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 전두환(7) - 5.17과 그 전야
10.26.직후의 카오스 정국
1979년 10월 26일, 거대 권력 박정희 대통령이 사라지자 국가는 타이타닉과 같은 난파선이 되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생각에 너도나도 눈들이 뒤집혔다. 일반범죄는 물론 밀수, 살인, 강도, 폭력 등 강력범죄들이 기승을 부렸다. 당시 서정화 내무장관은 1980년 1월부터 3월까지의 범죄 발생 현황을 보고하고 우려를 표했다.
“살인 64.3% 급증, 강도 113.9%로 급증, 밀수 122.6% 폭증, 폭력 20.1% 증가, 절도 21.4% 증가, 특별관리가 절실합니다.” 인명진 목사 등이 양성한 대학생 위장취업자들이 수많은 기업에 위장 취업하여 어리고 온순한 근로자를 꼬드겨 신나에 불태워 죽이면서 사회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고, 기업주를 전봇대에 매달아 놓고 칼로 배를 긁어 피를 내면서 기업을 도산시켰다.
민주 노동자들이 기존 노조 간부의 부인을 발가벗겨 전봇대에 여러 날 묶어놓고 강간하고 린치를 가했다. 학생들은 교수를 패고 70대 대학원장을 구타하며 학원을 폭력화했다. 간첩들이 여기저기 유언비어를 만들어 국민을 선동했다. 국민을 빈자와 부자로 갈라치기하면서 사회 불만을 고조시켰다. 공무원과 고관들은 부정축재에 열을 올렸고, 사학 학원가는 과외 열풍을 조장하여 떼돈을 벌었다.
김일성은 남파간첩을 증가시키고 겉으로는 대화 공세를 취하면서 뒤로는 남침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3김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꾼들은 사회안정이고 정치안정이고 안중에 없이 최규하 과도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당장 해체하라 난동을 부렸다. 새로운 헌법을 1년 내에 만들어 1년 이내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매일 약속을 해주어도,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 당장 내각을 해체하라며 학생들과 노동자들과 종교인들을 선동하며 난동을 부렸다.
여기에 더해 자나 깨나 오로지 국가를 찍어 내릴 궁리만 하는 시국사범들을 무능한 최규하가 다 풀어주었다. 이들은 서울에 봄이 왔다고 더 날뛰었다. 국가를 걱정하는 사람은 오로지 선량한 국민과 국군뿐이었다. 그야말로 타이타닉의 아비규환 그대로였다.
이런 어둠 속에서 한 가닥 빛이 보였다. ‘시국수습!’, 전두환이 내건 현수막 구호였다. 지금도 자생력 없는 정당에 비상대책 위원회를 설치하듯이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국보위’ 즉 국가보위위원회를 설치하고, 국보위 의결에 의해 삼청교육대(군부대 정화교육)를 설치했다.
사회 불만을 선동하는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와 괴담을 근절시켰고,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불법 소요 행위를 차단했다. 종교를 빙자하고 민주화를 빙자하는 정치행위를 제한시켰고, 불법 노동시위를 차단했다. 사이비 악질 언론을 정화하고, 과외를 금지시켰다. 부정축재 재산 853억 원을 국고에 환수시켰고, 8,601명의 고관들과 2급 이상의 공무원들을 숙정했다.
장관 1명, 차관 6명, 도지사 3명, 2급 이상 공무원 232명, 국회의원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및 정부산하의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모두 8,601명을 부정 축재자로 숙정했다. 과외를 중지시키고 대입 본고사를 폐지하고, 대학 졸업 정원제 등 긴급한 조치들을 단행했다. 1993년 김영삼이 단행한 부정부패 척결 결과는 이에 비하면 그 규모와 내용 면에서 초라했다.
불량배 57,561명을 검거하여 3,052명은 재판에 회부하고, 38,259명을 삼청교육대에 회부하고, 16,250명을 훈방조치했다. 부정, 불량식품과 불량약품을 단속하고 수출입 절차를 간소화하고, 연좌제를 폐지했다. 전과 기록을 말소하여 삶의 희망을 주었고 가짜가 만연했던 신원 기록을 재정비하였다. 이처럼 동분서주, 불철주야로 전두환이 ‘시국수습’을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3김이라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무엇을 했는가? 시국을 어지럽히는데 동분서주 불철주야 했다.
권력 공백기의 안보 상황
당시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하자 가장 염려되는 것이 김일성의 남침이었다. 남침위협!, 당시를 살아온 사람들 제1의 관심사였다.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김일성은 미리 계획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무시무시한 지시를 내렸다.
마치 10.26.이 발생할 것이라고 미리 알고 준비한 듯 한 구체적 지시였다. 전군에 ‘폭풍 5호’라는 전투태세 강화 지시를 내린 것이다. 보병은 완전군장을 꾸리고 차량은 시동 여부를 점검하고, 전투기 조종사는 발진 대기(얼러트) 상태에 돌입하라는 것이었다. 동구 순방 중인 오극열 총참모장 일행이 급거 귀환했고,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쟁동원 훈련을 실시하고, 철도역마다 비상 열차가 24시간 대기했다.
남파 간첩들에는 남한의 모든 시위조직을 동원하여 반정부 투쟁을 일으키라 지시했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하도록 ‘점화기폭조’를 잠입시키라고 지시했다. “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Decisive moment)에 해당한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은 권력 내부에 모순과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적들은 지금 계엄을 선포해놓고 서로 물고 뜯기를 계속한다. 이 얼마나 좋은 계기냐. 연락부(간첩운영부)는 사태가 수습되기 이전에 빨리 손을 써야 한다. 남조선 심어놓은 역량을 최대로 동원하여 ‘전민봉기’(전국봉기)를 유도해야 한다.” 북에서는 전투태세를 갖추면서 남한에서는 전국 폭동을 일으키라는 구체적인 지시였던 것이다.
12.12.직후 김일성은 또 지시했다.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 하에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쿠데타이다. 계엄사령관실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남조선 정세가 극도로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남조선 수뇌부는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무휴 대기하라.” 신군부라는 말도 김일성이 창조한 단어이고, ‘군사쿠데타’라는 정의도 김일성이 가장 처음 내린 ‘사태의 성격’이다. 김일성의 명령은 반드시 남한에서 실현했다. 김일성이 12.12.를 쿠데타로 정의했기 때문에 남한 주사파들이 12.12.를 쿠데타로 몰아간 것이다.
5월 18일이 다가오자 김일성은 또 남조선에 전민항쟁(전국봉기)을 일으키라고 지령했다. “드디어 남조선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북탄광 유혈사태는 식민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이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학생과 도시 빈민 할 것 없이 이글거리고 있다. 남조선 지하조직과 혁명가들은 광범위한 민중을 연대시켜 격렬한 전민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1980년 3월 28일, 일본 통일일보에는 5.18을 정확히 예고하는 기사가 실렸다. “작년 가을부터 김철만 상장(3성) 책임 하에 대남 특수작전을 준비했는데, 그 목표는 1980년 봄에 무장 게릴라를 남파하여 ‘자발적인 의용대’(시민군)로 위장한 후 지방도시(광주)의 방송국 등을 장악케 함으로써 대규모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산케이 신문 정치부 편집위원 ‘사에키 히로아키’는 “북한의 공작이 없었다면 너무나 이해 불가능한 사건이 5.18 광주사태”라는 글을 썼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단어가 있다. “작년 가을”!, 남한에서 일으킬 무장 게릴라전을 1979년 가을, 즉 9~10월부터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10.26을 김일성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김재규를 김일성이 사주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980년 1월 21일, 최규하 권한대행은 그가 주재한 ‘대간첩 대책 중앙회의’에서 지시했다.
“북한은 고정간첩을 통한 정치선동과 무장간첩을 남파하여 소요를 획책할 수 있으니 대공 관계자들은 각별히 노력해주기 바란다.” 1980년 5월 10일, 중앙정보부는 일본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관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첩보를 받았다. “북한은 김재규가 처형되는 4월경 항의 데모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남침시기를 정했다가 다시 이를 연기하여 남한의 대규모 전국시위가 절정에 이를 5월 20일을 전후하여 남침할 것을 결정했다
.” 5월 10일에 이런 첩보를 받은 중앙정보부, 앞으로 10일 후에 북한이 남침을 한다는 것은 실현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전두환은 이 첩보를 존 위컴 연합사 사령관에게 전달하면서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자기의 생각을 피력했고 위컴 역시 전두환 판단에 공감했다.
