂器)들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아야 할 수 있는 어려운 역할(役割)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상쇠’는 다른 악기(樂器)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유념(留念)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악기들이 화려(華麗)하게 자랑하는 대목이라든가 멋진 장면들에서는 바로 그 장면, 혹은 그 사람을 띄워줘야 하는 소임(所任)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매사에 혼자 잘났다고 떠들어대면 그만큼 알아주지도 않지만, 다른 사람을 잘났다고 칭찬(稱讚)하고 이끌어 줌으로써 자기 자신도 더 빛이 난다는 평범한 진리가 ‘꽹과리’에도 적용(適用)되는 것이다.
여성 쇠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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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렇기 때문에, ‘꽹과리’는 세게 쳐서는 안 된다. 풍물악기(風物樂器) 중에 가장 작은 것이 ‘꽹과리’지만, ‘쇠’ 하나만으로도 수십 명을 이끌 수 있는 터라 여럿이 치면서 서로 소리 크기를 자랑한다면, 그 소리는 ‘꽹과리’ 소리가 아닌 말 그대로의 쇳소리, 잡음(雜音)이요 소음일 뿐이다.
낮게 낮게 치다가 필요할 때에 강하게 쳐야만, 그 효과는 극대화(極大化)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힘을 빼고 슬금슬금 치는 것이 아니라, 편하게 자연스럽게 치면 된다.
‘꽹과리’는 풍물을 연주(演奏)할 때는 ‘고동박’을 짚기도 하지만, ‘고동박’을 ‘엇박’으로 흘리고 ‘북’이나 ‘장구’의 가죽소리를 키움으로써 더욱 흥을 높이기도 한다.
여고생 풍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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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주로 ‘분산박’을 자유롭게 연주(演奏)하기 때문에 ‘부침새’와 ‘시김새’, 특히 ‘발림’이 좋아야 잘 하는 ‘꽹과리’라 할 수 있고, 가락의 운용(運用)에 있어서 내고 달아서 맺고 푸는 기교(技巧)가 뛰어나야 신명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침새’는 가락을 밀고 당기는 기교(技巧), ‘시김새’는 묵은 김치처럼 가락을 속으로 삭여 표현(表現)하기, ‘발림’은 살살 비위를 맞추어 달래어 치는 자세(姿勢) 또는 그 춤을 말한다.
다음은 ‘꽹과리’를 치는 사람들의 명칭과 역할을 구체적(具體的)으로 알아본다. 하나의 풍물패에서 ‘꽹과리’를 열 명이 친다면, 그 첫 번째 사람을 ‘상쇠(上釗)’라 하고, 그 두 번째 사람을 ‘부쇠(副釗)’, 마지막 사람을 ‘끝쇠(終釗)’, 셋에서 아홉까지의 사람들을 ‘종쇠(從釗)’라 한다.
상 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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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쇠’는 옛 마을 굿(洞祭)에서는 제관(祭官)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의미들이 많이 사라진 현재에는 풍물패를 이끌고 판굿(陳法)을 만들어 가는 지휘자(指揮者)로의 역할만이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꽹과리’를 잘 친다고 해서 ‘상쇠(上釗)’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락을 치는 것은 약간 부족하더라도 판이 어떻게 짜여 있고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를 파악(把握)하고, 계획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대목에서는 조바심이 날 정도로 느리게 가다가 어떤 대목에서는 바짝 당겨서 맺거나 넘기고, 계획(計劃)은 아홉 가지를 짰더라도 시간 여유나 판의 규모(規模)를 감안해 열두 가지를 하거나, 여섯 가지만 하는 등으로 판을 적절히 운용(運用)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부 쇠
따라서 ‘상쇠(上釗)’는 어느 정도는 지도력(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야 하며, ‘꽹과리’를 치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을 흥겹게 놀리는 덕담(德談)과 사설(辭說)에 노래 몇 자락을 시원하게 뽑아 낼 수 있는 다양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상쇠(上釗)’는 지도력(指導力)이 첫 번째 조건이다. 또한 ‘발림’이 뛰어나고 ‘꽹과리’를 치는 모양까지 좋다면, ‘상쇠’를 하기 위한 ‘역사적(歷史的)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상쇠(上釗)’는 원진(圓陣)이 만들어지면 바로 원진 안으로 들어가 잡색(雜色)들과 어우러져 놀게 되므로, ‘상쇠’를 선출할 때는 위의 기준(基準)을 특히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사물놀이’나 ‘조짜배기’ 간이(簡易) 풍물판에서는 ‘꽹과리’를 칠 줄 알거나, 잘 치는 사람이 맡으면 될 것이다.
