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4일 오늘의 역사
2021년 희망의 신학을 외치며 한국개신교 부흥을 주도한 조용기 목사 별세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병상에서 누나의 친구로부터 처음 복음을 접한 뒤 부산에서 미국 오순절교단인 '하나님의성회' 소속 켄 타이스 선교사를 만났고 폐결핵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면서 신학교 입학했다. 조용기 목사는 1958년 5월18일 고(故) 최자실 목사와 함께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천막 교회를 시작했다. 그의 노력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 1993년 교인수 70만명을 넘어서며 세계 최대의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 이르렀다. 그 후 성장을 거듭하면서 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 알려졌고, 1973년 9월 제10차 세계 오순절 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시아 국가가 주최한 첫 오순절 세계 대회였다.
여의도로 교회를 옮긴 뒤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져서 1979년 10만명, 1981년 20만명을 넘어섰다. 1976년에는 세계교회성장기구를 설립해 세계 교회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조 목사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했다
구소련 붕괴 후인 1992년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성회를 가졌고,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명이 운집, 두 나라에서 모두 개신교 사상 최대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조 목사는 1975년부터 2019년까지 71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다. 비행 여정으로 보면 지구를 120바퀴 이동한 셈이다.
1999년에는 비정부기구인 사단법인 선한사람들(현 굿피플)을 세워 국내 및 해외에서 인권 환경 보건 및 아동복지 등의 증진에 앞장섰으며 그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1996년에는 심장병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헌신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2005년에는 미국 뉴욕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더 패밀리 오브 맨 메달리온'을 수상, 2007년에는 미연방의회에서 '자랑스런 한국인 인증서'를 받았으며 2009년에는 캄보디아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2018년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문제 3,385일 만에 해결, 해고자 119명 2019년 6월 30일까지 복직시키기로 합의
2018년 개성공단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
2016년 이승엽 600홈런 기록(대구) 한국 14시즌 441홈런 일본 8시즌 159홈런
2015년 토니 애벗 호주 총리 당대표 선거에서 패배해 총리직 사임
2013년 허리케인 2개(잉그리드 미누엘) 멕시코 동시상륙 169명 사망, 이재민 4만3천여명
2009년 미국 배우 패트릭 스웨이지 별세
췌장암으로 투병해 온 미국 인기 배우 패트릭 스웨이지(57)가 2009년 9월 14일 숨졌다.
패트릭 스웨이지의 홍보 담당자 애닛 울프는 이날, “병마에 대해 20개월 동안 도전을 벌이던 스웨이지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공식 발표했다.
스웨이지는 지난해 3월 치명적인 암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은 뒤에도, 그의 아내와 드라마 시리즈인 ‘비스트’를 같이 찍는 등 활동을 계속해 왔다.
스웨이지는 올해 초 ABC 바바라 월터스와 인터뷰에서 “(암 판정을 받은 이후) 5년 동안 생존한다는 것은 너무 희망적인 생각”이라면서 “통계를 믿는다면 2년일 듯하다. 나는 치료법이 발견될 때까지 살고 싶다”고 말했다.
세 번이나 골든 글로브 수상 후보에 올랐던 스웨이지는 1987년 영화 ‘더티 댄싱’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1990년대 초에는 데미 무어와 함께 영화 ‘사랑과 영혼’에 출연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선보였다.
2008년 러시아 우랄산맥 중부서 여객기 추락 사망 88명
2006년 노무현 대통령 워싱턴에서 한미정상회담
2002년 중국 난징에서 최악의 독극물 사건 발생
중국 난징(南京)에서 쥐약 등 독극물이 든 음식을 먹고 학생·군인 등 80명 이상이 숨지는 중국 최대의 독극물 중독사건이 일어났다.
