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 72현과 수절신(守節臣: 고려))
19세 휘 유. 20세 휘 자진. 20세 휘 허.
두문동 72현이란 조선 태조가(이성계)건국을 하자(1392),
이를 거부하던 고려의 유신(遺臣: 왕조가 망해도 남아 있는 신하))들이다.
고려가 망하자 고려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고 지조(志操)를 지키기 위해,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 던져 버리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기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에 모여든 유신(遺臣)들이다.
새 왕조, 조선의 녹을 먹지 않기로 결의를 다짐하며,
새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외부 세계와 단절을 하며 지조를 (志操)지키는 분들이다.
후세 사람들이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불렀으며,
그 명단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 광산김씨의 김약시를 위시하여 신규, 신흔,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이다.
이들은 이성계에 의해 거의 몰살 당했으나
그후 조선 정조 때 왕명으로 두문동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했다.
이들은 정몽주, 이색, 길재, 원천석 등과 함께
고려 수절신으로 후세에 위국순절의 귀감으로 추앙되고 있다,
19세 중랑장 휘 유(양간공파‧ 전리공파)
고려 후기 문신. 자는 사강. 아버지 공조전서 남우, 어머니는 경주 이씨.
공민왕 때 중랑장으로 이성계와 함께 남북 정벌에 큰 공이 있었다.
신돈이 정사를 문란케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령군 도진에 피해 살다가
합천군 영창에 이주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삼은(정포은, 이목은, 길도은)과 같은
절개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중랑장 유 묘갈문
공의 휘는 유, 자는 사강이니 고려 공민왕 당시에 시중(이성계)를 따라
동북면을 정벌 할 때 큰 공훈을 세워 벼슬이 중랑장에 이르렀다.
이때 신돈이 평직후로 봉해져 국정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때 명현과 선비들이 혹은 간하다가 죽고 더러는 물러나 숨었다.
공이 한철중과 박간 두 공과 더불어 고령 도진촌에 퇴거하였다.
그때 복숭아꽃이 골짜기에 피었고, 쏘가리가 자유롭게 뛰어노니
무릉도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에 숨어 몇 해를 지내다가 공양왕이 폐위되고 이태조가 즉위하였다.
그때 고령으로부터 합천 영창동에 옮겼는데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한(韓), 박(朴) 두 공(公)과 권사관(權史官)이 뒤를 따라
팔은재(八隱齋)라는 이름이 있었다.
목은 한산 이색 찬
20세 수산공 휘 자진(문숙공파․수산공파조)
나주 수산정(首山亭)의 유래
고려 후기 절의신, 호는 수산, 아버지는 병사 백균.
고려가 망하니 정몽주와 재현으로 더불어 의리를 같이 하여 나주 두곡에었다.
거처를 수산(水山)이라 하였으며
조선 태조가 큰 벼슬을 세 번이나 내려 불렀으나 두문불출하며 평생을 마쳤다.
문숙공파에서 문파를 이룬 황(黃), 벽(碧), 백(白) 삼파의 연원은
고려 말「금위사정」을 지낸 자진(子進: 수산공파조)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대의명분에 따라
벼슬을 버리고 6대조인 문숙공의 사패지지(賜牌之地)인
지금의 전남 나주군 공산면 삼장 산하에 은거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하였지만 끝까지 나아가지 않으셨다.
고려 왕조의 신하임을 분명히 밝히고자
거처하던 정자 이름은 수산정이라 하였으며
고려성(담장), 고려전(밭), 고려정(우물)이라 하였으니
공의 정충고절(精忠高節)이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조선조 헌종 때「숭정대부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흥문관 제학 겸 지 경연 춘추관사
규장각 제학」을 지낸 박기서(효문공)는 공의 충절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광산(光山)의 명족이며 고려의 세신(世臣)이로다.
동국의 높은 명성 한 시대의 영걸이로다.
상공(相公)이 계승하니 금관옥대 찬란하도다.
보상이 없을 손가 공전(公田)을 하사하도다.
나주일구 마련이니 공의 식읍(食邑) 넉넉하도다.
국운이 바뀌던 날 대절(大節)을 심었도다.
존망(存亡)을 같이 하니 1월 같은 춤이로다.
조상 뜻을 따라 불사이군 맹세하도다.
성군(聖君)이 새로 나니 척지(尺地)라도 왕토(王土)로다.
백이숙제 생각하니 주나라의 밤을 먹을 손가.
구조(舊朝)에서 하사(下賜)한 땅을 찾아가서 갈겠는가,
익은 곡식 걷어 들여 죽식간에 여기로다.
왕촉의 절개이며 도은의 지조로다.
남구에 이름 붙여 구방(舊邦)을 못 잊도다.
고국의 남은 자취 여기 이름뿐이로다.
고려정과 함께 하여 옛터같이 생각하도다.
충성심이 저러하니 황천(皇天)이 살피도다.
천추에 느낀 마음 한 말씀 드리도다.
고려전을 바라보니 금성관 밖이로다.
공의 뜻을 붙였으니 이름으로 표(表)하도다.
높고 높은 수양산이 그 이름 방불하도다.
유허 비명을 찬한「유록 대부, 광은부위겸 오위도총부,도총관」효헌공(김기성)은,
“인신(人臣)이 임금을 섬기되 누구나 의를 다할 것”을 기약하지만,
그의 화복과 영욕에 대하여 그 마음은 고치지 않고,
끝까지 하나 인(仁)자로 관철하는 사람은 고금역사에 별로 없으니,
순강(純剛)한 정기를 품득한 자가 적고,
식견과 정력이 또한 인욕(人欲)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하지 못하여,
배양(培養)이 오래 되면 창졸간에 위망(危亡)의 즈음에 처하여,
자기의 지조를 지키는 이가 적고,
화복과 영욕으로 중심이 동요되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공자는 인(仁)을 다룬다 하고,
맹자는 의(義)를 취한다 하였으니 이 아니 위대하고 장렬한 말씀인가.
호남의 나주에 수산정이 있으니 곧
전조(前朝) 사정(司正) 김공(金公)이 은거하여 길이 맹세한 곳이다.
공이 고려 말 혁명의 시기를 당하여 이군불사(二君不事)의 지조를 같고
누차 우리 성조(聖朝)의 부르심을 받고도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그 정자를 수산정이라 하고, 그 담장을 고려성이라 하고,
우물을 고려정이라 하고, 그 밭을 고려전이라 하였다.
다시는 천일(天日)을 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았으니
공은 정절충의(貞節忠義)의 선비로 서 장차 백세까지 남을 것이다. (후략)
종보 98. 1. 1.
김 허(虛:20세)는
강호 김숙자의 문인으로 벼슬이 사제감부정이었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멀리 타국에서 별세하였다.
효경 상례장을 벽장에 써붙이고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대호군에 추증되다.
광산김사, 광산김씨 종보, 광산김씨약사.
2023년 5월 편집자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