‘조짜배기’ 풍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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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짜배기란 가짜, 즉 ‘가짜배기’란 말로 형식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부쇠(副釗)’는 ‘상쇠’와 약간 다르다. 가락을 잘 치는 사람이면서 판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며, ‘상쇠(上釗)’가 신호를 보내 주면 그 뜻을 파악해서 ‘상쇠’가 요구(要求)하는 바를 그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면 된다.
‘상쇠(上釗)’가 원진 안으로 들어가 ‘잡색(雜色)’과 놀 때에는 판의 가락을 ‘부쇠(副釗)’에게 맡기면서 ‘나는 나 혼자 잠깐 놀겠다’는 뜻이므로 이때는 ‘상쇠’를 맡는 것처럼 가락을 이끌어야 하고, 풍물패를 둘로 갈라서 진행할 때는 스스로 한 편의 ‘상쇠(上釗)’가 되어야 하니 그 역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끝쇠’는 누구보다 ‘원박’에 충실한 사람이 맡는다. 가락을 잘 칠 수 있더라도 변화(變化)를 많이 주지 않으며, 자기를 억제(抑制)할 수 있어야 한다.
상 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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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럴까? ‘상쇠(上釗)’나 ‘부쇠(副釗)’가 가락을 아무리 잘 치더라도, ‘꽹과리’ 소리는 두 사람만 건너뛰면 그 앞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 ‘꽹과리’를 더 지나쳐서 ‘징’이나 ‘북’, ‘장구’들은 누구의 ‘꽹과리’에 맞춰 어느 장단에 춤을 추며 맞춰야 하겠는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끝쇠’다. ‘상쇠(上釗)’의 동작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면서, 그 호흡에 의해 ‘상쇠’와 똑같이 ‘원박’을 맞춰서 ‘징’과 ‘설장구’에게 넘겨주면, 전체는 ‘끝쇠’의 가락에 의해 놀게 되는 것이니, ‘끝쇠’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役割)인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종쇠(從釗)’들의 역할이다. ‘종쇠’들은 사실상 ‘쇠잽이’ 견습생(見習生)들이다. ‘쇠’를 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실전(實戰)에 참가하여 동작을 익히고, 자신감을 기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상쇠', '부쇠', ‘종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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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종쇠’들은 ‘쇠’를 치면서도 자기의 소리를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만약 ‘종쇠’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 ‘쇠’소리를 다투어 낸다면, 풍물판은 시끄러운 불협화음(不協和音)으로 가득해버릴 것이다.
때문에 ‘종쇠(從釗)’들은 ‘끝쇠’의 ‘원박’ 충실(充實)과 ‘부쇠’의 가락을 배우고, ‘상쇠(上釗)’의 내고 달아 맺고, 풀기, 판을 짜는 방법, 진법(陳法), ‘발림’과 모양새를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법(陳法)’이란 ‘풍물놀이’에서 풍물패가 일정한 모양을 이루며 움직이는 방법을 말하는데, 이 ‘진법(陳法)’에는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일자진, 을자진, 좌우각진, 방울진, 되풀이진, 장사진 등이 있다.
풀물놀이 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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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놀이’는 ‘상쇠’부터 ‘끝쇠’까지 가락을 내는 강약(强弱)이 같아야 소리가 듣기 좋다. 가락 머리는 아래로 가는 곡선(曲線)이고, 가락 끝은 위로 올리는 곡선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곡선 속에서 상쇠(上釗), 부쇠(副釗)는 파격을 주고, 변주가락을 다양하게 내면서 판의 높낮이를 조절(調節)하고, 가락의 구성을 짠다.
그리고 ‘종쇠(從釗)’들은 강약(强弱)의 곡선을 유지하며, 약간씩의 변주를 시험하면서 판의 흥겨움을 이끌어 내려면 어떻게 하며, 지금 ‘상쇠(上釗)’의 방식은 어떤가, 내가 ‘상쇠’라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들을 하며, ‘꽹과리’ 전체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그 뒤에서 ‘정박’의 ‘끝쇠’가 정확한 박자를 지켜 주게 된다.
