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황 ※ 춘천지구전투 상황도
1.1. 1950년 6월 25일 미명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다. 북한군 제2군단은 화천-춘천 및 인제-홍천 양 접근로에 각각 1개 사단씩을 지향토록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2군단은 제2사단을 주공으로 하여 춘천을 점령하는 즉시 고도의 기동력을 발휘, 이천-수원선으로 우회 기동하여 수도권에 집중하게 될 국군 주력부대를 서남쪽에서 협공할 것을 기도하였다. 북한군 제2사단 좌측 홍천 방면에는 북한군 제7사단 및 독립전차 연대가 투입되었다.(애니메이션 보기)
1.2. 북한군 제2사단은 38도선을 돌파한지 2시간만에 춘천공격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인 모진교를 확보함으로써 그들의 계획대로 공격 당일에 춘천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제2사단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더 이상 진격이 곤란하였다. 적은 생각치도 못한 아군의 저항에 부딪혀 주공의 진출이 저지되자 홍천을 목표로 공격중인 북한군 제7사단 및 독립전차 연대의 각각 일부씩을 양구-화천 방면으로 북상시킨 후 춘천 정면으로 증원 이곳에 집중 공격을 가하여 왔다. 6월 27일 17:00경 춘천시내에 진입한 적은 계속 공격하여 철수하는 제6사단 7연대와 원창고개 일대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1.3.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의 6·25기습공격을 초전에 격퇴시킨 유일한 사단이었다. 그 예하 제7연대(연대장 중령 임부택)는 개전당시 100%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천험의 고지군이 횡격실로 이어진 수리산맥을 이용하여 38선 정면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6월 25일 적이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제7연대는 지형의 잇점을 최대로 이용하여 진지를 고수하였다. 특히 지원 포병은 정확한 집중포화로 북한군 제2사단의 주력부대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서울이 실함된 6월 28일 정오에도 제7연대는 춘천을 사수하고 있었다. 그후에도 제6사단은 춘천에 사단예비(제19연대)를 투입하여 끝까지 버티었으나 좌, 인접사단이 철수하게 되자 전선의 균형유지와 적에 의하여 퇴로가 차단될 것에 대비하기 위하여 부득이 춘천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이리하여 제7연대는 28일 오후 춘천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원창고개(춘천 남방 8㎞)-부사원고개에 제2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2. 작전경과 ※ 원창고개 작전상황도
2.1. 아군의 철수를 알아챈 적은 포병화력을 퍼부우면서 맹렬한 속도로 추격을 해와 아군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원창고개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연대장은 제2대대만을 원창고개에 배치하여 전방에 잔류한 부대의 철수 엄호와 적의 근접 추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하는 한편, 연대 주력을 원창고개 남방 6㎞지역으로 철수시켜 사현선을 확보하기로 결심하고 사단장의 승인을 받았다.
2.2. 제2대대장은 가파른 고개마루의 저지진지 앞으로 적을 바싹 유인하기 위하여 진전 200m 거리에 도달하기 전에는 절대 사격을 말도록 엄명했다. 은폐된 방어진지와 양호한 관측과 사계, 그리고 기습적인 집중사격의 실시로 적의 제1제파 공격은 저지되었다. 그러나 적은 공격을 단념하지 않고 제2제파, 제3제파의 공격을 시도했으나 아군은 효과적인 방어 사격으로 상당한 타격을 가한 후 적을 격퇴시키는데 일단 성공했다. 그리고 전선은 얼마동안 잠잠해졌다.
