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오사 특강-4 <선정은 수행자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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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정의 중요성을 인식합시다.
부처님은 선정 닦기를 장려하십니다. 선정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부처님이 오도하신 계기는 농경제 때 경험한 초선정의 기억을 상기한 것이 결정적입니다. 6년 고행 끝에 바른 길을 발견하지 못한 싯다르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감각적 쾌락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없는 즐거움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없는 선정의 즐거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MN 36: 36) 그리고 농경제때 경험한 초선정의 기쁨을 떠올리고 즉시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 出入息念, 호흡관)로서 선정에 들어 차례로 사선정까지 이르러 삼명(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성취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색계의 네 가지 선정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의존하는 천상의 거처(dibbavihara, a heavenly dwelling)라고 하시면서 늘 거기에 머무셨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순차적으로 그리고 역순으로 선정에 들어갔으며 완전한 열반(parinibbana)은 제4선정에서 일어났습니다. (DN 2:156)
부처님은 네 가지 선정을 열반의 한 종류로 비유하시며 찬탄하셨습니다. 즉 선정을 즉시 볼 수 있는 열반, 완전한 열반, 부분 열반, 지금 여기의 열반(現法涅槃)이라고 하셨습니다.
(sanditthikanibbana, parinibbana, tadanganibbana, dittha dhamma nibbana)(AN 4:453~54)
2. 선정은 수행자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수행자가 호흡 알아차리기에 집중하여 마음이 고요해져서 선정에 가까워지면 환희(piti, rapture)와 행복(sukha, bliss, happiness)이 일어납니다.
①환희는 다섯 가지 장애(pancanivarana, 감각적 욕망, 악의, 나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죄의식), 의심이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생겨납니다. 즐거움, 기쁨, 기쁨에 넘침, 명랑함, 유쾌함, 열광, 흥분, 마음의 자족함이 그 내용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몸과 마음이 상쾌하여 무게를 느낄 수 없을 정도 가볍게 느껴집니다. 온 몸이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하듯이 유쾌할 때도 있고 밀려오는 환희의 파도에 전신이 전율할 때도 있습니다. 환희가 체험되면 집중은 저절로 됩니다. 수행하는 내내 환희가 있기에 시간가는 줄도 몸이 존재하는 것도 느끼질 못합니다. 수행에 싫증이 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②행복은 환희에서 조금 들뜬 부분이 가라앉으면 나타납니다. 깊은 행복감에 온 몸이 녹아들듯이 느껴집니다. 포근한 품에 안겨 전신이 녹아드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다른 종교인들이라면 이것을 ‘신비체험’이라든지 ‘신과의 합일’이라 표현할지도 모릅니다.
③뿐만 아니라 선정수행에 따라서 선한 자질(kusala dhamma)이 체험됩니다.
초선정에는 19가지의 아름다운 정신적인 덕목(소바나, sobhana)이 있습니다.
즉, 신심(saddha), 알아차림(sati), hiri(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 羞惡心),
ottappa(不善法을 두려워하는 마음, 怖畏心), alobha(無貪), adosa(無嗔, metta와 동일), tatramajjhattata(평정심, upekkha와 동일),
kayapassadhi(몸의 輕安/편안함), cittapassadhi(마음의 편안함),
kayalahuta(몸의 가벼움), cittalahuta(마음의 가벼움),
kayamuduta(몸의 유연함), cittamuduta(마음의 유연함),
kayakammannata(몸의 적응성), cittakammannata(마음의 융통성),
kayapagunnata(몸의 민첩함, 능수능란함), cittapagunnata(마음의 민첩함, 능수능란함),
kayujjukata(몸의 똑바름), cittaujjukata(마음의 똑바름),
그리고 pannindriya(반야의 기능)과 karuna(연민)와 mudita(수희심)도 들어있습니다. 제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예비삼매(parikammasamadhi, 三昧란 ‘주의 깊은 고요한 멈춤’입니다. 선정에 들어가는 순차가 예비, 근접, 본 삼매 세 가지입니다)만 되어도 몸과 마음의 passadhi(輕安/편암함), lahuta(가벼움), muduta(유연성), kammannata(융통성, 적응성), pagunata(민첩함, 능수능란함), ujjukata(똑바름)가 느껴지고 수행해갈수록 이러한 공덕이 더 현저해졌습니다. 수행자는 일반적으로 성욕을 금하고 소식하며 잠을 적게 잡니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행에서 오는 이런 좋은 공덕을 누리기 때문에 수행자는 심신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유지해나갑니다. 수행자가 탐욕을 부리거나 화를 잘 내거나 불안하거나 우울해지는 경우 이러한 자질이 제대로 계발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양의 일부 기독교인들은 메마르고 진부해진 기독교를 소생시키려면 원시 기독교의 신비주의적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비주의(Mysticism)는 환희와 지복감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영지주의(Gnosticism)나 사막의 교부들(Desert Fathers),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Sufism)에서 회자되던 것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수행자들은 종교와 종파를 막론하고 수행에서 오는 환희와 행복을 먹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최고의 웰빙(Well-being)과 노후보장은 선정의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3. 선정의 즐거움에 집착하면 장애가 되는 것일까요?
