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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만사]DSM-5 = 질병 인플레이션?
[청년의사가 만난 사람]
정신질환이 급증하고 있다. 이른바 정신질환 인플레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지난 15년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환자는 3배 가까이 늘었고, 자폐증은 20배, 소아 양극성 장애는 40배나 늘었다. 현재 미국인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정신 장애 진단 요건에 해당된다는 말도 있다. 이런 진단 과잉은 약물 처방으로 이어져 미국 성인 기준으로 5명 중 1명이 향정신성의약품을 복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늘어난 것일까? 아니면 진단 기준이 폭 넓게 수정된 것이 원인일까?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기준이 되는 정신장애 진단 통계편람(DSM)을 제작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앨런 프랜시스 박사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프랜시스 박사는 최근에는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원제: Saving Normal)이라는 정신질환이 늘어나는 이유를 폭로한 책을 내면서 주목받고 있는 유명인이다.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앨런 프랜시스 박사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Q. 이렇게 이메일로 인터뷰에 응해줘서 감사하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가.
이런 기회를 줘서 내가 고맙다. 일본이나 중국은 두 번이나 방문했었는데 아쉽게도 아직 한국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훌륭한 글들도 많이 봤다. 조만간 방문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Q.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Saving Normal)을 출간한 후 DSM과 관련한 인터뷰가 많았을 것 같다.
그렇다. 특히 아내는 잦은 (인터뷰) 여행으로 피곤해 한다. 실제로 인터뷰 요청이나 블로그, 트위터 글쓰기 등으로 바쁘긴 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이 (인식 전환의) 정점으로 달리고 있다고 믿는다. 또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나의 메시지를 외부에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 있는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줘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Q.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한 챕터 당 적게는 30~40개, 많게는 70개가 넘는 출처를 달아 놓았다. 읽다보면 의학 교과서를 읽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대중 의학 서적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방식으로 보이는데.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에서 나는 꽤 굵직한 주장들을 했다. 우리가 정신적 신체적 질병들을 이해하고 다루는 방식들에 잘못된 부분들이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런 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그와 연관된 근거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개인적인 주장에 그쳤을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신념에 근거해서 받아들여져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Q. 책을 읽는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 현대 의학의 불완전성, 특히 정신의학의 불완전성을 과장되게 느끼게 하는 면도 있어 보인다.
나는 현대 의학에 잘못된 부분들이 상당히 있고 그것들이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미국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퍼진) 과잉 검사, 과잉 진단, 과잉 치료에 대한 문제는 심각하다. (미국의 세계적인 심장내과 전문의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버나드 론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환자들에게 처치를 덜함으로써 종종 환자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다행히도 많은 의학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경향성을 깨닫고 바로잡으려는 움직임들이 시작되고 있다. ‘현명하게 선택하라(Choosing Wisely)’도 그중 하나다. 이 운동은 미국에 기반을 둔 의학 계몽 캠페인으로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환자 중심의 치료를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예상하는 것과 달리) 나는 정신의학과 현대의학을 크게 신봉하고 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절한 지침대로 행해졌을 때만 신뢰한다. 론 박사의 말대로 종종 덜한 것이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처음 DSM이 만들어 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로 참전 군인들의 정신 상태와 장애를 진단할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정신의학 협회가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 질병 및 사인 분류 6판(ICD-6)을 참조해 만들어졌던 130쪽 페이지의 작은 책자였다.
하지만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DSM-III와 IV를 거쳐 정신의학의 바이블로 자리잡았다. DSM-III 책자는 500페이지였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주의력 결핍 등이 수록됐다. DSM-IV는 이전 변화에 비해 소극적인 변화였고 전체 정신 장애의 수는 거의 변화가 없다고 평가 받지만 아스퍼거 증후군과 성인 양극성 장애가 추가됐다.
Q. DSM-IV 작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DSM-IV가 진단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고 고백했다. 물론 DSM-5는 더 매몰차게 비판했지만.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인가.
