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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스크랩 스크랩 민화 그림과 설명글
queenart 추천 0 조회 1,386 09.10.22 15: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생활속의 미술 민화....민화의 특징 7가지

 

민화


민화는 일반 대중의 실용적 요구로 인해 그려진 소박하고 꾸밈없는 그림으로, 실내를 장식하는 데 이용되었다. 따라서 민화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생활과 밀착되어 생활 공간과 사람을 하나로 맺어 주는 교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책거리란 책과 그 주변에 있는 물건을 말하며 과거에 입격하고 자손을 많이 낳아 오래도록 무병 장수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색채 구성은 화려한 당채로 칠해졌고, 구도는 원근법과 시점이 무시되어 자유롭게 그려졌다.

민화표현의 특징
1. 다시점 2. 원근법의 무시 3. 과거, 현재. 미래의 동시적 표현 4, 사물의 상호 비례관계 무시 5, 각 사물의 개별적 색채효과의 극대화 6, 사물의 평면화 7, 대칭형, 나열형 구도이다.

지난날, 실용을 목적으로 서민들이 즐겨 그렸던 그림


민화의 특징

1.소박하고 파격적이며 익살스러운 것이 특징

2.민화는 공간구성 방법이 독특하다

3.복합성과 반복성이 두드러진다.

4.민화는 모든 색채를 강렬한 색상대비로 표현하고 있다.



민화의 소재에 따른 종류


[ 화 조 ] 꽃을 중심으로 새들이나 나비등의 곤충들을 함께 그린그림.

모란, 연꽃, 봉황,오리, 화훼도,화조도,닭 그림, 나비그림등

 

[ 산 수 ] 한국의 산수와 중국의 산수를 그린 그림


 

[ 민 속 ] 무교에 얽힌 신앙과 풍습을 담은 그림

신선도, 백동자도, 십장생도, 호랑이, 잉어, 토끼, , 호렵도, 영모도,영수도,십이지도,일월십이지도

 

 

 

 

[ 교 화 ]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지주인 한국적 도덕 윤리관을 강조하는 그림

효자도, 고사도, 경직도, 평생도, 계회도, 책거리, 구운몽도, 삼국지도, 문자도

 

 

 

 

 민화의 작가는 대부분 누구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림에는 직인이나 낙관을 찍는것이 관례로 행해지고있지만
민화의 경우 낙관이 있어도 누구인지 알수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민화라는것은 대중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이고
민화의 화가가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어 어떠한 활동을 하지 않았던 이상
그사람에 대해서 알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민화를 주로 향유했떤 계층은 부농을 비롯한
서민중에 경재력이 있는 계층이 향유를 했습니다
(1) 민화 농수산물도매시장의 정의
민화란 일반 서민들이 에호하던 그림으로 생활 공간을 장식한다거나 민속적인 관습으로 제작되었던 실용화로서 한 시대를 약용식물 살아가 약용식물 약용식물는 일반 대중의 집단 사고가 몇몇 기본적인 형 약용식물과 형의 짜임새로 표현된 공에적 회화라 하겠다.
'민화'라는 국가자격증 용어를 라이센스 처음 쓴 사람은 뜻밖에도 일뼈?야나기 무네요시이다. 그는 1929년 3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민예품전람회에서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937년 2월, 일뼈?월간 <공예>지에 기고한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 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민화의 범주를 창의성보다 실용성이 강조되고 몇 장 씩 되풀이하여 그리는 그림이며 생활 공간의 장식을 주목적으로 하는 민속적인 미와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그림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화'란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민화에 대한 개념은 있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여염집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속화라고 칭했다. 요컨대 민화는 서민들의 일상 생활 양식이라든지 관습 등에 바탕을 두고 발전했기 때문에 일회적인 창작이기보다는 반복적이고 형식화된 유형에 따라 계승되어 왔으며 일상생활 공간을 장식하는 생활화로서 깊은 의미를 갖는다.
(2) 민화의 발생 배경
건국 초부터 유지되어 오던 조선의 봉건적 전제정치와 사회제도는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새로?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농민의 대부분은 소작농이었으나 자작농인 경우 그들의 재부(財富)를 어느 정도 축적할 수가 있었다. 이들은 이앙법, 이모작기술 보급, 농민적 상품생산, 타인 전지(田地)의 차경(借耕) 등으로 그들의 소득을 늘려서 부유한 농민이 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정부의 납痰?犬?공명첩을 기회로 명의상 양반신분으로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평민에게 부과되는 여러 가지 부담을 면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계속되어


