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음나루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369-1
미음동(美音洞)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있는 법정동.
미음동은 강서구의 서부 내륙에 위치한다. 북으로 옥녀봉(玉女峰)을 경계로 김해시와 접하고, 서로는 지사동, 동으로 범방동에 접한다. 부근의 태정 고개[일명 장유 고개]가 두 곳을 잇는다. 동쪽 산록에서 발원한 범방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하류에는 넓은 평야가 발달하였으며, 이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분절 소류지가 축조되어 있다.
원래 김해군 토야면(土也面)은 내륙의 범방리(凡方里)·탑동리(塔洞里)·구랑리(九郞里)·소압리(小鴨里)·미음리·상룡리(上龍里)·중곡리(中谷里)·지사리(智士里)· 생곡리(生谷里) 등의 9개 리 가운데 한 마을이었다.
-미음동이 속한 지역은 1832년(순조 32) 김해군 토야면에서 태야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김해군 녹산면(菉山面)과 태야면이 통합되어 녹산면이 되면서 녹산면 관할이 되었다.
-1989년 경상남도 김해군 녹산면이 부산직할시 강서구에 편입되어 녹산동이 되면서 녹산면의 미음리도 강서구 미음동이 되었고,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이 되었다.
미음동의 미음(美音)은 ‘천상에서의 아름다운 소리’라는 의미이다.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전하는데, 먼저 풍수지리상 화동(花童)이 피리를 부는 화동 취적형(花童吹笛形)의 명당이 있어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풍상산의 전설에서 유래한다고도 하는데, 가난한 한 어부의 노모가 승천하면서 노모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풍악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법정동인 미음동은 구랑동, 송정동, 화전동, 생곡동, 녹산동, 지사동, 범방동, 신호동과 합해 행정동인 녹산동 관할하에 있다.
세산 마을·미음 마을·분절 마을·와룡(臥龍) 마을 등의 자연마을과 세산(細山)·세산교·장유고개,·분절저수지 등이 있다. 세산마을은 원래 태야면 세산리였다가 1914년 미음리에 통합되었고, 와룡마을도 원래 태야면 상룡리에 속하였다가 1914년 미음리에 통합되었다. 세산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이라 하여 서산(鼠山)이라 하고 명당으로 여겼는데, 일제강점기에 세산으로 바뀌었다. 세산교는 길이 30m, 너비 4.6m로 1985년에 가설되었다. 장유고개는 지금은 태정고개라 하며, 지역 내에 미음 지구 산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부근에 2002년 부산 아시아 경기 대회 때 승마 경기가 열린 부산 경남 경마장이 있다. 경제 자유 구역에 속해 있어 많은 지역 변화가 예상된다.
유적으로 분절조개무지, 분절고분, 미음도요지, 분절고인돌, 남강 조정환 구국기적비가 있다. 분절조개무지는 현재 밭과 과수원이 되었는데, 4~5세기 경의 토기 조각과 6세기 경의 굽다리접시 조각이 출토되었다. 분절고분은 미음동고분이라고도 하며, 완만한 구릉 위에 있다. 무덤 형태는 목곽묘와 돌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미음도요지는 넓이 200평 정도로, 지표면은 과수원으로 변하여 별다른 흔적은 확인할 수 없지만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고, 분절고인돌은 남방식 고인돌로 추정된다.
민속유물로 당산제를 지내는 와룡당산할매나무와 분절당산나무가 있다. 와룡당산할매나무는 팽나무로 수령 180여 년, 둘레 3.8m, 높이 약 12m이고, 분절당산나무는 팽나무로 수령 100여 년이다. 교육기관으로 세산초등학교가 있다. 출신 인물로 조정환(曺正煥)이 있는데, 1875년 출생으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80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미음들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
미음마을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있던 자연 마을.
북쪽에는 풍상산 자락이 있고, 남쪽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이 평야는 1934년 서낙동강에 녹산 수문이 건립되기 이전까지는 하천수가 드나들던 곳이나, 이후 개간하여 농경지로 조성되었다.
[명칭 유래] 옛 이름은 미음실(美音室) 또는 미음곡(美音谷)이었다. 미음은 풍상산(風裳山)의 전설과 관련된 지명이다.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성이 지극한 한 어부가 고기잡이를 나갔는데, 갑자기 세찬 바람과 뇌성이 일어 집에 와 보니 이미 노모는 없고 치맛자락만 나무에 걸려 바람에 펄럭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노모의 목소리가 풍악 소리와 함께 들려와서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노모의 목소리였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해서 ‘미음(美音)’이 되고, 치마가 휘날렸던 산의 이름은 ‘풍상산’이 되었다고 한다.
미음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미음 마을 뒤쪽[남쪽] 산지에서 고려 후기의 도요 파편이 출토된 미음 도요지가 발굴되어 오랜 거주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에 명월산의 수참(水站)[하운으로 세곡(稅穀)을 운반하며 중간에 배를 쉬던 곳]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수참이 미음 마을과 인접해 있던 수정 마을[현재는 미음 지구 산업 단지 조성으로 사라지고 없음]의 옛 이름이었고,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사수하다 순절한 ‘이조 참판 유식 묘(吏曹參判柳湜墓)’가 마을 뒤쪽 산지에 있어 조선 시대에도 인가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조선 후기 김해군 토야면이었으며,
-1832년(순조 32) 김해군 태야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태야면이 녹산면에 병합되어 경상남도 김해군 녹산면 미음리 미음 마을이 되었고,
-1989년 부산직할시 강서구 미음동 미음 마을이 되었다가,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미음 마을이 되었다.
-2008년 미음 지구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미음 본동과 남서쪽의 수정 마을이 모두 철거되어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008년 미음 지구 산업 단지 조성 사업으로 마을이 전부 철거되어 주민들의 이주가 있었으며, 평탄화 작업으로 지형 변화가 나타나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철거 후 일부 주민이 공단 조성지에서 제외된 일부 농토 주변에 새로 집을 지어 정착하였지만, 신항 배후 국제 산업 물류 단지 조성 계획에 포함되어 있어 존립에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미음마을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