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 안동—반변천 임하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0년 10월 14일 (수요일) [별도 탐방] ① 안동 ←반변천 수계-임하
안동시 반변천 임하(臨河)
댐 건설로 만들어진 임하호(臨河湖)
반변천(半邊川)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1218.5m) 산줄기와 낙동정맥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청송군 진보를 경유하여 임하호(댐)에 흘러들고, 댐 아래 안동시 임하면을 지나, 안동시 정하동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임하댐은 낙동강 유역 수자원 종합개발을 위하여 1984년 12월 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완성된 다목적댐이다. ‘임하댐’은 반변천(半邊川) 하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와 임하면 임하리에 사이에 건설되었다. 댐의 건설로 인하여 임동면 수곡리 지역이 모두 수몰되어 그 지역에 수백 년 동안 살아오던 무실 류씨는 수곡리 주변의 높은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서 마련한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고택을 옮겨지어서 떠나갔다.
임하댐 건설로 인한 수몰된 문화재와 자연경관
‘임하댐’은 반변천(半邊川) 하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와 임하면 임하리에 사이에 건설되었다. 댐의 아래쪽에 위치한 임하면의 천전리에 세거하고 있는 의성 김씨의 내앞마을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선대 조상들과 연고가 있는 많은 유적들이 댐의 위쪽에 있어 물속에 잠겼다. 대부분 높은 곳으로 옮겨왔지만 유적지는 그대로 수몰된 것이다. 임하댐으로 인해 수몰된 ‘지산서당’(임동면 망천1동)은 조선 중기의 문신 지촌 김방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과 사림의 발의로 1800년에 건립한 서당이었다. ‘임당댁’은 1775년 김규진이 임동면 망천리에 건립한 집이다. 수몰된 ‘사빈서원’은 청계 김진 선생과 그의 아들 5형제분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685년에 사림과 자손들의 공의로 건립되었다.
도연삼절(陶淵三絶)
수몰된 반변천의 절경들
임동의 반변천의 한 굽이에 자리 잡은 절경으로 ‘도연폭포’, ‘격진령’, ‘선유창벽’이 유명한데 이를 일컬어 ‘도연삼절(陶淵三絶)’이라 불렀다. 기험한 바위언덕 잘룩한 목중이를 타고 넓게 퍼져, 암벽을 곤두박질하는 우람한 물줄기와 길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검푸르고 너른 못에 떨어지는 물줄기의 굉음은 온통 땅을 들먹일 듯이 우렁찼다.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반변천의 본류인 만큼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끊어지는 일이 없고 특히 홍수 때 도연폭포를 통과하는 물의 양은 전국의 어느 폭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몰되기 전, 안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국도 35호선을 따라 20분쯤 차를 달리다가 보면 망천(網川)에 이른다, 거기에서 오른쪽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어 울퉁불퉁한 돌길을 20분쯤 달리면 길이 오르막이 되면서 오른쪽에 ‘격진령(隔塵領)’의 수려한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 아래로 빠져 흐르는 ‘도연폭포’가 있었다. 불과 4m 높이였지만 격진령을 아늑히 둘러싼 높고 짙푸른 산색과 검은 벼랑 밑을 흐르는 청아한 물빛의 조화는 낙동강 지류의 폭포 중 그 경관이 으뜸이었지만 지금은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어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도연폭포는 옛날 도연의 용과 선찰사의 부처 사이에 강줄기를 두고 다투다가 용의 꼬리가 격진령의 허리를 잘라버리자 생겨나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성리학자 표은(瓢隱) 김시온(金是縕)은 이곳에 ‘와룡초당(臥龍草堂)’을 지어 학문을 닦고 후학을 키워내면서 도연폭포의 경치에 젖어 살았다. 수몰 전까지 폭포 뒤편 솔밭에는 김시온의 유허비인 ‘숭정처사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와 ‘송정(松亭)’이 서 있어, 도연을 사랑한 은둔 거사의 고절(高節)한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옛적엔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육부자(六父子)가 공부하던 ‘장육당(藏六堂)’도 있었다. 모두 물속에 잠긴 지역에 있었다.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
임하댐 아래쪽 지역, 반변천 앞 의성김씨 세거지
내앞마을은 안동시 임하면 임하댐 아래쪽 천전리 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 있다. 임하현 관아가 있던 곳이라 해서 현내(縣內)라고도 불렀다. 마을은 동쪽의 영양과 청송의 산악지역에서 흘러내려와 안동으로 유입되는 반변천 앞 비교적 넓은 들판이 있는 지역이다. 큰 하천 유역에 너른 들판이 있으니 비교적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에 좋은 곳으로 양반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세거지의 조건을 잘 갖춘 곳이다. 마을은 여러 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동네들이 비교적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다. 천전리를 중심으로 한 의성 김씨, 안동 권씨와 단양 우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영남 4대길지로 손꼽히는 ‘내앞[川前]마을’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터를 잡아살던 세거지의 구성, 다양한 형태의 한옥들이 남아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는 안동권씨 종택에 해당하는 이우당 종택(二愚堂宗宅)을 중심으로 지금은 낡았지만 규모가 있는 오래된 한옥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전통마을답게 서원에 해당하는 사빈서원, 재실에 해당하는 송석재사, 후학을 양성하던 운곡서당과 정자인 백운정 등이 있다. 또한 임하댐 건설로 수몰된 임동면 지례마을에서 옮겨온 고택인 오류헌, 양동댁, 국탄댁이 있다.
안동 임하리에 있는 호계서원
호계서원(虎溪書院)은 현재 임하댐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조선 선조 6년(1573)에 월곡면 도곡동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서원으로 처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위패를 모셨다. 1625년(인조 3) 김성일(金誠一), 류성룡(柳成龍)의 위패를 추가 배향했다. 1676년(숙종 2)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뒤 이황은 ‘도산서원’, 김성일은 ‘임천서원’, 류성룡은 ‘병산서원’에 주향되면서 강당만 남았다. 1973년 안동 댐 건설로 인해 월곡면 도곡동에서 임하댐 아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그 유명한 '병호시비(屛虎是非)'의 주역인 호계서원이다.