나는 DSM-IV를 작성할 때 매우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94개의 새로운 진단이 제안되었지만 그 중 단 2개만을 채택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주의력 결핍 장애(ADD), 자폐증, 양극성 장애의 거짓된 유행이 초래됐다. 이 모든 것은 느슨한 진단 기준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 일로 얻게 된 교훈은 진단 매뉴얼에서 그 어떤 것이든 잘못 이용될 소지가 있는 것이라면 결국에는 잘못 이용된다는 것이다. 특히 힘 있는 제약 회사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그들은 시장을 잘못되게 이끌어 감으로써 실행 과정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Q. 진단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제약사들의 마케팅을 상당한 원인으로 꼽았는데 납득하기 쉽지 않았다.
제약 회사들은 잘못된 믿음을 널리 퍼뜨렸다. 정신 질환이 매우 일반적이고 쉽게 진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뇌의 화학적 불균형에 기인하며 항상 해결책으로서 약을 필요로 한다는 믿음도 퍼뜨렸다. 치료약은 보다 심각한 정신 장애에는 필수적이지만, 인간 조건에서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문제들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정신 장애 진단은 그것이 정확하게 내려진다면 크나큰 이득을 주지만 부정확하게 내려진다면 크나큰 해를 초래한다. 진단을 잘 내리기는 무척 어려우며 시간과 전문성을 요한다. 많은 가벼운 정신적 문제들은 심리 치료나 환경 변화, 혹은 시간의 변화에 잘 반응하여 치유된다. 처방약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말이다.
Q. 얼마 전 한국에서는 세월호라는 큰 유람선이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다. 언론에서 이 사고를 생중계 하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보도를 본 일반인들이 우울증이나 PTSD를 겪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나올 정도다. 보건 당국도 적극적으로 국민들의 정신보건을 챙기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애도 반응을 우울증이나 PTSD와 같은 질환으로 확대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충격적이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재난 이후에 우울감이나 PTSD 같은 증상을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반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과 주변의 지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데 대해 애도하는 일반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회복이 된다. 이처럼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을 질병화하고 비극에 대처하는 유서 깊은 문화나 특이한 방법들을 피상적인 의료 절차로 대체하는 것은 매우 큰 실수라고 본다.
박사의 책에는 사별한 뒤 정상적으로 보이는 애도 반응이 DSM-5에서는 중증 우울증으로 진단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슬픔, 다른 일에 흥미를 잃는 것, 수면과 섭식 곤란, 에너지 감소,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등은 정상적인 애도 반응에서 얼마든지 보일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SM-5에서는 이를 중증 우울증으로 진단받기 쉽게 느슨하게 기준을 설정해 우울증 약물 처방을 늘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Q. DSM-5의 느슨한 기준을 앞으로는 바싹 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DSM 제정 권한을 미국 정신의학협회에서 다른 독립된 기구로 옮겨야 할 것 같다. 적합한 기구로 생각하는 곳이 있는가.
정신 장애 진단은 정신 의학자들의 손에 독점적으로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하다. 정신의학에서 새로운 진단 기준은 수많은 환자들을 양산할 수 있다. 또 새로운 약이 도입되었을 때는 더 큰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학의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공중보건과 보건 경제에 대한 전문가와 1차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들, 소비자들로부터 총체적인 정보를 얻어 반영할 수 있는 통제 기구가 필요하다.
