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벚꽃이 만발한 1960. 4. 18. 사진 8매.(6~3)
♥. 그때 그시절 나의 일기 요약
4. 2.(토).
학교를 갔다.
학생들의 머리모양, 의복, 가방 등등 가지각색이었다.
수강신청을 마치고
인촌 김성수 선생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형과 연달(큰고모 큰아들 고종사촌)형, 큰고모님등이
충주에서 오시는 아버지, 큰어머님을 모시러 환송을 나가셨다가 오셨다.
중앙여객으로 오셨는데 짐이 많아 구루마꾼이 날랐으나 짐이 많았다.
♥. 4. 4.(월). - 학비 등등 지원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 -
신입생에게 학력 고사 시험을 보았다.
오후 늦게
아직 충주에서 오는 짐이 더 있어 구루마꾼의 힘을 빌려서 하지만
힘든 이삿짐 옮기는 작업을 해 냈다.
셋째 누이 천종(天鍾, 아명 복동)의 시누이(남편의 누이동생) 남편이 되시는
역리 정용운(후에 한수면사무소 근무, 덕산면장 역임, 현재 청주에서 거주, 향토 시인) 형님도 오셨다.
그도 우리와 함께 답십리 집에서 집에서 잠시(1~2개월) 계셨다.
아버지와 황강리 어머님의 뼈빠지는 고생 속에 돈을 모아 서울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자식을 대학 보내기 위해 모으는 돈은
어렵고 힘든 얘기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더욱이
대학교 3명, 초등학교 1명의 학비 등등을 지원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한수에 계시는 식솔님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한몸같이 움직여
농사에서 얻은 곡식은 주식을 해결하지만,
학비와 책값, 교통비, 과외 학습 그리고 일상생활의 비용은
특수작물, 상점의 운영, 소, 돼지 등 가축 사육으로 얻어지는 돈을 마련 할 수뿐이 없다.
가장 많은 고생하시는 어머님 생각에
아픈 가슴을 참고 참으며 대학교 공부를 열심하는 것이 내가 어머님께 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
4. 5.(화).
교가와 응원가 연습을 했다.
4. 6.(수). 맑음.
오늘도 교가와 응원가 연습을 하였다.
충주중학교 동기 이종수(李鍾秀)는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함께 중학교 동기 박영일(朴英一, 7~8전까지 충주에서 병광서점 운영, 충주 거주)을 만나러 갔다.
도보로 학교에서 약 35분 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신중하고 말수가 적았던 박영일은 다변자가 되어 있었고, 살아가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후 늦게 청주고 동기 상학과 신입생 오창록(吳昌祿)과
고려대학교 뒷편에 있는 개운사(開運寺)에 갔다.
김동화 선생님의 불교 교리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위 사진 설명 :
-. 충주중학교 3학년때의 박영일(박승렬)의 모습입니다.
부모님 고향은 개성이시고, 충주시 연수동에서 과수원하시던 부모님, 형님과 다복한 생활을 하다
어머님께서 계(契) 놀이에 실패를 하시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 그래도 근면한 성품과 노력으로 충주와 서울, 수원등지에서 상업을 하면서 재기하여
충주시 병광서점을 오랜동안 경영한바 있다.
4. 7.(목)
오늘도 교가와 응원가 연습을 했다.
오늘부터 종로학원에서 영어강좌를 배우기로 했다.
4. 8.(금). - 친구 김근학 찾아 옴 -
오늘도 교가와 응원가 연습 및 응원요령 등등 연습을 했다.
청주고 33회 동기이며 경영학과 입학 동기인 김정남(金正男)과 정문을 나서는데
고등학교 동기인 친구 김근학이 정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金謹鶴은 공무원시험 합격 후, 단양, 청주 내덕동 우체국 근무,
당시 보통고시에 합격하여 문교부 근무, 대학교 서무부장, 충북. 대전시 교육청 부교육감 역임하고,
현재 초당대학교 교수 겸 나주김씨 도유사, 재경 청고 33회 동문회장]
나와는 고등학교 시절 "청랑(淸浪) 크럽을 함께한 가까운 친구이다.
김근학은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 했는데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입시에 낙방을 하고 재시험 공부중이었다.
반가웠다.
근학이와 성동역까지 걸어 나왔고, 성동역 옆 경북식당에서 점심을 400 환 주고 먹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답십리 집까지 얘기를 나누며 걸어왔다.