안동 도산면에 다시 지은 호계서원(虎溪書院)
임하리는 임하댐 하류로, 습기가 많아 건물 훼손이 우려되자 지역 유림 등에서 이건과 복원을 요청해 왔었는데, 경상북도에서는 2013년부터 총사업비 65억원을 들여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한국국학진흥원 부지 상단에 터를 잡고 복원하여, 2020년 말 복설했다. 이건 및 중건된 호계서원은 1만㎡의 부지에 총 93칸, 13동의 서원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여강서원 건립 당시와 같은 규모이다.
새로 지은 호계서원은 강당인 숭교당(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강당 뒤는 사당이 있다. 여강서원(廬江書院) 건립 당시 퇴계(退溪) 선생을 봉향한 서원이라는 점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서원의 규모도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대표 서원이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사당인 존도사(尊道祠)가 6칸, 신문(神門) 3칸, 신주(神廚) 5칸, 강당인 숭교당(崇敎堂)이 15칸, 동재인 구인재(求仁齋) 4칸, 서재인 명의재(明義齋) 4칸, 진학문(進學門) 1칸, 동몽재(童蒙齋) 15칸, 유사방(有司房) 5칸, 재주(齋廚) 15칸, 보상고(寶上庫) 15칸 등 92칸이나 되었다. 또 동협실을 사성재(思誠齋), 서협실을 주경재(主敬齋)라 하였다.
호계서원은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영남유림 간 오랜 갈등의 징표였었는데 이는 퇴계 선생의 제자인 서애(西厓) 류성룡과 학봉(鶴峯) 김성일을 배향하는 과정에서 위패의 서열, 즉 누구를 상위인 좌측에 봉안하느냐의 문제로 양 문파간의 다툼인데, 이런 좌우 문제가 불거지면서 발생한 3차례의 시비를 말한다. 이번 복설을 하면서 류성룡을 퇴계 위패의 동쪽(좌)에, 김성일을 서쪽(우)에, 그 옆에 김성일의 후학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배향하기로 합의하면서 오랜 갈등도 해소됐다. ☞ ‘병호시비’에 대해서는 「낙동강 종주이야기(18)」 풍산 ‘병산서원’ 편에서 자상하게 서술했다.
내앞마을의 불교유적
▶ 임하리 내앞마을에는 네 기의 석탑이 있다. 임하동 삼층석탑, 임하동 십이지삼층석탑, 임하동 중앙삼층석탑, 임하동 오층석탑이 그것이다. 이곳에 있었던 사찰 내력에 대해서는 남겨진 기록이 없으나,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들판(논) 한 가운데 탑만이 남아있다.
안동 임하동 십이지삼층석탑
이 탑은 나말여초(羅末麗初)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원래 삼층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높이는 2.74m이다. 임하동 마을 논 가운데 있는 3기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소탑(小塔)이며 현재는 탑의 무게를 받치는 2층 기단(基壇) 위로 2층 옥개석까지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결실(缺失)되었다. 임하마을에 남아 있는 탑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특히 하층기단은 12매의 판석을 조립하여 구성하였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2개의 탱주(撑柱, 받침기둥)가 새겨져 있고, 2개의 탱주로 분할된 각 3면에는 십이지상(十二支像)이 1구씩 새겨져 있다. 하층기단의 갑석은 여러 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는데, 상면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의 상층기단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에 12지상(十二支像)을 조각하여 석탑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고, 위층 기단에는 8부신상(八部神像, 불교의 법을 지키는 여덟 무리의 신)을 배치하면서 특히 인왕상(仁王像)을 주되게 표현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원원사지(遠願寺址) 동서 석탑의 기단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상이 장식되어 있다. 석탑의 몸돌에 갑옷을 입은 사천왕상이나 팔부신상 그리고 십이지상은 부처나 사리를 수호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이렇듯 각 기단에 두 종류의 무리를 함께 장식하는 예는 특이한 모습이어서 석탑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만든 시기는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안동 임하동 오층석탑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2중 기단의 석탑으로 높이는 5.5m이다. 기단부가 완전히 매몰되어 있으며, 탑 전체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1층 몸돌의 남면에는 문 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네 귀에 모서리 기둥이 있고 안기둥은 없다. 2층에서 5층까지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과 함께 각 면 중앙에 한 개의 안기둥을 배치하였다. 각 층의 지붕돌은 매우 두꺼운 편이고 몸돌에 비해서 지붕돌의 길이도 짧아 전체 높이가 높은데 비하여 둔하게 느껴진다. 탑이 있는 주위에는 많은 기와가 나오며,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주초석이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0호이다.
임하동 이우당종택(二愚堂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9호
이우당종택(二愚堂宗宅)은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에 있다. 이 건물은 안동 권씨(安東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 임하지파(臨河之派) 이우당(二愚堂) 권환(權寏, 1580~1652)의 ‘종택’으로, 조선 인조 18년(1640)에 건립한 것이다. 사랑채는 1773년(영조 49) 정침(正寢)을 보수하면서 지었다.
이 종택은 'ㅁ'자형 안채와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사랑채 앞에 대문간채와 중문간채가 있었던 집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책방과 통하게 되어 있다. 'ㅁ'자형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있는데, 왼쪽이 안방이고 그 앞에 부엌, 아랫방 아랫부엌이 있다. 집터의 모양에 따라 북동향으로 지었으나 대청을 북쪽에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온돌은 남쪽에 아궁이를 두어 겨울에 따뜻하게 하였다. 사당은 본채의 남쪽에 위치하며 담장과 대문이 있다.
권환(權寏, 1580년(선조 13)~1651년(효종 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택보(宅甫), 호가 이우당(二愚堂)이다. 아버지는 증사헌부집의 대기(大器)이며, 어머니는 흥해 배씨(興海裵氏)로 희도(希度)의 딸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안동부에서 의병(義兵)이 결성되자 중의(衆議)에 의하여 부장(副將)을 맡아 임금의 교지를 받들고 죽령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강화가 성립되어 적이 물러감에 따라 전투에 임하지는 못하였다. 그 당시 의병진에서 작성한 문서들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 갔다고 한다.
