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도 강화 나들길 트레킹
시간을 묶어 버린곳 휴전선이 휘돌아가 엄격히 민간인 출입을 해병대에서 통제하는 지역이지요.
그래서 발전이 안된 60 70년대의 풍경입니다 북한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수 있는 섬 강화도 전체가 지붕없는 역사 박물관입니다.
인천시 강화본도와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연륙교가 2014년 7월 1일 정식 개통했습니다.
2014년 7월1일 인천 강화도 본섬과 북한 접경 지역인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연륙교가 정식 개통됐습니다. 길이 3.44km, 폭 13.85m, 왕복 2차로의 교동연륙교는 총 사업비 890억 원이 투입됐으며, 2008년 19월 25일에 착공하여 6년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사장교 형태이며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도 심한데다 빠른 물살 때문에 교각 일부가 유실되는 등 공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합니다.
교동도는 민통선 북방지역이기에 해병 군부대에서 검문을 하며 교동 군민은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외지인들은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까지만 통행이 가능합니다. 검문소에서 외지인들에게 출입 목적 확인 등 소정의 절차를 확인 후 신분증을 제출하고 출입증을 발부 받아야만 다리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나올 때는 출입증을 제출하고 신분증을 찾아옵니다.
▲ 교동도 개념도 (네이버지도를 베이스로 지명을 추가했습니다) ⓒ 2014 한국의산천
교동도
교동도는 북한쪽 황해남도 연안군과 3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화도 북단 최전선의 섬으로 특별한 명승지나 볼거리는 부족(?)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여행의 무게감을 느끼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입니다. 해변의 평지에 자리한 거대한 난정저수지와 강화군 전체에서 가장 넓은 교동평야, 그리고 교동읍성과 철책선의 긴장감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섬입니다
역사속의 교동도는 고려와 조선 1천년간 개성과 서울의 관문이자 군사요지였으며, 활발한 무역항이었습니다. 지금도 옛날 중국 화폐가 많이 출토된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에 교동의 위치는 수도 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개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들려야 하는 중간 기착지였습니다. 교동 남산포구에 도착한 중국 사신들을 맞았던 곳이 남산포 대변창입니다. 대변은 손님을 맞는다는 대빈(待賓)이란 말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변형된 글자입니다. 남산포구에 내린 사신들은 인근에 있는 절에서 하룻밤을 지냈고, 다음 날 아침 배로 개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교동은 충청도, 황해도, 경기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 통어영이 설치된 곳입니다. 당시 교동의 원님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할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 받았던 곳입니다. 무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적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 방어선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개교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가 지금도 존재하는 곳이지요. 얼마전까지만해도 강화도와 같은 행정기관이 있었으며, 부자들이 많이 사는 섬이었습니다.
또한 교동도는 조선시대부터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습니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그간 교동도가 잘 알려지지 않고 멀게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교통이 불편했고 교동도의 북쪽 해안과 서쪽해안은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으로 교동 전체가 민간인 통제구역이기에 입출입이 제한적으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외지인 통제도 많이 완화되었으며 뱃길보다는 다리를 통해 쉽게 왕래할 수 있는곳으로 변했습니다. 아직은 생소할 수도 있고 개발의 바람을 덜 타서 시골스러움이 오히려 외지인들에게 더욱 좋은 매력으로 끌리는 모양입니다.
단, 교동은 전체적으로 관광지 개념의 섬이 아니기에 식당과 마트가 거의 없습니다.
▲ 강화 교동대교 초입에서 신분증과 출입증을 교환해주면 그것을 가지고 다리를 건널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는 결코 멀지 않지만 마음으로 짚어보는 거리는 너무도 멀고먼 교동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으로 서해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동도의 동남은 양사면, 삼산면, 서도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으로는 불과 3km 내외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군사분계선을 이르고 있어 황해도 연백군이 눈앞에 보입니다. 해안선은 평탄한 편이고 해저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합니다
교동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戴雲島)입니다. 고림(高林)또는 달을신(達乙新) 이라고도 불렀으나,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릅니다. 주민들의 주업이 농사일이니 만큼 넓디 넓은 평야를 품고 있습니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더 벌이가 좋은 일을 찾아 하나둘 도시로 떠나면서 이제 교동도는 한적한 섬이 됐습니다.
강화교동대교
▲ 총연장 3.44㎞의 강화교동대교 ⓒ 차량과 이륜차량, 자전거는 출입증 발급후 교량 통행이 가능하지만 도보로 걸어 갈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다리를 건너가는 섬. 빠르고 편리한 반면에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아수라 백작의 양면성이 떠오릅니다
▲ 지금은 폐쇄된 월선포 선착장에서 바라 본 교동대교 ⓒ 건널때는 몰랐는데 엄청나게 길게 보이는 다리입니다.
▲ 사진촬영 동호회가 탄 버스가 대교를 넘어 교동으로 진입합니다 ⓒ 이곳은 교동도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찾는이가 별로 없던 봉소리입니다. 창우리와 월선포 선착장은 폐쇄되고 이제는 봉소리가 교동도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세상일은 예측하기 힘든 일이 참 많습니다.
옛 추억 깨워주는 대룡시장
교동도에서 먼저 찾은 곳은 가장 번화하다는 대룡시장입니다. 막상 대룡시장에 가보니 '번화하다'라는 단어가 쑥스러울 정도로 한가했습니다. 시장은 조용하고 시간이 멈춘듯 6~70년대의 풍경이 그대로 멈춰있는 느낌입니다. 300m 남짓한 골목길은 사진찍는 여행자들의 발길만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대룡시장입구에는 교동초등학교가 있으며 광무10년(1906년)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합니다
▲ 몇해전에 방문해서 이발관에서 커피도 한잔하고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
한국에서 열네 번째로 큰 섬이지만 교동도는 민통선 안쪽 지역이라 최근까지도 주민이외에는 출입이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개발도 더뎠고, 바깥바람도 덜 탔습니다. 그렇기에 6~70년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곳은 외지인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ㅅ브니다.
▲ 변화가 심한 요즘에 이렇게 50년 넘게 제 자리를 지켜온 가게들이 또 있을까 ⓒ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있는곳 시간이 머물러 있는 섬 교동도. 대룡시장
▲ 대룡시장내의 오래된 건물들은 예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어두운 방에서 도장을 파고 계시는 할아버지 ⓒ 귀가 어두우신 할아버지께 사진 한장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촬영하였습니다
▲ 교동대교 개통으로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이 붐빌듯한 교동도 ⓒ
석모도 보문사 신분증 지참 (군사지역이라 교동도 들어갈때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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