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9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마태오 11,25-27
선물 없이는 상대를 알 방법이 없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성령이 필요한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진리의 주인이 되는지 알려주십니다.
바로 철부지 어린이들입니다.
그 어린이의 대표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말씀으로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드러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드러내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은 ‘사랑’이고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지 않으면 그분이 사랑인 줄 모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령께서 ‘선물’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선물을 받아야만 사랑이 무엇인지, 아버지의 본모습을 알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삼위일체 신비가 매우 크게 녹아있는 내용입니다.
삼위일체는 아버지와 아드님이 성령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하나가 될까요? 아버지가 아드님께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시작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성령은 ‘선물’입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선물을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아봐야 그 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자격이 있는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선물을 주는 사람도 그 받는 사람에게 선물을 줌으로써 자신과의 관계가 합당한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성령을 받으시고 그 안에 들어있는 뜻을 십자가에서 완수하시며 아버지의 완전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다시 아드님께 성령으로 모든 것을 주시는데 이것이 부활입니다.
이렇게 관계가 지속되고 그 관계가 ‘사랑’이 됩니다.
또 그 사랑을 통해 자녀가 탄생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탄생입니다.
영화 ‘궁극적 선물’(The Ultimate Gift: 2006)은 제이슨의 극도로 부유한 할아버지인 하워드 레드 스티븐스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레드는 자신의 자손들이 다 돈만 바라지 자신과의 관계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돈을 조금씩 줍니다.
손자 제이슨은 그렇게 돈 많은 할아버지가 자신들을 가난하게 살게 만든 것에 매우 실망해 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제이슨에게 12개의 작업만 완수하면 많은 재산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작업이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일의 선물: 제이슨은 목장에서 일하며 열심히 일하는 것의 가치를 배웁니다.
돈의 선물: 제이슨은 한정된 금액의 돈을 받고 자신의 방법으로 더 많이 벌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친구의 선물: 제이슨은 진정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배움의 선물: 이전에 몰랐던 것을 배우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문제라는 선물: 제이슨은 문제가 변장한 기회라는 것을 배웁니다.
가족의 선물: 제이슨은 가족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웁니다.
웃음의 선물: 그는 인생에서 기쁨과 유머를 찾아야 합니다.
꿈의 선물: 그는 꿈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는 선물: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감사의 선물: 제이슨은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루의 선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웁니다.
사랑의 선물: 제이슨은 무조건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사실 제이슨은 몸으로 하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관계에는 서툰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친구를 사귀어본 적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린 에밀리라는 소녀를 공원에서 사귀에서 자신과 친구가 되었다고 증언해 달라고 합니다.
에밀리는 속는 셈 치고 제이슨과 친구가 되어줍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백혈병이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자신을 위해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관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받은 1,000만 달러를 아픈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수조 원에 달하는 할아버지의 재산이 다 자신의 것이 된 것입니다.
제이슨은 자신도 모르게 죽은 에밀리를 통해 위 열두 개의 모든 임무를 완수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들려고 한 것이 할아버지의 궁극적인 선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이 영화는 성령께서 어떻게 선물이 되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일치시키는지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성령을 받으시고 그 성령에 가장 완전한 그릇이 되셨습니다.
성모님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살과 피가 곧 성령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그분의 뜻, 곧 당신이 우리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살과 피를 내어놓는 사람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러면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당신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 지극한 이가 먼저 선물을 주지 않으면 관계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선물은 받는 사람을 정화합니다.
그래서 그도 그 선물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면 비로소 서로를 온전히 알게 됩니다.
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관계에서 오는 행복은 이때 절정에 이릅니다.
삼구에 빠져 성령을 거부하지 말고 나를 죽여 성령에 합당한 그릇이 됩시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참 행복입니다.
이웃에게 살과 피가 되어줍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9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마태오 11,25-27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하느님 얼굴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소명으로 주신 하느님께 도저히 자신 없다고 난감해하는 모세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탈출 3, 12)
이 세상에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말씀이 또 있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 내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상황 앞에 놓이던지,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큰 위로요
기쁨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언약에 용기백배한 모세는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과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직도 타고난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고민하고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도자로서 강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이며 그들을 이끌기 시작합니다.
절대 권력자 파라오의 권력과 위협에도 모세는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매일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 하느님과 긴밀히 소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그 귀중한 소명을 시작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기쁨 충만한 신앙생활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바로 언제 어디서나 주님 현존 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의 행보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굳게 믿었으며, 이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굳게 믿고 살아가셨던 마리아에게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 현존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기쁨의 원천입니다.
따라서 고통 중에도 기쁘게 사는 비결은 주님 현존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는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라씨아 플레나(Gratia plena)! 번역하면 ‘충만한 은총을 받은 여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리아를 각별히 공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기쁨으로, 은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항상 자신 안에 현존하심을 수용했습니다. 성령께서 자신 안에 현존하시고 역사하심을 수용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가 오로지 성령의 힘으로 인한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마리아는 이제 새로운 계약의 궤, 성령의 궁전, 살아있는 감실이 되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2023. 7. 19. 수)(마태 11,25-27)
<유식한 바보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처하지만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 교만한 위선자들, 잘난 체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기득권층 사람들, 지식인들, 권력가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감추시고” 라는 말씀은, 그런 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자들은 자기들이 현세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에 취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데, 그 뜻을 외면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외면해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자들이 스스로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 1,18-22).”
이 말은 원래는 무신론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을 꾸짖는 말인데, 신앙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속의 이상하고 쓸데없는 이론에 귀를 기울이다가 신앙인들도 하느님과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 중에도 그런 ‘유식한 바보’가 있습니다.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다가 예수님의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에서의 선교활동’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과 토론하고, 또 날마다 광장에 나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몇몇 철학자도 바오로와 대담을 나누었는데, 어떤 이들은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바오로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 하고 말하였다.
사실 아테네인들과 그곳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모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사도 17,17-18.21).”
오늘날에도 진리를 탐구한다고 말하면서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고, 이해가 안 되면 아예 안 들으려고 하고......
그러면서 점점 더 ‘구원의 진리’에서 멀어져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겸손한 신앙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드러내 보이시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겸손한 사람들에게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들만이 단순하고 순수하게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세속의 지식이나 기득권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세속의 기득권층 사람들과 지식인들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구원을 독점한다면,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고 배울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소외되고 차별 당한다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도 아니고, 그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들의 교만과 위선을 버리면 됩니다.
스스로, 진심으로, 자기를 낮추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라는 말씀은, 승천하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나라’에, 즉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도달하는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