미국 정신의학협회는 DSM-III가 나올 때까지는 DSM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DSM 관리 작업은 공공재 성격이 강했던 터라 정신의학협회가 일을 떠맡은 면이 컸다. 하지만 DSM의 권위가 커지자 정신의학협회는 수익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자의 책을 보면 DSM-5 출판 수익에 따라 예산 계획이 세워졌고, 그 일정에 따라 2013년 출간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협회는 2,500만 달러라는 엄청난 규모의 돈을 DSM-5 제작에 투입 했지만 방만하게 운영되는 탓에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치료자인 정신과 의사에게만 이런 권한을 일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앨런 박사의 주장이다. 좀 더 거시적인 공공의 이익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Q. 최근 한국에서는 4대 중독관리법을 국회에서 만들려고 하고 있다. 4대 중독은 알코올·마약·도박과 인터넷이다. 특히 인터넷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 법을 찬성하는 정신과의사들은 DSM-5에서도 인터넷 중독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자녀를 둔 학부모들도 이런 움직임에 찬성하고 있다. 반면 게임 산업 종사자들은 과도한 규제가 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인터넷 및 인터넷 게임 과다 이용 문제를 가진 나라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는 현명하고 조심스럽게 이 문제들을 대응해 왔다고 알고 있다. 인터넷 과다 이용을 정신 장애로 규정하지 않으면서 관련 연구를 위한 적절한 기금을 조성하고 게임에 갇힌 사람들을 보다 일상적인 삶으로 복귀하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독’과 ‘여흥적·생산적 사용’ 간의 경계는 흐릿하기에 뚜렷한 선을 긋기가 어렵다. 게다가 인터넷 중독은 DSM-5에서도 기각된 바가 있다. 한국처럼 초고도 기술 국가에서는 상당수의 인구가 정신 장애로 잘못 진단될 수도 있다.
Q. 한국은 항우울제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에 대한 처방을 정신과 의사가 아니면 2달까지만 보험 급여를 해준다. 신경과나 신경외과 등은 파킨슨병이나 뇌졸중 후 생기는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신들에게도 SSRI를 제한없이 처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다. 또 가정의학과에서도 안전한 약이란 이유를 들어 SSRI 처방에 대한 제헌을 철회해달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SSRI의 80%가 비(比)정신과 의사들에 의해 처방된다. 때로는 부주의하고 명확한 지침도 없이 처방이 이뤄진다. 나는 일정 정도의 규제가 이와 같은 현상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사용을 허용할 수 있을 만큼의 유용성도 가져야 한다.
Q.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폭력 범죄자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어린 소녀를 강간했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미국도 비슷한 사건이 많았다고 알고 있다. 이런 사건을 보고 일부 언론에서는 정신병적인 상황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는 한다. 진짜 병적인 상황과 그렇지 않은 단순한 범죄자를 어떻게 감별해야 하는가.
‘미친 것’과 ‘나쁜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범죄 행동은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범죄는 행동의 치료가 아닌 교정의 차원에서 다뤄져야만 한다. 유일한 예외는 범죄 행동을 유발하는 명백한 원인으로 분명하게 정의된 정신 질환들에 국한돼야 한다. 이런 질환들은 드물지만 종종 제기되고 있기는 하다.
Q. 비정상과 정상을 정확히 구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비정상을 더 많이 포함시키면 진단 인플레이션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박사님은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저서에서 이런 진단 인플레이션을 우려했다. 그러나 반대로 정상 쪽으로 기준선을 옮길 경우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별로 안 돼 있다. 이럴 경우 제대로 진단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 않나.
정신 장애 진단을 과다하게 내릴 위험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놓칠 위험 사이에는 언제나 ‘추’가 존재한다. 지금은 추가 건강한 사람들을 과다하게 진단하고 정말로 아픈 사람들은 무시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사람들은 심지어 정신 장애 진단이 없이도 필요하다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 중독이라는 진단명을 만드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게임과 관련해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우리는 불필요한 치료를 줄일 수 있게끔 진단 과정을 조이고 심각한 질환들에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만 한다.
Q. DSM-5가 나온 지 1년이 되었다. DSM-5 출간 이후로 정신 의학계에 새로운 변화 같은 것이 있는가? DSM-5가 치료 현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DSM-5에 포함된 새로운 진단명들을 둘러싼 논쟁들이 진전이 있는지 궁금하다.
1년을 가지고 DSM-5의 영향력을 평가하기는 조금 이르다. 내 생각에는 많은 나라들에서 DSM-5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약 회사들은 이미 DSM-5에 포함된 정상적인 애도의 질병화와 폭식 장애를 통해 수익을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우리는 환자들을 위해 정말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다만 히포크라테스가 경고했듯 ‘해를 끼치지 마라(Do no harm)’라는 말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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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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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상과 비정상을 재정의하라|작성자 인물과사상
뒤집어 읽는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을 재정의하라
김병수 |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 부교수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사람들은 무엇이 정상이며, 자신이 그 정상에 속하는지 아닌지 알고 싶어 한다. “내가 정상인가요? 이렇게 괴로운데 이건 비정상인 거죠?”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때로는 부부 싸움이 잦은 부인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남편과 저렇게 하는 나, 선생님이 보기에는 누가 정상인가요?”라며 정상, 비정상을 가려 달라고 한다(내가 무슨 판사도 아닌데 말이다).