1635년 장릉참봉에 천거되었으며, 그 뒤 사옹봉사·직장 등을 지냈다. 163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으며, 1640년 예부좌랑, 1641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 1646년 강원도사를 역임하였다. 권환은 전형적인 청백리로서 조정에서는 거침없이 직간(直諫)을 하고 문란한 당쟁의 와중에도 공평하고 명분이 뚜렷한 정책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학문을 권장하고 풍속을 순화시키는 한편, 인정(仁政)을 널리 펴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이우당문집(二愚堂文集)》 4권이 있는데 시문집 형태를 띠고 있다.
‘내앞마을’ — 의성 김씨(義城金氏)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川前里) 집성촌의 내력
의성 김씨(義城金氏)의 시조(始祖)는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석(金錫)이라고 한다.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가운데,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김석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인 것이다. 김석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일대의 땅을 봉토로 받으면서 의성군(義城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김석의 자손들이 대대로 의성에 살게 되면서 본관을 ‘의성(義城)’으로 삼았다.
그 후 김성일(金誠一)의 7대조 ‘김거두’가 처음 안동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김거두는 안동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김방경(구 안동김씨의 시조), 권한공 등의 집안과 혼인을 하면서 재지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김거두의 증손자 ‘김한계(1414~1461년)’는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단종 때 집현전 학사와 부지승무원 원사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세조가 정권을 잡자 안동(安東)으로 낙향했다.
의성 김씨가 안동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시대’를 연 사람은 망계(望溪) 김만근(金萬謹, 1446~1500)이다. 관직을 사직하고 안동에 은거한 김한계(金漢啓)의 장자다. 김만근은 임하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가진 갑부 해주 오씨 ‘오계동(吳系童)’ 집안에 장가들어 처갓집 재산을 물려받고 임하면 천전(川前, 내앞)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그것을 계기로 '의성 김씨 내앞파’가 생겼으며, 김만근의 손자이자 김성일의 아버지인 청계(淸溪) 김진(金璡)이 내앞파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호를 따서 ‘청계대조(淸溪大祖)’라고 불리는 김진은 이후 재산을 증식하여 수백 년 동안 이어지는 의성 김씨 내앞파의 기반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김성일(金誠一)은 훗날 자신에게 인간적,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두 사람을 꼽았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 김진(金璡)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스승인 퇴계 이황(李滉)이었다.
▶ 해주오씨 교위(校尉) 오계동(吳系童)의 조부 광정(光廷)은 조선초기 과거에 급제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선친 선민(善敏)이 안동부 임하현에 입향한 이래 생활의 기반을 닦았고, 임하현감을 지낸 오계동은 일찍이 안동권씨 집안에 장가를 들어 착실하게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었다.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셋째 딸이 의성김씨 진사 만근(萬謹)과 혼인하였다, 당시의 풍습대로 사위를 맞아들여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 생활의 기반을 닦도록 했다. 만근과 오씨부인은 슬하에 인범(仁範)·예범(禮範)·지범(智範) 등을 두었는데, 청계대조 김진(金璡)은 바로 예범의 아들이다.
▶ [海州吳氏 1991大同譜 典書公派 기록 ] ☞ [10세] 계동(季瞳) 三女 * 金萬謹義城人 進士左通禮後裔世居臨河 父漢啓直提學 子仁範宣略將軍 禮範左承旨 智範 ○ 仁範子瓛琉璃珀玉筆 ○ 禮範子璡號靑溪生員贈吏判 珽參奉進校尉 ○ 智範子玹 ○ 璡子克一號藥峯內資正守 守一號龜峯生員察訪 明一號雲岩生員 誠一號鶴峯贈吏判諡文忠 復一號南嶽府使 女柳城全州人贈司僕寺正 子復起號岐峯贈吏叅 復立號黙溪贈吏叅後裔世居臨東
청계공 김진(金璡, (1500~1580년)은 1525년 사마시에 급제한 다음 성균관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성균관은 과거를 준비하는 교육기관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얼마 뒤 김진은 돌연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당을 세우고 집안 자손들과 동네 아이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김진이 과거를 포기하고 처사(處士)의 삶을 선택한 것은 당파 싸움을 일삼는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의 사연에 대해서는 전설(傳說)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김진(金璡)이 서울로 가기 위해 문경새재를 넘다가 고개 마루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한 백발노인이 고개를 올라오더니 김진의 곁에 앉았다. 김진이 어른에 대한 예의로 인사를 하자 노인이 물었다. “댁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 / “한양 갑니다.” / “한양은 웬일로 가시오?” / 잠시 머뭇거리던 김진이 말했다. “과거공부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 노인은 김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수를 보아하니 살아서 참판 벼슬을 하는 것보다 돌아가서 증 판서를 하는 게 더 낫겠는데?”
증(贈) 판서를 한다는 것은 자식이 잘되어서 부모에게 높은 벼슬을 내린다는 뜻이다. 훗날 김진은 김성일(金誠一)을 포함하여 다섯 형제를 모두 과거에 합격시키는 등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으므로 그 노인의 말대로 된 셈이다.
이렇게 의성 김씨는 청계공(淸溪公) 김진의 조부인 망계(望溪) 김만근이 내앞[川前]마을로 입향한 이래 기반을 다져오다가 청계공 대에 이르러 가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청계공 김진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이다. 5형제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각별한 교육을 받다가, 모두 퇴계(退溪)의 제자가 되었다. 그중 3형제(약봉, 학봉, 남악)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운암과 귀봉은 소과에 급제하였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흔히 이 집안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고 칭송하기도 하고 다섯 형제는 ‘의성 김씨 오룡(義城金氏五龍)’으로 불리기도 한다.
안동에서 의성 김씨 종택은 여러곳 있으나 내앞마을 ‘대종택’과 안동 서후면 금계리의 ‘학봉종택’이 유명하다. 내앞마을 대종택은 청계공 김진의 종택이며, 학봉종택은 청계의 넷째아들 학봉 김성일의 종택이다. 학봉(鶴峯)은 안동시 서후에 사는 권덕봉(權德鳳)의 사위가 되어 서후면 금계로 이거한 것이다. 장자 김극일(金克一)의 손자로 숙종 조에 대사간을 역임한 김방걸(金邦杰)은 임동 지례에 거주하였으니, 지금 ‘지례예술촌’의 '지촌종택'이다. 또 김진의 셋째 아들인 운암 김명일은 임하면 신덕리에 이거하였다.