상쇠와 종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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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기준과 요령(要領)을 잘 지키는 풍물판은 멀리서 들을 때 ‘꽹과리’ 소리가 판의 ‘장구’나 ‘북’소리와 어울려 찰찰 흐르고 굽이치며, 파도(波濤)를 이루는 듣기 좋은 소리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상쇠’와 ‘부쇠’, ‘끝쇠’와 ‘종쇠(從釗)’들이 자신의 역할과 소리 내는 법을 지켜서 친다면 ‘꽹과리’만으로도 아름다운 화음(和音)을 이뤄낼 수가 있다.
지금은 그 시절 ‘쇠잽이’들이 모두 딴 세상으로 가버려 이러한 기준(基準)과 요령(要領)조차 모두 사라지고 말았지만, 몇 십 년 전까지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우리들 선대들에 의해 그 기준과 요령들이 면면히 이어져 왔고, 그래서 그 시절의 ‘풍물놀이’는 그만큼 정이 들었고, 신명이 났던 것이다.
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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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자꾸만 길어져 ‘꽹과리’에 얽힌 짧은 고향얘기 한 토막을 소개하면서 파일을 덮을까 한다. 필자의 얘기라기보다는 ‘질나이 쇠잽이’에 대한 얘기다.
옛적 괘릉리(掛陵里)에 있던 필자의 생가(生家) 앞 개울가에는 부락에서 제일 큰 앵두나무가 자라고 있던 대동우물이 있었는데, 언젠가 이 우물가로 어디에서 온지도 모르는 한 가족이 이사를 왔다.
대동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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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이사(移徙)를 왔다는 것은 지금과 같이 지어진 집을 사거나, 세(貰)를 들어 이사를 왔다는 것이 아니라 집터를 사서 자기가 살던 집을 뜯어 와서 그 재목(材木)으로 집을 지은 후 이사를 왔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이사를 가는 경우도 다른 동네에 가서 미리 집터를 구입(購入)한 뒤 그 인근(隣近) 가옥에 임시로 세를 들어 살면서 자기가 살던 집을 뜯어 와서 그 재목으로 집을 지은 후 입주(入住)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대동우물 옆에 집을 지어 이사 온 가정에는 홀아비에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는 이른바 결손가정(缺損家庭)이었다. 딸애는 필자와 동갑으로 영지초등학교 같은 학년에 편입되었고, 아들아이는 미취학(未就學) 아동이었다. 아내가 몇 년 전에 사별(死別)했다고 했다.
앵두나무 우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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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처녀 뒤에 있던 앵두나무는 작년 태풍에 부러져 잘라내어 버렸다)
그리고 문제는 그 가정에는 택호(宅號)가 없다는 점이었다. 택호는 주로 아내의 친정(親庭)마을의 이름을 따서 짓는데, 아내가 죽었으니, 그 택호를 그대로 쓰기가 뭣해서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택호(宅號)가 없으면, 이름이 없는 것과 같이 피차 불편(不便)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놈’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그래서 주위에서 자꾸 택호를 지어야 한다고 조언을 하자 서당(書堂) 훈장(訓長)님을 찾아가 작명을 했는데, 훈장님은 그 집에 괘정댁(掛井宅)이라는 택호를 지어 주었다.
‘괘릉리(掛陵里)에서 제일 큰 우물(대동우물)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글자를 잘 모르는 동네 어른들은 ‘괘정어른’을 사투리식 약칭(略稱)으로 ‘괘지’라고 불렀다.
지금의 앵두나무 우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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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지, 집에 있나? 우리 집에 와가주고 ‘탁배기’ 한 ‘대지비’ 마세라.”라며 인정을 베풀곤 했었다. “괘정아, 집에 있느냐? 우리 집에 와서 막걸리 한 사발 마셔라.”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괘정어른’이 ‘풍물놀이’에서 치는 ‘상쇠’치기는 문자 그대로 ‘질나이’라는 점이었다. 당시의 어른들에 의하면, 당시의 외동면(外東面)에서는 그만큼 ‘꽹과리’를 잘 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었다.
풍물놀이 상쇠(괘정어른)
때문에 그해부터 ‘괘정어른’은 동네와 이웃마을에서 행하는 모든 ‘풍물놀이’에 ‘상쇠’역으로 초빙(招聘)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꽹과리’의 소리를 음성(音聲)으로 표현할 때는 종래(從來)의 “딴따 딴따 딴따다” 대신 “괘지 괘지 쪽조글”로 바꾸어 표현하곤 했었다.