하지만! 이 첩보는 신뢰성이 매우 높은 첩보였다. 전두환과 위컴 사령관이 김대중과 김일성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음미하지 못한 것이다. 5월 16일, 김대중이 나서서 5월 22일을 기해 김일성이 지령한 ‘남조선 전민봉기’를 일으키겠다고 전국 반체제 세력에 공고한 것과 연결지어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남한에 전민봉기만 벌어지면, 북은 곧장 남침하게 되어 있었다. 아래는 김대중의 공고문 요지다.
“민주애국시민은 유신체제를 종결짓는 민주투쟁에 동참하는 의사표시로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라. 비상계엄은 무효이므로 국군은 상부의 지시에 복종하지 말 것이며, 언론은 검열과 통제를 거부하고 전 국민은 민주화 투쟁을 용감하게 전개하라.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 노동자 농민, 학생, 공무원, 중소상인, 민주애국시민은 5월 22일 정오에 서울은 장충단 공원, 지방은 시청 앞 광장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
이 선언문은 문익환, 심재권 등을 시발점으로 하여 신문사, 전국 대학교, 44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으로 확산됐다. 실제로 5.18 광주사태의 그림을 보면 일본 통일일보 보도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방송국들을 점령한 존재가 ‘시민군’이었고 이 ‘시민군’이 통일일보에 기재된 바로 그 ‘의용군’인 것이었다. 그런데 남침이 성사되려면 5월 22일을 시행일로 선포한 김대중의 ‘전민봉기’가 실현돼야만 했다. 김대중의 전민봉기만 실행됐다면 북한은 100% 남침했을 것이다. 과연 전민봉기는 가능할 수 있었는가? 과연 전민봉기의 역량은 준비돼 있었는가? 만일 있었다면 어째서 남침으로 연결되지 않았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 폭력의 실체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도산’(도시산업선교연합회)에서 출발했다. 민주노총을 잉태하고 생산한 어머니가 바로 이 도산이었다. 1964년 3월, 혁신계 목사 300여 명이 ‘도산’을 형성했다. 도시 근로자들에 대한 선교를 한다는 구실로 성경 교리를 ‘해방신학’, ‘민중신학’ 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근로자들을 의식화시키고 왜곡된 교리를 주입시켜 노사분규를 연출해냈다. 이 중심에 그 유명한 강원용 목사가 있었다. 여기에서 의식화 된 노동자들이 주도한 대표적인 분규로는 1969년 9월의 제일물산 분규, 1972년 3월의 동일방직 분규, 1977년 5월의 남영나일론 분규, 1979년 8월의 YH사건, 1980년 4월의 반도상사 분규들이었다.
“도산이 오면 도산한다.” 대다수 경제인들의 노이로제가 이렇게 표현됐다. 이에 박정희 정부가 칼을 빼들자 이들은 지하로 잠수했다. 1976년 11월, 영등포 지하에서 ‘사회선교협의회’가 결성되었고, 1981년 말에는 경기지역 여러 곳에 지하 교육기관인 ‘다락원’을 설치하여 대학생을 위주로 하는 위장취업자들에 4개월 코스의 합숙훈련을 통해 이른바 ‘도산이론’을 무장시켜 주었다. 1개 기에 30~40명, 1982년까지 1년 동안 200여 명이 배출됐다. 이들이 전문세포가 되어 구로, 인천, 부천, 성남 지역에 널려있는 문제 많은 기업체로 취업했다.
위장 취업자 제 1기생인 손학규 경기도지사, 2006년 11월 24일 ‘한국발전연구원’ 조찬 강의에서 위장 취업자의 정신세계를 생생하게 소개했다.
“저는 실제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직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소설가 황석영씨와 같이 구로동 수출 공단에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취직을 하려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이 사회를 뒤엎을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공장에 취직해서 다니다가 친구에게 들킬 형편이 되어서 다른 공장을 찾고 있던 중에 박형규 목사님께서 노동운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 빈민운동이라고 해서 청계천 판자촌에 가서 살았습니다.
지금 뉴 라이트 기수가 되어 있는 김진홍 목사님도 같이 일을 했습니다.” 노동자 규합에서 무산자 규합으로 선동의 장르를 옮긴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하면 잘 살아볼까 하고 구로공단이라는 수출공단 단지를 만들었는데 손학규는 그곳에 위장취업자로 들어가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을 꼬드겨 공단을 파괴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윤리위원장과 비대위원장을 지냈던 인명진 목사, 그가 바로 이 위장 취업자를 양성한 원조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손수 YH사건 등에 개입하여 노동자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 2005년부터 갑자기 주사파들이 전향을 했다면서 한나라당에 떼로 몰려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언론들이 그들을 신선한 인물들이라며 한껏 띄웠다. 그 기수인 김진홍, 2005년에 캐나다 교회에 가서 터놓고 설교를 했다. 노무현 시대였다. 간첩 송두율도 귀국하여 언론의 영웅이 되었고, 북괴가 530GP를 다 날려 내무반 병사 전원을 험하게 사살했는데도 덮어 주었던 주사파 황금시대였다.
설교단 위에 선 김진홍이 안주머니에서 증명서 하나를 꺼내들었다. “여러분, 이 증명서가 무슨 증명서인지 아십네까? 이거이 바로 ‘북조선 거류민증’이라는 겁네다. 어느 날 아침 9시에 당 간부가 나를 불러 단상에 세우더니 이 증명서를 주면서 그럽데다. ‘김진홍 동지, 김진홍 동지는 남조선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유일한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합네다.’ 아~ 이러면서 이걸 주더라구요. 북한 거류민증 1호가 바로 나 김진홍 이올시다. 아, 이거 가지고 남조선에 가믄 감옥에 가겠는데요 하니까 아 그럼 이거 가지고 북으로 날래 오시라요.” 이 말에도 교인들은 박수를 많이 쳤다.
이 동영상이 당시 사회에 꽤 많이 확산되면서 김진홍 목사의 성가에 타격을 주었다. 인명진 목사는 한나라당에 와서 극우라는 꼬리표가 달린 김용갑 의원을 윤리위에 회부하는 등 한나라당에서 극우 분위기를 차단시키는 역할을 했다. 한나라당을 민주당 2중대로 만들어 놓은 최초의 산파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인명진 목사였던 것이다.
인명진 목사가 지하에서 길러낸 손학규와 김문수 등 위장 취업자들, 이들이 다시 길러낸 순진한 노동자들이 어느 날부터 섬뜩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공존관계가 아니라 적대관계다.”
“사용자를 폭력으로 타도하고 노동해방을 이룩하자.”
“사용자는 쓸어버려야 할 한줌의 적이다.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자.”
“구걸하며 얻느니 싸워서 빼앗자.”
순진하고 어린 이 노동자들에게 위장 취업자들은 처음부터 자본론이니, 계급투쟁론이니, 민중운동사니 하는 어려운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는 사례들을 수집하여 공분을 자아내게 했다. 근로자들의 불평과 불만 내용을 수집하고 기업주의 수탈과 호화 향락 행위를 지어냈다.
기존의 노조가 노동자들의 애환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주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어용의 패거리라는 것을 주입했다. 네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은 너의 아버지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정치와 사회구조가 잘못돼서 그런 것이다. 정치가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나서서 타도해야 한다고 세뇌했다.
머리에 하얀 백지만 들어있던 어리고 순진한 노동자들이 대학생들과 은밀한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우쭐해졌다. 그들에게서 주입받은 지식이 세상의 전부라는 인식에 ‘이 사회를 바로 잡아야 할 투사는 바로 나’ 라는 소영웅심이 자라나게 되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노동의 새벽],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빼앗긴 일터] 등 노동자의 삶을 비참하고 절망적인 내용으로 노래한 소설, 수기, 시 등을 읽게 하여 사회적인 적개심을 갖게 하고, 투쟁의 눈을 뜨게 해 준 다음, 서서히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관계법’ 등 실제 투쟁에 사용되는 전투 도구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제까지도 ‘열심히 일하고 알뜰히 생활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순진한 근로자들이 ‘1,000만 노동 형제의 해방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 노동 전사로 탈바꿈 했다. 영웅심이 충만한 노동 투사들이 부화한 병아리 떼처럼 무더기로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노동자들이 오늘의 민주노총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프랑켄스타인들을 길러낸 인명진, 김문수, 손학규 등은 지금까지 미안하다, 잘못했다 사과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사 사과의 말을 했다 해도 오늘날 국가 파괴를 일삼는 괴물 집단을 양성해놓은 죄는 결코 사과 한마디로 용서될 수 없을 것이다.
