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었다. 익숙한 탁자, 익숙한 침상, 익숙한 의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육신을 휘감고 있는 격심한 목마름과 통증뿐인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소리를 지르자니 좀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이성을 되돌려 이대로 얼마나 더 앓아야 고통이 사그라들 수 있는지 헤아리려 했지만, 그 전에 어떻게 된 일인지 반추하는 것이 먼저였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얼마 전 도융헌은 친우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내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꽤 무게가 나가는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엔 책이 여러 권 들어 있었다. 안에 담긴 물건을 확인하고 고개를 드니, 이국의 풍경을 그림으로 담은 화첩이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태어나 지금껏 대도를 벗어난 적 없는 내겐 더없이 생경한 물건이었다. 그는 선물을 받은 이의 감상을 어서 듣고 싶다며 새벽부터 출발할 것을 권하면서, 물건을 상하게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화첩을 읽어도 좋다고 했다.
어차피 거스를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지만, 잠시라도 대도를 떠나고 싶었던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대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심산이기도 했다. 내가 몰랐고, 또 내가 떠나지 않았을 뿐 세상은 광활하니 나 하나 숨겨둘 곳은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 도융헌의 뜻대로 살아온 결과, 많은 사람들의 삶에 걸림돌을 만들고 말았다. 도융헌은 적법한 일에 트집을 잡아 적법하지 않은 일로 만들고, 적법하지 않은 일에 명분을 만들어 적법한 일로 바꾸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돕는 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세상은 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함께 품고도 어떻게든 흘러가지만 세간의 시선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어서 도융헌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정확히는 죽임을 당할 고비를 넘겼다는 서술이 맞겠다. 그런 이유로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임을 당할 일을 멈추지 않는다니 지독하기도 하지.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도융헌에게 더는 이렇게 살지 못하겠다고 빌었다. 무릎을 꿇고 한참을 울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에 대한 단 한 치의 신뢰가 있었다. 나를 아들로 데려올 적만 하더라도 내 몸에 가득한 흉터를 보고 울어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언젠가는 그를 위해 내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겠다 생각했으므로.
이대로라면 또 누구의 삶을 내 손으로 망칠지 알 수 없다는 짐작은 죽기보다 끔찍했다. 더는 이렇게 살지 못하겠다는 말은 이대로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의미였는데 눈을 뜨고 나니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이 내 것이 되어 있었다.
나를 태우고 사주(沙州)로 향하던 마차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서 완파되었다. 사고 직전까지 읽고 있었던 화첩에는 바다가 그려져 있었는데, 잠깐 겨우 눈을 떴을 땐 아무렇게나 펼쳐진 화첩 속 바다가 내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사고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붉은 바다, 그게 꼭 내 현재이자 미래의 삶을 닮았다고 이후로도 종종 생각했다.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대도로 돌아와 있었다. 어디로든 도망치려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한 셈이다. 사고 직후부터 대도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는데, 의원은 몇 번이나 저승으로 향하려던 내 손목을 잡아채 이승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원망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다 좀처럼 생각이 이어지지 않아 묵묵히 있었다. 그는 나를 어떻게 살렸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었지만, 왜 살렸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나를 왜 살렸을까. 차라리 살리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원의 일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으려나.
“다른 사람들은요?”
겨우 꺼낸 첫마디로 다른 사람들의 생사를 물었다. 분명 마차엔 마부와 나를 따라온 청지기가 하나 있었지만 이 정도로 다친 사람은 나뿐이라고 했다. 마차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서 내가 타고 있는 부분만 따로 떨어져 나가 추락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낭떠러지에 걸쳤기 때문이라고. 우연한 사고는 아니겠구나 확신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정이야 어떻든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마부와 청지기는 모두 가족이 있다고 했으니 함부로 몸을 상하게 해서야 곤란하겠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눈이 자꾸 감기려고 했다. 어쩌면 눈을 감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내게 의원은 이제 의식을 찾았으니 조금 더 깨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눈이 감기면 흔들어 깨울 수밖에 없으니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묻고,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고.
“돌보던 환자가 죽으면 의원님은 어떻게 되나요?”