어떤 스승들은 선정의 즐거움에 집착하면 마장(魔障)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참선수행자나 일부 위빳사나 수행자들은 수행 중에 나타나는 환희나 광명 현상을 체험하면 마장이라 여기고 물리쳐 없애버리려 합니다. 그들이 근거로 삼는 것이 위빳사나의 경계 즉, 위빳사나 우빠낄레사(vipassanupakkilesakatha)입니다. 이 대목은 청정도론(Visudhimagga) 제20장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견청정(maggamaggananadassanavisudhiniddeso, 道非道知見淸淨)에 나옵니다. 여기에 제시된 10가지 위빳사나의 경계(upakkilesa)는 광명(obhasa), 지혜(nanna), 환희(piti), 경안(passadhi), 행복(sukha), 결심(adhimokkha), 분발(paggha), 확립(upattana), 평온(upekkha), 욕구(nikanti, 위빳사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10가지는 유익한 현상(kusala dhamma)들이지만 이러한 경이로운 현상이 일어나면 도와 과에 도달했다는 착각에 빠져 이 경계를 즐기거나 명상주제를 놓아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에 여기에 집착하여 안주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렇다고 수행을 잘못하여 그릇된 길로 들어섰다는 비판이나 질책은 아닙니다. “위빳사나 경계는 진리를 통찰함에 이른 성스러운 제자에게 그리고 그릇되게 수행하거나, 명상주제를 놓아버린 게으른 제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바르게 수행하고 지속적으로 명상주제와 함께하는 위빳사나를 시작한 선남자에게 일어난다.” (청정도론 20:105). 그러므로 위빳사나 경계를 경험한 수행자는 7청정의 길을 따라 제대로 밞아왔으니 앞으로 계속 진보하여 청정의 완성인 열반으로 향하라는 칭찬과 격려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계를 극복하면 도 닦음에 대한 지견청정(行道知見淸淨, patipadananadassanavisudhiniddeso)에 들고 최종적으로 통찰지수행의 이익(pannabhavananisamsaniddeso)을 얻어 수행을 완성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선정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다인이여, 이것은 욕망에서 벗어남의 즐거움(nekkhammasukha), 멀리 떠남의 즐거움(pavivekasukha), 그치고 고요히 함의 즐거움(upasamasukha), 올바른 깨달음의 즐거움(sambodhasukha)이라고 불리며, 이러한 종류의 즐거움은 추구되어야하고 증가되어야하고 계발되어야 하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MN 66:19)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감각적 쾌락보다 월등한 선정이라는 행복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회색의 고행주의,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저는 불교는 영적인 쾌락주의(Spiritual Epicureanism)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음집중이 잘 되면 수행 중에 눈을 감아도 아름다운 빛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니밋따(nimitta)라고 합니다. 이는 평범한 이미지가 아닌 고도의 집중된 상태에서 발현되는 표상(表象, sign)입니다. 이것은 부작용이나 마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발되어야 할 선한 자질(善法, kusala dhamma)입니다. 마음집중이 잘 되어 호흡이 아주 미세해지거나 사라진 경우에 환희와 행복이 충만해지면 누구나 니밋따(nimitta)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로 아름다운 빛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고요하게 멈춘 마음, 즉 마음의 특성을 경험(citta-patisamvedhi)하는 것이며 마음 대상(citta-sankhara, mind object)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니밋따의 찬란한 빛과 황홀한 느낌은 수행자를 완전히 감싸서 어떤 것도 들을 수 없고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지극한 경지로 몰입(appanasamadhi, 본삼매)하게 만듭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평범한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는 상태’(uttari-manussa-dhamma)이며 ‘바른 깨달음의 행복(sambodhi-sukha)’이라고 하셨습니다.(MN 66:19) 그렇기에 수행 중에 보이는 빛이나 현상은 마장이 아닌 수행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장애라고 여겨 물리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계발하여 해탈로 가는 수레로 삼아야 합니다.
