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의 『가능주의자』
논산 출신 시인이 많이 있다. 박용래와 김관식이 대표적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나희덕 시인이 있다. 1966년에 논산에서 태어나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으로는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이 있다.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예술의 주름들』이 있다.
1998 제17회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관광부), 2001 제12회 김달진문학상, 2005 제17회 이산문학상 <사라진 손바닥>, 2007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섶섬이 보이는 방 외>, 2014 제14회 미당문학상 <심장을 켜는 사람>, 2019 제19회 고산문학대상 <파일명 서정시> 그리고 2019 제21회 백석문학상 <파일명 서정시>을 수상했다.
나희덕 시인의 『가능주의자』는 문학동네 시인선 167번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천천히 읽어가면서 시인의 시에 빨려든다.
이번 시집에서 나희덕은 독자에게 불쾌감과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느끼기를 제안한다. 편재한 소외와 부조리를 모르는 채로 살면 평안할 수 있지만, 인간은 정녕 그렇게만 지낼 수 있는가? 누구도 혼자 존재하지 않으므로 타자와 함께 사는 삶의 좋음에 각자의 안녕이 달려 있다. 허나 ‘유령’과도 같이 지워진 존재들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후에야” “사람들은 간신히”, 아주 잠시 그들을 볼 뿐이다. 그러니 유령들이 진정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를 환기하고 오래 남기는 문장이 필요하며, 그들이 그들일 수 있게 할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잊힌 존재들을 융기시키는 것이 바로 시의 가능한 역할이자 의미라고 시인은 호소한다. 시집의 2부와 3부에서는 구체적인 유령들을 호명한다. “이 땅에 30년 넘게 갇혀 있는 장기수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선 위에 선」)을 말하고, “죽음의 무진장”이자 “답할 수 없는 질문의 무진장”(「묻다」)인 광주를 떠올리며, 4·3의 “피붙이 잃은 울음소리”와 “젖 보채는 울음소리를”(「이덕구 산전」) 듣는 화자는 용산 참사의 흔적이 말끔히 가신 곳에서 “너무 늦게 죽은 사람들을/ 너무 일찍 잊어버린 사람들 속에 오래 서 있었다”(「너무 늦게 죽은 사람들」). 마치 세월호의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이들은 “가장 확실한 시각적 방역을 위해”(「사라지는 것들」) 노숙자들을 지우려 한다. “탄소 발자국”(「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을 따라 점차 “사라져가는 얼음덩어리로부터”(「빙하 장례식」) 온 우리가 바로 다음 차례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시인은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을 마주하며 “피난의 장소마저 잃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피난의 장소들」)는지 묻는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방향 상실에도 불구하고 부정의 맨 마지막에서 시인은 우리의 기원으로 다시 돌아가 시작할 수 있는 의지를 발굴한다.- 출판사 서평중에서
|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대로 불편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아름다운 서정성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시에 등장하는 내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그 불편함은 어쩌면 개인의 이기주의에서 출발한 것인지 모른다.
입술들은 말한다(56-17쪽)
입술들은 말한다
자신의 이름과 고향과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에 대해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에 대해
기후위기와 정부의 부동산대책에 대해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마을을 휩쓸고 간 장마비에 대해 파도소리에 대해
얼굴도 없이 몸뚱이도 없이
격자무늬 벽에 처박힌 채 입술들은 말한다
거미처럼 분비액을 뽑아내는
저 입술들은 대체 어디서 모여든 것일까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목소리들은 서로 삼키고 뱉고 다시 삼키고 뱉고 삼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소음의 벽을 향해
중얼거린다
들리지 않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봐
귀가 먹먹해
먼 들판에 풀벌레소리 자욱해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복용해온 약에 대해
또는 피 흘리는 말, 다른 입술들에 대해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원하고 자신의 생각은 입을 통해서 밖으로 표출되게 된다.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체념을 했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이지만 입술은 늘 들먹이고 있다.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은 과연 어떤 무늬를 담고 있을까?
지나가다(44-45쪽)
저에게 남은 것은
한쪽 다리와 세 마리 개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이 피켓을 세워두고 거리에 앉아 있다
사람들은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옆에 휠체어가 놓여 있고
종이박스를 펼쳐 만든 자리에는
어린 개들이 잠들어 있다
깨어 있을 때도 좀처럼 짖는 일이 없다
누군가 그 자리에 데려다주면 종일 앉아 있다가
밤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녀
그녀는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개들을 쓰다듬는다
신의 흔적이 있다면
남은 다리일까 사라진 다리일까
그녀에게 개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지진 후에도 몇 차례 여진이 지나갔지만
오늘은 모처럼 날씨가 화창하다
꽃 진 벚나무에는 잎이 돋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저에게 남은 것은
한쪽 다리와 세 마리 개밖에 없습니다
피켓을 읽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따금 뒤돌아보지만 누구도 손을 건네지 않는다
살갗이 벗겨진 사람처럼 앉아 있는 그녀를
이 시를 읽으면서 사실 유쾌하지는 않았다. 한 사람이 다리가 없고 세 마리의 개와 함께 있는 풍경이 눈앞에 어슬렁거린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물론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잠시 입술을 열어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손을 건네지 않는 것을 본다. 사회의 차가움을 말하려 한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무겁다.
사라지는 것들(72-73쪽)
하나씩 사라졌다
정수기가 사라졌다
전기 콘센트가 사라졌다
벽에 걸린 티브이가 사라졌다
보이지 않게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방역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무엇이든
자정 넘으면
쉼터도 문을 닫고
방문자센터도 폐쇄되고
공공화장실도 잠겨 있고
급식소도 당분간 열지 않는다
역에서 잘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천막을 칠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날이 추워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지
여자들은 천막도 칠 수 없다
한밤중에 누가 덮칠지 알 수 없기에
그나마 여자화장실이 안전하다
똥 묻은 휴지가 넘쳐나고
오줌 섞인 물이 바닥에 흥건해도 어쩔 수 없지만
길에서 자는 사람들은 실제로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적은 많지 않다
도시의 섬처럼 각자 떠다니니까
그런데도 왜 하나씩 사라지는 것일까
우리를 사라지게 하려고?
멸종저항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그들이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은
정수기나 전기 콘센트나 티브이가 아니라
거기 줄을 대고 있는 존재들,
가장 확실한 시각적 방역을 위해 사라져야 할 존재들
사라지는 것들은
어느새 사라진 것들이 되었다
코로나가 앗아가는 일상속에는 가장 기본적인 삶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존재했던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노숙자들은 더 열악한 삶의 살아야만 하는데 원천적으로 그러한 사라짐보다는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그들을 누르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