위장취업자들은 순진한 어린 노동자를 분규의 투사로만 활용했는가? 일반 대중에, ‘자본가들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기 위해 제물로도 바쳤다. 풍물패를 동원하거나 중요 행사가 있다는 등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어린 노동 투사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신나를 붓게 한 다음 영웅적인 장면을 연기케 했다. “개 돼지로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 “이 한 몸 불살라 천만 노동자를 해방 시키겠다.” 끔찍한 구호를 외치게 했다.
어린 노동자는 이 단계까지만 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바람잡이들이 어지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면서 성냥불을 그어댔다. 이른바 ‘인간 불화살’! 1970년~80년대에 이렇게 죽은 어린 노동자가 17명, 그 중 전태일이 제1호였다. 이 17명 중 위장 취업한 대학생은 한 명도 없다.
그들을 하늘처럼 따르고 존경했던 노동자들을 제물로 바칠 때마다 위장취업자들은 그 세계에서 진급을 했다. 진급을 했기에 언론의 각광을 받고 정치적 인물로 성장한 것이다. 언론이 공작의 주요 수단이었던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청계천 평화시장통 국민은행 앞 광장에서 화염의 이슬로 사라졌다.
1976년 4월, 김일성은 비밀지령을 내렸다.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 얼마나 좋은 선동 자료입니까! 물론 청계천 피복노동조합이라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조직이지만 우리는 전태일을 영웅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추모사업회도 만들어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합니다.” 남한에서 발생한 현상은 이미 그 현상을 미리 지령한 김일성 어록에 다 들어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이 되면서 평양을 리모델링 해 주겠다고 했다.
이명박이 당시 한국의 먹거리 ‘청계천 시장’을 없애고 거기에 개울을 만든 것도 순수해 보이지는 않는다. 청계천 총 길이는 불과 5.8km, 한강에서 물을 끌어다 흘리는 수로일 뿐이다. 비용이 만만치 않다. 5.8km 중 평화시장 근처의 700m가 전태일 공간이다. 이름하여 ‘전태일 거리’ 전태일 동상이 거기에 우뚝 서 있다.
벽에는 이름 있는 사람들이 전태일에 바친 동판 글들이 도배돼 있다. 전태일 추모사업회도 있다. 전태일 수기, 전태일 평전도 있다. 모두가 다 김일성의 지령 그대로 실현돼있는 것이다. 전태일 수기에는 전태일이 위장 취업자에 속아서 죽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신발 끈을 매면서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모레 낮 12시에 평화시장 국민은행 광장에 나와보세요. 구경거리 있을 거예요.” 자기가 불에 타 죽을 줄 알면서 어머니에게 자기 죽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오라 할 아들은 없을 것이다.
일기에는 “두 번째 골목에서 불이 붙은 채로 뛰어나와 죽은 전태일의 손에는 ‘노동법’이 쥐어져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몸은 불에 탔는데 책은 타지 않고 손에 들려 있었다는 것이다. 청계천은 전태일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노동자와 무산자!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 5층에는 통일부가 관장하는 ‘북한자료센터’가 있다. 문을 열면 정중앙에 북한 대사전이 기념물처럼 떠받혀 있다. ‘사람’이라는 단어는 찾으면 설명이 나온다. ‘사람은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을 의미한다.’ ‘주체사상’을 찾아보면, ‘사람이 사람답게 주체적으로 살려면 사람의 적을 없애야 한다.
사람의 적은 미 제국주의, 남조선 괴뢰정부, 자본가다.’ ‘민주화운동’을 찾으면 ‘사람의 적을 까부수는 투쟁’인 것으로 설명돼 있다. ‘민주화 세력’에서 두 번째로 대통령이 된 노무현이 개설한 봉화마을 홈페이지 이름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노무현은 사람의 중심인 노동자를 북한 사전과 똑같이 표현한 것이다. 1988년 7월 8일 그는 대정부 질문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돈과 힘을 함께 거머쥔 특권층의 착취로 노동자, 농민, 빈민의 고통이 야기된 것이라면 그들은 해방돼야 합니다. 재벌은 해체돼야 합니다. 재벌 일가가 가지고 있는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 이들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부채도 탕감해주고 토지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1988년 12월 6일 노무현은 현대 중공업 파업 현장에 가서 말했다.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말아야 한다.” 1990년 5월 4일, 국회의원 자격으로 현대 중공업 파업 현장에 가서는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며 파업을 부추겼다.
“노동자가 하루 놀면 세상이 멈춥니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 노동자들이 꾸려 나갑니다. 하지만 노동자가 모두 염병을 해서 자빠져 버리면 사회는 그날로 끝입니다. 이래서 노동자가 법도 만들고 노동자가 경제도 경영하면서 주인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대통령들이 멀리에까지 찾아가 경배하는 ‘민주화 대통령’ 노무현, 2012년 12월 17일에 밝혀진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는 김정일의 철저한 신하가 돼 있었다. “위원장님, 그동안 외국 정상들로부터 북측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노릇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던 일도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군부가 뭘 자꾸 안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군부가 개편이 되어서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평화 협력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나도 10년 전부터 상당히 개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야당이 반대해서 못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외국군대가 있는 것, 나라 체면이 아니라서 내보냈지 않습니까. 2011년 되면 나갑니다. 작계 5029라는 것을 미국이 만들어 가지고 우리한테 거는데... 그거 지금 못 한다 해서 없애버리지 않았습니까. NLL문제, 그것이 국제법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 남측에서는 이걸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6자 회담에서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 왔고, 국제무대에서 북측 입장을 변호해 왔습니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모르니까 뒷걸음질 치지 않게 쐐기를 박아놓자 이겁니다.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만든다는데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대를 하면 하루아침에 인터넷에서 바보가 됩니다.”
위 노무현의 발언을 극구 비밀로 하려고 민주당은 사활을 걸 정도로 저항했다. 위 대화록은 그나마 한나라당이 건져낸 귀중한 역사 자료다. 이 대화록은 “위원장님, 저보고 뭘 못한다고 자꾸만 그러시는데 저도 최선을 다 했습니다.”라는 취지의 대화에 이어진 노무현의 변명 자료다. 이처럼 결국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은 북괴의 노예집단인 것이다.
1980년 1월 9일. 전태일의 노동 공간이었던 청계천 피복노동조합이 농성 투쟁을 신호로 4월 29일까지 3개월 20일 동안 719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는 1979년 12개월 동안에 발생한 분규 수의 7배에 해당했다. 박 대통령이 시해되자마자 모두 다 들고 일어난 것이다.
1980년 4월 17일 강원도 사북탄광 광부 1,000여 명이 폭력난동을 부렸다. 당시 38세였던 이원갑, 신경 등이 주축이 되어 노조 지부장 부인 38세의 김순이를 발가벗겨 성폭행들을 하고, 정문 기둥에 묶어 놓고 47시간 동안이나 음부에 난행을 저지르는 등 온갖 린치를 가했다. 4월 21일부터 3일 동안 광부들은 부인들까지 동원하여 3,500여 명으로 세를 불린 후, 곡괭이, 파이프 등 흉기를 들고 광업소, 기차역, 파출소를 파괴하고 도로를 점거하여 교통을 마비시켰다.
사북 일대가 완전 무법천지가 되었다. 결국 계엄군 제11공수여단이 투입되어 4월 24일에 진압했다. 경찰관 1명이 사망했고, 70명이 부상을 당했고 22억 상당의 재산이 파손됐다. 그런데! 2005년 노무현 시대의 ‘민보상위’(민주화 보상 심의 위원회)는 주모자 이원갑과 신경 등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했고, 이명박 시대인 2008년에 ‘과거사위’(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가가 당시의 광부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100만 민주노총은 무력 적화통일 전위 능력을 갖추고 있다. 더구나 이들에는 간첩들이 침투해있다. 북이 남침하면 이들이 전국규모로 나설 것이다. 김대중이 선포한 5월 22일의 거사가 실현되었더라면 김일성이 말하는 3대 혁명 역량의 두 번째 역량인 남조선혁명역량이 충분히 가동됐을 것이다. 이 엄청난 노동 역량에 이어 김대중이 직접 이끄는 전국 대학생 역량도 있었다. 이러했기에 김대중은 무서울 것이 없다는 자세로 5.17까지의 람보 정국을 홀로 주름잡았다.
김대중과 람보정국
10·26 이후 5월 17일까지 8개월 동안의 시국은 김대중이 주도한 람보시국이었다. 사회를 극도로 교란하고 국가 운명에 총구를 댄 채 러시안룰렛 게임을 하듯 했다. 왼손에는 ‘민주화’의 푯말을 들고, 오른손에는 도끼를 들어 국가를 연속으로 찍어 내렸다. 손학규가 가장 존경한다는 우상이 바로 김대중 그였다. 1980년 전후의 시국을 그가 어떻게 요리했는지, 그 현란한 플레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의 발자취만이라도 살필 필요가 있다.