*목차*

(1) 민화의 정의
(2) 민화의 발생 배경
(3) 민화의 성격과 약용식물 특징

민화는 장식적 필요에 의해 그린 그림이다
민화는 토속신앙 약용식물과 세계관이 반영된 그림이다
민화에는 주술적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민화는 집단적 감수성의 표현이다
민화는 모방한 그림이다

⊙ 민화의 특징

독특한 공간구성 방법을 들 수 있다
민화는 모든 색채를 강렬한 색상대비로 표현 유기농기능사실기하고 있다
복합성 약용식물과 반복성이 두드러진다

(4) 민화의 종류

꽃 그림
새 그림

학(鶴) 그림
봉황(鳳凰) 그림
백로(白鷺) 그림
닭 그림
원앙 그림

물고기 그림

잉어 그림
쏘「?그림
메기 그림

동물 그림

호랑이 그림
용 그림

민화의 가치
 

민화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이다.

그는 1929년 3우러 일본 쿄토에서 열린 민예품전람회에서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937년 2월 일본의 월간 [공예]지에 기고한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만중에 의해 그러지고 만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민화의 범주를 창의성 보다 실용성이 강조되고 몇장씩 되풀이 하여 그리는 그림이며 생활 공간의 장식을 주목적으로 하는 민속적인 미와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그림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화'란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민화에 대한 개념은 있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여염집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어있는 그림을 속화라고 칭했다.  

민화에 대한 정의나 민화관은 크게 두가지를 중심축으로 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더보기 참조)

하나는 민화의 제작과 사용의 범주 즉 누가 그렸고 누가 사용했으며 어떤 목적으로 그렸는가 하는 문제이며, 다음은 예술적 가치관의 문제라고 할수 있겠다.

민화는 상류계층의 감상용 그림이 못된다고 해서 회화사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례였다

일단 민화라고 불리면 이른바 정통회화와는 구별되는 회화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민화를 전반적인 회화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게 되면 민화가 가진 예술적 의미나 역사적 의미는 크게 퇴색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민화는 단지 소박하고 꾸밈없는 민중의 그림"이라는 단편적 정의에서 벗어나 민화의 형성과정이나 유통과정 그리고 민화의 내용을 형성하게 된 당시의 시대적 미의식과 전체 미술사적 맥락을 폭넓게 해석하고 이해야만 할 때이다.

 

* 민화는 장식적 필요에 의해 그린 그림이다.

생활 미술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형태로 나타나거나 가옥구조에 첨가되는 장식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병풍은 이러한 생활미술품으로 웃풍이 센 우리네 한옥구조의 결함을 보완하거나 방 안의 자질구레한 물건을 가리는 데 없어서는 살림세간 가운데 하나였다. 방안을 치장하는 도구로서 항상 주인 가까이에 놓이는 실용품인 동시에 장식품인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돌상과 혼례상을 병풍 앞에서 받았고 회갑연에서도 병풍 앞에  앉아 하례인사를 받았으며 생을 마치면 관에 담긴 시신을 병풍 뒤로 모셨다.

집안 잔치나 행사에서 반드시 거기에 어울리는 그림이 있는 병풍을 둘러쳐서 분위기를 돋구었으므로 병풍은 행사의 형식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민화는 거의가 병풍에 편집되어 집 안에 간직되었는데 병풍에 그린 민화는 그것을 둘러칠 장소나 행사의 내용에 걸맞는 것이 선택되었다.

사랑방에는 책걸이나 문자도 혹은 주인이 호방한 성품이라면 수렵도나 호랑이 그림, 안방에는 화사한 화훼도나 부귀를 상징하는 화조도, 또는 수많은 물고기가 노닐며 다산다복을 뜻하는 어해도 병풍이, 혼례의 신방에는 이러한 어해도 외에도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모란병풍 또는 탐스런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린 화조도가 제격이었다.  수연이나 회혼례 때에는 주인의 일생을 다룬 평생도를 주문하여 장식했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그림으로 분위기를 한결 북돋았다.

문살과 창호지에 여러가지 장식적인 문양이나 그림 혹은 꽃이나 나뭇잎을 덧붙일 만큼 잔잔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우리 선조들은 다락문이나 벽에도 산수화 몇 폭을 붙여 방안 분위기를 살렸다.