정신의학적으로 정상이냐, 아니냐 하는 궁금증 속에는 대체로 두 가지 두려움이 숨겨져 있다. 우선 자신이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근원적인 불안이다. 사회·문화적 체계 속에 자신이 포함될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정상은 대다수의 사람 속에 안전하게 속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고, 무리를 지어 살아왔고, 그래서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집단에서 배제되는 것에 원초적 불안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누구나 평균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나만 다르다’는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정신 장애(mental disorder)에 대한 두려움이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처럼 한 사람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말은 없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고, 약이라도 처방받으면 자신이 비정상이라도 된 것처럼 낙인 찍혔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히고, 불안해서 병원에 갔는데 공황장애라고 진단받게 되자 하늘이 무너지고 인생이 끝장난 것 같다며 공포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종종 본다. 공황 증상으로 인한 괴로움보다 공황장애 진단 자체가 더 충격적이라며 암 판정이라도 받은 것처럼 덜덜 떨기도 한다. 공황장애는 암과 비교할 정도의 심각한 질환도 아니고, 치료 가능하고, 잘 치료하면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데 말이다.
정신과 의사는 두말할 나위 없고, 매일 기도하는 목사나 신부, 해탈을 꿈꾸는 스님도 정신적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우울해진다.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 정신적 압박 속에서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공황 증상을 경험할 수 있다. 우울하고 불안하다고 해서 비정상은 아니다. 이런 증상은 세상 사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일 뿐이다.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에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처럼 인식해서는 안 된다.
정신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정신 병리의 다양한 패러다임에 기초를 둔다. 그런데 정신 병리가 있느냐, 없느냐를 구분 짓는 보이지 않는 선이 제정신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것으로 오역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을 때 ‘골절상을 당했다’고 하지 그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하지 않는다.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당신은 비정상이야”라고 말하지 않듯, 심리적 고통에 시달린다고 비정상이라고 함부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정상성의 5가지 관점
정상은 규정하기 힘든 개념이다. 정신의학적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신 건강 진단은 의학적 진단과는 사뭇 다르다. 전 세계 정신 건강 전문가들이 객관적 검사를 통해 정신 장애를 진단하는 검사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결실을 보지 못했다. 기초과학에서 뇌의 작동 방식에 대한 훌륭한 연구 성과를 끊임없이 내놓고 있지만, 임상 진료 현장에서 당장 활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분자생물학, 유전학, 뇌 영상 촬영 등 강력한 연구 도구를 갖고 있지만 주요 우울 장애, 조현병, 양극성 장애, 강박 장애 등의 정신 질환에서 단일한 원인을 분명하게 밝혀낸 것 또한 아직까지 없다. 원인이 밝혀져 있지 않으니, 그것을 확진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검사법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정신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정상과 병적 상태를 근원적으로 구분해내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정신의학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깝다. 정신의학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예술에서의 관점처럼 개성적이고, 다중적이고,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정상과 정신 장애를 확정적으로 구분하는 생물학적인 검사법이나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진단을 내릴 때 정신과 의사의 느낌(좋게 말하면 직관)이나 인상(impression)은 물론이요, 임상적 때로는 도덕적 판단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의학은 유사 과학에 불과하다고 폄훼 당하기도 한다. 이론적으로 정신 장애를 정의하는 기준은 있지만, 현실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경계가 모호할 뿐 아니라 회색지대가 매우 넓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과 경험 중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판단하는 데는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상성(normality)을 다음의 다섯 가지 관점에 따라 정의 내린다. 첫 번째가 통계적 정상이다. 통계적 모형에서는 어떤 증상과 행동이 대체로 정상이라고 말하는 범위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구분한다. 