친구는 저녁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 갔다.
위 사진 설명 :
-. 김근학(金謹鶴)은 청주고 33회 동기이며, 청랑회(淸浪會) 동아리 회원이었지요.
위 사진 설명 :
-. 김정남(金正男)은 청주고 33회 동기이며, 1960년도 고려대 경영학과에 함께 입학하였지요.
4. 9.(토)
두째 누이(化鍾, 구명 鍾善. 신당리 최경용과 결혼)가 충주에서 올라 왔다.
아들 최기국(崔基國)이도 함께 왔다.
반가웠다. 어디가 닮아도 광주이씨 외가 형제들과 비슷한 이목구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아들 최기국, 최기섭을 낳고 작년부터 이혼소송중에 있다.
위 사진 설명 :
-. 두째누님 이화종(李化鍾)과 아들 최기국(崔基國)입니다.
-. 지금은 충주시 엄정면 소재지 안씨댁으로 재가하여 아들(안희준) 딸(안희분)을 낳아 결혼하였고,
잘 살고 있으며, 2011. 12. 1일 8순이라 제가 다녀 왔지요.
위 사진 설명 :
-. 내게 두째 매형이셨던 살미면 신당리 최경용(崔慶容)입니다.
지금 충주에 살고 계시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4. 10.(일). 비, 구름.
종로학원 영어 강의를 듣고 왔다.
집으로 오는길에 세기극장(世記劇場)에서 상영하고 있는
"녹색의 장원(綠色의 壯園 : 오드리 헵번. 안소니 파킨스 주연) 명화를 감상했다.
♥. 4. 12.(화). - 부모님과 동생들 창경원 꽃 구경 -강의실 찾기 요령이 터득되지 않아 어제도 오늘도 고생을 좀 했다.
강의는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하겠다. 라는 요점만 수강 신청한 과목별 교수로부터 설명이 있었을뿐이다.
한수에서 서울 창경원 봄 꽃구경을 하러 여동생 상종(尙鍾)이만을 제외하고
아버지, 어머님, 그리고 장난꾸러기 남동생 인종(仁鍾, 별도 이름 憲鍾), 화종(和鍾)까지 다 올라 오셨다.
을지로 6가에 마중을 나갔다
택시로 답십리를 오는길에 굴다리에서 트럭과 옆을 스치며 부딛치는 일이 있었다.
모두 무사하였다. 다행이었다.
4. 13.(수). 구름
남동생 이석종(李錫鍾, 아명 鍾泰))은 1960년 4월초에
한수초 5학년을 마치고 서울 동대문구 전농초등학교 6학년으로 전학을 하여 오늘 처음으로 학교에 갔다.
열심히 1년동안 공부하여 중학교에 입학해야 된다는 각오를 다짐했다.
학교 강의 3교시가 끝나고
부모님과 남동생들 그리고 큰고모님을 인촌 김성수 선생님 동상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하였다.
우리들은 약속된 시간에 만나
학교 구내 뒷산에 모셔져 있는 인촌(仁村) 선생 묘소로 해서
개운사(開運寺)를 거쳐 시내버스로 덕수궁으로 가는 도중에
남동생 헌종은 장나꾸러기를 면치 못할 정도로 열심히 장난을 치며 다녔다.
남산(南山) 길을 따라 노량진으로 가는 중에 한강 철교를 멀리에서 보며 돌고돌아 집으로 왔다.
동생 화종(和鍾)은 조용한 편인데, 헌종(憲鍾)은 오늘 많이 돌아 다녔는데도 똘방똘방 생생하다.
잘 뛰어 다닌 것이 대견스러운데 나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위 사진 설명 :
-. 1960. 4. 14(목). 오후, 나의 손을 잡고 백화점 계단을 깡충깡충 뛰어 내려오는 남동생 이헌종이고,
이 사진은 종로 백화점 스냅부에서 찍었던 것입니다.
사진이 오래되어 선명치를 않군요.
4. 14.(목)
학교 강의가 끝나고
같은과 친구 김정남(金正男)과 함께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창경원(昌慶園)을 갔다.
부모님, 동생들과 만나 창경원 내 구경을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벚꽃 구경을 많이도 왔다.
친구 김정남(金正男)은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한수면 함암리 이순재(寒水面 咸岩里 李順載) 아저씨의 모친인 골말 할머님이
서울대학교 병원 안과에서 눈 수술 치료를 위해 입원하신 병실을 찾아 병 문안을 드렸다.