그외 문배그림이나 벽장식 그림에도 민화가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민화는 종이에만 그린 것이 아니다. 신부가 타는 꽃가마 덮개로 호피도라는 헝겊에 그린 민화를 사용했고 몸채에도 원앙이나 학을 조각했다.

이외에도 널판지, 대나무, 도자기, 가구, 문방구, 돗자리에 이르기까지 민화는 우리네 일상 생활공간  곳곳에 놓였으며 한국인이 살아가는 곳에는 민화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 민화는 토속신앙과 세계관이 반영된 그림이다.

민화의 특성으로는 실용성, 상징성, 예술성을 꼽을 수 있다. 순수 미술은 예술성을 앞세운다.

이와 달리 민화에서는 예술성보다는 실용성이 강조되는데 이는 민화에는 상징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 시대마다 그때에 그려진 그림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징성은 그 새대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의 민화도 그것이 그려진 시대의 시대상을 읽어내는 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민화에는 장식적 필요에 의한 것이든 주술적 필요에 의한 것이든 많은 상징적인 도상들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더욱 뚜렷이 부각시키기 위해 표현방법이나 소재 해석을 늘 새로이 했으며 이를 통해 우리의 민화는 도욱 독특하게 발전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화의 상징성은 그 지방의 문화적인 환경이나 개인적 의사에 의해 자유롭게 변형되어 첨삭되어 이제까지 볼수 없었던 전혀 새롭고 흥미있는 그림들로 나타났다.

예를들어 물고기의 생물학적 특징 즉 한꺼번에 많은 알을 낳는다는 점과 떼지어 다닌다는 점은 어해도의 '다산' 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였으며, 연못 속에 유유히 떠다니는 잉어는 출세와 부귀를, 폭포를 거슬러 뛰어 넘는 잉어그림인 '약리도'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입신출세를 상징하게 되었다.

고사나 민담의 내용을 담은 이야기를 한 가지 또는 두세 가지의 사물로 축약하여 상징적인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메기의 그림에는 두가지의 상징이 있을수 있는데 머리를 투구처럼 그린 것은 장수를 남근처럼 그린것은 다산의 욕구를 표현한 것이다.

민화의 상징적 표현은 서민들이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희노애락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그러한 의사소통의 바탕이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해 주는 역활도 한다.

가령 부귀다남.부귀공명.무병장수 등 인간으로서의 소박한 바램이 민화에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민화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동경의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옛 사람들에게는 자손의 번영과 출세는 음양의 조화, 풍수의 조화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자리잡혀 있었으므로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이러한 사상은 민화의 '청룡백호도'나 '지도화'에서 독특한 시점과 묘사법으로 나타난다.

민화의 '지도화'는 산과 집들을 화면의 한 중심에서 사방으로 둘러본 것처럼 그린다. 이는 음양오행사상에 바탕을 둔 좌청룡. 우백호나 배산임수라 하여 물을 앞에 산을 뒤로 한 바로 그 지점이 인간과 산신이 한 마당에서 어우러져 사는 공간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것이다. '지도화'는 단지 등축도법에 의한 실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개념화된 풍수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그림으로 볼수 있으며 자연과 인간이 일체가 되는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지도화와 같은 독특한 그림을 낳게한 것이다.

민화에서 표현되는 이러한 상징성들은 사회 전체에 의해 공유되기도 하지만 특수한 사회부류에서만 통용되는 것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감수성에 의해 그 상징이 변질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성이 민화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이루게 하며 민화의 아름다움과 해학 역시 이러한 상징적 표현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 민화에는 주술적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오늘날의 회화에는 여러가지의 사회적 필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감상을 위한 것이든 교화를 위한것이든 아니면 단순히 치레나 장식을 위한것이든 그 필요성은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옛그림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기능 중에서 오늘날의 기능과 다른점은 그림이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지닌 매개체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들 그림이 가진 주술적 힘이 여러가지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또 소원하는 바도 이루어 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한국인의 의식속에 자리잡고 있는 벽사구복의 사상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민화중에는 토착적인 종교와 결합된 풍습에 의해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것들이 있다.