자연과 인간에 관한 속성들은 평균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흩어지며 (가장자리로 갈수록 줄어들면서) 분포한다. 통계적 모형에서는 평균에서 한 단위나 두 단위의 표준편차 밖에 있으면 흔히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라고 판단하고 비정상으로 취하게 된다. 그런데 정신 증상은 평균 분포를 정확히 알 수도 없거니와, 안다고 해도 중심에서 얼마만큼 떨어졌을 때 비정상이라고 할지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 정신 현상에 대해서는 통계적으로 흔하게 관찰된다고 정상이라고 하거나, 소수 집단에 속한다고 비정상이라고 질병화해서는 안 된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두 번째는 주관적 고통을 기준으로 한 정상이다. 개인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상인가? 그렇지 않다. 마음이 건강해도 괴로움을 안고 살기 마련이다. 정신적 고통에 휩싸여 있다고 비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족을 잃고 비탄에 빠져 잠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하는 것은 정상적 반응이다. 반대로 문제가 많은데도 자신은 멀쩡하다고 여기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가 대표적인 예다. 아무 이유 없이 칼로 사람을 찌르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도, 반사회적 인격 장애 성향을 가진 사람을 접해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거다(직장 상사나 동료 중에 이런 사람, 꼭 한두 명씩 있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뇌 속의 공감 회로도 고장 나 있어서 타인의 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다른 사람을 괴롭혀도 “그래서 어쩔 건데” 하고 째려보거나 “네가 문제다”라며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상하게 몰고 간다. 그러니 주관적 고통이 있느냐, 없느냐를 정신 건강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
정상을 정의하는 세 번째 관점은 사회·문화적 기준이다. 문화마다 정상의 기준이나 개념이 다르다.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정신과 진단도 달라진다. 정신의학에서는 개별적인 문화적 특성 아래에서만 진단되는 질환을 따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을 문화 특이적 증후군(culture bound syndrome)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여성에게 흔한 화병도 여기에 속한다. 개인이 처한 맥락에 따라 특정 행동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사회적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만을 정상이라고 한다면? 외부에서 기대하는 행동을 충실하게 따를 때만 정상이라고 한다면? 독특하게 말하고 남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무조건 비정상이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네 번째는 이상적(ideal) 관점에 따른 정상이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상태와 부합하면 정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이라는 거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과 행동에 관해 비교 기준으로 삼을 만한 이상적 모델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인간이란 없다. 콤플렉스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열등감 없는 사람도 없다. 어느 정도의 비정상성을 누구나 갖고 있다.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산다. 이상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비정상이다.
다섯 번째로, (이번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임상적 관점에 따른 정상이다. 임상적 진단에 부합하는 정신 장애가 없는 것을 정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 장애인지 아닌지 가르는 진단 기준은 무엇인가? 정신과적인 증상 자체는 건강한 일반인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우울하다, 불안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기억력이 떨어진다, 괴로운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누구나 이런 것 한두 가지는 겪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난다면 병리적인 문제일 수 있다. 단순히 재미없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잠이 오지 않고, 불안하고, 식욕도 떨어지고, 주의집중력과 기억력이 저하되고,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면 우울 장애가 발병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일한 증상 한두 가지가 있다고 정신 장애로 진단하지는 않는다. 정신 장애가 있다고 하려면 여러 가지 증상이 특정한 방향으로 나타나야 한다. 덧붙여, 증상이 심각해서 지속적인 문제를 일으켜야 한다.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사회적, 직업적, 대인관계 또는 일상생활 기능에 손상이 생긴 경우에야 정신 장애가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데 실제 임상에서는 정신 장애냐 아니냐, 혹은 정상이냐 아니냐는 것이 쉽게 갈라지지 않을 때가 많다. 증상 몇 개가 한꺼번에 나타나야 진단 기준을 충족할 것인가는 기술적인 결정일 뿐이다. 기준의 경계에 있는 경우도 많다.