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팔월이 드는 첫 주 일요일은
종중 벌초를 시행 하는 날로 그 날짜는 나 어릴적 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 이전에는 아마도 정해진 날짜가 있기는 해도 지금처럼 딱 못박아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을 성싶다. 그 시절에도 고향을 떠나서 도회에서 삶을 이어가는 일가가 적지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들 자신의 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다 떠나고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로는 그 광대하고 여러곳에 분포된
선산 벌초를 할 수도 없을 뿐아니라 그들도 이제는 노쇄하여
하려는 엄두조차 못 낼 것이다.
나의 고향 부락은 집성촌이다.
촌에서는 큰 부락으로 백여 가구가 살았는데 그중에 우리 성을 가진 가구가
60%는 된 듯하고, 근동에도 적잖은 동성이 살고 있어 한때는 가문의 위엄이 만만찮았고
제실을 지어 그러한 위세나 위엄을 바같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나 어릴때, 도포로 의관 정제하고 갓을 쓴 집안 어른은 없었으나 명절 때나 제실에서
제를 올릴 때 집안 어른들은 그런 의복차림으로 가문의 뼈대를 은근히 내세우기도 하고
선친께서도 갓은 안 썼지만 정자관을 쓰고 제례에 임했을 만치 명망있는 유가의
후손임을 내비쳤다.
실제로 그 당시에 폐문한지 오래지 않은 서당이 버젓히 있었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우리 가문은 ㅇㅇx씨 +++파 26대 손이고, 入고을 12대 손으로
윗대에 어느 할아버지가 벼슬에 들어 어떤 관직에까지 올랐으며, 누구누구는
어느 지방의 부윤까지 지냈다든가...어디에 사는 누구는 내재종질이고, 재종형인 누구의 아버지는
종백숙부로 너한테는 당숙이 된다....'들었다.
그렇게 가문을 은근한 자랑으로 여긴 윗세대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가치를 퇴색되거나
조금의 흠집도 없이 귀하게 보듬어 우리들에게 물려주었으나 가치관이 변해버린 우리들은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고 소중히 다룬 가문의 위상이 한낱 짐이나
천덕꾸러기로 변해 버렸다.
이전 세대나 그 이전 세대에서는
가문의 위상을 더 높이고 문중의 세를 과시하는 목적으로 초상이 나면
일부러 긴 장례끝에 장지도 백리나 떨어진 곳에 모시기도 하였다. 밤을 세워가며 상여가 가고
구슬프고 애조로운 상여곡조로 하여 가문을 알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수십년 전만 하더라도 문중의 애경사시에는 제종 질부와 삼종 형수까지 나서서 일을 거들다보니
시작부터 끝까지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다보니 근수 많이 나가는 돼지 한마리만 하여도
충분한 잔치가 두세 마리는 잡아야 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렇다 보니,
작고한 조상의 묘가 한둘이랴.
고향 마을의 산자락에 거의 백 기 가까운 선산이 공동묘지처럼 두군데나 있고
入고을 12대 할배 묘소가 있는 곳은 그 할배로부터 가까운 웃대 조상의 선산이 또 하나 있다.
그런데다 각 가정의 증조까지는 개별적으로 해야한다.
그래서 전국 각지로 흩어져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후손들이 그날 모여서 함께 벌초를 하는데
그 인원이 과히 만만찮다. 동원된 예초기만 수십대, 트럭이며 경운기가 여러대, 낫과 톱, 갈쿠리...
거기에다 간식용 막걸리가 여러 박스에 고향 특유의 닭조림이 오십 여마리.
이른 아침 동네 광장에 집결하여 각 소대별로 인원 배정을 한 후 그 장소로 출발한다.
워낙 많은 인원과 장비가 동원되니 거의 오전에 종중 벌초가 끝나고
오후에는 개별 벌초를 하는데, 점심은 문중 제실에서 먹는다.
식사 준비 또한 예전에는 거창했다.