‘괘지 괘지’는 ‘괘정(掛井)어른’의 택호(宅號)를 연호하는 말이었고, ‘쪽조글’은 ‘괘정어른’의 얼굴에 유난히 잔주름이 많아 쪼글쪼글했기 때문에 ‘쪼글쪼글한 모양’을 빗대어 붙인 말이었다.
어쨌든 이 때문에 필자들은 초등학교(初等學校) 때부터 ‘괘정어른’이 ‘상쇠(上釗)’를 맡은 ‘풍악놀이’에는 밥내 놓고 따라다니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그 어른의 외동딸도 덩달아 인기를 얻어 여러 머슴애들의 우상(偶像)이 되다시피 했었다.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를 졸업하고 말만한 처녀가 되어 옥색공단 저고리에 자주색치마를 입고, 대동우물 쪽으로 난 쪽문어귀의 앵두나무 밑에 삼단 같은 댕기머리를 앞가슴 위로 척 늘이고 앉아 있다가 어쩌다 ‘물지게’로 물을 길러가는 필자와 마주칠 때는 온 얼굴이 홍시(紅柿)가 되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괘정댁’ 딸내미
그러나 그 시절의 필자는 불행(不幸)하게도 생가 윗집의 ‘분례’ 누부야와 아랫집의 ‘계남이’ 누부야의 등살에 끼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고, 그로부터 이태 후에는 필자가 무작정 상경(上京)을 해버려 그녀와는 영영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지난 2002년, 50년 만에 그 우물을 스쳐 지나오면서 그 시절 ‘괘정댁’ 집과 대동우물을 찾아봤지만, 우물은 흙으로 매워버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괘정댁’ 집도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능갓’에서 넘어오는 도로변 쪽으로 잡초(雜草)와 함께 우거진 생울타리 대나무만 몇 포기 남아 있었을 뿐 집터조차 논배미로 바꾸어져 있었다.
지금의 그 대동우물 터
당시의 필자는 물론 괘릉리(掛陵里) ‘샛말’ 여성들의 애환(哀歡)과 사연을 그 깊이만큼이나 숱하게 간직한 그 우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너무나 아쉬워 한참 동안이나 머물러 그 시절을 회상(回想)하다가 떠나오고 말았다.
글이 너무 길어져 배경음악(背景音樂)을 게재한 후 파일을 덮고자 한다. 배경음악은 이번 시리즈가 우리민족의 민속악기인 무율악기(無律樂器)로서의 타악기(打樂器) 시리즈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들 타악기가 등장하는 풍물연주를 게재하여 감상하기로 한다.
깽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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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동네마다 풍물패를 만들어 ‘지신밟기’하던 그 시절 풍물소리를 게재하여 지금도 가슴 속 앙금으로 가라앉은 묵은 추억들을 반추(反芻)함으로써 때 묻은 향수(鄕愁)를 다시 한 번 달래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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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거 나중에 출판 하실 거지요 ?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실은 최근에 가입했답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저 멀리 2년여 전 시작 때의 것부터 훓어보고 있는데,
자료도 정확하게 고증하셨고, 무척이나 재미도 있습니다.
감사드리며, 발간 하시면 저도 한 권 사서 보관하겠습니다.
깽께미......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선배님이 벅구 질나인줄 몰랐네요....뭐 모르시는게 없고...못하는게 없으신 분이라...각시 분장까지도 하셨다면....이쁜 색시 같았겠네요.ㅎㅎㅎ 연예인으로 풀려도 성공할수 있었을낀데....주변에 인기를 몰고 다니신거 보면 보통사람과는 다르신듯....분례 누부야..계남이 누부야...혜영이 누부야....ㅎㅎㅎ 누부야만 해도 많은데..그기다 괘정댁 딸내미까지 넘보셨다니...ㅎㅎㅎ 대단하셨습니다.
그 대동우물을 보존했어야했을낀데....아까워 보이네요....쪼치바리란 말 참 오랜만에 들어 봅니다.ㅎㅎ 이번 보름은 어쩌다가 하늘도 한번 못쳐다보고 지나갔는데....오늘 밤 풍물놀이도 감상하고....지신밟기도 하고..보름달도 쳐다보고...ㅎㅎ
보통 보고서가 아니지요.....전집으로 내야 하는데....그게 숙제입니다. ㅎㅎ
지신밝기해본지가50여년이되었네요 요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