4. 선정의 행복에 집착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선정의 행복은 관능적인 흥분, 개인적 성취감에 기인 된 것이 아닌 ‘놓아버림’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놓아버림’에서 온 행복을 맛본 수행자는 더욱 더 놓아버리게 됩니다. 크게 놓아버릴수록 기쁨과 행복을 더 커지기에 마침내 마음은 ‘찬란한 소멸’을 이라는 자유(vimokkha)를 경험하게 됩니다. <청정한 믿음의 경>(DN 29:25)에서 부처님께서는 “선정에 몰두하는 사람은 오직 네 가지 결과, 즉 예류, 일래, 불환, 완전한 깨달음 중 하나만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정에 몰두한 결과는 깨달음입니다. 수행자는 선정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선정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 체험의 결과는 찬란한 소멸, 자족과 평화, 열반과 해탈, 수행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순백의 길을 가는 수행자여, 이제까지 당신의 수행에 조금이나마 고요함이나 청정함, 맑음과 밝은 빛, 반짝이는 지혜와 영감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했다면, 그래서 일순간 고양된 감흥을 느꼈다면 당신은 벌써 도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계속 길을 가십시오. 물러서지 않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도를 이루는 행운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선언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할 일은 다했다. 이루어야할 것은 모두 이루었다. 닦아야 할 것은 모두 닦았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이번 생이 중생으로서의 마지막 삶이다. 다시 인간의 몸을 받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5. 선정의 행복은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쁨과 행복을 원합니다. 불교에 입문하여 수행하게 된 동기 역시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기쁨과 행복은 관능적인 쾌락, 개인적 성취, 그리고 ‘놓아버림’ 이 세 가지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관능적인 행복은 감각을 자극시켜서 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극적이고 들뜨게 만듭니다. 이렇게 얻은 쾌감은 반복될수록 권태로워지기 때문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욕망이 강해지는 만큼 욕구불만도 커지게 됩니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이치이죠. 개인적 성취에서 오는 행복은 사람을 신나게 하고 살맛이 나게 만듭니다. 세상이 모두 그를 부러워하겠죠. 그런데 그것은 에고를 부풀리면서 자기가 가진 힘에 대한 환상을 조장합니다. 성공할수록 오만해져서 주변 사람과 사회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조작하고 통제하려고 하죠. 그리고 부침하는 세상 속에서 자기가 성공한 것을 지키기 위해 계속 노심초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이 만족하고 멈출 때를 알기가 힘든 법입니다. 성공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만큼 고통의 원인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죠.
‘놓아버림’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amacchanda)과 악의(byapada)를 놓아버림으로서 일어나는 즐거움은 저절로 솟아나는 시원한 샘물로 가득 차있는 호수와 같습니다. 애씀을 내려놓고 자연스런 호흡경험의 중심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호흡이 미묘해졌다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아름다움, 평화, 지복, 빛 또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험입니다. 그것은 애씀이 없는, 육신이 사라진, 에고가 없는, 심오한 경험으로 청정하고 순수한 기쁨입니다. 놓아버림에서 오는 행복을 체험하면 할수록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던 욕망이 정화되고,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초연한 심리적인 안정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오탁악세라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 제 정신 차리고 살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잡고 수행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수행할 여건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수행자의 안전한 피난처는 어디입니까? 수행자가 쉴 곳은 어디입니까? 세상에서 안전하게 숨을 곳이 없다는 게 현대인의 상황입니다.
세상(Loka)은 다섯 가지 감각에 대한 욕망으로 이루어집니다. 다섯 가지 감각에 대한 욕망이란 색성향미촉(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대상)에 대한 탐착이죠. 다섯 가지 욕망이 끊어지면 세상에서 벗어납니다. 오욕락의 끝이 세상의 끝입니다. 그곳은 바로 선정과 열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타카(本生譚)>에서 말씀하셨습니다. (Ja 4:147)
“다섯 가지 감각의 세계를 버리면 버릴수록, 더한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완전한 행복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다섯 가지 감각의 세계를 버려라.”<DN 2:131-32>
그 대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감각적 쾌락을 대신할 만한 선정이 주는 행복을 가리키셨습니다.
