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미곡상
쌀소동(1)
서울의 시전(市廛)은 종로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전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열 수 있었으며 정부에 관수품(官需品)을 공급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시전 중에서 세금을 많이 부담하는 전을 골라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다.
시전은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대신 난전(亂廛)이라 불리는 잡상인을 규제할 수 있는 금란전권(禁亂廛權)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3남지방에서 정부에 바치는 세곡(稅穀)과 서울 양반들의 소작료를 운반하는 일로 자본을 축적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강변인 서강, 마포, 용산에 근거를 두고 큰 배를 이용해 황해 바다와 한강을 오르내렸다.
시전 상인은 조선 후기부터 쇠퇴하여 경강상인들이 이들을 조종하기에 이르렀고, 서울에 이른바 「쌀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홍경래난이 일어난 지 22년이 지난 1833년(순조 33) 음력 3월 8일― 매년 찾아 오는 춘궁기(春窮期), 즉 「보릿고개」를 앞둔 때였다. 이해는 여느 해 보다 서울의 인심이 흉흉했다. 그도 그럴 것이 2월 하순부터 서울의 쌀값은 날마다 뛰어 오르더니 쌀이 품귀(品貴)해져 10여 개의 쌀 도매상 중 9개는 문을 닫아 버리고 1개만 교대로 열어 놓았다.
이 때문에 쌀을 사려고 몰려드는 인파가 길을 메우니 쌀값은 2월보다 갑절로 뛰었다.
"후유, 쌀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니 우리 같은 서민은 굶어 죽게 되었군."
"이게 모두 쌀값을 올리려는 상인들의 짓이 분명한데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어."
"우선 쌀독에 쌀 한톨 없어 밥을 지어먹지 못하니 밥 달라고 우는 애들이 불쌍해 못 보겠어."
"여보게, 이제 이판 새판이니 미곡 상인부터 요절을 내세."
"옳소."
"내가 앞장 설 테니 여러분은 나를 따르시오."
쌀값을 올리려고 쌀을 팔지 않는 데에 원한을 품은 시민들은 드디어 이날 쌀소동을 일으켰다.
이때 앞장 선 사람은 고억철(高億哲), 김광헌(金光憲), 강춘득(姜春得) 등 이었다.
"미전(米廛)은 모두 없애고, 곡식 창고는 불을 질러라."
"와 와---"
흥분한 군중들은 선동자의 말에 좇아 종로의 미전(米廛)을 모두 파괴하고 방화했다. 뿐만 아니라 한강변의 곡식을 쌓아 둔 15곳의 창고도 불태워 버렸다. 홍진길(洪眞吉)은 손에 요령(搖鈴)을 들고 난민들을 이끌기도 했다.
쌀소동에 놀란 조정에서는 각영(各營)의 군졸을 동원해 진압하려다가 실패했다. 이에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의 포교와 포졸들까지 풀어야 했다. 조정에서는 52명의 체포자 중의 주동자 7명을 그날로 효수(梟首)하였고, 중죄인 11명을 귀양보냈다. 또 27명은 태형(苔刑)에 처하고, 7명은 석방하였다.
조정에서는 형조(刑曹)로 하여금 이 사건을 조사하게 했다.
"올해는 예년보다 쌀이 한강변에 많이 반입되어 2월 중순경에는 쌀값이 하락했는데 어찌하여 쌀소동이 일어났는가 바른 대로 이야기하라."
"예, 제가 알기로는 경강상인들이 매점해 둔 쌀값이 오르지 않자 여각(旅閣)·객주(客主)등을 시켜 쌀을 쌓아 두게 하고, 시전 상인으로 하여금 호응해서 쌀값이 오르게 된 줄 아옵니다."
"허허. 그러면 언제부터 쌀의 품귀 현상이 일어났는고?"
"아마 2월 하순부터일 겁니다. 한강변 창고에 쌓아 놓은 쌀이 전혀 도성 내로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요."
"괘씸한 지고. 이 놈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하라."
이 당시 경강상인 김재순(金在純)과 미곡상인 정종근(鄭宗根)은 매점매석 죄로 사형에 처해지고, 미곡상인 이동현(李東顯)과 최봉려(崔鳳儷)는 멀리 유배되었다. 이동현은 저울을 속인 죄이고, 최봉려는 이른바 화수(和水; 물을 부어 곡식을 붓게한 것)인 줄 알면서 이를 은폐했다는 죄였다.(*)
종로의 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