의성김씨 대종가(보물 제450호)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내앞마을은 안동에서 영덕으로 반변천을 따라 12km 가다보면 34번 국도변 좌측에 자리 잡은 전통마을이다. 종택이 위치한 천전리(川前里)는 ‘반변천 앞’에 있다고 해서 ‘내앞’으로 불린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영남 4대 길지 중 하나로 이곳 ‘내앞마을’을 꼽고 있다. 마을 맨 왼쪽(서쪽)에 청계공 김진(金璡)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는 의성김씨 ‘대종택’을 시작으로 천변 따라 동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대종택(大宗宅)을 ‘의성김씨대종가(義城金氏大宗家)’라 부르는데, 이는 바로 그 옆에 청계(淸溪) 김진(金璡)의 손자인 운천(雲川) 김용(金涌)을 불천위로 모시는 소종가인 ‘귀봉종택(龜峯宗宅)’이 있기 때문이다. ‘귀봉(龜峯)’이라는 택호는 김진의 둘째 아들 김수일(金守一)의 호에서 연유한 것이다. 귀봉은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문장과 시가 뛰어나 선생의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귀봉종택 옆에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金東三) 생가가 있다. 마을 한가운데 천전새마을창고 북쪽 산기슭에 ‘만송헌’이 있고 바로 위에 ‘운곡서당’이 있다. 동쪽으로 골기와가 예쁜 ‘백인재고택’이, 옆으로 ‘백하구려’와 ‘제산종택’, ‘치헌’이 연달아 있다. 치헌은 지례마을에 있던 집으로 수몰되는 바람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마을 앞 반변천에는 마을사람들이 치수(治水)를 위해 조성한 소나무 숲, ‘개호송’이 있고 건너편에는 ‘백운정’이란 정자를 갖추고 있다.
안동의 의성김씨 대종택(義城金氏 大宗宅)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던 것을 김성일(1538∼1593)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구분되는데,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고 형태는 ‘—’자 형이다.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았던 안채는 ㅁ자형이고 다른 주택과 달리 안방이 바깥쪽으로 높게 자리를 잡고 있다. 행랑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 가옥 구성이 ‘巳’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행랑채에서 안뜰로 통하는 중문이 없어 외부사람이 드나들 수 없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교 사상의 남녀유별, 내외사상을 건물구성에 반영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랑채 출입은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사랑채로 직접 갈 수 있는 별도의 문이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이어주는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은 서재로,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인다. 이와 같은 2층 구조는 다른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훗날 추가로 연결한 서쪽 끝의 대청문은 지붕이 커, 집 전체 겉모습에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은 간략한 양식으로 지었지만 보기 드문 주택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민가 건축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성 김씨 집안의 학문과 기개
‘내앞마을’ 의성 김씨 종택은 조선 선비의 학문과 기개가 전해져 오는 집이다. 안동의 동쪽으로 반변천을 따라가다 보면 고풍어린 기와집이 즐비하게 자리 잡은 풍경이 나타난다 . 500여 년 역사를 지닌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내앞마을 의성 김씨가 명문가로 알려진 계기는 중시조인 청계(淸溪) 김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서 부터이다.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등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 하여 ‘오룡등과택’, 혹은 ‘오룡지가(五龍之家)’라고도 한다. — 이 집안 5형제는 경북 일대에서 종택과 집성촌을 이뤄서 현재 전국에 5만여 명의 후손이 존재한다.
청계(淸溪) 김진의 자녀교육은 특별했다. —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 안 된다.’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의성 김씨는 조선시대 대·소과 합격자가 100여명에 달한다. 또한 문집을 남긴 인물이 90여명에 이른다. 청계가 후손들에게 남긴 유훈은 ‘벼슬은 정2품 이상을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을 하지마라’는 것이었다.
내앞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명당으로 손꼽혔는데, 근래 임하댐이 들어서면서 크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청계(淸溪) 공이 마련했던 내앞의 위기지학의 이상향이었던 ‘도연(陶淵)’이 물속에 잠겨버렸고, 그리하여 도연으로 가는 30리 길이 사라져 버렸다. … 지금, 의성 김씨 대종가에는 청계 16세 종손 김창균(1953, 전 포스텍교수) 내외가 지키고 있다. 종택에는 솟을대문도 없고 당호도 특별히 없다. 오리려 청계의 검소함을 수백 년 후 손들에게 말해주는 것 같다.
귀봉종택(龜峯宗宅),
안동 내앞마을 두 번째 종택
귀봉종택은 안동 임하댐 아래 천전(내앞)마을 대종택 옆에 위치한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년)의 종택이다. 귀봉 김수일(金守一)은 청계(淸溪) 김진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이며, 학봉 김성일의 형이다. 현재 종택은 현종 때(1660년) 건립하였고, 고종 대에 김주병이 중건하였다. 사당에 김수일의 맏아들인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의 ‘불천위(不遷位)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서, 이 집을 ‘운천종택’이라고도 한다. 김용이 임진왜란 당시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난 할 때 주서(注書)로 수행하여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호종일기(扈從日記)》 (보물 제484호)를 보관해 왔다.
건물은 조선중기 전형적인 종택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ㅁ’자형으로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성 김씨 대종택과는 외형상 다르지만 건축기법이나 구성 등에는 큰 차이가 없다. 건물은 많이 낡았지만 외관상으로 상당히 웅장하고 화려하다. 대종택과는 달리 문간채가 있는 솟을대문을 갖추고 있다. 고종 때 크게 중건하면서 당시 건축양식이나 유생 등이 반영되어 구한말 대저택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규모의 사당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동쪽 산 아래에 별도의 담장을 두고 꾸며져 있어 언뜻 보기에 이 집과 상관없는 건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당에서 본채를 바라보면 이렇게 멀리 배치한 이유를 절로 알 수 있다.