2.3. 11:00시경 대대 규모의 적이 다시 공격해 오고 있다는 경고가 전 진지에 전파되었다. 잠깐동안 한 덩어리의 주먹밥으로 허기진 배를 달랜후 탄약보충과 병기 손질 등, 진중 정비에 바빳던 제2대대 용사들은 다시 손을 털고 정 위치에 뛰어들었다. 가슴을 조이는 듯한 또 한차례의 흥분과 긴장 속에서 살그머니 방아쇠에 인지를 갖다댔다. 바로 이무렵 대대장은 제5중대장 김상흥 대위로부터 "적이 백기를 들고 올라오고 있읍니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자세히 전방을 관측해 보니 개간되어 있는 밭 두렁을 따라 큰 백기를 앞 세운 여러 개의 중대 대열이 여기 저기 관측되었다. "몇 차례의 공격에 실패한 적이 드디어 투항을 해 오는구나." 대대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전쟁 발발이후 3일간 춘천지역에서 줄곧 거듭된 제7연대의 전승은 이러한 가벼운 판단을 더욱 촉진해 주었다. 별명이 있을 때까지 사격하지 말 것을 지시한 대대장은 적의 지휘부로 판단된 행렬쪽으로 몇명의 안내원까지 파견했다.
2.4. 모든 장병들은 너도나도 호밖으로 뛰어나와 뜻밖에 일어난 기적같은 현실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땀흘리지 않고 일확천금을 얻은 듯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적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깨에 다발총을 그대로 메고 한 손으로 흰 수건을 흔들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군중 어느누구도 적병들의 어깨에 메어진 총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질 않았다. 드디어 20m거리까지 접근했을 무렵, 느닷없이 적은 백기를 내던지고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2.5. 원창고개에 저지진지를 급편한 제2대대장(김종수 소령)은 새벽 전방 잔류부대 철수를 바싹 뒤따라 추격해 오던 2개 연대규모의 적의 공격에 호밖에서 팔장을 끼고 투항 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제2대대 장병들은 천만 뜻밖의 돌발사태로 넋을 잃은 채, 허둥지둥 호 속으로 뛰어 들거나 적을 부둥켜 안고 뒹굴기 시작했다. 고요했던 전장은 순식간에 육박대결의 처절한 살육장으로 변했다. 대대장도 엉겹결에 적병과 맡붙어 뒹굴다가 연락병의 날쌘 사격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장병들은 기습을 당했지만 번개같은 동작으로 구축된 호를 이용, 후속하는 노출된 적병들은 사살할 수 있었고 위기를 모면한 대대장의 진두 지휘로 한참동안의 격전끝에 가까스로 적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대대는 적의 기만 전술에 의한 근접 기습사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고야 말았다. 원창고개의 방어선은 이렇게 하여 어이없이 붕괴되고 말았다.
3. 교훈
3.1. 전술적 기만작전의 목적은 적에게 허위상황 제공으로 아군 상황을 오판토록하여 아군 작전의 성공 가능성를 증대시켜 아군 부대에 유리한 반응을 조성함에 있다. 기만의 형태에는 양공, 양동, 계략 및 허식 등이 있으며 허식에는 모의, 가장 연출 등의 방법이 있다. 이중 연출은 적에게 어떤 활동이 실제활동과 다른 종류의 활동으로 보이도록 적을 기만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기만작전은 비교적 열세인 전투력을 보완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으며 인원, 물자 및 시간 절약을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전술적 기만작전의 실시여부는 기만의 용이성, 기만기회, 시간과 자원의 가용성 및 적의 예상반응을 고려하여 걸정한다.
원창고개에서 적은 그동안에 발휘한 아 제7연대의 전투력으로 보아 정상적으로 판단하고 기만 전술의 허식중 연출을 적용했다. 반면 제7연대 제2대대는 적의 기만전술에 그대로 말려 들어갔다.
3.2. 제7연대 제2대대가 범한 가장 큰 과오는 적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하지 않은데 있었다. 개인이나 부대의 투항을 막론하고 투항의 첫째 조건은 무장해제이다. 과거의 전례를 훑어 보면 부대 투항은 통상 백기를 든 비무장 연락원이 먼저 나타났으며, 개별 투항은 무기를 버리고 양손을 들고 나타났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군시절 정훈교육이었던가? 철책 들어가기전 훼바(FEBA)근무 시의 교육받던 생각이 아련히 생각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