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는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내에 위치해 있는 누각으로 남강(南江)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이다. 남강변 절벽 뒤편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주장대(主將臺)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이기도 했다. 1241년 고려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지대(金之岱, 1190-1266)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1365년? 1379년에 김충광(金忠光)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1322년 목사 안진(安震, ?-1360)이 중수하였고, 1618년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 1576-1627 )에 의해 재건된 이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으며, 1725년 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중수되었으며,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또 한번 소실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인간 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1593년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1593년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전쟁 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촉석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했다. 1747년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남으로는 진주 촉석루, 북으로는 평양 부벽루라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河崙, 1347-1416)의 '矗石樓記'를 비롯한 많은 글이 걸려 있다.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