이를 '세화'라 하며 매우 널리 그려졌다. 궁중은 물론이고 사대부들의 저택,  일반서민의 집에서 입춘방처럼 축귀나 구복의 상징으로 그린 세화를 정월 초하룻날 대문 또는 집안에 걸거나 붙이게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호랑이 그림인데 호랑이는 영물로서 악귀를 쫓을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호랑이는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에 그려진 것처럼 음양오행설로 따지자면 서쪽을 상징하는 금에 해당하고 털짐승의 우두머리이며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의 상징으로서 지상의 잡귀를 능히 물리칠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영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로선 이것이 상식이고 사실이었으며 '영적인 힘을 지닌 동물 그림을 집에 둠으로써 잡귀를 물리칠수 있다'는 믿음은 민화의 발생과 전파에 큰 사상적 기저가 되었다.

이러한 주술적인 요소를 지닌 벽사화로는 '사신도' '사령도' 용그림' '산신도'등이 대표적이다.

 

* 민화는 집단적 감수성의 표현이다.

서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장식이나 주술적 가치로 그린 그림은 곧 그들의 공통되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정통회화가 작가 개인의 예술성이나 개성 혹은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에 비해 민화에는 일반 서민의 집단적인 미적 체험이나 세계관이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표현형태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이는 민화를 완성도 높은 예술작품으로 그렸다기 보다는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그렸다는 것을 의미하며나아가서는 공통의 감수성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렸다는 의미가 된다.

민화는 곧 일반 서민들의 마음이라 할수 있으며 공감과 공동소유에서 올수 있는 쾌감을 바탕으로 그리고 감상하고 즐겼던 그림이다. 그들은 이것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법도 없이 그리고 표현하고 상요해왔다. 여기서도 우리는 민화가 서민들의 생활과 함께 숨쉬면서 형성된 실용성과 대중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여실히 느낄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이우환씨는 "모두가 서로 다른것을 갖겠다는 욕구보다는 같은것, 비슷한것을 갖다는다는데 한층더 기쁨을 느낀다. 결코 새로운것, 낯선것, 개성적인것을 원치않고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동족이고 서로 닮았다는데에서 안도감을 찾으며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될때 감동한다"고 쓰고 있다.

 

* 민화는 '뽄' 그림이다.

민화는 그 주제와 표현의 원류에 있어서 문인화나 도화서 화공들의 그림을 철저히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담아내는 내용이나 표현기법은 다르다. 이는 민화가 속칭'뽄그림'이라고 하여 일정한 본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점차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특징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즉 본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가운데 조선시대 상류층과 왕권중심으로 형성된 유교적인 세계관이 토속적이고 종교적인 민중들의 세계관으로 전이되었으며 민화가 양산되고 보급도면서 점차 서민들이 지배층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세계관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화의 형성 과정에 담겨 있는 서민들의 미의식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자연환경에 대한 순박한 감상과 소박한 생활양식 그리고 거짓없는 진솔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표현기법에서의 독특함 그리고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은 바로 서민들에 의한 여타의 예술이 드러내고 있는 미적 특질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민화의 정의

호랑이

 일반적으로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2)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29년 3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민예품전람회에서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937년 2월 일본의 월간 <공예>지에 기고 한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민화라는 용어로 부른 것은 일본 민속화의 일종인 오오쓰에, 도로에, 에마를 지칭한 것이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화란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민화에 대한 개념은 있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여염집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어있는 그림을 속화(俗畵)라고 칭했다.

  보통 민화는 "한 사회에서 생활 습속에 따라 제작된 대중적인 실용화"라 정의한다. 학문적으로 표현하자면 "민족의 신앙, 소원, 일상 생활과 정치, 사회의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한 교화, 주거공간의 미화를 위한 장식, 민중의 미의식에 직결되는 작품"을 민화라 통칭하고 있다.

  우리 회화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비전문적인 화공, 장인들이 대중의 그림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멋대로 그린 소박하고, 꾸밈없는, 그리 명성이 알려지지 않은 그림을 가리킨다. 보다 광범위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통용된 민화의 개념은 정통화 대가들의 작품을 제외한 도화서, 불교, 도교 등의 장식과 종교, 민족에 관계된 그림들도 포함하도 있다.