귀봉 김수일이 벼슬의 뜻을 접고 호연지기 하고자 지었다는 강 건너 ‘백운정(白雲亭)’이 사당마당에서 바라다 보인다. 귀봉은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장원했으나 대과(大科)에는 실패했는데, 그 이후 1568년(선조 1)에 낙동강 지류인 임하 반변천(半邊川)과 어우러져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부암(傅巖)에 백운정(白雲亭)을 짓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반변천 ‘백운정(白雲亭)’
임하(臨河)의 ‘백운정’(白雲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5호)은 역시 눈에 띄는 명승지이다. 1568년에 세운 백운정(白雲亭)은 내앞마을 강 건너편에 위치한 정자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한 폭의 그림처럼 바라다 보이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맑은 강과 어우러진 전통적 건축의 품위를 지닌 산뜻한 모습이다. 백운정(白雲亭)은 귀봉 김수일(1528~1583)이 그의 아버지 청계 김진으로부터 땅을 받아 조선 선조 1년(1568)에 세운 정자로, 전통적 유교문화의 경관을 그대로 담고 있는 정자로 내앞마을과 함께 50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백운정은 팔작지붕에 정자 형태로 세 칸 중 한 칸은 온돌방으로 두고 ‘ㄷ’자형 안채를 이어 만들었다. 백운정에는 많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백운정’이라는 글씨는 미수 허목이 쓴 것으로, 아름다운 전서체(篆西體)로 물 흐르듯 써내려간 글씨는 임하댐의 넘실거리는 물결과 어울려 부드럽고 아름답다. 백운정 마루 난간에 서서 앞내마을을 바라다보면, 댐 건너로 보이는 여러 채의 기와집이 산에 안겨 있는 듯 전통마을의 포근한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 백운정(白雲亭)은 학봉(鶴峯) 김성일 등 다섯 형제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며 노닐던 곳으로, 반변천 강 언덕 위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한 폭의 그림 같은 경관을 지니고 있다. “높은 산에 올라 흰 구름 바라보며 어버이 그 아래 계신가 그리워 하노라!(登高山望白雲 思親在其下)— ‘白雲’이라는 이름은 세상을 떠난 부친을 추모하는 의미가 담긴 시구에서 따 온 것이다.
반변천 ‘개호송(開湖松)’ 숲
임하에는 강 건너편 백운정(白雲亭)과 함께 반변천 수중에 조성되어 있는 개호송(開湖松) 숲이 있다. 반월형 섬 위에 조성된 소나무 숲이다. 내앞마을은, 반변천과 강가의 기암과 단애, 천변 숲이 한 눈에 펼쳐져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대표적인 씨족 촌락의 지혜를 보여주는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개호송(開湖松), 소나무 숲은 의성 김씨 후손들이 문중의 흥망을 걸고 400여 년 동안 지켜온, 후손들의 정성과 결의가 그대로 담겨 있는 곳이다. ‘이 숲이 없으면 내앞마을도 없다’는 개호송은, 임하댐 아래 반변천 일부에 300m 정도 펼쳐져, 호수 가운데 신비한 숲의 모양을 만들어낸다. 후손들이 이 숲을 지키는 데 정성을 다한 것은 내앞마을의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개호송(開湖松)은 바람과 물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수구막이(물길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곳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로 만들어진 숲으로, 완사명월형으로 알려진 내앞마을 풍수형국의 부족함을 메우기[裨補] 위해 조성되었다.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문중 규약을 만들어 개호송 숲을 보호해 왔다.
사빈서원(泗濱書院)
‘사빈서원’은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과 그의 아들 5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685년(숙종 11)에 사림과 후손들의 공의(公議)로 건립되었다. 1709년(숙종 35) 동구 밖 사수(泗水)가로 이건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고, 1882년(고종 19) 사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복설되었다. 임하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1987년 임하리로 옮겼다가 2005년에 중창 사업 계획에 따라 임하면 천전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2005년 시작된 중창 사업에 따라 임하면 임하리에 남아 있던 강당과 주사를 현 위치로 이건하고 사당, 동재, 서재, 전사청, 누각 등을 새로 짓는 계획이 수립되어 완성되었다. 강당은 많은 변형과 중수 등의 흔적이 있으나, 주사는 안동 지역의 평면 양식인 ‘ㅁ’자 평면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변형이나 개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원형 보존이 양호한 편이다. 사빈서원은 1985년 8월 5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현재 김창균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참고] ; 『안동문화재대관』(안동시, 2007)
지촌종택(芝村宗宅) / 지산서당(芝山書堂)
의성 김씨 지촌종택(芝村宗宅)은, 청계 김진의 장자인 김극일의 손자인 김방걸(金邦杰, 1623~1695)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임하댐 변에 있다. 김방걸(金邦杰)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대사간과 대사성 등의 벼슬을 지냈다. 건물은 1663년(헌종 4년) 에 지었고 지금 있는 자리보다 아래쪽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1985년 옮긴 것이다. 원래 지례마을은 ‘도원향’이라 불릴 만큼 산자수명한 곳이었다. 김방걸은 ‘도연’에 은거하는 아버지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을 문안하러 자주 왕래하다가 도원 상류에 자리한 지례마을에 터전을 잡아 입향조가 되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87호이다.
지촌종택(芝村宗宅)은 근자에는 ‘지례예술촌’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산속 깊은 곳에 있는 고가(古家)이다. 본채와 곳간, 문간채, 방앗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 별묘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이 있는 문간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지나 앞쪽에 본채가 있다.