홍콩 싱다오(星島)일보는 “음식물을 먹은 중독자 수가 600여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사망자 수가 최소 80여명 선에서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부 인터넷 매체들은 목격자의 말을 인용해 사망자가 이미 100명을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현지 목격자들은 “14일 오전 7시를 전후해 장닝(江寧)구 탕산(湯山)진에 있는 허성위안(和盛園) 두부콩국 음식점에서 학생 등 시민 상당수가 음식을 사먹고 집단 중독 증세를 보였다”면서 “피해자들은 아침식사용으로 참깨빵과 두부콩국 등을 사먹고 눈과 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숨졌다”고 전했다. 사망자 대부분은 인근의 주어창(作廠)중학교 학생들과 건설 현장 인부들, 인근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포병학교 군인들이라고 신문들은 보도했다.
난징시 정부는 “음식 안에 사용이 금지된 강력한 쥐약이 들어 있었다”면서 “음식을 만드는 물에 독극물을 탄 것 같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투입 경위와 범인을 밝히지는 못했다. 싱다오일보는 현지 조사관들의 말을 인용, “이번 사건은 오랫동안 꾸민 원한에 따른 음모사건일 가능성이 크다”면서 “조사관원들은 해당 음식점 책임자들을 소환해 조사 중이지만, 정확한 원인과 사망자 수는 밝히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일부 홍콩 언론들은 “혐의자들은 이미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시 당국은 환자들을 난징군구(軍區)종합병원 등 10개 병원으로 분산 수용하느라 큰 혼란을 겪었다. 신화통신은 14일 오후 9시(한국시각 14일 오후 10시)까지 41명이 숨졌다고 보도한 이후 공식 피해자 수를 밝히지 않았으며,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사회불안을 우려, 즉시 공안부에 범인 색출을 지시했다.
2000년 소설가 황순원씨 사망
소설가 황순원옹이 2000년 9월 14일 오전 서울 사당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85세였다.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으로 평가돼 온 황씨는 단편 ‘별’(1941) ‘독짓는 늙은이’(1950) ‘소나기’(1953) 등과 장편 ‘카인의 후예’(1954)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1964) 등 수십편에 이르는 명작을 남겼다. 1931년 시로 등단한 황옹은 그후 1982년 장편소설 ‘신들의 주사위’를 남길때까지 거의 50여 년동안 주옥같은 명편들로 한국 문학사에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 ‘소나기’는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백미로서 교과서에도 실려 독자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황순원은 1915년 평남 대동에서 출생,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해방 직후 서울고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7년부터 경희대에서 오랫동안 후학을 가르쳤다.
1998년 중국 양상곤 전 국가주석 사망
1994년 철학자 칼 포퍼 사망
`열린사회`를 주창한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가 1994년 9월 14일 사망했다. 포퍼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계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받았으나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7년 뉴질랜드로 망명했다가 1946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가 평생을 사회정의에 천착한 철학자로 평가받은 것은 어린시절 도시의 빈민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부터였다. 1918년부터는 빈대학에서, 1925년부터는 빈교육연구소에서 심리, 문학, 철학 등에 대해서 공부하고 1928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대학에서 논리학, 과학방법론을 강의했다.
그는 최초의 저서 `탐구의 논리`(1934)에서, 과학(지식)은 합리적인 가설의 제기와 그 반증(비판)을 통하여 시행착오적으로 성장한다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인식론을 제창했다. `실수로부터 배움`으로써 진리에 접근한다는 포퍼의 생각은 현대의 지적세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주요저서로는 `탐구의 논리` `추측과 반박` `객관적 지식` `자유사회의 철학과 그 논적` 등이 있다.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평화협정 조인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여러 지역을 포함하며, 대체로 서쪽의 지중해에서 동쪽의 요르단강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지대, 남쪽으로는 가자지구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20세기에 들어 지금까지 유대인과 아랍의 민족운동 진영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맹의 결정에 따라 이 지역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놓였다.
