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2
김선영
열려 있던 방문
슬그머니 닫히고
이불 걷어차던 동생
새벽이면
이불을 도로롱
번데기가 된다
- 동시집 『주렁주렁 복주머니』 (2021 도담소리)
가을을 감는다
박소명
풀숲마다
풀벌레들이
추르르르르르~
가을을 감는다.
선선한 바람
푸르른 하늘
알알 맺은 열매
고운 잎새
겨울 오기 전에 다 감아
계절 선반에 간직했다가
흰 구름 피어오르는
새 가을에 풀어놓으려고
밤새도록
돌돌돌
도르르르르르~
-《열린아동문학》 (2021 가을호)
듬비
박해경
봄비 내린 뒤
구름과 하늘을 담고 있던
작은 듬비에
내 발이 빠졌다.
구름도 하늘도
깜짝 놀라
내 발밑에서 출렁거린다.
*듬비: 웅덩이
- 동시집 『우끼까 배꼽 빠질라』 (2021 책내음)
고은이
서정홍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은
똥오줌 마려울 때 어떻게 할까요?
-길옆에 세워둔 짐차 뒤에서요.
-하천에 내려가서요.
-참지 않을까요?
어머니가 길거리에서
붕어빵을 팔고 있는 고은이가
-가까운 상가에 뛰어가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정답을 맞혔어요.
‧‧‧‧‧‧
말줄임표 끝에
.
마침표도 찍지 못하고.
-《동시마중》 (2021년 9.10월호)
세상에 이런 일이
신난희
우리집 미용실에
하얀 북극곰이 찾아왔어요
아기 공룡 둘리처럼
빙하 타고 왔대요
북극이 더워져서 못살겠다고
하얀 털 다 깎아달래요
부들부들
엄마 손이 떨리고
뭉턱뭉턱
하얀 털이 떨어질 때
또록또록
커다란 눈물방울도 떨어졌어요
지구가 더워져
빙하가 녹고
섬도 사라지는 방송을 본 날 밤
꿈이지만
정말 생길 것 같아
스위치 하나 내려요
지구 온도 내려요.
-《동시 먹는 달팽이》 (2021년 가을호)
등
이수
장맛비 고인 웅덩이에
엎드려 있는
모래주머니의 등을
며칠째 밟고 지나갔어요.
생각해 보면
내가 밟는 건
모래주머니 등만이
아니었어요.
가족의 등 친구의 등 선생님의 등
흙의 등 물의 등 숲의 등‧‧‧‧‧‧.
모래주머니 등을 밟고
흙탕물 건너다녔듯
묵묵히 내준 등 기대어
하루하루 잘 건너왔어요.
-《열린아동문학》 (2021년 가을호)
빈말
이재순
빈말이란 말이 있지
한 입 베어 먹으면
텅 빈 공갈빵처럼
어떤 말이
빈말일까?
말 속에 있는 참말
누가 갉아먹고
껍질만 있는 말
훅ㅡ
불면 날아가 버리는 말.
-《어린이와 문학》 (2021 가을호)
달빛 밟기
조정인
한밤중 잠에서 깼어.
방바닥에 달빛이 소복했어. 손바닥으로 쓸면
뽀얗게 묻어날 것 같았어.
달빛을 덮고 강아지 송이는 곤히 잠들었어.
반 뒤집힌 귀를 가만히 펴주었어.
보라색 가느다란 실핏줄들이 지나가는 귀.
작은 앞발도 쥐어보았어.
달빛이 희게 내린 동그란 이마에
입술도 얹어보았어.
나도 달빛 한 자락 끌어다 덮고 송이 곁에 누워
송이 코고는 소리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어.
강아지 잠 속에도 내 잠 속에도
달빛은 내려 쌓여서
꿈속의 내가
강아지 꿈속으로 놀러갔어.
우리는 포근포근 달빛을 밟았어.
국화꽃무늬 강아지 발자국 내 발자국이
머뭇머뭇 뒤따라왔어.
까치 같은 내 짝꿍
최정심
까치의 흰 깃털이
새하얗게 반짝이는 건
곁에서 검은 깃털이
받쳐주기 때문이야
검은 깃털이
더욱 까맣게 보이는 것도
옆에 흰 깃털이 있기 때문이지
흰 깃털과 검은 깃털이 되어
서로를 빛내주는
- 동시집 『비 주머니』 (2021 청개구리)
기린호텔
홍현숙
케냐에 가면
기린호텔이 있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예약이 항상 꽉꽉 차 있대
내가 만일 그곳에 간다면
가방에
기린이 좋아하는
아카시 잎과 포도를 가득 넣어 갈 거야
점박이 목을 쑤우욱 들이밀며
가방을 긴 혀로
달그락달그락 뒤지고 있을
기린을 상상해
그런 기린호텔
한 번 가 보고 싶어
- 동시집 『기린호텔』 (2021 걸음)
출처: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