큰 사랑채와 별채 사이로는 쪽문이 열리고,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또 동쪽 영역을 크게 차지한 채 자리 잡고 있는 지산서당(芝山書堂)이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큰 집이며, 본채의 서쪽으로는 길 위쪽으로 올라앉아 있는 사당이 있고, 또 그 서북쪽 사면으로 올라있는 정곡강당(井谷講堂)이 있는데, 지산서당을 보완하는 강학장소이다. 지금은 지촌제청(芝村祭廳)으로 쓰이고 있다.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은 청계공 김진의 장자 김극일의 손자로 1677년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임금에게 시폐(시대의 폐단)를 상소하면서,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으로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할 것과 퇴폐된 기강을 바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온갖 시기가 있어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그 뒤 수찬, 사간, 응교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로 올랐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1692년 사간원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94년 병조참의를 거쳐 참지가 되었으나 동년 여름에 일어난 인현왕후 복위와 관련된 사건으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귀향한지 며칠 만에 전라도 동복으로 귀양을 가게 되고 1695년(숙종21년) 배소에서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다음은 김방걸이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향리로 돌아와 칩거하면서 지은 칠언절구 시다
一臥滄江世月深 (일와창강세월심) 창강(滄江)에 한번 누운 지 세월 오래되었는데
幽居不受點塵侵 (유거불수점진침) 유거(幽居)에 티끌 하나 침입하지 못 하네
已知漁釣還多事 (이지어조환다사) 낚시질 하노라고 도리어 일이 많아졌고
更覺琴碁亦攪心 (갱각금기역교심) 금기(琴碁) 또한 어지러운 마음을 깨쳤네
石榻任他風過掃 (석탑임타풍과소) 석탑(石榻)은 그냥 두니 바람 불어 쓸어가고
梅壇輪與鳥來吟 (매단윤여조래음) 매단(梅壇)을 둘러보니 새[鳥]가 와서 노래하네
如今全省經營力 (여금전성경영력) 지금에 경영하든 일은 모두 생략하고
終日無言對壁岑 (종일무엄대벽잠) 말없이 종일(終日)토록 푸른 산(山)만 대하네
* 금기(琴碁)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는 것 * 석탑(石榻) 돌의자 * 매단(梅壇) 매화나무가 있는 화단
제산종택(齊山宗宅) / 우곡서당(愚谷書堂)
안동 천전마을 동쪽 끝에 있는 제산종택(齊山宗宅)이 있다. 이 집은 조선후기 영조 때의 학자이자 관리였던 제산(齊山) 김성탁(金聖鐸)이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은 살림집와 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택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ㅁ’자형 건물이다. 살림집 오른편에 앞면 3칸 규모의 초당을 두고 있는데 실제로는 초당이 바깥주인이 거처하면서 손님을 맞는 사랑채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살림집은 앞면 5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을 하고 있다. 중문재 옆에 대청과 온돌방이 있는 사랑채를 두고 있지만 다른 가옥에 비해 규모가 작고 형식적이다.
김성탁(金聖鐸)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우곡초당(愚谷草堂)은 앞면 3칸 규모로 원래는 초가였겠지만 지금은 기와지붕을 얹어 놓고 있다. 이 집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사랑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우곡서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중앙간과 동측간 정면에만 툇마루를 꾸며 놓았으며, 동측간에는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서측간은 온돌방으로 정면 기단에 아궁이를 꾸미고 상부에 쪽마루를 꾸며 놓았다. 벽면에는 머름을 꾸미고 두짝 띠살창호를 달아 놓았고, 처마 밑에는 ‘可軒’(가헌)이라는 편액을 달아 놓았다. 굴뚝은 배면 기단 위에 있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은 의성김씨 청계공 김진(金璡)의 6대손이다. 청계(靑溪) 김진(金璡)—장남 약봉(藥峯) 김극일(克一)—장남 대박(大朴) 김철(澈)—장남 표은(瓢隱) 김시온(是榲)—장남 김방렬(邦烈)—3남 적암(適庵) 김태중(泰重)—장남 제산(霽山) 김성탁(聖鐸)—장남 구사당(九思堂) 김낙행(樂行)으로 이어진다.
김성탁은 일찍이 가문의 학통을 이어받아 아버지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에게 공부하여 학문의 기반을 익혔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통달하여 각광을 받았다. 이어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귀양에서 돌아와 금양에서 제자를 가르치자 그에게 나아가 학문의 꽃을 피웠다. 이로써 그는 가문의 학통과 퇴계 학문의 적통이었다. 학문적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으로 이어지고, 세전 가학으로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운천(雲川) 김용(涌)—표은(瓢隱) 김시온(是榲)—금옹(錦翁) 김학배(學培)—적암(適庵) 김태중(台重)—제산(霽山) 김성탁(聖鐸)—구사당(九思堂) 김낙행(樂行)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제산(霽山)은 당대 영남유림의 석덕제유들과 교유하면서 학덕을 쌓았다. 이러한 결과로 1710년에 향시에 합격하고 1711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창의소(倡義所)에서 토역문(討逆文)을 각 지방의 유림(儒林)에 보내어 의병에 가담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인하여 안핵사(按覈使)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 정의(旌義)현에 유배되었고, 그 뒤 광양으로 이배되어 배소에서 사망하였다. 문장가로 조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제산문집(霽山文集)》, 《수견잡록(隨見雜錄)》, 《만록(漫錄)》,《지비록知非錄》등이 있다.
영조는 그의 급제를 고대하고 있었고, 마침 그가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급제하자 바로 어전에 불러 손수 축하시를 지어 차운하게 하였다. 이때 임금과 주고받은 시는 온 나라에 유명하였다.
昨日嶺南貢擧人 작일영남공거인 어젯날 영남에서 과거보러 온 선비
今辰頭上桂花新 금신두상계화신 오늘 아침 머리 위에 월계화 새롭구나
豈徒於爾爲親喜 기도어이위친희 어찌 다만 어버이 위해 그대만 기쁘랴
爲予金門文學臣 위여김문문학신 나에게도 금마문의 문학신이 되었는 걸 (영조)
自是遐荒賤末人 자시하황천말인 본디부터 저 먼 시골 미천한 사람이
不堪今日聖恩新 불감금일성은신 오늘날 새 성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許歸榮渥尤殊絶 허귀영악우수절 어버이 뵈러 가란 은혜도 특별하니
萬殞難酬愧小臣 만운난수괴소신 만 번 죽어 갚지 못할 부끄러운 소신입니다 (제산)
운곡서당(雲谷書堂)
안동 임하면 내앞마을에 ‘운곡서당(雲谷書堂)’이 있다. 이곳은 조선후기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와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의 학문과 덕행을 계승하고자 후학들이 세운 서당이다. 김학배는 문신으로 벼슬이 예조좌랑까지 지냈으며, 김태중은 그의 제자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운곡서당은 김학배(金學培)가 초당(草堂)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앞면 4칸 규모의 온돌방과 마루로 된 ‘—’자형을 하고 있는 강당기능을 하는 건물과 이를 관리하는 살림집으로 되어 있다. 김학배와 김태중의 학문을 계승하고 후대에 서당을 세운 것으로 볼 때 서원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조선 현종 10년(1969) 금옹 김학배(1628~1673년)가 증조부인 운계 김약이 살던 옛집 위 시냇가에 초가 3칸을 얽어 ‘운계초당(雲溪草堂)’을 지어 학문을 가르치던 데서 비롯된 서당이다. 금옹(錦翁)이 죽은 후 운계초당은 오랫동안 비어 있자 숙종 16년(1690)에 적암 김태중(1649~1711)이 다시 수리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그후 퇴락한 초당을 금옹. 적암의 학문 전수의 덕행을 추모하고 이를 계승하고자 제자들이 사림의 힘을 모아 영조 37년(1761)에 다시 지어 운곡서당(雲谷書堂)이라 하였다.