49세였던 김대중,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56세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도전했다가 패하자, 신병 치료를 이유로 곧장 일본으로 건너갔다.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박정희 정권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를 찍어 내렸다. 71년 일본으로 가자마자 북한 김병식 부주석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만나 당시 화폐 20만 달러라는 엄청난 공작금을 받았다. 지금의 환율로 쳐도 20만 달러는 2억 5천만 원 상당이었다. 1978년 강남 30평형 아파트 가격이 200만 원이었으니, 아파트 100채 이상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 돈을 가지고 박정희 정권을 타도하라는 것이었다.
1973년 4월, 하버드 대학의 코헨 교수에 접근하여 호소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을 타도해 달라. 그러려면 한국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 의회 지도자들에 압력을 가해달라.” 73년, 같은 시기에 김대중은 ‘한민통’(한국민주통일연합)이라는 반국가 단체를 조직하여 의장이 되었다.
북한계 베트콩과 배동호, 곽동의, 김종충 등과 일본의 골수 좌파인 우스노미아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국회의원들을 포섭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을 파견한 단체도 한민통이었고, 간첩 김정사를 키운 단체도 한민통이었다. 한민통은 매월 조총련으로부터 2천만 엔씩을 받아 ‘민족시보’라는 기관지도 발행했다. ‘반국가 단체 구성죄’는 형량이 사형이다. 1980년 김대중은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선고를, 5.18배후조종과 혁명내각 구성 및 내란음모죄로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도가 지나친 이런 반국가 행위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수수방관할 수가 없었다. 1973년 8월 8일, 중앙정보부가 그를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하여 129시간에 걸쳐 서울로 압송했다. 간첩은 어디에나 있었다. 극비에 극비로 행해진 납치 공작이 김대중파에 노출되었고, 야당이 벌떼처럼 일어나 일본 정부를 충동질했다. 일본 정부가 주권 침해를 주장하면서 한일 간 외교 분쟁이 되어 국제사회에 여론화됐다.
미국이 중재하고 일본에 지인이 많은 김종필이 나서서 사태는 일단 수습이 됐고, 곧바로 김대중은 가택연금 신세가 됐다. 이 연금 상태에서도 김대중은 반국가 선동행위를 저질렀다. 1974년 12월, 그는 반체제 단체 ‘국민회의’(민주회복국민회의)의 함석헌, 문익환 등 공산계 인물들과 함께 이른바 ‘명동사건’을 저질러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 민족 통일을 내건 반국가, 반체제 선동이었다.
이로 인해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선전선동공작의 달인들인 반체제 인물들이 또 들고일어났고 이로 인해 국내외 언론들이 여론을 악화시켰다. 할 수 없이 박정희는 1978년 12월, 그를 석방해 ‘가택연금’으로 전환했다.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1979년 3월 1일, 함석현, 윤보선 등 골수 반골들과 함께 ‘국민연합’(민주주의 민주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했다.
이렇듯 오로지 한가지, 국가 파괴만을 일삼았던 그를 어이없게도 최규하가 완전 해방시켜 주었다. 79년 12월, 가택연금을 해제했고, 86년 2월 29일, 김대중, 윤보선, 지학순, 문익환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을 모두 사면복권시켰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었다. 12.12사건이 발생한 79년 12월 12일과 서울의 봄이 열린 날인 80년 2월 29일 사이에는 3개월 20일간의 시차가 있다.
이에 더해 정승화를 체포한 12.12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을 대사면시킨 서울의 봄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12.12는 정승화와 윤성민과 장태완의 난동 사건을 진압한 사건이고, 이로부터 110일 이후에 시혜받은 ‘서울의 봄’ 조치는 완전 별개이고 성격 자체가 다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김성수는 12.12사건을 ‘서울의 봄’사건이라고 왜곡시킨 것이다.
최규하의 혜택을 받고 복권된 김대중은 복권된 바로 그 순간부터 최규하에게 ‘유신 잔당’이라는 주홍 글씨를 붙여 ‘최규하 유신잔당 즉각 해제’를 구호로 내걸고 그에게 람보총을 휘둘렀다. 자나 깨나 어디를 가나 목숨까지 내놓고 북에 충성하는 김대중, 북한에서는 어떻게 알려져 있을까? 2008년 10월 탈북 군인들의 모임임 ‘자유 북한 군인 연합’이 탈북자들의 수기를 모집하여 450쪽 분량의 책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을 냈다.
소설보다 더 스릴 있고 실감 나는 16편의 수기가 실렸다. 그 243쪽에 북에 알려진 김대중이 소개됐다. “당시만 해도 북한 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 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 통일과 남조선 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북한 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 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 258쪽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다. “북한에서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 척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5.18 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 때나 김정일 때나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이고 북한 사람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모두가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남조선에 와서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과연 의심할 바 없는 북한 쪽 사람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사 이래 최고의 거물 간첩으로 전향한 김용규 전 북한 대좌는 1999년 원민 출판과 발간한 [소리 없는 전쟁]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압박을 무릅쓰고 아래와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 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 용어’다. 남한의 모든 민주화 운동 사건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김일성의 목표였다. 김대중은 북이 키웠다. 호남은 적화 통일의 전략적 거점이다. 4.19도, 5.18도 북의 공작이 야기한 필연이었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민주화 운동 사건은 북의 지령이라는 말은 주사파에서 전향한 프리존뉴스 사장 강길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거물 간첩 출신 김용규는 같은 책 [소리 없는 전쟁] 제 72쪽에 이렇게 밝혔다. “간첩들로 조직된 ‘통혁당(통일혁명당)’이 1967년 목포로 내려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역전, 터미널, 시장통 할 것 없이 찾아다니며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목포가 죽느냐 사느냐의 사활이 걸려있는 선거다. 목포시를 살리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공화당을 낙선시켜야 한다고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이 막강한 선거 캠프의 지원을 받는 김대중(44세), 목포역 광장에서 유세했다. ‘여러분! 이 김대중의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나에게는 아주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가지고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해둡니다. 여러분!’” 최규하의 사면 복권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된 김대중, 일본에 있는 김종충, 배동호 등 ’한민통‘ 베트콩파와는 전화로, 다른 베트콩파 김녹영 등과는 기자 등 인편을 통해 반정부 음모를 계속했다.
이른바 3김 시대가 전개되었다. 김종필에게는 공화당이 있고, 김영삼에게는 신민당이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에게는 당이 없었다. 당을 구성하지 않은 이유는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그가 정권을 잡을 길이 복잡 요원하고, 뒤집어엎는 방법만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한의 역량과 배합하려면 반드시 폭력 방법을 선택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반체제 단체 ’국민연합회‘, ’민주헌정 동지회‘, ’민주연합청년동지회‘, ’한국정치문제연구소‘ 등을 이용하여 소요를 선동했다. 3월 초, 심재철에 100만 원, 박계동의 친구 박일남에 45만 원, 부산대 복학생 조태원에 34만 원 등 공작금도 뿌렸다. 5월에는 김상현을 통해 광주 운동권 대부라는 정동년과 윤한봉에 500만 원을 주었다.
1980년 3월 29일, 김대중은 YWCA에서 연설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은 결코 슬로건이 아니라 진실이다.” 피 흘려 투쟁하라는 뜻이었다. 80년 4월 10일 오후 8시, 김대중은 북악파크 호텔 501호 아지트에서 최규하 과도정부를 궁지로 몰자는 음모를 꾸몄다.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고은), 김종환, 한완상, 심재권 등 10여 명을 불러 모아 계엄령을 철회시키고 정부가 주도하는 개헌 작업을 포기시키고, 최규하 중심의 유신 잔당을 퇴진시키고, 정치일정을 단축시키고, 모든 구속자를 사면 복권시키고, 언론과 학원의 자유를 보장시키기 위한 투쟁력을 강화시킬 대책을 세웠다.
국민연합을 대폭 개편할 것, 투쟁 경력이 풍부한 복학생으로 하여금 각 대학 학생 지도부와 연계 시킬 것, 복학생 이현배를 총무국장, 장기표를 조직국장, 심재권을 홍보국장에 임명할 것, 국민연합, 민주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등의 조직을 확대하고 연대하여 ’민주화운동‘임을 내세워 학생시위를 학교 밖으로 유도하여 일반 시민의 동참을 유도할 것, 언론을 통해 전국 여론을 조성할 것 등을 결의했다.
