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서정
가 세 현
가을이 깊어가니 산에는 아름답게 물들어 있던 나뭇잎들이 하나둘 소리 없이 긴 여정을 떠난다. 황금 들판의 벼들이 베어져 황망하게 변하고 쓸쓸함이 고독으로 밀려온다. 그래도 붉게 물든 저녁노을은 아름답다. 그림 같은 아름다움은 자연의 섭리이다. 나이 탓일까 일출보다는 일몰이 좀 더 정감이 가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신비롭게 보이는 요즈음이다.
봄에 파종하여 여름의 강한 땡볕에 이마에 소금꽃을 피우면서 가꾸어온 자식 같은 농작물을 이 가을에 수확하는 농부들의 마음은 그동안 힘들었던 농사일을 모두 잊고 설렘과 보람의 기쁨을 만끽하리라. 인생도 젊어서 부지런하여 삶의 가치와 보람을 찾아야 늙어서 후회를 덜하게 되리라.
황금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들이 하나하나씩 수확의 기쁨을 맞이할 때마다 농부들의 마음은 뿌듯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다. 올해는 태풍피해 없이 잘 넘어갔다. 하지만 애를 쓴 만큼의 보상은 요원하다. 쌀값은 오르지 않고 농자재값과 비료대, 그리고 인건비는 계속 오르고 있으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대부분의 영세 농가들은 논과 밭을 놀릴 수는 없으니 영농 조합이나 개인에게 영농을 위탁하여 겨우 식량이나 하는 정도이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직장 상사였던 분이 해마다 벼농사를 지으면 20kg의 쌀을 세 자루씩 이 십여 년 가까이 주고 계신다. 이제는 허리가 아파 농사 일을 못하고 위탁을 했는데도 변함없이 올해도 챙겨 주셨다. 회사에서 의견 충돌 한번 없이 서로 의지하며 지냈고 퇴직해서도 변함없이 형제처럼 지내니 늘 고맙다. 서로 존중하며 생활해온 보람이다.
“할머니 고구마가 별로 없어요“ 외손자들이 한 달 전 외할머니의 부름을 받아 고구마 수확 체험을 하면서 하는 말이다. 금년 여름은 유난히 장마가 길었고, 가을장마까지 겹쳐 토양에 수분이 많고 햇볕을 덜 받아 뿌리에 열매를 맺지 못한듯하다. 그 대신 수분을 좋아하는 콩은 예년에 비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많이도 달렸다. 신기해서 세어보니 한 대에 평균 사십 알은 들어있다. 이것이 세상 이치이리라, 수분을 싫어하는 작물도 있고, 좋아하는 작물도 있게 마련인가 보다.
작지만 귀여운 고구마와 노랗게 잘 익은 콩을 직접 수확하며 땀을 흘리고 나서 점심을 먹으니 정말 맛나다고 외손자들은 싱글벙글이다. 큰 외손자는 중1이다. 공부에 시달리다 외 가에 와서 외할머니가 직접 농사지는 밭에서 흙도 만져보며 농작물을 직접 수확하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같이 밥을 먹어보니 꿀맛이란다. 좋은 경험을 하는 것이다. 노력이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농사를 통해 가르쳐 주었고, 외손자들은 이것이 진정한 보람이고 신선한 노동의 댓가 라는 것을 자연(自然)으로부터 배웠다. 아내와 나는 모처럼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사람은 자식 농사도 잘 지어야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들어왔다. 삼대가 같이 밥을 먹고 ‘밥상머리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뤄졌었다. 효를 배우고, 협동심은 물론 가족사랑 또한 저절로 배우게 된다. 각박해져 가는 나 홀로의 세태(世態)를 보면서 인성교육이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함을 느낀다. 학교폭력, 묻지 마 폭행, 교사의 희생 등을 접하면서 논어에 나오는 ‘무과(無過)’라는 문구가 생각난다. ‘세상을 살아감에 반드시 성공만을 바라지마라 허물없이 살아감이 곧 성공이다.’ 깊어가는 만추의 계절,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볼 가치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