  민화의 특성은 일반 서민들이 공감하는 실용성, 상징성, 예술성에 있다. 또한 토착종교와 결합된 풍습에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들이 많다. 주로 상징적 표현으로 무병장수, 부귀공명, 다산, 벽사구복과 같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이 반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전후,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그림들이 우리 국민들과 구미인, 일본인 등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민화' 혹은 '민족화', '겨레그림'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민화에 대한 정의나 민화관은 크게  민화의 제작과 사용의 범주, 즉 누가 그렸고 누가 사용했으며 어떤 목적으로 그렸는가 하는 문제와 예술적 가치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민화는 상류계층의 감상용 그림이 못 된다고 해서 회화사의 일반적인 범주에서 제외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례였다. 일단 민화라고 불리면 정통회화와는 구별되는 회화라는 인식을 갖게된다. 그러나 이렇게 민화를 일반적인 회화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게 되면 민화가 가진 예술적 의미나 역사적 의미는 크게 퇴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민화는 단지 소박하고 꾸밈없는 민중의 그림'이라는 단편적인 정의에서 벗어나 민화의 형성과정이나 유통과정 그리고 내용을 형성하게 된 당시의 미의식과 전체 미술사적 맥락을 폭넓게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할 때이다.

money.gif민화의 목적

복주머니

  한국의 민화는 쓰임새와 상징이 있는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생활의 자질구레한 물품들에 장식적으로 그려지거나 가옥구조에 첨가되는 장식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민화는 병풍으로 편집되어 쓰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병풍에 그린 민화는 그것을 둘러칠 장소나 행사의 내용에 걸맞은 것이 선택되었다. 이것은 곧 민화에 부여되어 있는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박판(저고리나 치마같은 곳에 금박을 올리는 데 사용하던 판)이나 나무에 수(壽), 복(福), 다산(多産)등의 글자들이나 길상을 새겼다.

  사랑방에는 책거리나 문자도 병풍, 안방에는 화사한 화훼도나 부귀를 상징하는 화조도 혹은 수많은 물고기가 노닐며 다산다복(多産多福)을 뜻하는 어해도 병풍, 혼례의 신방에는 이러한 어해도 외에도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병풍 또는 탐스런 복숭아가 열린 화조도 병풍을 쳐서 장식하였다. 수연이나 회혼례에는 그 사람의 일생을 그린 평생도나 오래오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도 등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민화의 상징적 표현은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희노애락과 그것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세계관을 보여주게 된다.  곧, 민화에는 무병장수, 부귀공명, 다산, 벽사구복 등 인간으로서의 소박한 바램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민화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동경의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병장수 (無病長壽)

  현세를 살고 있는 인간들의 가장 큰 소망은 아마도,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일 것이다.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수 있을 것이라는, 불로장생의 믿음은, 참으로 오래되고도 끝이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망인 듯 하다.
  장수의 상징으로는 해, 구름,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천도 등이 있는데, 옛사람들은 이것들을, 시문, 그림, 조각, 생활용품 등에 즐겨 사용하였다.
  우리의 민화에서도 이러한 무병장수, 불로장생에 대한 소망을 깃들여 이 열가지 장생물을 한 화면에 배치하여 십장생도라 이름 붙여 세화로 그리기도 하고 회갑잔치를 장식하는 수연병풍으로 쓰기도 하였다.

        다산 (多産)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노동력의 다소가 곧 부의 원천이었던 이유에 다산을 큰 미덕으로 삼았다.  게다가 남아선호의 사상이 가세하여 아이를 많이 낳고, 또 그 중에서도 아들을 많이 낳아 잘 살게 해 달라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바램 이었다. 이러한 다산의 상징으로는 연꽃이나, 수십마리의 물고기가 떼를 지어 노니는 어해도, 알을 품은 잉어 그림 등이 있다.

    부귀공명 (富貴公明)

  과거에 나가 급제하고, 벼슬을 하여 이름을 떨치며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현세에 누리는 최대의 영화로 생각하였고 항상 현세의 행복을 추구하였던 민화의 주인들은 이러한 부귀공명을 소망하는 마음을 여러가지 그림에 실어 담아놓았다

  예를 들어, 꽃 중의 왕으로 일컬어 지는 모란은 그 자태의 화려함으로 인해 부귀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상징이며, 물고기그림 중에서 잉어나 쏘가리 등이 공명과 관련한 상징들이다.  어변성룡도는 잉어가 변하여 용이된다고 하여, 대표적인 입신출세를 소망하는 민화의 화제이다.