영국의 통치는 1948년까지 계속되었으나 다수 민족인 아랍인과 세력이 점점 커가는 유대민족 모두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UN) 총회에 팔레스타인문제를 넘기게 되었다.
UN총회에서는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에 아랍인 국가와 유대인 국가를 따로 세울 것을 제안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수립이 선포되면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영국 관리들도 철수하였다.
그후 이스라엘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주변 아랍국들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면서 벌어진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갈릴리 지방, 연안지역, 이집트 점령 가자지구 일부, 네게브 사막, 예루살렘 북서부지역을 포함해서 UN의 원래 분할안보다 50% 정도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72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이스라엘을 떠나 주변 아랍국가들에서 난민생활을 하게 되었다.
1979년 캠프데이비드협정이 조인되면서 규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1979~1982년에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되돌려주었으나 웨스트뱅크, 가자지구, 골란고원, 동예루살렘은 계속 점령하고 있다.
아랍연맹은 1974년 10월 모로코의 라바트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유일한 대표기구로 인정하였다.
PLO는 1969년 헌장에서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제거하고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지역 안에 이슬람교도, 그리스도교도, 유대교도 각각의 독립국가를 건설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1988년에는 이를 약간 수정하여 팔레스타인문제 해결을 위한 2개 국가 수립안, 즉 이스라엘과 공존하게 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안에 대해서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993년 9월 오늘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평화협정이 맺어져 가자와 웨스트뱅크 지역에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의 설립이 확정되었다.
1991년 남아공 평화협정 조인
흑인에 대한 백인정권의 차별정책으로 인종분쟁이 끊이지 않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1년 오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 지도자들은 유혈 정치분규를 끝내기 위한 평화협정에 조인합니다.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 민족회의 의장과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 그리고 망고수투 부델레지 인카르타 자유당 지도자 등 세사람이 평화협정 조인의 주인공입니다.
협정문에는 선동적 언동의 금지 정치폭력 문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법원의 설치등이 규정돼 있습니다.
1990년 미국서 사상 최초 유전자 이식수술 실시
1990년 이라크 군 쿠웨이트 주재 4개국 외국공관에 난입
1986년 김포공항 폭발물 테러사건 발생
서울아시안게임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1986년 9월 14일 서울 김포공항 국제선1층 청사밖 5번과 6번 출입문 사이의 철제쓰레기통에서 고성능 사제시한폭탄이 터져 전송객부부 등 일가족 4명과 공항관리공단 직원 등 모두 5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폭발참사가 발생했다.
치안당국의 조사 결과 고성능폭약인 '콤포지션4' 계열의 폭약과 시한장치가 철제쓰레기통에 숨겨져 있다 터졌으며 사망자들은 쓰레기 파편에 맞아 숨진 것으로 밝혔다.
경찰은 사건전후에 김포공항을 출입한 외국인 2백67명과 국내범행가능자 2만8천명, 인터폴을 통해 입수한 국제테러리스트의 입국여부, 공항주변부민 6천명, 국내폭발물 제조 판매 저장업소 1천7백71개소 및 시민제보 1백여건을 모두 조사했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 상황과 당시 국내외 정세를 분석해 볼 때 북한이 파견한 테러리스트 혹은 북한의 조종을 받은 국내외 테러리스트가 외국인의 왕래가 많은 한국의 관문인 김포 국제공항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차별하게 살상하여 한국의 치안상태가 극히 불안하다는 인상을 국제 사회에 심어 줌으로써 서울에서 열리는 '86 아시안 게임 참가를 저지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제전인 서울 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저질러진 사건으로 여겨졌다
1984년 대한적십자사, 북한적십자사의 수재물자 제의 수락
1982년 그레이스 켈리 사망
미국 영화배우 출신의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가 전날 막내 스테파니 공주와 함께 타고 가던 승용차가 산길에서 전복되는 바람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던 중 1982년 9월 14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53세였다.
