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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음악의 성지 문나이트와 이수만과 서태지의 기묘한 인연
1. 댄스음악의 태동
1981년 이수만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컴퓨터공학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때 이수만은 미국의 MTV와 미국의 음반산업을 보며 연예기획자로 꿈을 꿉니다.
8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수만은 방송활동을 재개합니다. 그런 후 인천 월미도에서 운영한 헤밍웨이카페가 성공함으로써 사업 자금을 마련할 수 있게 된 이수만은 본격적으로 연예기획자의 길에 뛰어듭니다
이수만은 댄스음악과 힙합을 믹싱해서 프로듀싱하기로 마음먹고 이태원이나 여러 유명클럽에 찾아다니며 쓸만한 인재를 탐색합니다.
이수만은 이태원의 한 클럽인 문나이트에서 DJ를 하는 최진열을 고용한후
"음반을 낼까 하는데 주변에 춤되고 노래되는 애 있으면 찾아달라"고 일을 시킵니다.
최진열은 평소에 알고 있던 이주노와 현진영을 이수만에게 소개합니다.
이주노와 현진영을 저울질하던 이수만은 현진영이 이주노보다 노래을 잘하는 점에 현진영을 발탁합니다.
이때는 1988년이며 현진영은 당시나이가 16세였습니다.
이수만은 미국인트레이너를 고용해서 힙합과 댄스를 가르치게 합니다.
그리고 최진열은 현진영의 매니저를 담당합니다.
1989년 송파에서 이수만은 회사(SM기획)를 창립한후 김광진과 한동준을 영입합니다.
얼마후 이수만은 댄스페스티벌에서 수상한 구준엽과 강원래를 추가로 발탁해서 와와의 멤버로 키웁니다.(와와1기)
(구준엽, 강원래는 훗날 클론이 됨)
1990년 이수만은 제1집 "New Dance"를 발표하며 현진영과 와와(구준엽,강원래)를 데뷔시킵니다.
야한 여자 -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와와1기)
하지만 "현진영과 와와"의 야한여자는 그당시 대세였던 박남정과 김완선에 밀렸지만 어느정도 인기를 얻었습니다.
한편 구준엽, 강원래는 군대문제로 입영하게 되자 친한 동생사이였던 이현도, 김성재를 이수만에게 소개합니다.
이수만은 새로 이현도, 김성재를 와와2기로 발탁한후 후속곡 '슬픈 마네킹'을 발표했는데 큰 인기를 얻어 현진영은 박남정의 라이벌로 급부상합니다.
(이현도, 김성재는 훗날 듀스가 됨)
슬픈 마네킹 - 현진영, 이현도, 김성재(와와2기)
2. 양현석과 이주노의 등장
1978년 한백희는 인순이를 희자매로 데뷔시킨후에 김완선, 이주노, 박철우를 발굴하여 혹독하게 트레이닝을 시켰습니다.
(한국가요계에서 최초의 연습생, 덧붙여서 김완선의 발탁시기는 1983년이고 14살이였음)
한백희는 희자매가 해체되자 인순이를 솔로로 전향시키면서 "인순이와 리듬터치"라는 백댄서팀을 구성하고 로드매니저로 김광수(현 코어사장)를 채용합니다.(1985년)
(리듬터치의 백댄서멤버: 이주노, 김완선, 박철우)
한백희는 김완선을 백댄서로 기량을 가다듬게하고 1986년 김완선을 17세의 나이에 데뷔시킵니다.
김완선
김완선의 등장은 한 마디로 쇼킹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가 들고 나온 음악과 스타일, 컨셉, 안무, 무대 구성등은 예전의 기성 가요와는 궤적을 달리하는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였죠.
김완선 데뷔후에 인순이, 이주노, 박철우는 한백희곁을 떠나게됩니다.
이주노와 박철우는 브레이크 댄스팀 "스파크"에 입단하는데 여기서 양현석과 박남정을 만나게 됩니다.
이주노와 양현석은 문나이트에 출입하면서 이현도, 김성재, 구준엽, 강원래, 이탁, 현진영과 친분을 맺습니다.
또한 이주노가 이수만에게 가수오디션을 받았지만 현진영에게 밀려 탈락합니다.(1의 이야기에 연결됨)
1988년 박남정은 양현석, 이주노, 박철우, 김영완을 백댄서로 영입해 "박남정과 프렌즈"를 결성합니다.