         벽사구복(僻邪求福)

  민화는 또한 악귀를 쫓는 주술적인 성격을 품고 있기도 했다. 재앙과 액운과 나쁜 병을 물리쳐 늘 행복하고 평온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러한 소망의 또 한 행태인 부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서 맥을 잇고 있다. 또 입춘에 이르면 '입춘대길' 등의 길상문을 대문 앞에 붙여서 액을 쫓고 복을 비는 마음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벽사의 그림은 정월 초하루에 선물하던 세화가 있으며, 민화의 가장 보편적인 소재인 호랑이 그림이 옛사람들의 이러한 벽사구복의 마음을 담은 민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money.gif민화의 발달

  조선후기(약 1700년 이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회화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은 사상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였다. 조선시대는 성리학과 실학의 발달로 주체적인 자존의식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가 크게 중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시켰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화원(畵員)과 문인(文人)들은 기존의 중국 산수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재 경관을 대상으로 하는 진경산수화를 발달시켰으며, 곧이어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표현한 풍속화가 순수감상화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해갔다.

  조선후기 이전까지 회화의 수요층은 주로 사대부와 문인들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농업 생산력과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은 회화의 제작 수요층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기존의 양반층 이외에 중인(中人)계층이 경제적으로 부상해 갔으며 서민들 중에서도 농업과 상공업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의 부르주아지처럼 근대사회의 주체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자신들의 재력 정도에 따라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아갔으며 그에 따라 회화의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순수감상용 회화보다 장식용 그림을 통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초(年初)에 집안에 붙였던 진경산수화를 비롯하여 요지연도, 문자도, 책거리, 화조도 같은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 그림들이 사대부가에서부터 일반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발달해갔다. 한양의 광통교(현재 광교 부근)에서는 이들의 매매가 이루어졌으며, 19세기 문헌에는 '일반 서민들이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림을 집에 붙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렇듯 저변으로 확산되어간 장식 그림들은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반영하는 새로운 시각적 통로가 되었다. 또한 사대부가의 장식 그림이 지니고 있던 전형들이 파괴되고 보다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일반 서민들의 미적 취향이 반영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민화란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민간으로 확산되어 갔던 장식 그림으로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그림을 가리킨다. 민화는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는 미숙한 기량이나 끊임없는 모방의 습성으로 인한 '작품의 질적 저하'이며, 다른 하나는 다양한 변형을 통한 '새로운 형식의 창출'이다.  전자는 회화의 수요가 저변화될 때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후자는 봉건사회의 해체기라는 조선후기의 사회가 지닌 시대적 특수성이다. 민화의 특징은 이 두가지 성격의 충돌과 결합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우리는 민화의 보편적 성격에 지나치게 치중해온 경향이 있다. 소박함이나 꾸밈없음 같은 미적 평가들은 모두 민화의 보편적 속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보편성과 함께 민화가 지닌 특수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 혹은 조선시대의 사대부가에서 향유되던 장식 그림의 전형이 민화에서 과감하게 변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낡고 고정된 형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전이되었고, 사대부나 문인들의 고사(故事)가 담겨있던 그림 속으로 민간 설화나 민간 신앙에 관련된 내용들이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왜곡과 과장, 삽입과 생략에 의한 자유로운 형식 변형을 통해 민화는 당대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과감히 표현해 냈던 것이다. 민화가 조선후기 회화사에서 진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민화는 그 종류가 다양할 뿐 아니라 단 한 점도 똑같은 작품이 없다. 이것은 그만큼 창조성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그림들이 근대적인 대량 생산의 공정 속으로 편입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민화는 다양하기는 하지만 체계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민화는 쇠퇴해 갔고 그 성과들은 중앙 화단으로 재수용 되거나 근대사회의 대중 문화로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되고 말았다. 당대의 사대부와 문인들은 이 그림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에 결코 미적으로 공감하지 않았다. 또한 민화의 담당자들 역시 민화의 발달을 체계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봉건적 모순에 도전하는 수많은 민란(民亂)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근대화가 외세의 입김 속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민화의 발전에도 치명적인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는 조선 후기 봉건사회 해체기에 성장해가던 민(民)의 문화적 대응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 안에 깃들여진 밝고 해학적인 정서와 만나면서 그 시대에 회화의 양적 발달이 가져다 줄 수 있었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money.gif민화의 특징

표현적 특징

 

민화는 공간구성 방법이 독특하다

민화는 전후, 좌우, 상하, 고저에 대한 분명하고 일괄된 시점이나 작법을 무시하고 그렸다.  즉 시점이 다양하다. 가령 호랑이의 얼굴과 형태에서 앞면과 옆면이 동시에 표현되기도 하고 사물의 겉과 속이 동시에 그려지기도 한다.