1928년 11월 12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켈리는 18세 때 배우가 되기 위해 뉴욕의 아메리카 연극아카데미에서 연기수업을 마쳤다.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서 단역으로 출연 중 영화기획자의 눈에 들어 1951년 영화 `14시간`으로 은막에 데뷔했다. 그가 주목받는 여배우가 된 것은 `하이눈`에서 게리 쿠퍼 상대역인 약혼녀 `아미`역을 맡은 후부터였다. 이후 `다이얼 M을 돌려다` `상류사회` 등에 출연했고 1954년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56년 4월 모나코왕 레이니에왕과의 결혼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왕비로 변신했다. 생전에 3명의 자녀 캐롤란인 공주, 알버트 왕자, 스테파니 공주를 두었다.
1982년 7회 대한민국음악제 개막
1981년 프랑스, 중성자탄 개발계획 발표
1979년 한국-적도기니 국교 수립
1977년 남대문시장에 대화재(재산피해 20억 추정)
서울의 남대문시장은 조선 태종 때 조정에서 남대문 부근에 점포를 지어 지정된 상인들에게 빌려준 데서 유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후 1608년에 세공(歲貢)․ 세곡(稅穀)을 보관하고 베와 돈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 부근에 설치됨에 따라 남대문 밖 칠패(七牌)에는 자연스럽게 객사와 주막,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12년 조선농업주식회사의 송병준을 설립자로 지금의 남창동 일대에 남대문시장이 생겼으며, 1954년 큰 화재 이후 현대식 건물로 그 면모가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1977년 다시 대화재가 발생하게 된다.
1974년 인도-파키스탄 공동성명 발표(국교정상화)
1973년 국무회의, 해병대 해체하는 국군조직법 개정안 의결
1972년 남북적십자 2차 본회담, 3개항 합의서 교환
1972년 제1회 한-일 축구정기전 열림(일본 도쿄)
1972년 서독-폴란드 외교관계 회복
1969년 영동 호남지방 홍수(-9.15) 사망 353명 실종 55명 이재민 7만여 명
1969년 공화당, 3선개헌안 변칙통과
공화당이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50분경 야당이 농성중인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제3별관 특별회의실에서 제6차 본회의를 소집, 3선개헌안을 전격적으로 변칙통과시켰다.
개헌안 표결은 공화당 소속의원을 비롯한 개헌안 발의 서명자 1백18명 전원과 무소속의 김용태 의원 등 3명과 정우회의 양찬우 의원 등 모두 1백22명이 참석, 참석의원 전원이 가표를 던져 개헌통과선 1백14표를 넘었다. 이에 따라 이효상 의장은 개헌안을 가결했음을 선포했다.
공화당의 3선개헌안은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개헌안을 처리하는 절차법안인 국민투표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함에 따라 10월 17일 개헌찬반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 총 유권자 1천5백4만8천9백25명 중 77.1%가 투표를 했고 이중 65.1%가 찬성, 개헌을 확정했다.
1968년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덕수궁 대한문 22m 후진
1966년 한미 평화봉사단지위협정 체결
1962년 브라질 내각총사퇴
1962년 동부 터키서 지진으로 10만명 이상의 이재민 발생
1961년 육군참모차장 포섭 기도사건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 설립(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설(1960) : OPEC는 석유수출국기구의 약칭으로 1960 년 9 월, 바그다드에서 열린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등 5 대 석유수출국회의에서 그 창립을 결정하였다.
이 기구의 창립목적은 석유가격의 안정을 위해 국제석유회사와 생산 할당에 관해 협의하고 국제석유회사로부터 보다 많은 이권료를 획득하기위해 석유수출국이 공동교섭에 임하도록 하는데 있다.
2000년 현재 가맹국은 11 개국이며, 기구산하기관으로는 총회, 이사회, 사무국 등이 있다.