80년 4월 11일에는 서울대 학생 추도식에 가서, 16일에는 한국 신학대학에 가서, 17일에는 서울대 4.19 기념 강연회에 가서, 18일에는 동국대와 인하대학의 4.19기념 강연회에 가서 최규하 정부를 유신체제 옹호 세력으로 몰아가면서 투쟁하여 타도하자고 선동했다.
80년 4월 16일, 김대중은 한국 신학대학 학술 강연회에 나가 연설했다. “특권층은 수십억 원의 호화주택에서 기천만원의 잉어를 기르고 고래수염으로 이쑤시개를 한다. 독재 하에서 감옥에 가고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학원과 직장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부(혁명정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 4월 17일에는 서울대 학생 초청 강연회에서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라는 말을 했다. 김주열은 누구인가? 4.19를 촉발한 불쏘시개로 악용된 마산상고 학생이었다. 1960년 4월 11일부터 MBC는 김주열이 최루탄을 이마에 맞아 바다에 빠졌다가 여러 날 후에 떠올랐다며 요란한 방송을 반복했고, 이에 학생들이 분노하여 4.19를 일으켰다.
최루탄은 포물선으로 시위 군중의 가운데로 날리는 것인데 어떻게 얼굴에 깊이 박혀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상태로 바닷물 속에 여러 날 파도에 밀렸으면서도 어떻게 분리되지 않고 얼굴의 일부가 되어 떠올랐는지도 과학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성균관대 북한 전문가 이명영 교수는 그의 유명한 저서 [통일의 조건]에서 4.19는 간첩 ‘이석‘의 공작으로 촉발되었다고 썼다.
‘이석‘은 장기 고정간첩으로 1946년 10월의 피바다였던 대구 폭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다. 김상진은 누구인가? 서울 농대 학생으로 1975년 유신과 긴급조치에 반대한다며 분신자살한 인물이다. 김재규를 ’이승만을 퇴진시킨 김주열‘과 ’박정희에 강펀치를 날린 김상진‘과 동급의 ’열사‘인 것으로 정의하여 연설한 것이다. 4월 18일 김대중은 동국대 학생회 초청에 응했다. “10·26 사태는 독재에 항거한 전 국민의 혁명이다. 탄압받더라도 끈질기게 저항하면 10·26과 똑같은 또 다른 무정부 상태가 될 수 있다.” 최규하도 박정희처럼 시해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러한 선동의 영향으로 불법 학생 집회가 급증했고, 그동안 비교적 평화적이었던 학생 집회들이 극렬한 폭력 시위로 변질되었다. 성균관대, 목원대, 전남대, 서원대 등에서는 노선을 달리하는 교수들을 폭행하고, 70대 노령의 대학원장을 구타했고, 서울대, 조선대, 전북대, 총신대 등에서는 학교 시설을 마구 파괴했다.
80년 4월 한 달의 통계를 보면 시위 농성 106개 학교, 수업 거부 25개 학교, 휴강 조치 44개 학교였다. 경희대, 한양대, 세종대에서는 철야 농성이 1주일 이상이나 지속됐다. 이에 고무된 ’국민연합‘은 4월 29일 ‘민주화촉진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고, 5월 1일에는 북악파크 호텔에 다시 모여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기정사실로 정해놓고 24명의 ‘혁명내각(Shadow Cabinet)’을 구성했다.
“학생 시위를 폭력 시위로 전환하고 여기에 시민들을 참여시켜 전국으로 확산하면 최규하 유신정부는 붕괴된다. 학원에 영향력이 있는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 등은 학생 선동에 주력하라. 결행 시기는 5월 중순이다. 혁명 내각은 집권 후의 지휘본부 역할을 하고, 정부 전복 직후 과도내각 역할은 ‘한국민주제도연구소’가 맡아야 한다. 이를 위해 이사장에 예춘호, 소장에 이문영을 임명한다.
민족재생 담당에 김관석, 역사문화 담당에 백낙청, 종교교육 담당에 정을병, 노동 담당에 탁희준, 농업 담당에 유인호, 경제 담당에 임재경, 안보 담당에 양호민, 통일 담당에 문익환, 도의정치 담당에 안병무, 행정 담당에 이문영을 선임한다.” ‘혁명 내각’(Shadow Cabinet) 구성원은 김대중, 문익환, 임상현, 예춘호, 이해찬, 한승헌, 한완상, 인명진, 고은태(고은), 이신범, 심재철, 설훈, 이문영(교수), 이해동(목사) 등 24명이며, 학생 시위 배후 조종자로는 김대중, 예춘호 의원, 문익환 목사, 인명진 목사, 김동길 교수, 고은태(고은) 시인, 이명희 한양대 교수 등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5월 12일 오후 5시, ‘국민회의’ 지도부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열, 한완상, 한승헌,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 계훈제 등이 북악 파크 호텔 아지트에 또 모였다.
장기표와 심재권(복학생) : “전국 26개 대학 학생 회장단 45명이 5월 11일 15:00부터 5월 12일 09:00까지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철야회의를 했습니다. 앞으로 휴교령이 내려지면 단호하게 투쟁한다는 결의와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 국무총리 면담 등을 결의했고, 5월 16일 전국 대학생 회장단이 이화여대에서 회의를 열어 새로운 투쟁 방법을 협의합니다. 이후 시위가 대폭 확산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김대중 : ”최규하 정부는 유신 잔당이다. 정권을 계속 잡으려고 한다. 이들을 분쇄해야 한다.”
장기표 : “모든 대학은 날을 정해 각목, 화염병을 사용하는 폭력 시위를 과격하게 벌일 것입니다. 그러면 4.19와 같은 무정부 상태가 됩니다. 김대중 선생님께서 수습 인물로 나서면 정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심재권과 함께 폭력 시위를 주도할 것이니 선생님께서는 이문영 교수에게 과도정부 구상을 미리 시켜주십시오.”
김대중 : “알았다.”
이후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과격하고 극렬한 양상으로 진전됐다. 파출소 3개 동, 경찰차량 7대가 전소되었고, 경찰장비 192점이 파괴되고, 경찰관 233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국에서 활활 타오르는 폭력 시위, 경찰 능력의 한계를 넘었다. 김종환 내무부 장관이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경찰력으로는 관리가 안 되니 군 병력을 투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반면 시위현상에 고무된 김대중은 ‘국민연합’ 성명을 냈다. “학생의 소리는 국민의 소리이고, 민주화의 소리다.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하다. 정부가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불타오르는 학생시위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5월 15일의 서울역 10만 집회! 집회의 절정이었다. 김대중으로부터 100만 원이라는 거금을 공작비로 받았다는 심재철과 유시민이 주도한 집회였다. 80여 개 대학이 동원됐다. 계엄해제, 최규하 내각 퇴진을 외치며 경찰차 3대를 불태웠고, 민간 차량 4대를 탈취하여 경찰 대열로 돌진시켜 경찰관 1명이 즉사했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수적 열세에 몰린 경찰은 오직 청와대 하나라도 지켜야 한다며 청와대에 배치됐다. 같은 시각에 지방에서도 인하대, 충북대, 전북대,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역전과 도청에 집결해 시위를 벌였다. 경찰관 113명이 부상을 입고 경찰장비 178점이 박살이 났다.
심재철, 청와대로 진격하면 뚫렸을 텐데 왜 중도에 시위를 중단했을까? 수많은 사람이 궁금해 질문을 했지만, 심재철은 답이 없다. 왜였을까? 장기표와 김대중에게는 무정부 상태를 만드는 것이 꿈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그 엄청난 시위를 중도에 멈추고 해산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다. 북한과 공모된 날이 5월 22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날, 5월 15일은 그 가능성만 테스트한 날이었을 것이고 김일성에게는 ‘전민 봉기를 이렇게 할 수 있으니, 안심하고 내려오라’라는 신호용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인 5월 16일, 5월 22일에 전국 시위(김일성 언어로는 전민봉기)를 강행할 것임을 선포했을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은 정부의 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개점휴업 상태에 있는 거대한 기구 중앙정보부를 활성화하기로 하고, 전두환을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했다. 당시 중정 요원들은 대통령을 시해한 기관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다가 전두환이 수장으로 임명되자 활력을 되찾았다. ‘재야세력’으로 표현되는 ‘반국가세력’은 이 ‘서리’ 임명을 놓고 ‘안개 정국’이 시작됐다고 했다.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가 번갈아 나서서 안정을 호소하고, 각 대학 총장을 초치해 학원 안정을 호소했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국가 중요 시설과 방송국, 중계소에 계엄군이 속속 배치돼 경비를 서기 시작했다. 전투 부대들이 수도권으로 이동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학봉 수사국장은 학원 소요를 배후 조종하는 인물의 명단과 당시 사회적 지탄을 받던 부정 축재자 150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전두환 중정 서리에게 보고했다. 전두환이 이 명단에 대해 결재 받는 과정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그의 지인 1명을 삭제했고, 최규하 대통령도 지인 1명을 삭제했다.