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기능 손상’이라는 것을 정확히 가르는 기준도 없다. 사회생활에 어느 정도 문제가 생겨야 임상적으로 유의미하다고 할 것인가? 권태기 부부가 매일 싸우면 대인관계에 손상이 생긴 것인가? 의욕이 없어서 일주일째 결근했다면 직업 기능에 손상이 있는 것인가? 평소에 깔끔하던 사람이 스트레스 받아서 한 달 동안 세수도 안 하고 집 안을 어질러놓고 산다면 일상 기능에 손상이 왔다고 판단해야 하나? 언어로 기술된 기준은 명확해 보여도 임상적 관점에서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는 것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무엇을 정상으로 규정할 것인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지난 2013년 5월 정신의학 전문가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으며 정신의학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진단 기준인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의 5번째 개정판 『DSM-5』가 출간되었다. DSM은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독자적으로 발간하는 것이지만, 전 세계 정신의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진료뿐만 아니라, 연구과 교육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DSM이 개정판을 내놓을 때마다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곤 했다. 이번 『DSM-5』도 마찬가지였다. 출판이 되기 전부터 과거보다 격렬한 논박들이 오갔다. 그중 압권은 『DSM-Ⅳ』의 수석 편집인이자 책임자였던 앨런 프랜시스(Allen Frances)가 대놓고 이번 개정판을 쓰레기 취급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넷 기고를 통해서 『DSM-5』가 정신의학 진단을 잘못된 방향으로 몰아간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1
『DSM-5』는 진단 기준이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변질되었고, 새로운 정신 장애 범주를 많이 만들어냈으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약한 증상까지도 정신 장애 테두리 안에 집어넣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는 『DSM-5』가 정신 장애 진단을 남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DSM-5』를 따르면, 정상도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일이 이전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한다. 『DSM-5』는 진단 기준이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변질되었고, 새로운 정신 장애 범주를 많이 만들어냈으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약한 증상까지도 정신 장애 테두리 안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또한 진단의 근거가 명확하지도 않고, 치료법도 없는 정신 현상을 정신 장애로 진단하도록 부추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DSM-5』에서는 (정상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폭식 장애, 경도 신경 인지 장애, 파탄성 기분 조절 장애 등이 추가되었는데, 이러한 진단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수백만 명의 정상인이 정신질환자로 잘못 진단될 것이라고 했다. 『DSM-5』에서는 카페인 중독과 금단도 하나의 정신 장애다.
예를 들어, 커피 2~3잔(혹은 그에 상응하는 정도)을 복용한 뒤 안절부절못하고 위장 장애, 불면, 초조, 심계 항진이 생긴다면 중독 증상일 수 있다. 커피 중단 이후에 두통과 함께 졸림 등이 나타나면 카페인 금단 증상이 생긴 것이고, 이는 카페인 사용과 관련된 정신 장애로 진단된다. 『DSM-Ⅳ』에서는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 뒤 2개월 안에는 우울 증상이 발생하더라도 우울 장애로 진단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는데, 『DSM-5』에서는 이러한 기준을 아예 삭제해버렸다. 즉 배우자나 부모가 사망한 직후에 슬픔에 빠져서 흥미를 상실하고, 식욕이 떨어지고, 잠도 못 자고, 집중력이 저하되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요 우울 장애 환자가 되어버린다.
앨런 프랜시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DSM-5』가 정신 장애의 폭을 넓히고 진단을 쉽게 내릴 수 있도록 기준점을 낮춘 것이 제약회사의 마케팅과 이에 결탁한 정신 건강 전문가들의 이권 챙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비판이 옳으냐 아니냐를 떠나서 진단 기준 체계의 개정은 정신 건강에서의 정상성에 대한 논쟁에 또다시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DSM이라는 진단 기준이 폭넓게 활용되기 전에는 정신과 의사 두 명이 똑같은 환자를 진단할 때, 진단이 일치할 확률이 우연에 의한 것보다 높지 않았다. 정신과 의사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이론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진단을 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공연한 사실이 두 연구 결과를 통해 공개적으로 확인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첫 번째는 영국과 미국 정신과 의사의 진단을 비교한 연구였다. 똑같은 환자를 비디오로 녹화해서 보여준 뒤에 진단하도록 했더니, 두 나라 의사들의 진단이 서로 다른 것이 확인되었다.2 그러다 보니,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정신분열병의 유병률 또한 상당한 차이를 나타냈다.