“춘다야, 네 가지의 기쁨을 추구하여라. 그것은 완전한 환멸, 욕망의 빛바램, 고요한 멈춤, 평화, 곧 바로 앎,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춘다여, 감각적 쾌락에서 물러난 한 비구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선정에 들어가 머문다.”
선정의 행복(samadhisukha)은 감각적 쾌락과 장애를 벗어버린 데서 오는 <정신적 행복감,pavivekasukha閑居獨樂>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행복(spiritual happiness/niramisukha)이며 속세를 떠난 데서 오는 행복(happiness of renunciation/nekkhammasukha)입니다. 근접삼매에서 경험하는 환희와 행복감은 세속적인 쾌락을 능가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선정을 경험하면 저절로 관능적인 욕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꿀을 따는 벌이 더 달콤하고 향기로운 꽃을 찾아가듯 수행자는 더 정묘하고 흠이 없는 삼매가 주는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죠. 대상이나 상대에게 의존하지 않는 행복, 항상 내게 있는 행복, 구하면 언제나 맛볼 수 있는 행복 그것은 샨티수카(santi sukha), 청정한 기쁨입니다. 선정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거처입니다. 이것이 수행자가 기댈 곳이며 숨을 곳이며 피난처가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선정은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행복한 거주처(現法樂住, 딧타담마수카위하라, Ditthadhammasukhavihara)가 되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선정은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열반이다(AN 4:453-54)라고 까지 찬탄하신 것입니다.
샨티 수카, 청정한 기쁨이여!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홀가분한가.
행복은 범속한 애착에 얽매이지 않는 연꽃 속에 있다.
활짝 핀 연꽃의 꿀맛을 보는 벌처럼 만족하라.
지극한 행복으로 해탈하여라.
6. 선정은 수행자를 건강하게 해줍니다.
“행복이 최상의 건강이다. Happiness is the highest form of health.” 라고 달라이라마존자가 말씀하셨습니다. 기뻐할 때 생긴 물질은 윤기가 있고, 유연하고, 활기차고, 촉감이 좋다. 슬퍼할 때 생긴 물질은 마르고 생기가 없고 추하다. 청정도론(Visudhimagga)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에서 생겨나는 행복은 수행자를 건강하게 지켜줍니다.
7. 선정은 수행자를 깨닫게 만듭니다.
태국 숲속전통의 스승이신 아잔차(Ajahn Chah, 1918~1991)의 제자이신 아잔브람(Ajahn Brahm, 1951~ )스님과 파옥 사야도(Pa Auk Sayadaw, 1934~ )의 법문을 참조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염처수행을 확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온(五蘊)을 보고 명(nama)과 색(rupa)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본이 안 갖추어진 염처수행은 밋밋해서 타성에 빠질 소지가 있습니다. 염처수행을 하더라도 삼매가 약하면 마음이 다섯 가지 장애에서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에 불쾌한 느낌에는 악의(byapada)를, 즐거운 느낌에는 욕망(kamacchanda)을 가지고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온현상을 여실히 관찰할 수 없습니다. 욕망과 악의를 누르고 평정심으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선정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정을 체험한 후 반조를 하게 되면 놀랄만한 통찰이 일어납니다. 선정에 막 나오면 그 알아차림(그때의 상태는 근접삼매/upacara samadhi이다)이 초강력(satima, superpower mindfulness, 초강력 알아차림)해져서 무엇이든 실상대로 꿰뚫어버립니다(진실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如實知見/yathabhuta nannadassana). 그래서 선정은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호흡명상의 경(MN 118)에는 선정에서 나오는(出定) 즉시 그때의 경험을 검토하여 반조하라고 합니다. 이때 네 가지 방식으로 깊은 통찰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로 무상(anicca)에 대한 통찰이 일어납니다. 선정의 경험을 되돌아보니 변치 않고 항상 있으리라고 믿고 있던 ‘어떤 것(자아연속성, 자아동일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무아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옵니다. 가슴에서 뭔가 엉겨있던 것이 확 풀어져버린 시원함이 느껴지고 크게 벗어났다는 느낌이 옵니다.
둘째로는 점차적 사라짐(viraga)에 대한 통찰이 일어납니다. 선정에 들었을 때를 반조해보니 정체성(‘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본질적이 부분들(기억, 상처, 자의식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냥 ‘나’라는 것이 없어져도 괜찮다는 깊은 안도감이 듭니다.