백인재고택(百忍齋古宅)
백인재(百忍齋)는 내앞마을 의성 김씨 대종택과 귀봉종택 남측에 있는 주차장에서 동측으로 난 동서안길 우곡길 북측에 남향으로 앉아다. 지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와, 헝클어진 기와골이 고풍스럽다.
마을주차장에서 마을 안길을 따라 동측으로 가다보면, 북측에서 남으로 흐르는 건천의 자그마한 다리를 만난다. 이 다리를 지나 마을 방앗간과 마을회관이 안길 남측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회관에서 동북쪽으로 여러 채의 전통가옥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먼저 보이는 것이 ‘백인재’이고, 다음으로 ‘백하구려’, ‘제산고택’, ‘김도련가옥’, ‘치헌’ 등이 있다. 백인재를 제외한 건물들은 최근에 기와 공사를 해서 지붕이 말끔하지만 백인재의 지붕은 기와에 이끼가 자리하여 옛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기와가 흘러내려 지붕의 선은 직선적이지 않아 자연스러운 맛이 있다.
이 가옥은 우간(雨澗) 김호운(金虎運)의 둘째아들인 백인재(百忍齋) 김헌수(金憲壽, 1803~1869)의 고택이다. 이 가옥의 정확한 조영연대를 알 수 없지만 마을사람들은 약 210여년 정도 된다고 한다. 사랑채에는 ‘百忍齋’ 편액이 붙어 있다. 현재는 김창정이 주인이다.
제산종택의 우곡서당 동측에는 김도련 가옥과 치헌(恥軒)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 두 건물은 내앞마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배치평면을 하고 있지 않으며, 두 건물의 조영 배경 또한 다르다.
치헌(恥軒)
치헌은 내앞마을 우곡길을 따라서 있는 전통건축 중에서 가장 동측에 위치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국탄(國灘) 김시정(金始精)의 셋째 아들 치헌(恥軒) 김영운(恥軒 金永運)이 1785년 분가하면서 건립한 살림집이었다. 고택의 당호는 김영운의 호를 따라 ‘恥軒’(치헌)이라고 했다.
원래 치헌은 임동면 지례동 ‘국탄댁’ 옆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립으로 1988년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로 이건 되었다. 치헌은 우곡길 북쪽의 산자락에 등을 기대고 있기 때문에 대문이 안길에서 떨어져 있으며, 길과 대문사이에는 장방형의 바깥마당을 꾸며 놓았다.
백하구려(白下舊廬)
독립지사를 길러낸 명가, 협동학교
백하구려는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이 1885년 4월 19일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 고가[舊廬]이다. 당호는 김대락의 호인 백하(白下)에서 따 온 것이다. 김대락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에 국민 계몽과 독립 운동에 헌신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되었다.
1907년 백하구려의 사랑채를 확장하여 안동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同學校)’ 교사(校舍)로 변경하였다. 협동학교는 당시 안동 지방의 애국계몽운동에서 중추적 위치에 있던 학교로서 고루한 안동유림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의 산실이기도 했다.
2000년 4월 10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된 ‘백하구려’는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단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랫단 기단은 앞쪽으로 3m 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 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에 방이 1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에는 향유(鄕儒)인 금상기(琴相基)가 김대락 사후에 ‘백하구려’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다. 2021년 지금은 김대락의 종증손자인 김시중이 살고 있다. 마당에 접해 있는 낡은 방문을 들어서면 벽을 둘러가며 붙어있는 훈장(勳章)들이 보인다.
백하 김대락(金大洛)부터 김대락의 7남매와 그 자손들이 받은 건국훈장이다. 김대락의 막내여동생 김락(金洛), 조카 김만식(金萬植), 김정식(金萬植), 김규식(金萬植) 증손자 김성로(金成魯) 등이 모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받았다.
백하구려(白下舊廬)는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한 ‘협동학교’를 출범시킨 산실이라는 점과 주인 김대락이 개화와 독립을 위해 활약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비록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었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김대락의 애국정신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안동문화재대관』
내앞사람들의 구한말 독립운동이야기는 별도의 책으로 써도 남는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일어나자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은 만삭인 손부와 손녀까지 데리고 간도로 망명한다. 내앞 사람 22가구 50여명이 함께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 1877~1950)은 김대락의 아들이다. ‘협동학교’에서 교사를 하다가 부친과 만주로 망명했다. 안동 협동학교는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곳이다. 월송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김구와 김일성이 만나는 남북연석회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
구국의 절조 김락(金洛) 여사, 백하 김대락의 누이
— 안동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은 —
백하(白下) 김대락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다. 맏이 김우락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독립지사)에게 출가하였고, 막내 김락(金洛)은 기암 이중업(李中業)에게 출가, 퇴계의 11대손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의병장, 1842~1910)의 며느리가 되었다. 김락은 안동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건국훈장(建國勳章)을 받은 분이다. 김락(金洛)은 의병장 시아버지(이만도)와 시숙부와 남편 이중업을 모셨고, 나라가 망하자 단식 끝에 순국한 시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 향산은 죽음을 기다리며 시를 지었다.