병원과 병실은 수리를 하는 중이었다. 냄새도 없었고 깨끗하였다.
종로,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과 신신백화점(新新百貨店),
그리고 파고다(탑골) 공원을 보고 집으로 돌아 왔다.
서울은 많은 사람 구경과 높은 건물을 보다가 기운이 다 빠진다.
4. 15.(금). - 부모님과 동생들 하향 -
부모님과 남동생들은 청량리에서 열차편으로 제천을 경유하여 한수로 내려 가는길을 택하셨다.
석종이와 나는 청량리역까지 나갔다.
아버지 어머님과 동생들은 서울에 꽃 구경 오셨다가 사람 구경만 많이 하시고 고생만 하시다가
시골로 내려 가셨다. 여행은 고생을 각오해야 하는 것 같다.
전에 충주에서 서울로 올때
어머님과 헤여질때만 해도 눈물을 흘리던 석종(錫鍾)이는 외로울때 자주 눈물을 흘렸지만,
벌써 어른스러워진듯 부모님 마음에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4. 16.(토). - 동생 석종에 대한 매사 신경 쓰기 -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 라고 하더니 하지 못했다.
마산사태로 인하여 집회 허가를 받지 못했다. 라고 한다.
6학년 어린 동생 석종이와 서울 생활은
주위 사람들이 어머님과 같이 따뜻하게 대해 주는 분도 없기에
석종이는 내게 크게 의지하고 지낸다.
학교 가는일도 혹시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맞지나 않나,
그리고 각 과목별 공부 하는 것도,
또한 밖에 나가 잠시 노는일도 등등 매사에 내가 신경을 써야 하며
더욱이 심리의 움직까지 잘 살펴서 돌봐야하는 부담이 항시 있었다.
위 사진 설명 :
-. 나보다 6세 아래인 남동생 이석종(李錫鍾, 1948년생)은
한수초등학교 5학년을 1960. 3월에 수료하고
1960. 4월초에 서울 동대문구 전농초등학교 6학년으로 전학하였다.
-. 동생은 누구에게도 의지 할 수가 없었고, 오로지 나에게만 의지하였다.
어려서 부모님을 떠나 있으려니
석종이의 어린 마음은 외로울때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자주 눈물도 많이 흘렸다.
-. 위 사진은 전농초등학교에서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2012. 4. 20. (금).
오늘은 옛날 일기를 요약하는 글을 올리려고 보문산행도 못하고, 朋村 李明鍾
위 사진 설명 :
-. 1960. 12월 중, 지금부터 52년전, 나의 가족입니다.
-. 뒷줄 좌측으로부터,
故人된 이복형 이완종(李玩鍾, 1941. 음. 9. 1.~ 1980년 경, 운명) ;
당시 충주고 졸업후, 항공대학 국비장학생 합격하였으나, 서울대 공과대학 화공학과를 희망하여 재수중.
두번째가 붕촌 이명종(李明鍾, 1942. 음 4.월생, 대전 거주) :
당시 청주고 졸업후, 고려대 상과대 경영학과 1년 재학중.
세번째가 이복동생 이민종(李玟鍾, 1944. 4.월생, 서울 거주) ;
당시 충주고 2년 재학중. 서울 서대문구 경기대학 일본어과 합격.
-. 두째줄 좌로부터,
남 동생 이석종(李錫鍾, 1948. 음. 1월생, 뉴질랜드 오클랜드 거주) ;
당시 한수초 5학년 수료후, 서울 동대문구 전농초 6년 전학, 광신중학교 1년 입학,
두번째, 아버님 이영재(李榮載, 1910. 음 9. 6. ~ 1964. 11. 17.) ;
한수초 10회 졸업,
세번째, 어머님 정은용(鄭銀鎔, 1917. 음 7. 22. ~ 1994. 9. 28.),
네번째, 여 동생 이상종(李尙鍾, 1950. 음 12월생, 청주 거주) ;
당시 한수초 4학년 재학중,
-. 앞줄 좌측으로부터,
아버지 앞에 앉은이, 남 동생 이인종(李仁鍾, 별도명 李憲鍾, 1956. 음. 1월생, 수원 거주),
두번째, 어머니 앞에 앉은이, 막내 남 동생 이화종(李和鍾, 1958. 음. 8월생, 경기도 동탄 거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