두 번째는 정신과 의사들이 내리는 진단이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멀쩡한 사람에게 잘못된 치료가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실험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 데이비드 로젠한(David Rosenhan)은 정상인 8명에게 정신과적 증상을 교육시킨 뒤, 가짜 환자로 둔갑시켰다. 그런 뒤 이들을 서로 다른 병원으로 보내 “얼마 전부터 귀에서 쿵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요. 공허하고 텅 빈 느낌이 들어요”라고 호소하게 했다. 그러자 8명 중에서 7명은 정신분열병, 나머지 1명은 조울병으로 진단받았고 짧게는 7일에서 길게는 52일 (평균 19일) 동안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1972년에 시행된 이 실험 결과가 이듬해 『사이언스』에 「제정신이 아닌 곳에서 제정신으로 지내기」라는 조롱 섞인 제목으로 발표되자3 미국의 정신의학은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뚫고 나온 것이 바로 『DSM-III』이었다. 『DSM-III』에서는 정신 장애 진단에 부합하는 증상을 나열하고, 이에 기반해서 진단할 수 있게 했다.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을 진단 기준에 따라 세심하게 적용해 진단의 신뢰도가 현저하게 높아졌다. 『DSM-III』를 활용하게 되자, 똑같은 환자를 두고 정신과 의사마다 다른 진단을 내릴 가능성이 확실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문제도 생겼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으로 진단을 내리니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이나 환경적 맥락을 이전보다 덜 고려하게 되었다. 『DSM-III』를 기점으로 정신과 진단은 보텀 업(bottom up) 방식이 아니라, 톱 다운(top down)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전에는 개인의 과거, 가족력, 방어기제처럼 증상 아래에 담겨 있는 삶의 정보를 모아서 진단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맨 꼭대기에 드러난 증상만으로 진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진단하는 과정이 환자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행위가 아니라, 진단 기준 항목을 검토해서 체크리스트를 작성하는 일로 축소되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DSM에 기술된 진단 분류와 기준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이 작위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진단 기준의 표현을 바꾸거나, 진단 기준을 충족하는 데 필요한 증상의 개수를 줄이거나 늘임으로써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쉽게 허물어졌다. 정신 질환의 유병률도 높아졌다. 정신 건강에 대한 통계를 보면, 일반 인구의 20퍼센트 정도는 현재 정신과적 진단을 충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4 (만약 네 사람이 모여 고스톱을 친다면, 당신은 소위 말해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 한 명과 게임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수도 있다) 몇몇 정신 장애의 유병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ADHD)와 조울병(Bipolar Disorder, 공식 명칭은 양극성장애)이다. 이 두 진단은 1994년에 『DSM-Ⅳ』가 발표된 이후 유병률이 이전에 비해 약 2~3배씩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DSM에 새로운 진단이 추가될 때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질병이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1952년 DSM이 처음 발표될 당시에는 106개의 정신 장애 진단이 있었는데, 1980년 『DSM-III』에서는 182개로 늘어났고, 2013년 『DSM-5』에서는 거의 300개로 늘어났다. 6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정신 장애의 종류가 3배나 늘어난 것이다(세상이 미쳐 돌아가서, 정신 질환이 늘어난 것이라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이제 『DSM-5』가 발표됨에 따라 ‘정신 장애 분류와 진단의 기준선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문제가 다시 부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무엇을 정상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정신의학에서 비정상으로 규정했다가 스스로 철회한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다. 1968년에 발표된 『DSM-Ⅱ』에서는 동성애가 성적 일탈(Sexual Deviancy)이라는 진단의 정신 장애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DSM-Ⅳ』에서는 더 이상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보지 않았고 진단 체계에서도 삭제되었다).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기다려야 한다
DSM과 같은 진단 기준 매뉴얼은 진단 목록일 뿐, 진정한 질병 목록이 아니다. 진단 기준은 규칙일 뿐,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정신 질환의 정확한 본질을 알지 못 한다. 앞으로 짧은 기간 안에 실체가 밝혀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러니, 진단에 있어서도 불확실성을 안고 가야만 한다. 정확히 진단하기 힘든 경우도 있고, 진단이 계속 바뀌는 환자도 있다. 어떤 환자는 한 시간의 면담으로 진단이 내려지기도 하지만, 어떤 환자는 정확히 진단되기까지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 이것이 정신의학의 현주소다.
