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이 나쁜 이유는 무엇인가?
1. 문제제기
한국 교회가 기복신앙 때문에 위태롭다는 자성의 목소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 기복신앙을 경계하면서도, 복을 얻고자 하는 신도들의 강렬한 욕구를 외면할 수 없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기복신앙을 완전히 버릴 수 없기에 그 의미를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일이 종교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사실 어떤 점에서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지 모른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복이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복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창12:2).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쁘고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에서 “요구하는” 왜곡된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왜곡된 신앙이 오히려 정상적인 신앙인 양 그 정체를 숨기고 교회 안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한번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왜 교회가 나가는가? 왜 예수님을 믿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정답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렇다고 구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 자리에서 논의하지는 않겠다. 비록 그 구원이 전적으로 저 세상 천국에서 실현된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고 저 세상 천국에 가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은 왜 나쁜 것인가? “이 세상에 ‘나뿐’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기복신앙의 폐단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바로 이런 “나뿐”이라는 이기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복신앙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과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결단코 떨쳐버려야 할 신앙양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목회자로부터 일반 성도에 이르기까지 기복신앙으로 온통 뒤범벅이 된 듯하다.
2. 기복신앙의 정체와 한국 교회의 실태
사전적 의미에서 볼 때, 기복(祈福)이란 복(福)을 구하는 것이요, 신앙(信仰)이란 어떤 대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은 복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풀든지, 아니면 누군가를 믿고 따르면서 복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든 결과적으로 목적은 복을 구하는데 있다. 그런데 복을 구하는 신앙은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 이유를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기복신앙의 첫 번째 문제점은 그것이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양태일 뿐이라는데 있다.
한국 교회에서 우려하는 기복신앙의 양태는 결코 영적인 기복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영적”이라는 말과 “기복신앙”이란 말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한발 양보해서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 실태는 결코 영적인 기복신앙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기복신앙은 자신의 물질적, 육체적 복을 위해 비는 미성숙한, 더 심하게 말하면 천박한 신앙일 뿐이다.
여기서 미성숙한 신앙이란 자신의 건강, 재물, 출세 등만을 위해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을 말한다. “1일 3善이면 天福이 내리고, 1일 3惡이면 天災가 임한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민중도교에서 나온 것이고, 한국의 무교적 민간신앙에도 널리 퍼져 있는 신앙양태인데, 이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목적이 복을 얻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될 때, 그것은 바로 저차원적인 종교윤리가 된다.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저차원적인 윤리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기복신앙의 설교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기복신앙을 자제하고 좀더 남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온통 복 받으라고 외치고, 부자 되라고 축원한다. 심지어 복 받지 못하고 부자 되지 못하면 신앙이 없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심까지 받아야 할 지경에 놓인 것이 한국 교회의 일반화된 현상인 것 같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고 추켜세우지만, 정작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하는 이가 별로 없다.
이런 교회의 기복신앙은 외적 성장주의로 빠르게 치닫는다. 이 교회의 외적 성장주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대부분 한국 교회들은 크고 안정적인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목회의 1순위는 언제나 “교회 키우기,” “교인 늘리기”에 집중되어 있다. 대형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물질적인 풍요다. 이것은 교인수와 직결되는 문제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 몰려들어야 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의 토대 위에 큰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가 주일성수를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동시에 교인수가 물질적 풍요로 이어지려면 헌금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십일조라는 제도는 매우 확실한 담보가 아닐 수 없다. 그밖에 각종 헌금들이 교인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든다. 전도를 왜 하는가? 교인 늘리기 위해서인가? 교회 안에만 옹기종기 몰려있는 한국 교인들의 영적, 사회적 무기력함에서 탈피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을 드리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신앙표현이다. 10의 1이 아니라 10의 3이면 어떻고 10의 5면 어떠랴. 하지만 왜 감사는 꼭 헌금(돈)으로 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 초기에는 “날연보”란 것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날”(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감사의 방법을 좀더 다양화해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에 교회까지 덩달아 춤을 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란 말이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 헌금(돈)을 드려라”로 들리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렇게 강조하며 걷어들인 헌금은 대체로 어디에 사용되는가? 역시 1순위는 제 교회 짓기에 들어간다. 한국 교회의 “교회건축 신드롬”은 교회 기복신앙의 결정체다. 이것은 교회당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오류에서 나온 것이다. 아직도 교회당을 성전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구약에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던 신앙이 오늘날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신앙의 모범인가?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로 대체되었다. 성전이라는 건축물에 갇힌 하나님은 이제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신다. 교회는 바로 신자 자신들이요, 신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어디나 신자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면 교회당이요, 예배당인 것이다.
2) 둘째로 기복신앙은 일종의 보상신앙이기 때문에 문제다.
신앙의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복을 구하기 위해,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누군가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성숙한 신앙양태가 아니다. 만일 복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신앙의 대상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포기할 것인가? 철새처럼 복을 장담하는 그런 신앙의 대상으로 옮겨다닐 것인가? 신앙이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대가가 이 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물질적인 것에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잘못된 신앙이다.
우리는 왜 기도를 하고, 왜 전도를 하고, 왜 봉사를 하는가? 하나님께서 주실 어떤 상급을 위해서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고 안 주시고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상주실 것을 믿으라고도 했다(히11:6). 그러니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대로 또 행한 만큼 충분한 상급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 상급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저급하고 어린 아이의 신앙인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봉사한다. 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면 보상을 기대하고 효도하지는 않는다. 그런 어른이 있다면 그는 미숙한 “어른 아이”일 뿐이다.