胸中葷血盡 흉중훈혈진 가슴 속 비루한 기운 싹 씻기고
此心更虛明 차심경허명 이 마음 다시금 텅 비어 밝아라
明日生羽翰 명일생우한 내일 날개 돋아 날아오르면
逍遙上玉京 소요상옥경 하늘나라에서 소요하게 되리라
閣瘦茅簷坐 각수모첨좌 야윈 몸 처마 밑에 앉아 있자니
川淙夜深深 천종야심심 쫄쫄 냇물 소리에 밤 더욱 깊어진다
萬理雖未淨 만리수미정 모든 이치 선명히 깨치진 못했어도
寧順自安心 녕순자안심 삶과 죽음 이치 따르니 절로 마음 편안하다
향산(響山) 이만도 선생이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곡기를 끊고 죽음을 기다리던 중에 지은 절명시(絶命詩)이다. 이 시를 지은 날은 9월 2일로, 단식 18일째였다. 이 시를 짓고 6일이 지난 9월 8일, 그는 비루한 역사 현장을 벗어나 훨훨 날아가 하늘나라에서 소요하게 된다.
그리고 김락(金洛)은 만주로 망명한 친정 오라버니(金大洛)와 조카들, 그리고 큰 형부 이상룡과 언니를 눈물로 이별해야 했다. 3·1만세운동 때에는 그 자신이 안동 예안시위에 참가했다가 수비대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두 눈을 잃기도 했다. 고문 끝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김락의 여생은 여전히 가시밭길이었다. 남편 이중업이 독립청원운동(파리장서)을 하다가 병사하고 차남 이종흠이 옥고를 치렀다. 참으로 혹독한 삶이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김락(金洛)은 자신을 포함, 시아버지 이만도(독립장), 남편 이중업(李中業, 애족장), 아들 이동흠(李棟欽, 애족장) 등 3대에 걸쳐 8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친가를 포함하면 훈장과 표창 등 위훈을 추서 받은 독립지사가 무려 26명에 이른다. 역사학자 안동대 김희곤 교수는 그에게 ‘민족의 딸이요, 아내이며, 어머니’라는 헌사를 바쳤다.
김락의 사위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학봉종가의 13대 종손으로, 주변에서 ‘파락호’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군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들 모두 사후에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내앞마을 의성 김씨 문중의 집단 망명은 김동삼의 계획에 따라 백하 김대락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내앞 문중과 함께 집단 망명을 감행한 집안은 석주 이상룡의 고성 이씨였는데, 이들과 혼맥으로 이루어진 영양·영덕·울진 등의 문중도 이 길에 동참했다.
독립지사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일송정 푸른솔은~’으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
의성 김씨 문중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고종 15)∼1937)이다. 경상도 안동 임하면 내앞마을에서 출생하여, 가풍에 따라 한학을 공부하다가 근대 교육과 민족주의 운동으로 뜻을 돌려 1907년 고향의 선배인 유인식(柳寅植-역사학자·독립운동가) 이상룡(李相龍-임정국무령·독립운동가) 김병식(金秉植, 협동학교교장)과 함께 경북 최초의 근대적 사립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협동학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안동 지역에서 개혁 유림 세력이 힘을 합쳐 세운 3년제 중등학교였다.
이 무렵 계몽 운동에 뛰어든 인사들 중 ‘신민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일합방조약 체결을 내다보고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 본명이 긍식(肯植)이었는데 뒷날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스스로 ‘만주 동삼성의 한 소나무’가 되겠다는 의지로 이름을 동삼(東三), 호를 일송(一松)으로 했다.
1910년 마침내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이 계획을 구체화하여 1911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윤기섭 등과 함께 간도 지방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데 참가했다. 경학사는 자치 조직,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무장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간도 지역에서 군정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1919년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로 조직을 개편하고 참모장을 맡았다. 3·1 운동의 단초 중 하나를 제공한 〈무오독립선언〉에 39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19년경, 김동삼은 상하이로 나아갔다. 1922년에 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에 가담했고, 1923년에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자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議長)을 맡아 활동하였는데, 이때 부의장이 안창호와 윤해였다. 1925년 정의부 참모장에 취임했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7년 향년 60세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유해를 수습하여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뿌렸다.
이때 조헌영(趙憲泳) 조지훈(趙芝熏) 여운형(呂運亨) 이원혁(李源赫) 홍명희(洪命熹) 방응모(方應謨 이극로(李克魯) 이인(李仁) 허헌(許憲) 등이 문상·애도하고 조선일보사장 방응모가 장례비를 상당 부담했다. 독립운동가 김승학(金丞學)은 ‘남만주벌판의 호랑이’ 라고 선생의 전기에 제목을 달았다.
의성김씨 청계공파 문중의 방대한 유물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 특별전시회 열어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그 동안 청계공파 대종택을 비롯하여 10여개 지파支派 문중에서 모두 18,000여 점에 달하는 국학자료를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연차적으로 기탁했다. 국학진흥원에서는 민간 소장 국학 자료의 수집과 보존을 통해 한국학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仁을 머리에 이고 義를 가슴에 품다" 라는 주제로 「제5회 기탁문중 특별전 "의성 김씨 청계공파 문중" 유물 전시회」를 2008년 11월 27일부터 2009년 2월 8일까지 국학진흥원 내 ‘유교문화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 바 있다.
전시회는 기탁자료 18,000여점 가운데 선별한 70여 점이다. 주요 전시자료는 임진왜란 이전의 회화(繪畵)로서 당대의 복식과 회화 양식 및 기법 연구 사료로서 가치가 큰 보물 제1221호인 ‘청계공 김진 영정’을 비롯하여, 청계공파 14대까지의 저명한 후손 94인 등 모두 1백 명의 유묵(遺墨)을 집성해 1973년에 제작한 병풍 ‘대기병(大忌屛)’, 김진 선생이 친필로 작성한 유언 〈분재기〉, 학봉 김성일 선생이 사가독서를 하면서 지은 시집 《호당삭제》(보물 제905호) 등이 전시되었다. …♣ [계속] ☞ 안동 반변천 수계 임동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