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되리라
묵시 21,9ㄴ-14; 요한 1,45-51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2023.8.24.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인도와 터키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이교도들에 의해 치명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의 인간됨됨이와 사도로서의 자질을 일찌감치 알아보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는 넓은 편이어서 햇볕을 가려줍니다. 그래서 낮의 무더위를 피해서 모임을 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당시는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가 일상적으로 유다인들을 폭력으로 억압하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열혈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보통의 유다인들은 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나누기도 하고, 뜻이 맞으면 모임을 결성하는 결사 행동이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계기는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모임을 하고 있는”(1,48)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가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내다보며 자신의 삶을 투신할, 거짓이 없는 지사(志士)임을 알아보셨습니다.
그 정도만으로도 바르톨로메오, 즉 나타나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만나자마자 그의 지사적 면모를 알아보았고 나타나엘은 그분의 예언자적인 면모를 알아보면서, 서로 간에 동시대를 사는 아픔과 고민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예언자들의 씨가 마를 정도로 워낙 시대상황이 답답했던 지경이라서 그분이 나자렛 출신이라는 필립보의 전언(傳言)에서는 시쿤둥하던 나타나엘도, 자기의 고민을 알아줄 법한 예수님의 통 큰 발언을 들으니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래서 가르치고 배운 사이도 아직 아닌데도 ‘스승님’이라 부르더니, ‘하느님의 아드님’이니 ‘이스라엘의 임금님’이고 고백해 버렸습니다(1,49).
그러니 이런 일방적 ‘오바 발언’을 들으시던 예수님께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심정으로 한 마디를 보태셨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1,30)이며,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1,3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공생활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그 복음이 현실화되는 과정과 그리고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 순명하고 또 하느님께 청하는 역동적인 결과를 체험하게 되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게다가 그가 사도가 되면 체험하게 될 현실 즉,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투신할 미래의 운명도 암시하셨음은 물론입니다.
늘 하늘에 열려 있는 자세로 인간관계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면, 마침내 우리를 도구로 쓰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들이 우리 위에서 오르내릴 것입니다. 우리네 인간관계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아 생겨난 골이 있다면, 그분의 자비로 메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양 교만스러움으로 돋아난 우리네 인간관계의 언덕이 있다 해도 그분의 은총으로 깎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네 인간관계도 성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르톨로메오를 사도요 선교사로 쓰신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 안에서도 재현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로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가며 도와주는 인간관계란, 외적인 변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열린 신앙과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관계를 성화시켜가는 이들에 의해서 이룩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러한 인간관계는 예수님과 바르톨로메오 사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머지 열한 사도들과의 사이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즉, 사도 요한이 환시로 본 광경에서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있는 성문에 동서남북으로 난 성벽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3). 실제로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시작된 인간관계는 부활 후 발현체험을 거친 후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를 거쳐서 그리스도와 사도의 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면서 백 세 무렵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돌보며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한 사도 요한 외에는 열한 사도가 모조리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심지어 생전에 제자로 불리지 못했던 사도 바오로까지도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 사도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복음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침으로써 교회 안에서 사도로 부활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사도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하늘이 열렸으며, 그 열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가며 믿는 이들에게 큰 일을 해 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은총스런 섭리가 실현 가능하게 된 원인은 예수님과 그 사도들이 맺었던 인간관계 덕분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또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그 거룩한 인간관계가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이룩할 수 있었던 일보다도 더 큰 일을 이룩할 수 있게 섭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희망이 오늘 미사의 영성체송에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루카 22,29-30).
교우 여러분! 인간관계를 성화시키고 복음화시키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되리라 2023.8.24. 목요일 강론중에서 늘 하늘에 열려 있는 자세로 인간관계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면 마침내 우리를 도구로 쓰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들이 우리위에서 오르내릴 것입니다. 서로 상처를주고 받아 생겨난 우리네 인간관계의 골을 그분의 자비로 메울 수 있을 것입니다.그렇습니다.공감합니다.교회는 사도들의 존재로 말리암아 하늘이 열렸으며 그 열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가며 믿는 이들에게 큰 일을 해내는 메시아 백성이였습니다 이러한 은총스런 섭리가 실현가능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예수님과 그 사도들이 맺었던 인간관계 덕분이였습니다 그렇습니다.공감합니다.인간관계를 성화시키고 복음화시겨야합니다.그렇지요. 신부님의 강론 감사합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보석 처럼 귀한 인간관계를 일구어 가꾸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미 이룩하는 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