보상심리에서 나온 신앙양태는 헌금을 드리는 근본 목적도 변질시킨다. 교회 건축헌금을 종용하면서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만큼 확실한 투자는 없으니 힘껏 헌금을 하자고 강변하는 모습을 보면,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헌금은 가장 확실한 투자라니. 한술 더 떠서 하나님께 헌금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신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사실 그 자리에서 그 말을 제지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수표를 남발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하나님께 헌금하면 곧 바로 수십 배의 이자를 쳐서 돌려준다니, 은행 이자에 비해 얼마나 높은가? 그렇다면 어느 누가 은행에 돈을 맡기겠는가?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달콤한 약속을 하신 분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 것은 천국 복음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땅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의미한다(마13:23).
3) 세 번째로 기복신앙은 복음의 정신과도 상극(相剋)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조건으로 물질적 풍요와는 정반대 조건들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며(눅6:20),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이며(마5:10),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모와 형제 자매도 버린 자(눅14:26)라고 했다. 반대로 합당하지 않은 자는 부자요(마19:23-24,눅10:23-25, 막10:23-25),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요(눅9:62),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자요(막10:15, 마18:3, 눅18:17),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요3:5)라고 했다.
또한 성경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구분하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경계한다(요일2:16). 오히려 예수께서는 영혼의 유익에 되지 않으면 눈도 빼고 손도 찍어내라 하셨다(마5:29-30). 자기 자신도 버리고 죽기까지 제자의 삶을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마귀에게 세 가지 유혹을 받은 것은 어떤 점에서 기복신앙의 요소들(재물/ 명예/ 권력)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다. 교회의 기복신앙은 세상의 기복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에 나가서 복을 비는 것과 큰 고목 밑에서 복을 비는 것은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을 세상의 잡신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복을 구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요, 우상숭배다. 어떤 형태로 미화한다 하더라도 교회의 기복신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기복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암적 요소다.
신앙의 본질과 공존하기 어려운 기복신앙은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신앙일 수 없다. 그러니 기복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 해석에서 영적인 의미를 놓치고 문자적으로 집착하게 되며, 단장취의(斷章取意)하는 문제가 빈번하게 자행된다.
기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기복신앙의 기도는 하나님도 들어주실 수 없다. 왜냐하면 기복신앙은 제 한 몸 잘 되기를 바라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분이시지만,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분은 아니시다. 결코 하나님은 차별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 가운데 고통 당해도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식의 신앙이다. 내 아들 대학 붙게 해달라는 기복적 기도는 다른 학생 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와 다를 바 없다. 모든 부모가 다 자기 아들 붙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누구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기도가 아닌 기복신앙의 기도는 당연히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기도, 이런 기도가 중언부언하는 기도다. 통성기도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기도라는데 있다. 통성기도가 다 잘못된 기도는 아니지만, 대개 통성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자기 원하는 것만 목청껏 외치다 말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기복신앙과 아주 잘 어울린다.
물론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애절한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어린 아이처럼 떼를 부리며 간구해야 할 때도 있다. 모든 것이 형통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응답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분이시고, 우리의 억울함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억압과 고통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대답하시는 분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절박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우리의 기도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웃 성도의 아픔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해, 내 교회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는 말든, 우리 교회에만 성도들이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사람은 어찌 되든지 간에 나만 잘 되고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대부분 하나님의 기본 법칙, 서로 나누라는 명령을 파기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은 어렵게 되고, 내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다른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기도를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기복신앙은 은사 위주의 신앙으로 빠지기 쉽다.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는 신앙의 본질을 착각하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기적이나 추구하는 신앙으로 바뀌게 한다. 자기 희생과 섬김의 덕목은 어느 틈엔가 빠져버리고 만다. 한국의 일부 기도원들이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사를 내세우며 성도들을 혹세우민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도 기복신앙으로 길들여진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인 양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를 쇠퇴시키는 주된 요인이 될 것이다.
3.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제자도 실천뿐!
1) 기복신앙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올바른 신앙교육이 필요하다.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다(딤후3:16).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경을 바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복음의 본질과 신앙의 본질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 목회자가 기복신앙에 빠져있다면 누가 바른 교육을 시킬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기복신앙은 누가 바로 잡아주는가? 평신도라도 나서야 한다. 아니 평신도가 나설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제일 마지막 열매가 절제(갈5:23)라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경은 그 밖에서도 절제의 미덕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행24:25; 고전9:25; 딤전3:2, 11; 딛1:8; 2:2; 벧후1:6). 절제신앙과 기복신앙은 반대말이다.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코 절제할 수 없다.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기복신앙에 빠지지 않는다.
2) 복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행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 사신 분이다. 심지어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분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재산을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보상심리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면서, 왜 우리는 건강과 재산과 명예를 위해 그토록 사력을 다해 간구하는가?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그의 제자가 가는 길은 제자도(弟子道)다. 제자도는 십자가의 길로 통한다. 그런데 이 길은 기복신앙과 전혀 무관한 길이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길이다. 과연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제자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 그보다도 먼저 우리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4. 마무리
언제부터인가 성경을 직접 읽을 줄 아는 젊은이와 의식있는 성도들이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분노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 비판을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과 설교가 목사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목사라고 해서 언제나 올바른 해석을 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성경 이해를 위해서 비판의 목소리는 계속 되어야 한다.
만일 한국 교회가 이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생명력 없는 종교, 맥빠진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목사의 설교에서 기복신앙의 어두운 그림자를 볼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는 성도들이 있기에 한국 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기복신앙은 정말 나쁜 것인가? 그렇다. 기복신앙은 정말 나쁜 신앙이다. 교회는 결단코 이 기복신앙의 늪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교회의 목회자도 교회의 성도도 모두 기복신앙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기복신앙을 멀리 할 수 있는 한국 교회가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다.
김용복/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