셋째로는 소멸(nirodha)에 대한 통찰이 일어납니다. 한때 거기에 있었던 것들이 이제 완전히 사라졌고, 끝났고, 비어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텅 빈 경지랄까, 고통이 끝났음을 난생 처음 경험한 것입니다. 본래 ‘나’라고 여겼던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다만 정신물질의 자연과정 만이 저절로 굴러갑니다. 이 자연과정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넷째로는 놓아버림, 포기(patinissagga)라는 통찰이 일어납니다. 행하는 것, 의지, 통제자를 놓아버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네 가지 통찰은 한꺼번에 일어날 수도 있고, 한 가지가 다른 것을 압도해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엄청난 지복감과 자유, 엄청나게 맑아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잔브람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정은 화약이고 반조는 성냥이 됩니다. 두 가지가 함께 한다면 어디선가 뭔가 ‘쾅!’하는 폭발이 일어납니다. 깨달음이라는 아름다운 폭발 말입니다.” 불교수행에서 선정체험이 필수적인 이유는 선정이 강력한 통찰(알아차림)을 일으켜 도와 과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 선정은 불가능하고 Natthi jhanam apannassa
선정의 성취 없이 지혜는 자라지 않는다, panna natthi ajhayato
선정과 지혜를 갖추면 yamhi jhananca panna ca
그에게 열반은 진정 가까우리라.(법구경 372) sa ve nibbanasantike
8. 미얀마식 위빳사나(마하시, 찬메, 쉐우민센터)에서는 열반을 이루기 위해 사선정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이 근접삼매로 충분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마얀마식 위빳사나에서 특히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1904~1982) 전통에서는 사선정이란 본삼매에 들어갈 필요 없이 근접삼매 정도의 집중력을 견지한 채 사띠빠따나(Satipatthana, 사념처)를 수행해나가면 열반을 체험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식으로 수행하는 사람을 위빳사나야니카(Vipassanayanika/통찰수행자)라고 하죠. 그러면 위빳사냐야니카의 경우 근접삼매만으로 어떻게 통찰이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순간 삼매(momentarily concentration/찰나삼매/카니카사마디, khanikasamadhi)라고 불리는 집중력에 있습니다. 그 명칭이 암시하는 것처럼 산만한 생각의 흐름 속에 있는 한 순간의 집중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 변화하는 현상의 흐름 속에서, 대상에서 대상으로 움직이는 역동적인 집중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장애를 정화시키는 강한 힘과 침착함을 지속시켜줍니다. 순간 삼매는 현상의 흐름을 고찰하는 통찰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마음이 움직이면서도 안정된 형태입니다. 위빳사나야니카는 수행주제(kammatthana)에 대해 마음을 고정시키지 않고서도 통찰수행과정에서 집중력이 자연스럽게 계발됩니다. 그래서 선정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과정에 부산물로서 순간집중을 얻습니다. 이러한 순간집중은 사마타야니카(Samathayanika, 선정수행자)의 기초적 선정(사선정 혹은 근접삼매)과 동일한 기능을 하며 통찰에 필요한 마음의 명료함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이 한국에 알려진 일반적인 위빳사나 수행법입니다.
그런데 태국 숲속 전통의 계승자이신 아잔차(Ajahn Chah, 1918~1992)스님의 제자인 아잔브람(Ajahn Brahm, 1951~)스님은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개진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입니다: “알아차림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강력한 알아차림과 약한 알아차림입니다. 선정은 ‘초강력 알아차림(satima, Super-mindfulness)’을 일으킵니다. 약한 알아차림은 티스푼으로 땅을 파는 것과 같고, 초강력 알아차림으로는 티스푼으로 몇 년 파야할 구덩이를 포크레인으로 한 번에 파는 것과 같습니다. 사념처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매우 긴 시간동안 초점이 유지되는 초강력 알아차림이 필수적입니다.”<Mindfulness, bliss and beyond/놓아버리기, 혜안스님 번역>
저 자신도 아잔브람스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선정에 들었다가 나온 직후 초강력 알아차림으로 이뤄지는 사념처 통찰은 미혹을 송두리 채 뽑아 텅 빔(무아)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면 마하시 계통 위빳사나에서 말하는 알아차림은 ‘보통 수준의 알아차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염처수행이 밋밋하여 성취가 더디고 타성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 강한 알아차림을 얻기 위해 선정을 목표로 하여 파옥이나 아잔브람식으로 수행하더라도 선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입니까? 누구나 그런 선정을 얻고 싶겠지만 실제 수행을 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여 수행한다 해도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결론이 납니다. 저는 어느 쪽으로 수행하든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초심자는 선배 경험자에게 물어보고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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