그당시 김완선과 박남정은 댄스음악계를 양분하였으며 그 다음순으로 현진영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서태지의 등장으로 박남정과 현진영의 운명은 바뀌게 됩니다.
(박철우는 R.ef로 데뷔, 김영완은 콜라로 데뷔)
박남정
3. 서태지의 등장
사나위에서 활동을 하던 서태지는 신대철과 마찰로 시나위를 떠나게 됩니다.
그후 서태지는 무궁화밴드에 입단하고 여러 나이트클럽에 진전합니다.
무궁화밴드는 캐피탈호텔에 공연하게 되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그때 "박남정과 프렌즈"도 공연을 하러왔습니다.
이때 서태지는 "박남정과 프렌즈"라는 댄스그룹팀의 춤에 반하여
춤을 배울려고 무궁화밴드의 리더인 황인영에게 부탁해서 양현석을 소개받습니다.
서태지는 양현석에게 춤을 배우고 양현석은 서태지에게 노래를 배웁니다.
서태지는 낮에는 작곡을 하면서 양현석에게 춤을 배우고 밤에는 연주을 하는 생활을 합니다.
드디어 곡을 완성한후 데모음악을 양현석에게 듣려줍니다.
이때 양현석은 서태지에게 "노래가 좋다. 그런데 이 노래는 혼자 하는 것보다 팀을 이뤄하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고
서태지는 양현석의 조언에 3명의 팀을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멤버을 구합니다.
첫후보을 탈락시킨후 결국 이주노까지 영입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한편 대마초사건으로 현진영에게 실망한 최진열은 SM기획을 그만두었는데 이주노를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의 매니저가 됩니다.
이주노, 서태지, 양현석
1992년 4월, 서태지는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난 알아요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는등 대성공을 거둡니다.
1992년 8월 이수만은 제2집 "New Dance 2"를 발표하는데 타이틀 곡인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높은 완성도와 함께 굉장한 인기를 얻었으며 같은 앨범의 '너는 왜'는 '현진영 고 진영고'라는 후렴구와 랩도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결국 현진영과 와와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강력한 라이벌이 됩니다.
서태지의 아이들의 열풍후 박남정은 완벽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김완선도 홍콩,대만등의 중화권으로 진출합니다.
한편 이수만에게 프로듀싱을 배운 이현도는 "New Dance 2"의 수록곡인 "너에게만"로 직접 프로듀싱을 했습니다.
결국 어느정도 프로듀싱능력을 갖춘 이현도와 김성재는 SM과 결별하여 1993년 듀스로 데뷔합니다.
이현도와 김성재가 떠나자 이수만은 와와 3기 멤버로 션을 발탁합니다.
(션은 훗날 지누션으로 데뷔)
4. 이수만 힙합과 결별하다.
1990년 슬픈 마네킹이 인기을 끌면서 단숨에 그당시 대세였던 박남정의 라이벌이 되지만 1991년에 현진영은 대미초혐의로 구속됩니다.
자신의 1호 가수가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볼수없었던 이수만의 노력으로 현진영은 1년만에 출소를 합니다.
1992년 4월경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를 휩쓸고난후 1992년 8월 이수만은 현진영의 2집 앨범을 발표합니다.
현진영 2집 앨범의 타이;곡은 문나이트에서 친한 이탁이 만든 "흐린 기억 속에 그대"였는데 당시 현진영은 커다란 후드티와 한껏 내려 입은 청바지로 코디한 후 빨라진 음악에 맞춰 현란한 댄스를 선보입니다.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과 음악에 익숙한 대중들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에도 커다란 지지를 보냈고, 현진영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라이벌로 급부상합니다.
또한 립싱크로 과소평가되었던 싱어로써의 자질을 "너는 왜"에서 여성 백댄서와 격렬한 권투춤을 추면서 현진영 Go 진영 Go를 하면서 라이브로 빠른 랩을 소화해내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죠.
1993년 이수만은 현진영의 3집 "두근두근 쿵쿵"을 발표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 2집과 현진영 3집이 정면대결을 펼칠 93년 가요계는 모두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발표한지 일주일 만에 필로폰 투약 혐의로 현진영은 구속되었고 방송정지을 당합니다.
이수만은 사력을 다해 현진영을 띄웠으나 그때마다 대마초와 필로폰으로 무너졌으며 결국 최종적으로 서태지가 이수만과 힙합주도권 경쟁에 승리하게 됩니다.