1959년 소련 무인탐사위성 루나2호 발사. 인류최초 달착륙
1956년 국무회의, 국군의 날(10월 1일) 제정
1955년 대구매일신문에 괴청년 40여명 난입
대구매일신문에 괴청년 40여명이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1955년 9월 13일 대구매일신문 주필인 최석채씨가 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 때문이었다.
이 사설은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인 임병직 대사가 대구를 방문할 때 당국이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환영한 처사를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사설이 나간 다음날인 9월 14일 국민회 경북도지부 총무차장 김민과 자유당 경북도 검찰부장 홍영섭은 괴청년 40여명을 이끌고 신문사에 난입, 인쇄시설을 파괴하고 발송중인 신문 뭉치를 탈취해갔다. 이날 밤 신문사를 ‘이적단체’로,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단체의 의거’로 규정하는 성명서가 삐라로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당국은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들며 가해자들을 가려내지 않은채 오히려 최석채 주필을 ‘이적행위’로 몰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9월 17일 전격 구속했으나 1956년 5월 8일 대법원의 무죄확정판결로 일단락되었다. 해방 후 필화(筆禍)사건이 대법원까지 가서 판결을 받은 첫 사례였다.
1950년 트루만, 대일(對日)강화교류 개시를 지시
1949년 목포형무소 파옥사건. 350여명 탈출
1949년 중국공산당, 장개석 정부에 8개항 최후통첩(평화안) 제시
1948년 공출제수 폐지. 양곡매입법안 국무회 통과
1948년 경부선서 해방호 열차 충돌 사망 26명(미군 25 한국인 1) 부상 70명
1946년 프랑스와 월남, 정치-군사협상 체결
1945년 맥아더장군, 일본점령 특별성명
1945년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 결성
1941년 독일군, 레닌그라드 교외에 돌입
1938년 독일-만주 통상협정 조인
1937년 총독부 군수동원법 실시 결정
1936년 노벨의학상 받은 소련 생리학자 파블로프 세상 떠남
1930년 의열단원 박재혁 부산경찰서 폭파 꾀함
1927년 이사도라 덩컨 사망
‘20세기 모던 댄스의 어머니’로 불리는 미국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이 1927년 9월 14일 급사했다. 사인(死因)인 즉, 그녀의 목에 걸고 있던 스카프가 승용차 뒷바퀴에 걸리는 바람에 질식사한 것. 덩컨은 무용인들이 수백년 동안 무대에서 벗어 본 적이 없는 토슈즈를 벗고 무대에 오른 ‘맨발’의 무용인으로 유명하다. ‘맨발의 이사도라’는 전통무용을 배격하고 창작무용을 창조적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무용가이다.
187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덩컨은 어려서 제도교육을 팽개치고 독학으로 무용공부를 시작했다. 22세 때인 1899년 시카고에서 데뷔했지만, 이때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녀가 이름을 떨친 것은 20세 들어서였고,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였다. 그녀는 자기 예술의 영감을 자연과 그리스 예술에서 찾았고 그때까지 무용에 도입되지 않았던 음악작품을 무용에 도입했다.
그녀는 러시아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녀의 영향으로 현대 발레를 시도한 최초의 발레 단체 ‘발레 뤼스’가 결성된 곳도 러시아였고, 그녀의 남편 에세닌 역시 러시아인이었다. 이때까지 이사도라 덩컨은 자신의 예술에서 그리고 사랑에서 확실한 성공을 거두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사생활은 지극히 불행했다. 남편 에세닌은 자살로, 두 아이는 사고로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죽음 역시 그녀의 삶만큼이나 극적으로 장식돼 불우한 그녀의 인생의 점을 찍었다.
1926년 덴마크 천문학자 드레이어 사망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1895년 좌천동에서 태어나 사립육영학교 (현 부산진국민학교)를 거쳐서 부산공립상업 학교 (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1915년에 수료하였다.