5월 17일 11:00경, 이학봉 합수단장은 중정, 경찰 등 합동 수사단 관계자들을 보안사로 소집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임무를 분담시켰다. 학생소요 배후조종자들인 ‘국민연합’ 간부들은 중정 수사국이 체포하고, 권력형 부정 축재자들은 보안사 대공처가 체포하고 복학생과 대학생 간부들은 경찰이 체포하도록 임무 분담을 시킨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보안유지에 가장 취약한 기관이었다.
5월 17일 오후 6:00경, 이대에서 일망타진해야 할 59명의 전국 대학 대표들이 비밀누설로 거의 다 도주했고 겨우 10명만 검거했다. 김대중은 밤 11:00에 동교동 자택에서 수경사 헌병에 의해 체포됐고, 김종필도 같은 시각인 밤 11:00에 자택에서 체포됐고, 복학생 정동년은 밤 12:00에 광주 자택에서, 김상현은 5월 18일 새벽 04:00에 제주도 친척 집에서 검거되었다.
5월 18일 12:00, 계엄사는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김종필 공화당 총재,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전 대통령 경호실장, 김진만 의원,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비서관, 김종락 코리아타코마 사장, 장동운 전 원호처장, 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 등을 체포했고, 학생 소요 배후자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예춘호 의원, 문익환 목사, 김동길 연세대 부총장, 인명진 목사, 고은태(고은) 시인, 이영희 한양대 교수 등 26명을 연행했다. 5월 18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나서서 “연행자를 석방하라, 계엄군 배치를 철회하라.” 목소리를 높이고 다시 5월 20일 오전 09:00에 상도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열려다 헌병 병력 31명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
5월 17일 오전 11:00, 국방부에서 관구급 이상의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전군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군 지휘관들의 컨센서스는 “더 이상 방치하면 국가가 망한다.”로 모아졌다. 오후 2:30까지 회의는 장장 3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회의 결과에 따라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오후 4시에 신현확 총리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방안을 보고했고, 이어서 5시, 대통령에 보고했다. 17일 오후 07:00, 최규하 대통령은 신현확 국무총리를 불러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방안을 처리하라 지시했고, 신현확 총리는 임시 국무회의를 열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는 만장일치로 가결됐고 이에 따라 대통령은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했고 이어서 대국민 담화문을 직접 발표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란 무슨 뜻인가? 계엄에는 ‘전국계엄’과 ‘지역계엄’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직후에 선포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고, 5월 17일 선포된 계엄은 ‘전국계엄’이다. ‘지역계엄’은 명목상 제주도가 포함되지 않지만 ‘전국계엄’은 제주도까지도 포함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차이점은 제주도를 포함하느냐 제외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계엄사령관이 대통령 결재를 받을 때 국방장관과 총리를 거치느냐, 건너뛰느냐의 문제다. ‘전국계엄’에서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에 직보하는 시스템으로 계엄이 처리된다. 계엄 집행의 속도가 빨라지고 강도 역시 강화된다.
전국 계엄이 선포되면서 5월 18일 새벽 02시, 전국 136개 국가 주요시설과 보안시설, 그리고 31개 대학에 계엄군 25,000명이 배치됐다. 전국에 휴교조치를 취했고, 정치집회와 정치발언을 금지했지만 국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전국이 살얼음판처럼 꽁꽁 얼어붙었고, 전국 도시에서는 산천 토목이 벌벌 떨린다는 ‘예비검속’이 발동되었다. 젊은이들이 학생으로 오해받아 경찰에 불려 가면 취조를 받고 구타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모두가 집안에 꼭꼭 숨어들 있었다. 이로써 요동치던 세상이 일거에 바람 잔 호수처럼 고요해졌다. 이상이 이른바 5.17 사건이다.
인식의 정리
이 복잡한 소용돌이 속에서 독자는 패러다임 차원에서 인식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5.17 역사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범법자에 대한 소탕이고 다른 하나는 계엄령 확대선포 조치다. 범법자 소탕은 전두환이 실무 총책이었고 계엄령 확대조치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실무 총책이고,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지휘자는 대통령 최규하였다. 독자는 사실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역사 평가과정에서 이 업무의 한계를 혼동하거나 섞으면 역사가 왜곡된다.
둘째, 김대중의 난동이 정권 장악에 있었는가, 아니면 김일성이 주도하는 통일에 있었는가에 대한 해석이다. 1979년 10월 26일, 김일성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마자 미리 시해 사건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북과 남에 명령을 내렸다. 북에서는 폭동 작전을 가동하여 해주에 ‘10만 대군’을 준비했고, 인민군 전체를 전쟁 준비 태세에 돌입시켰고, 남한에 대해서는 김대중으로 하여금 5월 22일을 기해 ‘전민봉기’를 일으키게 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5월 15일 서울역 10만 집회에서의 예행연습을 통해 확인했다.
한편 전민봉기를 순전히 김대중에만 맡기는 것이 불안해 79년 9월부터 강철만 상장(3성) 책임 하에 남한 도시(광주)에서 남한의 의용군(시민군)을 위장한 게릴라 작전을 수행하도록 준비시켰다. 남한에서 5월 22일의 전민 봉기가 광주사태처럼 전국에서 발생하는 바로 그 순간 김대중은 ‘전민봉기’의 의용군 총사령관이 되고, 김대중 명의의 ‘남침 초대장’이 국내외에 선포될 것이며 그것을 명분으로 김일성은 충분히 남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취지의 증언은 거물 탈북자로 알려진 강명도가 쓴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0쪽에도 기재돼 있다. “광주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고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보다 남한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배했다.”
‘3일 전쟁’, 당시 한국군에는 ‘3일 전쟁’이 유행어가 돼 있었다. 뜻있는 장교들은 그 가능성을 다 인정했다. 박정희 말기에 군은 많이 부패하고 해이해져 있었다. 일부 정치적 끈을 이용해 출세해 보려는 이른바 ‘정치 장교’들의 문란 행위로 인해 대다수 장교들이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군 내 사기 저하 현상도 김일성에게 보고 됐을 것이다. 만일 김대중이 선포한 5월 22일의 전국 봉기가 실현됐다면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일단은 남침이 실현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중이 주도한 6개월 동안의 난동은 자신의 집권을 위한 난동이 아니라 적화 통일 전쟁을 초대하기 위한 준비 작전이었던 셈이다.
만일 전두환이 북악 파크 호텔에서 내란 음모 현장을 덮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이희호 핸드백에 감추어진 ‘혁명 내각’ 명단을 압수하지 못했다면 김대중을 체포할 뚜렷한 증거가 없어 5월 17일 그를 체포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5월 22일의 ‘전국 봉기’와 아울러 김일성의 남침도 강행됐을 것이다. 이 절호의 순간을 전두환이 차단했기 때문에 전두환에 대한 김일성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고, 아울러 김일성을 신으로 받드는 남한 공산화 세력이 전두환을 극도로 증오하게 된 것이다. 결국 김대중의 전민 봉기가 중도에 무산되자 광주에 준비해 왔던 ‘게릴라 작전’이 4일을 앞당긴 5월 18일을 기해 ‘시민군 작전’으로 위장하여 개시된 것이다.
셋째, 위 사실을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의 판사들은 어떻게 왜곡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법관들은 5.17의 계엄 확대조치 자체가 ‘내란’이라고 왜곡했다. 계엄령을 강화·확대한 조치는 계엄령 자체가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는 ‘해악의 고지’ 행위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떨고, 장관들이 떨고, 국회의원 등 모든 헌법 기관들이 공포에 떨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헌정 질서를 파괴한 경우에 해당하므로 내란이라고 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하는지는 고도의 정치·군사적 판단에 속하기 때문에 사법부가 관여할 사안은 아니지만, 계엄령을 전두환이 선포했고 전두환의 마음에는 이미 대통령이 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관심법) 이러한 전두환이 선포한 계엄은 그 자체가 내란이라고 했다. 비록 계엄 선포는 최규하 대통령의 결재(재가)와 대통령의 입을 통해 선포됐지만, 최규하는 늘 전두환의 공포에 쫄아 바지같은 존재가 돼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결재한 모든 사항은 전적으로 전두환의 책임이라는 판결도 했다.