몇 집을 묶어 유사(有司)를 정해 책임지고 준비를 하는데, 평소 닫아 두었던 제실의
본체와 별체를 쓸고 딱고, 음식을 준비하고 상을 차리느라 야단법석을 이룬다. 그 일은 보통
문중의 아낙들이 주체가 되어 한다. 거의 추어탕이나 육개장/닭계장을 메인으로 하고
몇 가지 반찬과 안주를 상에 올렸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고향을 지키면서 주도적으로 했던 형수고 질부들도 이제는 연세가 들어
자기 한 몸 때거리도 귀찮은 판에 대규모 음식을 한다는 게 몸에 부치기도 하여 올해는
점심 식사는 건너뛴다고 통지가 왔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그러니까 바로 한세대 위 아재 뻘이나 선친이 주축이 된 그 시절에는
유사가 돌아오면 도회에 있는 며느리나 아랫동서라도 불러서 그러한 일을 감당하곤 하였는데
이제 어렸었던 내가 주도 세력에 가까운 나이가 되고 보니, 그렇지않아도 이전 세대의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판인데, 하물며 도회에서 자라 그런 모습을
보지도 못한 아래 세대의 며느리나 질부를 불러 그러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가는
무슨 험한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부락에 사시는 형수와 질부들이 근근히 끌어온 그 행사마저도
올해는 버거워 취소한다고 한 걸 보면, 비록 이전 세대 같지 않은 변심한 가치관이라고는 하나
자라면서 보고 들어온 것이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홀대하고 냉소적으로 대하면서도
내부 한편에는 소박한 자부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제실에서 먹었던 점심을 통해 그간 소원했던 일가 친척의 안부를 앎과 동시에
간격을 좁힐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는데 그 마저 이번엔 건너 뛴다고 하니
서운하고 아쉬운 감정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습성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다.
전통과 예절이란 명목으로 거부할 수 없었던 어떤 것도
한번 거절하면 두번이 쉬워지고 세번은 더 수월하고 그러다가 그게 자연스러워 질거다.
그렇듯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런 맥락을 살펴보면 벌초 후 제실에서의 점심은 이제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추억의 조촐한 파티로 남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나가 사라지고
또 거추장스럽다고 하나를 건너 뛰면
피땀 흘려 제실을 짓고 위토를 사들여 대대손손 번창을 기원하던
이전 세대들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말 것이다.
이렇게
문중의 담벼력에 실금이 가고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실금이 벌어져 그 틈이 넓어지고
이제는 밀쳐버리면 금세라도 무너질 것같은
아슬아슬한 문중이라는
이름의 담.
그리고 다 끝난 글에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내 생각이나 드는 감정은 이렇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배신과 의리 측면에서도
해도 너무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퇴색되고 거뭇머뭇 멀어져 가는 게 비단 그러한 풍속 뿐이랴.
단오는 숫자로만 남았고 정월 대보름의 강강술래나 지신밟기는 책으로만 남아
공부를 통해서만 그런한 풍속이 있었슴을 알게한다. 풍년을 기원하던 농악이나 노동요도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민속 최대 명절에 해 먹던 강정이나
송편도 예전에 있었던 일로만 기억할 따름이다.
그런 반면에 발렌타인데이나 할로인데이 같은 양놈들의 풍습은 놓쳐서 안 될 소중한 무엇인냥 그날을
기념하고 즐기려는 태세는 우리 풍습을 외면하는 서운함과 무관하게 어이없는 처사다.
명품 백에 환장을 하고 하물며 궁합이 맞지도 않는 양년이라면 침을 질질 흘리는 얼빠진 놈이나
사역에서 물 건너 온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몹쓸병이
이제 온 나라 백성에게 전부 감염되다 시피 확산되어 우리 것이라면
앞뒤 재보지도 않고 뒤쳐지고 촌스럽게 여기는게
신 문화병이 자리잡았다.
고색창연하고 우리 멋에 안성맞춤인 집기들은 그저 복고라는 이름이나,
이름마저 레트로란 것으로 잠시 멋을 느끼거나 치장하는 것에 불과할 뿐 그것에서
우리 멋을 이해한다든가 선조들이 가진 예술성에 감탄을 기대하는 것은
모래밭에 노송이 자라는 상상과 같이 허왕된 것이 되었다.
쥐불 놀이를 하며 자랐던 나는
솔잎 송편의 향긋함을 기억하고 있고
농악대의 흥겨운 가락에 맞춰 어깨춤을 들썩이는 어른들 사이에
곁다리로 낑겨 그 가락의 흥을 세포에 새긴 탓에
그것들의 소멸은 결국 살아온 과정의
부분 소멸처럼 여겨져
씁쓸하다.
99이다, 100은 벨랄라가 해라..ㅎㅎ
@법천 감사합니다.
백백백^^
위 두분께는 복이 내릴지니~^^
말 여물 주는 중~
많이도 쳐먹네.ㅋㅋ
ㅎㅎ
기름값이 많이 오르고있어여
어휴
올만에 글좀 읽을랫더만
왤케 길대유 ㅜ ㅜ
노안와서 폰 글씨 보기도 힘든디 ㅜ ㅜ
걍 안부 전하네유
까꽁^^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건강 잘 챙기고 알지? ㅎ
@푸른바다 나이가 있으니
온몸이 늙는거 빼곤 괜찮아용
오빤?
@파란하늘속 비 난 잘 지내지 ㅎㅎ
건강해야 언젠가는 볼수있지
뽀돌이 어제 년차 쓰며 벌초한뒤 근육통이 와서 개고생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