 

복합성과 반복성이 두드러진다.

화의나 그림의 주제가 일치하는 것이면 관련된 도상들을 모두 하나의  화면에 묘사한다.  반복성은 주술적인 면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는데, 똑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일종의 심리적 만족감이나 의지를 보인다

 

민화는 모든 색채를 강렬한 색상대비로 표현하고 있다.

민화는 어둡고 칙칙한 색이 거의 없고 모든 사물이 밝고 명확하다.  사물 모두의 존재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했기 때문에 붉은색 옆에 파란색을 똑같은 채도로 칠하여 어느 한 색이 다른 색으로 인해 약화되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강렬한 색상대비는 민화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다. 

 

▶ 내용적 특징

민화는 장식적 필요에 의해서 그린 그림이다.
 

  민화는 거의가 병풍에 편집되어서 집 안에 간직되었는데 병풍에 그린 민화는 그것을 둘러칠 장소나 행사의 내용에 맞는 것이 선택되었고, 문배 그림이나 벽장식 그림에도 민화는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신부가 타고 가는 꽃가마 덮게로도 이용되었다.  이렇듯 민화는 우리의 일상 생활공간 곳곳에 놓였으며 한국인이 살아가는 곳에는 민화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민화는 토속신앙과 세계관이 반영된 그림이다.
 

  민화에서 나타나는 상징성은 각 시대마다 그 때에 그려진 그림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징성은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민화의 상징적 표현은 서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희노애락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사소통의 바탕이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해 주는 역할도 해왔다.

민화는 주술적인 신앙이 반영된 그림이다.
 

  민화가 오늘날의 그림과 가장 다른 점은 그림이 일종의 주술적인 효과를 지닌 매개체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민화가 가진 주술적인 힘이 여러 가지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또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 준다고 믿었다.  민화 중에는 토착적인 종교와 결합된 풍습에 의해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이 있는데 이를 세화(歲畵)라 하여 매우 널리 그려졌다.

 민화는 집단적 감수성의 표현이다.
 

  정통회화가 작가 각자의 개성이나 세계관을 드러낸 것이라면 민화는 서민의 집단적인 미적 체험이나 세계관이 자연스럽고도 원초적인 표현형태로 드러난다.  민화는 서민의 공통적인 감수성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민화는 모방 그림이다.
 