나는 의원에게 내가 죽으면 당신은 어떻게 되느냐 물었다. 의원에 따라 다르지만, 자신은 받은 치료비의 삼 할을 위로금으로 보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삼 할은 조금 크지 않나요, 묻자 의원은 차마 부정은 하지 못하고 아마도요, 라며 얼버무렸다. 함부로 죽지도 못하겠구나 싶어 눈조차 다 뜨지 못한 채로도 픽 웃었다. 아마 그가 내 죽음을 위로할 일은 없을 거였다. 독을 마시고, 낭떠러지에서 추락해도 여태껏 살아있다면 신조차 나를 거둘 뜻이 없는 게 아닐까?
죽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나 있었다. 다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어도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으므로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늘 죽지 말아야 할 이유에 골몰했다. 그것들이 마치 나를 살릴 지푸라기라도 되는 것처럼.
의원은 나를 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어릴 적 독을 마신 까닭으로 약을 쓰기 난해하다며 진땀을 빼면서도, 이윽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그런 모습마저도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만, 의원을 보며 누워있는 동안 종종 생각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가 좋을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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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주에서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오늘이 지나면 대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대로 어디로든 도망칠까 갖가지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마치 노을이 저무는 것처럼, 어떤 순리를 따르듯. 대도로 돌아가고자 마음먹은 일은 어쩌면 내 인생에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 될 거였다.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는 대도로 가겠다니, 그것도 마치 순리를 따르듯 돌아가겠다니 우스운 이야기였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어느 때로 돌아갈 건가요?’
군주는 어느 날 내게 물었다. 시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돌릴 수 없지만, 누구나가 그러한 상상을 한 번쯤은 하기 마련이었다. 지금을 후회할수록,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겠지만 그걸 감안하고라도 나는 언젠가 똑같은 질문을 지독히도 반복해서 자신에게 해댔다. 그럴 때마다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시간이 짧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그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겠다고 자신에게 답했다. 그렇게 늘 매번 지금의 삶을 택했다. 꿈에서는 내가 탄 마차가 낭떠러지에서 바닥으로 추락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으로 시간을 돌려도 나는 도융헌이 내민 손을 잡는다. 가족과도 다름없는 아이들을 추위에 떨지 않고, 허기에 지치지 않게 해주겠다는데 그때는 그의 양자가 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그를 도운 것도, 그에게서 도망치지 못한 것도 어느 연장선상의 일이라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후회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인정이든, 체념이든 후회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니 그 시간들은 어느새 굳게 잠겨 열리지 않는 문이 되어있었다. 굳게 잠겨 열리지 않는 문은 어쩌면 한없이 막막하고, 또 한없이 편리했다.
분명 그랬었는데,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하나 생겼다.
다른 사람들의 흉내를 내겠다고 군주에게 같이 눈을 보자고 했던 날이다. 누군가는 눈 오는 날씨에서 낭만을 찾고, 정취를 느낀다던 말만 듣고 꺼낸 말이었는데 막상 눈 내리는 풍경을 보니 마음은 이내 안온해졌다. 쌓이는 눈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볼 때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여유가 되어주었고 여유가 되어준 풍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군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햇살이 비쳤다.
세책점에서 보았을 때와 같은 얼굴로 그는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나는 문득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평범한 지금 같은 시간을 당신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지…….
그리고 지금은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신이 나를 거둘 생각이 없다고 짐작한들 한 번 상하고, 또 한 번 부서진 생이 오래도록 이어질 거라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자면 세상에 미련을 남겨서는 안 되는데 눈에 밟힐 만한 것들이 계속 생겨났다. 세상에 피어난 꽃은 아름다웠고, 눈 내리는 풍경을 읽는 일은 안온했으며, 누군가에게 읽어주고 싶은 문장을 고르는 일은 소소한 재미를 주었고, 나를 깎아낼 여정마저 기꺼워졌다. 이제 아무것도 겪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후회한다. 척박한 삶에서 도망칠 곳으로 군주의 옆을 선택한 건 잘못이었다. 그의 삶만큼은 망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삶만큼은 망치게 될 것 같다는 짐작이 들 때면 온몸이 서늘해졌다. 명분이 생기면 언제든 그의 삶에서 나를 거두려 했는데, 아직까지 명분을 찾지 못했다. 이젠 명분을 찾지 못한 건지, 아니면 찾지 않은 건지도 잘 모르겠다. 누군가의 삶을 망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삶이라도 그러할 텐데 하물며 그의 삶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향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져본다. 군주의 삶에서 나를 거둘 마음을 먹고도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지는 마음은 모순이었다. 모순 앞에서 창도 될 수 없고, 또 방패도 될 수 없으니 별도리도 없이 쓰게 웃었다.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은 내게 무엇이 되는지.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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