비록 긴급 내각 회의가 열렸고, 계엄 선포에 대한 의견이 만장일치로 가결되긴 했지만, 이는 오로지 전두환의 강압과 국무회의 장소인 중앙청을 ‘집총한 병사들’이 삼엄하게 둘러싸고 있어서 국무위원들 모두가 공포에 떨어 강요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라는 판결도 했다.
결국 이런 판결이 1981년 1월 23일 당시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1980년의 대법원은 김대중을 내란음모자로 판결했고, 1997년의 대법원은 김대중을 체포한 전두환을 내란자로 판결했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에는 역적이 되고, 어제의 역적이 오늘에는 충신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 소신이 갈리게 된다. 그러면 김대중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일생에 걸쳐 악마라며 공격한 박정희와 전두환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소신을 가르는데 판단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격언에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입술로 판단하지 말고 작품(족적)으로 판단하라는 말이 있다. 박정희의 대통령 업적과 전두환의 대통령 업적은 이미 소개돼 있다. 여기에서 독자는 김대중이 대통령 시절에 남긴 업적을 잠시 살필 필요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
1999년 일본 문예 춘추는 김정일 육성 녹음을 공개했다. ‘김대중이 부친 김일성 주석님으로부터 엄청난 도움을 받았으면서 말로만 북한을 돕겠다, 생색만 내고 있다.’라는 협박 내용이었다. 이에 김대중이 2000년 3월 9일, 베를린으로 날아가 이른바 ‘베를린 선언’을 했다. 북한을 통 크게 도와주고 싶어도 정치적 명분이 없어서 기업 차원에서만 도울 수밖에 없었다며 정부 이름으로 통 크게 도와드리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나 달라는 표현이었다. 이에 김정일에게 달러가 현찰로 비밀리에 날아갔다. 미국이 밝혀낸 달러는 4억 5천만 달러이지만 손충무 기자의 책에는 10억 달러인 것으로 기재돼 있다. 이렇게 해서 2000년 6.15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명분은 정상회담이지만 내용은 접선이었다. 이후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관광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달러 자동인출기를 설치하여 북에 달러를 쏟아주었다.
2010년 통일부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10년 동안 북에 퍼준 돈이 현금 형태로 29억 달러이고 현물이 40억 달러, 총 69억 달러가 북으로 갔고, 이 돈이 핵무기 제조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의혹이 있다고 발표했다. 2009년 7월 3일 자 영국 파이낸셜 뉴스는 “지난 10년간 북한은 한국의 달러 지원으로 핵무기 만들었다.”라고 보도했다. 이런 의혹이 여론화되자 김대중은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대북 지원금이 핵 개발에 악용됐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다.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보도들은 달랐다. 2002년 11월 17일, 미국은 “북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인했다.”라고 발표했다. 2010년 11월 23일 조선일보는 ‘1998년 김대중 시절 실무자들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 장비 존재를 알았지만, 김대중의 지시로 은폐했다.’라는 요지의 보도를 했다. 북이 그가 퍼준 돈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함구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베를린 선언에서 기업을 통해 지원하다 보니 액수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과연 미미한 액수였는가? 1999년 1년 동안 대기업이 부담한 대북 지원 액수는 업체당 평균 745억 원, 기업이 정부에 납부한 국세의 1.2배, 지방세의 20배나 되었다. 1999년 10월 6일, 현대가 445만 달러에 상당하는 20인치 컬러TV 3만 대를 북송했다. 8월 16일, 대한제당이 연간 60만 달러에 해당하는 설탕 2만 톤씩을 북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11월 27일, 삼성이 172만 달러를 제공했다. 2000년 1월 25일, 현대 아산이 190만 달러의 기와 공장 설비를 제공했다. 2000년 2월, 8,863평의 평양 실내체육관 건설에 3,420만 달러를 제공했고, 삼성전자가 400만 달러어치의 전광판과 73만 달러어치의 소프트웨어 지원을 했다. 2000년 3월 6일, 축협에서 1천만 개의 달걀을, 새마을 운동에서 곡물 1,660톤을 보냈다. 2000년 4월 12일, 평화의 숲에서 묘목 20만 그루를 보냈다.
1999년 한해에 민간 차원에서 4,688만 달러(520억 원)가 갔고, 2000년 4월까지 56억 원이 갔다. 현대 아산에서 3억 8천만 달러(4,600억 원)가 갔다. 이후 정부가 공개적인 공여체로 등장하면서 쌀과 비료가 1회 당 30만 톤 또는 50만 톤 단위로 제공됐다. 1년에 관광객이 몇이 가든 무조건 50만 명이 간 것으로 하여 1인당 300달러씩을 한동안 퍼주었다. 금강산을 향해 첫 번째 여객선이 출발한 날은 1999년 11월 13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햇볕정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추진한 뻥튀긴 봉이 김선달 사업이었다.
김대중에게는 북한 인권이 성골 인권이었고, 남한 국민의 인권은 벌레 인권이었다. 2001년 11월 27일, 동아일보는 보도와 사설을 통해 김대중 정부를 질타했다. 김대중이 결핵 백신 ‘파스’, 30만 명에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을 몰래 비공식적으로 북한에 퍼주고 입단속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국내에는 한동안 결핵 백신 공백 상태가 벌어져 접종자들이 고통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북한에는 있는 대로 다 퍼주면서 국민 건강은 나 몰라라 팽개치고 있다.
파스 공급이 중단되면 생명도 잃고, 결핵균이 내성이 강해져 전염병처럼 퍼져나갈 수 있다. 10만여 결핵 환자가 있다. 이 중 1만 명은 중증이다. 그리고 이들은 극빈자들이다. 백신이 갑자기 끊기는 사태가 발생하자 전국 보건소들에 소동이 벌어졌다.”라고 지적했다.
이것도 분통터지는 일이겠지만 차마 믿어지지 않는 업적도 있다. 북한에 한국군의 생명을 바친 업적이다.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이 발생했고, 한국 해군이 완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국민은 사기가 올랐지만 김대중은 화가 났다. 김정일은 더 많은 화를 냈다. 대승의 작전을 지휘한 박정성 제2함대 사령관에 대해 훈장은커녕 좌천시킨데 이어 강제예편을 시켰다.
김대중은 왜 화가 났는가? “절대로 먼저 쏘지마라”는 엄명을 내렸는데도 교묘한 방법으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강제 예편된 박정성 전 사령관은 2006년 6월 19일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대통령이 절대 먼저 총쏘지 못하게 했다. 이는 군인의 손발을 묶는 명령이었다.
그래서 북 함정이 먼저 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총알이 날아왔다. 두두두두 팍팍 6월 15일 오전 9시 28분, 서해 NLL선을 넘어온 북한 함정에서 선제사격이 시작됐다. 이리저리 기동으로만 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자위권 차원의 반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화력이 원체 뛰어나 적이 섬멸됐다.”
자존심이 매우 상한 “김정일 위원장님”의 체면을 세워주어야만 하는 입장에 선 김대중은 교전규칙을 바꾸었다. 맞아 죽으라는 교전규칙이었다. “절대로 먼저 쏘지마라”라는 이전의 명령에 보태 “쏘려면 먼저 청와대에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라”이런 명령을 더 내린 것이다.
교전규칙 제1항은 북한 함정을 발견하면 500미터까지 가까이 다가가서 경고방송을 하라는 것이었다. 북한 함정이 6.29 해전에서 사용한 85미리 포의 명중사거리가 8km다. 그런데 북한 함정을 보면 500미터까지 다가가 경고방송을 하라고 규정한 것이다. 교전규칙 제2항은 경고방송을 한 후 200m까지 더 접근해 시위용 차단기동을 하라는 것이다.
교전규칙 제3항은 차단기동을 할때는 우리 함정의 기다란 옆구리를 적 함정의 전진항로 앞에 대고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이다. 가장 취약한 옆구리를 적의 총구 앞에 대 주라는 것이었다. 2002년에 우리가 당한 참수리호 테러는 이 교전규칙을 따르다가 당한 것이다.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2002년 6월 30일, 조선일보 3면에 난 기사가 리얼하다. “북 경비정이 갑자기 85미리 함포로 불을 뿜었다. 고속정 2척에 타고 있던 장병들이 즉각 전투배치 상태로 돌입했다. 모든 장병들이 화해와 평화만 믿고 전투배치조차 하지 않은 채 적 함정으로 접근했다.