환자나 보호자는 “정상인가요? 비정상이라면 진단은 뭔가요? 확실하게 말해주세요”라고 묻는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답하기 어려울 때가 적지 않다. 진단이 분명하지 않아서 그럴 때도 있고, 한 가지 진단이 강력하게 의심된다고 해도 섣부르게 말해주는 것이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기도 하다. 진단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거나, 한 사람 전체를 비정상으로 쉽게 규정해버리려고 할 때 특히 그렇다. 정신의학에는 흑백 사고가 적용되지 않는 회색 지대가 많다. 불확실성은 항상 존재한다. 섣부른 확신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기다릴 수 있어야 더욱 정확한 진단에 이를 수 있다. 주의 깊게 기다리는 것이 성급하게 진단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 기다리며 지켜보는 동안 진단이 분명해지기도 한다. 진단에 휘둘리기보다는 한 사람의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정신 건강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진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진)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짜 치료다.
특히, 경계선에 걸쳐 있는 경우는 더 그렇다. 약간 아픈 사람과 괜찮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증상이 극단적이거나 심한 경우에는 아픈 사람을 구분해내기 쉽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을수록 (그래서 진단 기준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을 때는) 진단하기 더 어려운 법이다. 이럴 때는 치료도 섬세하고 세밀하게 진행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일까? 다른 의료 분야에서는 중증 질환을 많이 다루는 대학병원 의사가 진단과 치료에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정신의학에서는 약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을 자주 접하는 개원 의사가 훌륭한 임상적 역량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순전히 개인적인 견해이니, 대학병원 교수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괴로움 자체가 정상이다
정상에는 고통과 괴로움, 갈등이 필요하다. 정신 건강은 평온과는 거리가 멀다. 갈등과 생존 경쟁으로 인한 괴로운 상태, 그 자체가 정상일 수 있다. 우리는 앞 세대가 경험해보지 못 한 환경에서, 앞 세대의 도움 없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어떤 길이 맞는지 알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괴롭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불안하지 않다면 그게 비정상이다.
정신적 고통은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인 이상 피하며 살아갈 수 없다. 충격적인 사고를 겪고, 사람이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눈물이 나고 참담함에 빠져들어 같이 고통을 느껴야 정상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지만, 나는 책임이 없다”라고 말한다 면 그게 비정상이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적어도 약간씩은 신경증적이라는 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정신 건강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를 갖지 못했다. 무의식적인 심리 갈등인 신경증은 인간 존재의 한 부분이니 말이다. 실존적 관점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안을 경험한다. 불안한 것은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프로이트는 우리 모두가 적어도 약간씩은 신경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존적 관점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안을 경험한다. 불안한 것은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우리의 마음은 계속 변한다. 그렇게 진화되어왔다. 마음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것이 정상이다. 변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오류가 일어난다. 오류가 일어나는 것이 정상이지, 완벽한 것이 정상은 아니다. 인간의 뇌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늘 완벽하게 작동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오류를 비정상이라고 간주해버린다면, 정상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프니까 청춘이다’처럼) 웬만한 괴로움은 무조건 참고 견디라는 말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것을 “나는 괜찮다” 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가 정상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정신 건강의 기준 또한 달라진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뿐이다. ‘무엇을 정상이라고 규정할 것이냐?’가 지금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다. 마음이 편하냐 아니냐, 괴로움이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정상 혹은 비정상으로 쉽게 재단하지 말라는 의미다. 완벽하지 못하다고, 그것을 대뜸 비정상으로 몰고 가지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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