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이씨 (公州李氏) | ||||||||||||||||||||||
| ||||||||||||||||||||||
1> 시조 : 이천일[李天一] | ||||||||||||||||||||||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 ||||||||||||||||||||||
공주는 충청남도 동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약 6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그후 천일의 36세손 우(양호공)의 후손에서 크게 번창하여 우의 아들 저(苧)가 고려에서 대제학을 역임하고 화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사손(思孫)은 첨의정승을 지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력공파 명선(明善)의 10세손 기수(麒壽), 붕수(鵬壽) 형제가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우고 옥탑평 싸움에서 순절하여 형은 부제학, 아우는 지평에 추증되었다. 강양공파 부(敷)는 조선개국 삼등공신으로 흥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11세손 도(棹)가 숙종때 부총관을 지냈다. 그외 3·1운동 민족대표인 필주(弼柱)와 지평공파 명보(明保)의 후손으로 철종때 우승지를 역임한 동발(東發), 참의공파 명윤(明尹)의 후손으로 정조때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응거(應擧)가 이름났고,현감공파 명의(明義)의 후손인 병덕(秉德)은 순조때 현감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주이씨(公州李氏)는 남한에 총 6,809가구, 28,6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
3> 집성촌 |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우정리, 유촌리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 | |||||||||||||||||||||
충남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 |
충남 공주군 장기면 월송리 | |||||||||||||||||||||
경북 예천군 지보면 매창리, 만화리 |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 |||||||||||||||||||||
전남 화순군 춘양면 양곡리 |
| |||||||||||||||||||||
|
광산 이씨 (光山李氏) 광산이씨 홈으로이동 | |
| |
1> 시조 : 이종금[李宗金] | |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 |
광산(光山)은 전남 북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서기 757년(경덕왕 16)에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 때는 견훤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으나 918년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광주(光州)라 칭하였다. 광산 이씨의 3대 인맥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상서공 순백의 아들 기(奇)가 고려 때 상호군을 역임했고, 증손 일영(日暎)의 둘째 아들 선제(先齊)가 조선조에 와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그후 양심당 시원(始元)의 아들 복선(復善)이 대사헌과 대사간을 역임했고, 성심당 형원(亨元)의 아들 달선(達善)은 해박한 경연(經筵)으로 왕으로부터 사유(師儒)라는 칭호를 받았다. 전라감사 중호(仲虎)의 아들 4형제중 장남 급(汲)은 홍문관 교리와 정읍 현감 등을 지냈으나,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아우 발(潑), 길과 함께 화를 당했다.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우고 진천현감을 지낸후 형 홍량(弘量)과 함께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의 숭앙을 받았던 홍우(弘宇)의 아들 서는,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능을 인정 받았으며, 스승의 명을 받아[오선생예설(五先生禮設)]을 편찬하였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난정이 계속되자 스승를 따라 벼슬의 뜻을 버리고 은거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후 거처를 승호(경북 달성군 논공면)에 옮기고 동호학당을 열어 스스로 호를 야로(野老)라 칭하고 후학을 기르는데 정성을 다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며, 1650년에 생을 마치니 유림의 발의로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사시(私諡)를 짓고, 선조가 모셔진 회연서원 향현사에 배향하였다. | |
3> 집성촌 | |
전남 광산군 대촌면 원산리 |
경북 달성군 논공면 삼리동 |
전남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 |
대구시 북구 관음동 |
전남 광산군 극락면 운암리 |
졍북 고령군 성산면 고곡동 |
전남 광산군 광산면 일곡리 |
경북 성주군 선남면 취곡동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
|
|
| |
1> 시조 : 이자성[李自成] | |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 |
광주(廣州)는 경기도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망명하여 회안국을 세우고 한왕이 된 마한의 일부였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는 신라 내물왕때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본래 칠원에 세거해온 호족의 후예로, 신라에서 벼슬을 세습해 오다가 제56대 경순왕에 이르러 신라가 망하자 이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가 회안 호장으로 삼았다. 그후 광주이씨는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이 실전되어 고려말에 현달했던 현조(顯祖)를 율정공 관의(寬義)의 맏아들 점은 성균관 사예와 집의, 사성을 역임한후 형조참판에 올랐다. 후에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같은해 한성 판윤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북 부안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 후에 복관되어 이조판서와 한성 판윤,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이듬해 둔촌의 아버지 당이 영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천곡은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놓은영천군 나현 모부인(母夫人) 묘 아래에다 예장을 치루었다.
풍애 지직(之直)의 둘째 아들로 세조때 우의정에 올랐던 인손(仁孫)의 다섯 아들이모두 현달하여 명문의 지반을 다졌는데, 장남 극배(克培)는 성종때 좌리3등공신으로 좌참찬, 영중추부사를 거쳐 영의정에 오르고 광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광성군 극감(克堪)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성종이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던 날형방승지로서 약을 가지고 갔었고, 그의 아들 수형, 수의, 수정, 3형제가 이조와 홍문관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간신 임사홍과 류자광이 연산군을 충동하여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수정의 아들 준경(浚慶)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신승연과 황효헌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31년 문과에 급제했고, 여러 관청의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558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윤경의 아들 중열(中悅)은 명종때 을사사화에 연루된 친구 이휘를 변호하다가 갑산에 유배, 사사되었다. 광주이씨의 화려한 인맥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목인 한음 덕형(德馨)은 좌의정 극균의 현손으로 지중추부사에 오른 민성(民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덕형은 31세 때 학자 관직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대제학에 올랐다. 초탁(招擢)되었다. 광해군때 영의정으로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했다가 삭직되고 어렸을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혼조삼리(昏朝三李)]라 하여 이항복·이원익과 더불어 당대의 명신이었다. 광주이씨의 또 다른 인맥으로는 지군사공 희령(希齡)의 아들 지강(之剛)이 한성부윤을 지내고 의정부 참찬 겸 대사헌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지유(之柔)는 성주목사를 역임했다. 한편 고려 말에 형조 우참의를 역임하며 강직한 충절로 이름이 높았던 양중(養中)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후에 남한산 밑으로 퇴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효행과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필성(必成)과 조선조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휴징(休徵)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성리학에 정통했던 극기(克基)의 아들 은(誾)은 학자로 영광의 보촌우에 배향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이씨(廣州李氏)는 남한에 총 33,816가구, 141,8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
3> 집성촌 | |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무갑리 |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
전북 고창군 해리면 기반리 |
경남 창녕군 계성면 신당리 |
전남 보성군 오성면 대곡리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삼신리 |
전남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양곡리 |
평북 의주군 옥당면 당목동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