5. 이수만 힙합외에 여러가지 시도를 하다 - 김광진, 한동준, 유영진
이수만은 힙합외에 알앤비, 포크록, 발라드등 여러장르를 기획합니다.
이수만은 한동준과 김광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1집앨범을 기획합니다. 특히 김광진은 작곡능력까지 있었죠.
김광진은 1991년 한동준에게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라는 곡을 줬고, 같은 해 김광진 본인도 1집 앨범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데뷔앨범은 대중들이 외면하였고 더욱더 힙합에 빠지게 된 계기가 됩니다. 이수만에 실망한 김광진과 한동준은 결국 이수만과 결별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명곡을 발표하며 뛰어난 뮤지션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김광진의 대표곡으로 편지, 마법의 성등이 있습니다. 한동준의 대표곡으로 사량의 서약이 있습니다.)
한동준 -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윤하가 부른 한동준의 명곡 사량의 서약
http://www.youtube.com/watch?v=5crDXWlUURs
1992년 유영진은 군대제대후 가수가 되고자 여러 기획사에 여러 오디션를 봤지만 탈락의 고배를 거듭하였습니다.
문나이트에서 친했던 구준엽과 강원래의 인연으로 인해 마지막으로 유영진은 SM기획에 자신이 작곡한 음악 CD를 보냈습니다.
이수만은 유영진에게 3일 정도 “곡이 더 있냐”고 물어보면서 유영진은 하루에 10곡씩 준비해 들려줍니다. 실력을 인정받은 유영진은 스스로 원해서 종신계약을 맺습니다.
1993년에 한국 R&B 역사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그대의 향기’가 나왔는데 유영진은 뮤직비디오에서 턴을 하기도 하고, 2집에서는 댄스음악 ‘너의 착각’을 내놓는 등 R&B뮤지션과 댄서의 모습을 함께 보여줬습니다. 당시 그의 뒤에는 문희준과 강타가 춤을 췄죠.
유영진- 그대의 향기
1993년 새로 오디션을 벌여 서연수와 임범준을 발탁합니다.
임범준은 락밴드활동으로 다져진 굵은 남성적 음색를 가졌고 서연수는 여성적인 맑은 미성을 지녔죠.
성공을 확신한 이수만은 메이저라는 2인조 그룹으로 데뷔콘서트을 하였고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이들이 선보인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도발적의상에 제재를 가했고 단정하게 나오지 않으면 방송활동을 할수 없다고 통보을 하였습니다.
이수만이 그들을 설득해도 서연수와 임범준은 비굴하게 음악을 할수없다고 거절하였고 결국 공중분해가 되어버렸죠.
Early spring day (이른 봄날), 1994 - 메이저(Major) 서연수, 임범준
마지막으로 이수만은 2명의 재미교포로 이루어진 J&J라는 그룹을 선보입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이 없어 처참하게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이 모든 기획들이 실패한 이수만은 대중들의 속성을 알겠다고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고 아이돌을 기획하게 됩니다.
유영진은 이수만의 기획 아래 프로듀싱하며 결국 HOT, SES, 신화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아이돌기획사로 완전하게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J&J 강준식, 김주현 - 미지수야 미지수.1994
그당시 댄스가수 데뷔년도비교
김완선(1986) - 박남정과 친구들(1988) - 현진영과 와와(1990) - 서태지와 아이들(1992)
댄스가수의 그룹의 멤버에 관해서
박남정과 친구들: 박남정, 양현석, 이주노, 박철우, 김영완
현진영과 와와: 현진영, 1기 - 구준엽·강원래, 2기 - 이현도·김성재, 3기 - 션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 이주노, 양현석
문나이트의 인맥
최진열, 이주노, 양현석, 현진영, 이현도, 김성재, 구준엽, 강원래, 이탁
SM의 초창기 아티스트들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이현도, 김성재, 션, 김광진, 한동준, 유영진, 메이저(서연수,임범준), J&J(강준식,김주현)
출처 - 가생이 방송연예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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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업가죠ㅋㅋ
유영진과의 만남은 결과적으로 지금의 SM이 존재할 수 있는 포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시대는 참 음악적으로 풍요로웠고, 자유로웠던 시대였던 것 같아요.
서태지,신해철,이현도처럼 스무살에 자기 노래를 만들어서 자기 음악과 컨셉을 가지고 데뷔해서 성공하는 어린 뮤지션이 요즘은 많지 않지요.