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들은 우리 장병을 속이기 위해 6월 27일과 28일에 와서 포구를 우리 경비정에 조준했다가 씨익 웃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29일에도 포구를 경비정에 겨눴다. 장병들은 이번에도 씨익 웃고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속임수로 저들은 일방적인 테러를 가한 것이다.” 이에 만족한 김대중은 다음날인 6월 30일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브라질 대 독일과의 축구경기를 구경하겠다며 붉은 넥타이를 매고 임동원을 대동하여 비행기를 탔고, 경기장 그의 옆에는 일본 왕이 앉아있었다. 일본 왕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2004년 6월 28일 네이버뉴스 업코리아에는 이에 대한 분노의 기사가 올랐다. “김대중은 대한민국 편이 아니었다”는 제목의 기사였다. “2003년 7월 10일자 한 주간지에 실린 고 박동혁 병장 어머니의 육필 수기는 김대중 정권이 저지른 조국 배반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002년 7월 1일, 경기도 분당구 국군 수도병원 체육관, 6월 29일 서해상에서 북한의 계획된 도발로 사망한 고 윤영하 소령을 비롯하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등 장병 4명의 합동 영결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날 영결식에는 유족들과 전두환 전 대통령, 손학규 경기지사, 장정길 해군참모총장 등 각계인사 500여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국가 최고지도자이며 국군통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뿐만 아니라 김동신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6월 29일 서해교전으로 온 국민이 분노에 떨고 슬픔에 잠겨 오열하고 있을 때 한가하게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30일 오전 서울공항을 통해 출국한 것이다. 시민들의 분노가 메아리쳤다.”
2012년 6월 26일 조선일보에는 6.29 당시 참수리호 군의관이었던 이봉기 의대교수의 심정이 토로돼있다. 그는 박동혁을 살려내기 위해 눈물겹게 고군분투했던 군의관이었다. “당시 전사한 장병과 유가족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런 정부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도 털끝하나 다치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드디어 군발이가 가고 민주정치가 오는구나!’싶었던 사람이다. 제2연평해전 부상자를 돌보면서 희생이 뭔지 배웠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군인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내가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도 지난 정권을 떠올리면 이가 갈리고 분통이 터진다. 나 말고도 그 자리에 있던 군의관 모두가 다 그랬다. 지금 종북 국회의원을 보면 내 세금이 왜 저런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하나 싶다. 종북 인사들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에 대한 모독을 자주 하더라. 우리끼리 일 끝나고 맥주한잔 할때마다 제2연평해전 이야기를 했다.
정말 너무하지 않느냐고! 나라 지키다가 젊은 사람들 죽어나갔는데, 국군 통수권자는 축구본다고 일본에 가서 웃으며 손 흔들고, 이러면서 사건 당시 전사자 빈소에 일반인들 조문 못하게 막았다. 유족들과 몇몇 군 관계자들만 다녀갔다. 유가족이 홀대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정부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다치고싶지 않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북한이 그리고 간첩이 원하는 것도 이런게 아닐까.
이 나라 젊은이들이 조금씩 그런 생각 먹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안보가 무너지게하고, 분열되게 하는 것이다” 한상국 중사의 부인은 2004년 4월 24일 영혼까지 떠난다며 미국으로 가면서 국가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군인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계속된다면 누가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서겠습니까”
김대중은 분명 대한민국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들은 많다. 2000년 6월 김정일과 접선했던 김대중은 곧장 경의선 철도를 복원하고 철도와 나란히 4차선 고속도로를 뚫겠다며 광역에 걸쳐 깔려있는 지뢰와 장벽과 대전차 장애물을 신들린 듯 제거하기 시작했다.
시험해보지도 않고 43억 상당의 지뢰제거장비 3대를 독일과 영국에서 급히 공수해왔다. 2대는 즉시 사용이 불가하여 폐기했고 작동하는 1대의 장비는 북에 주었다. 군사장비를 적진에 넘겨주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이적죄였다. 그의 북한 사랑은 실로 다양했다. 신동아 2000년 10월호의 기사가 눈을 의심케 했다.
노태우가 ‘북방정책’을 추진한다며 소련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주었다. 2000년 당시 러시아로부터 받아야 할 잔금이 14억 7천만 달러였고, 러시아가 북한으로부터 받아야 할 돈이 40억 달러였다. 김대중은 러시아와 인맥이 있는 이병화 박사를 거간으로 하여 러시아에 제안서를 건넸다. “한국이 러시아로부터 받을 돈을 포기할테니 러시아도 북한에서 받을 돈을 받지 말라”
국정원 해체도 김일성의 지상명령이었다. 김대중은 집권하자마자 국정원 해체에 착수했다. 1998년 4월 1일, 집권 33일 되는 날이었다. 그는 국정원 대공 전문요원 581명을 단칼에 강제해고하고, 민변출신 변호사 등 500여명을 특채하여 앉혔다. 이어서 대공경찰 2,500명, 기무사 대공요원 900명, 공안전문검사 40명을 해직시켰다. 북한에 불리한 정보를 삭제하고, 북에 필요한 정보를 북에 넘겨주었다는 소문들이 자자했다.
김대중이 설치한 ‘민보상위’는 간첩들과 그 아류들로 채워졌다. 민보상위는 과거의 간첩사건들을 재심케 해서 모두 민주화 공로자로 등극시키고 그들에게 수억~수십억 원씩의 보상을 하게 했다. 민보상위 뿐만 아니라 과거사위원회와 의문사위원회도 같은 역할을 했다.
이들에 의해 재심을 받고 무죄를 받게 해서 국가 세금으로 보상받은 금액이 1조 5천억 원 정도인 것으로 추산된다. 부산 동의대사건, 극렬 학생들이 경찰관 7명에 신나를 뿌려 현장에서 새까맣게 불태워 죽인 사건이다. 1989년 5월 3일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민보상위는 이 사건 범죄자 46명 모두를 민주화운동가로 등극시키고, 김대중 정부는 범죄 주모자에게 당시 화폐로 6억 원을 보상했다.
노태우 정권에서의 경찰관은 군사정권의 개이기 때문에 많이 죽일수록 민주화 공로가 높다는 게 그 이유였다. 2001년 월간조선 8월호는 기무사가 작성한 [좌익세력의 대군침투 실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 내막을 소개했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이후 급속히 확산되는 군 와해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낀 기무사 대공처장 염완돈 준장이 좌익세력의 대군침투 역사를 정리하고, 당시의 군 와해 실상을 정리하고, 당시 군 내에 침투한 좌익이 1,000여명이며 이들은 청와대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다는 내용들을 담았다고 했다. 조성태 국방장관(육사20기)은 이를 전 지휘관에게 배부하라고 지시했지만, 청와대는 그 염완돈 기무사 대공처장을 전격 해임했다. 미국에 출장을 갔다가 귀국하는 도중 기체 내에서 해임된 것이다.
그러면 김대중은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건설한 것이 있는가? 좌익들은 김대중이 김영삼이 초래한 IMF를 극복하기 위해 금모으기를 주도하고 워크아웃을 주도하면서 한국경제를 정상화시켜 놓았다며 극찬을 한다. 하지만 이는 좌익들의 선전 선동일 뿐 내용은 정반대다.
그는 은행에서 돈을 찍어내 이른바 ‘공적자금’을 은행에 제공하는 방법으로 대기업들이 은행에 잡힌 담보물을 자산관리공사로 넘겼다. 자산공사는 이 담보물들을 외국기업에 팔았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빌딩들과 금싸라기 땅들이 외국기업에 매각된 것이다. 당시 경제신문들은 이 과정에서 김대중이 2중계약서를 작성해 뒷돈을 챙겼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그가 미국에 꿍쳐놓은 검은 돈이 1조 이상이라는 소문들이 수많은 뉴스 매체에 도배돼 있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김대중 스스로 또는 그의 추종자들이 이 땅에 김대중을 신격화하기 위해 세워놓은 것은 아주 많다. 6조 이상의 건축비가 들어간 아시아 문화궁전, 김대중 컨벤션센터, 김대중 도서관 등 많고 화려하지만 그가 대한민국을 위해 기여한 업적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국민을 속여 북한에 퍼준 것들과 전두환의 전자기술 업적을 훔쳐 북한에 건네준 것들만 클로즈업된다.
여기까지에서 확실히 드러나는 것은 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충성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인민공화국에 충성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에 충성한 사람은 역적으로 몰리고, 인민공화국에 충성한 사람이 민주화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에 충성한 사람은 죽어서도 현충원에는커녕 뼛가루 항아리조차 묻힐 곳을 찾지 못한 채 배우자의 가슴에 안겨있고, 대한민국에 역적질한 사람은 공룡포를 입고 현충원에 누워서 7조원짜리 아방궁, 매머드 급의 김대중 문화궁전, 도서관 기념관 그리고 수천 개의 동상으로 치장하여 대한민국 땅과 세금을 지금까지도 흡입해왔고 또 앞으로도 흡입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과연 누구들의 나라인가![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