  민화는 그 주제와 표현의 원류에 있어서 문인화나 도화서 화공들의 그림을 철저하게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담아 내는 내용이나 표현기법은 다르다.  민화는 일정한 본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가운데 점차 발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그림 속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 담겨져 있다. 때론 고급스러운, 때론 소박한, 그리고 화려하기도 하고 여백의 미가 청초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자유로운 아름다움도, 서민의 해학과 풍자도 우리그림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그림 한점 한점 그 안에는 다채롭고도 풍부한 아름다움과 우리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우리의 “민화” 안에는 우리네 삶의 짙은 향기와 정서, 가치관, 시대적 배경과 역사의 흐름 등이 담겨 있어 우리문화의 진면목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이름 모를 서민들의 그림 안에 담긴 해학적 편린뿐만 아니라 특별히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어도 투박할지언정 야무진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술적 기개와 섬세함, 그리고 삶에 대한 희망과 삶에 대한 넋두리까지…. 토속신앙과 세계관이 반영된 우리의 그림, 민화에는 실용성, 상징성, 예술성이 모든 것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풍속화로도 불리는 민화는 정통회화의 조류를 모방하여 생활공간의 장식을 위해, 또는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된 실용화로 조선 후기 서민층에 유행하였다. 대부분이 정식 그림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화가나 떠돌이 화가들이 그렸으며 서민들의 일상생활양식과 관습을 바탕에 두고 발전하였다. 민화는 회화적인 세련미는 없으나 특별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소박하고 다양하게 그려져 서민들의 생활상이 짙게 느껴지는 그림으로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식물과 문방구,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고사나 소설 등을 바탕으로 그린 고사도 등의 종류들이 있다. 예를 들어 ‘까치와 호랑이’를 소재로 한 민화의 주된 의미는 새해에는 좋은 소식, 좋은 일만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의미인데 까치와 호랑이가 신년의 기쁨과 복된 미래를 대신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민화에는 토착적인 종교와 결합된 풍습에 의한 주술적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민화는 곧 일반 서민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으며 공감과 공동소유에서 올 수 있는 쾌감을 바탕으로 그리고 감상하고 즐겼던 그림이다. 민화가 서민들의 생활과 함께 숨 쉬면서 형성되었기에 실용성과 대중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민화의 미는 무엇보다도 그 빛깔의 아름다움에 있다. 감, 주, 황, 록을 주색으로 하여 홍, 록, 흑, 백이 알맞게 곁들여지는 색조의 아름다움은 단일색상에서 보다는 색상의 조합에서 더욱 높은 격조를 빚는다. 이러한 색들은 건물의 단청이나 여인네의 옷차림과 일치되는 색감을 나타낸다. 그것은 색감이 본디 관능에 속하는 감각이고 보면 겨레의 체질에서 우러나온 색조는 민화나 단청, 의복 할 것 없이 동일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리라.
민화의 색상은 대체로 밝은 중간색이다. 중국의 당채보다는 훨씬 밝고 일본의 색조보다는 짙은 빛깔로 나타난다. 어느 민족보다도 색감에 있어 그 섬세한 면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로 백자의 흰 빛깔을 섬세하게 구분할 줄 아는 우리겨레는 민화의 색조에 있어서도 역시나 섬세한 아름다움을 빚고 있다. 그러한 색조의 아름다움은 조선조 전기와 후기의 작품 속에서 고르게 퍼져있음이 관찰된다. 이와 같이 민화는 어둡고 칙칙한 색이 거의 없고 모든 사물이 밝고 명확하다. 사물 모두의 존재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했기 때문에 붉은색 옆에 파란색을 똑같은 채도로 칠하여 어느 한 색이 다른 색으로 인해 약화되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강렬한 색상대비는 민화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다.




민화는 전후, 좌우, 상하, 고저에 대한 분명하고 일괄된 시점이나 작법을 무시하고 그렸다. 가령 호랑이의 얼굴과 형태에서 앞면과 옆면이 동시에 표현되기도 하고 사물의 겉과 속이 동시에 그려지기도 한다. 사물을 평범하지 않게, 달리 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민화는 병풍이나 문배그림, 벽장식 그림에도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새색시가 타고 가는 꽃가마 덮게로도 이용되었다. 이렇듯 민화는 우리의 일상 생활공간 곳곳에 놓였으며 한국인이 살아가는 곳에는 민화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듯 민화는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사소통의 바탕이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해 주는 역할도 해왔다.
정통회화가 작가 각자의 개성이나 세계관을 드러낸 것이라면 민화는 서민의 집단적인 미적 체험이나 세계관이 자연스럽고도 원초적인 표현 형태로 드러난다. 민화는 서민의 공통적인 감수성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고사도’는 고사와 민화, 소설 등의 내용을 간추려 표현한 그림으로, 교화용(U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또한 ‘화조도’는 꽃과 새가 보기 좋게 어우러진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민화 중 큰 부분을 차지했던 테마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암수 한 쌍이 의좋게 노니는 모습을 담음으로써 부부금술과 부부화합을 간절히 바랐던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다.



- 구운몽도(九雲夢圖)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설 ‘구운몽’ (주인공 성진이 팔선녀를 희롱한 죄로 양소유라는 이름으로 인간 세상에 유배되어 벌어지는 갖가지 이야기) 을 바탕으로 그려진 민화로 주인공과 나무들의 구도와 형상, 색깔, 선, 원근이 특이한 그림이다. 19세기 말기 작품.
- 삼국지도(三國志圖) 역시 ‘삼국지’를 바탕으로 하여 그려진 민화로 이 작품은 19세기 초기로 추정된다

 


- 연화쌍압도(蓮花雙鴨圖)는 연꽃 아래서 노는 오리와 새의 다정한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19세기 말기 작품이다.
- 화훼도(花卉圖) 바위는 남성, 석류는 여성을 뜻하며 음과 양의 조화와 부귀와 영화의 간절한 바람을 뜻한다. 19세기 초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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