그 후 부산에서 무역사을 경영하던 중 1917년 사업차 상해에 건너갔다가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권유로 1920년 9월 국내의 일본관청을 파괴할 사명을 띠고 부산에 도착한 후 14일 아침 중국인 행상으로 가장하여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또와 면담 중 폭탄을 투척하여 그에게 중상을 입혔고, 자신도 상처를 입고 체포되었다.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단식투쟁으로 사형집행전 27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13년 과테말라의 대통령(1951-54) 아르벤스 출생
1910년 작가 이상 출생
1910년 한성신문(일제가 황성신문의 이름을 강제로 바꿈) 폐간
1901년 월리엄 매킨리 미국 25대 대통령, 한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 루즈벨트 계승
1901년 미국 데오도르 루즈벨트, 제26대 대통령에 취임
1852년 영국 정치가 웰링턴 세상 떠남
1847년 미국, 멕시코시티 점령
1847년 9월 14일 미국 원정군이 멕시코시티를 함락했다.
미국과 멕시코 간의 분쟁은 1845년 일어난 미국의 텍사스 합병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자국의 영토를 빼앗긴 멕시코인들은 분개했고, 이후 국경선 문제로 인한 분쟁이 계속되었다.
멕시코가 주장하는 국경선이 뉴에이서스 강인 데 반해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주장했다.
미국이 텍사스를 합병한 직후인 1845년 3월 멕시코는 미국과의 관계를 끊었다.
같은 해 9월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는 텍사스 국경 분쟁을 협상하고, 멕시코 정부가 미국 시민에게 진 빚 문제를 해결하며 최고 3,000만 달러에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를 사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멕시코시티에 비밀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미국의 사절을 만나주지도 않자, 이를 빌미로 포크 대통령은 1846년 1월 분쟁지역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1846년 4월 25일 멕시코 군대가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와 테일러군을 공격하자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미국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1848년 2월 2일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이 맺어졌으며, 미국은 리오그란데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130㎢가 넘는 멕시코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 모스크바 입성
1812년9월14일,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함락시키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추운 겨울이 닥치기 전에 승전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이 모스크바 시를 전소시키는 바람에 나폴레옹 군대는 굶주림과 추위 속에 기진맥진한 가운데 러시아 기병대에 쫓겨 결국 3만명 정도의 패잔병만 간신히 파리로 되돌아가는 비참한 패배를 경험했다.
1812년 가을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편안하게 지내기 위하여 12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그 곳에 진주했다.
첫 눈이 10월 30일에 내렸는데 예년에 비해 3주나 일찍 내린 것이 었다.
나폴레옹은 실망에 차 곧 퇴각을 서둘러 폴란드에 있는 여러 우호적인 도시에 겨울 진영을 설치할 것을 결정했다.
그것은 1천 마일이 넘는 황량하고 쓸쓸한 지역을 횡단하는 행군이었다.
1주일 후 그 거대한 군대는 완전히 모스크바를 벗어났다.
그 들의 적들은 경계가 허술한 곳마다 그들을 기습했다.
명령과 훈련은 망각되었고 계급은 무너졌으며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생 존을 위하여 다투었다.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이 발에 밟혔고, 수백필의 말들이 식용으로 살해되었다.
1791년 프랑스 최초의 헌법인 `1791년 헌법` 제정
1769년 독일 지리학자 훔볼트 출생
1321년 이탈리아 시인 단테 외교사절로 베네치아 다녀오다 세상 떠남
1265년 피렌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볼로냐 대학에서 배움 1300년 이웃나라인 생 제미냐노의 특파대사, 통령의 한 사람, 피렌체의 정치적 혼란 와중에 반대파로부터 영구추방당하기도 함
단테가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으로 사모한 베아트리아체의 영혼에 이끌려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의 과정을 읊은 『신곡』 ‘지옥편’은 1304-1308년, ‘연옥편’은 1308-1313년, ‘천국편’은 그의 생애 마지막 7년 동안에 완성
81년 제11대 로마제국 황제 도미티아누스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