장범준은 조금 특이한 케이스인것 같고요.
저 때가 한국 대중가요계의 르네상스였지.
천재기획자였던 이수만이 뒤늦게 깨달았다던 대중들의 속성이 아이돌이었다니................
서태지,듀스도 대단하지만
저는 현진영,김완선이라는 존재도 다시 나올수 없는
가요계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진영이 대마초였나 마약이었나 그것만 아니면 사람도 괜춘하고 열심히 노력했던 걸로 아는데 참 안타까운 케이스,
지금도 '흐린 기억 속에 그대' 나오면 애고 어른이고 할 거 없이 일어나서 머리 붙잡고 팔 흔들며 니킥댄스~댄스~ 하는데, 흑흑,
제일 안타까움, 흑흑,
그대가 이세상에 있는것만으로.. 그 곡 너무 좋아했었는데.. ㅎㅎ
망작이라니 안타깝네요. 방송도 많이 나오고 했었는데,
그나저나 메이저 저 곡도 엄청나게 좋아했었는데 왜 노래 하나만 하고 안나오나 했더니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요.
저때가 진짜 말그대로 르네상스였죠.
서태지 이후 댄스음악 대세가 되었지만
발라드, 힙합, 트로트, 포크, 락, 메탈, 일렉에
댄스에 국악요소 까지 곁들여주신 육각수 까지 모든 장르가 가요톱텐 차트안에 들었죠.
이수만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상업적 요소만을 벤치마킹한 HOT를 등장시킨 이후
댄스편중화, 거대 기획중심화가 되면서
밸런스가 붕괴되었지만요....
나야 좋은음악 원없이 들어서 별 미련 없지만
요즘 애들 음악듣는 것 보면 한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네요.
듀스, 서태지 현역시기에 맞춰 학창시절을 보낸건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악성루머(소속사 연예인 착취관련)를 떼놓고 본다면..
이수만은 그야말로 천재적인 사업가죠.
시장의 트렌드를 단순히 읽고 따라가는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트렌드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한 양반..
현진영은 정말 안타까운 케이스였지요..
그리고 또 한그룹이 있었지요..
서태지. 현진영 사이에서 선방한 노이즈
전 서태지보다 현진영의 흐린기억속의 그대 .. 노이즈에 너에게 원한건을 더 좋아햇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수 있나~ 참새방앗간 cf 찍었던 현진영 생각나네요ㅋㅋㅋ
현진영도 현진영이지만 개인적으로 듀스가 참 안타깝네요. 김성재 죽은것도 그렇고
아르헨도가 병역만 잘 해결했으면 지금도 여전히 잘 나갈텐데...
아르헨도가 병역이 문제가 되서 그렇지
곡은 정말 세련되고 기깔나게 잘 뽑았어요.
우리는, 너의 뒤에서, 사랑 두려움, 여름 안에서, 말하자면을 비롯한
김성재 1집은 지금 들어도 명곡입니다. 사자후를 비롯한 본인의 솔로곡도 그렇구요.
중고등 시절은 테잎이랑 씨디사는 재미도 쏠쏠했고, 그때는 음반가게도 동네에 많았는데, 누구 음반 나왔어요? 물어보고 기다리고
정말 듀스는 지금 노래를 들어봐도 질리지 않고, 참 좋은것 같아요.수능 전날 김성재 죽었다는 소리듣고 정말 벙쩠었죠.
살아있다면 지금 제 생각에는 멋진 배우가 되어있을것 같아요.
그 스타일 정말 죽였으니까요.
듀스가 메고 나왔던 검은 백팩이랑 엠엘비모자.
이때 엄청 유행했던것 같아요.
아. 그립네요. 그리고 모노의 넌언제나도 좋았지만 모자이크도 노래 좋았었는데
첫댓글 간만에 죽이는 자료네...짝짝짝
누가 요약 좀...
킹왕짱 박남정 덕분에 대거 남자댄스가수들이 벼르고 나타났다는 얘기.
업무시간에 싹다 봤습니다..감사합니다~
현도행님..
와 멋진 자료입니다
옛생각에 흐믓한 미소가 번지네요. 우리나라 가요계가 풍성하던 시절을 감수성 예민할 때 보냈던 저는 정말 행운아였군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다시 오지못할 아련한 황금기
저땐진짜 노래들을려고 찾아 다녔는데 지금은 쉽게 찾을 수 있어도 찾기 귀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