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평통보는 앞면에 공통적으로 ‘상평통보’라는 글자가 들어가지만, 뒷면에는 분류와 쓰임새에 따라 새겨지는 글자가 각기 달랐다. 뒷면의 글자는 동전의 품질을 보증하거나 불법 주조를 방지할 목적에서 천자문, 오행, 숫자, 부호 등으로 표시하였다.
천자문 순 : 상평통보 당이전 가운데 뒷면의 글자가 천자문(千字文)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 천자문 순 상평통보는 각 주전소에 따라 분류되고 서체와 크기에 의해서도 세분된다.
천자문 순 주조가 허가된 중앙관서는 어영청, 훈련도감, 호조, 선혜청, 총융청 5개 관영이었으며, 지방은 평안감영, 함경감영, 경상감영, 전라감영, 개성감영 등이었다. 대개 주전소마다 ‘천(天)’ 자에서 ‘왕(往)’ 자까지 20가지 내외의 천자문 순 상평통보를 발행했으나, 평안감영에서는 ‘천(天)’ 자에서 ‘수(水)’ 자까지 모두 44가지로 가장 많은 종류의 천자문 순 상평통보를 발행하였다.
한편 천자문은 중국 남조시대 양나라의 주흥사(週興嗣, 470~521)가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필적을 모아 글을 만든 것으로, 사언고시(四言古詩) 250구의 각기 다른 1,000개의 글자로 되어 있다.
숫자 순 : 당일전과 당오전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동전 뒷면 상단에는 주조처가, 하단이나 좌우측에는 통상적으로 ‘일(一)’ 부터 ‘십(十)’ 까지의 숫자가 새겨져 있다.
부호 순 : 해와 달, 별을 부호로 정하여 뒷면에 새겨넣고 여러 가지 형태로 분류하였다. 해는 ○, 달은 , 별은 ● 등의 부호로 표시했고, 그밖에 이중일표(二重日標), 괘표(卦標) 등도 표시했다.
오행 순 : 영조 연간에 발행한 상평통보 중형전이 여기에 해당한다. 뒷면에 오행(五行)인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 중의 한 글자가 표시되어 있다. 혹은 주조 연도인 임(壬, 영조 28년)자가 새겨지기도 했다. 중형전에 오행의 글자를 표시한 것은 주전소의 증설로 인한 무분별한 주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상평통보는 조선 후기 약 200여 년 동안 활발하게 유통되었는데, 이를 발행한 주전소만 해도 전국적으로 50여 군데를 헤아린다. 상평통보의 뒷면 상단에 새겨진 글자는 바로 이 주전소를 나타낸 것이다.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살펴보면, 호조의 경우 ‘호(戶)’ 자를, 평안감영의 경우 ‘평(平)’ 자를 쓰는 등 글자로 주조처를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어서 경기도 강화관리영에서 주조한 엽전에는 ‘심(沁)’ 자가 새겨져 있고, 경기도 광주관리영 주조 엽전에는 ‘기(圻)’ 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임금이 타고 다니는 수레와 말, 마구 등의 관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사복시(司僕寺)에서 주조한 엽전에는 창 밝은 ‘경(冏)’ 자 등이 새겨지기도 했다.
당시 주전소로는 중앙에 사복시, 경리청, 공조, 균역청, 금위영, 무비사, 무위영, 창덕궁, 정초청, 총융청, 양향청, 호조, 훈련도감, 상평청, 병조, 비변사, 선혜청, 수어청, 어영청, 전환국, 진휼청 등이 있었고, 지방에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감영과 관리영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주전소의 모형도
조선 후기의 화폐를 대표하는 상평통보(常平通寶)는 발행시기에 따라 이름과 크기가 조금씩 다르며 그 종류도 3,000여 종에 이른다. 상평통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전국적으로 유통된 화폐라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최초 발행된 17세기 말 이후부터 서양의 근대 화폐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약 200여 년 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렸다.
초주단자전(初鑄單字錢)은 1678년에 발행된 상평통보를 말한다. 형태를 보면 앞면에 ‘상평통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아무 글자도 없거나 상부에 각 동전 제조 관영의 약호가 표시되어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뒷면에 두 글자가 들어간 것도 있는데, 상부에는 제조 관영의 약호가, 하부에는 천자문이나 오행(五行)의 한 글자, 좌우에는 숫자나 부호로 된 주전번호를 표시하였다. 특히 오행이 표시된 오행전은 복술가나 민간의 복전으로 애용되기도 하였다. 상평통보 1문의 중량은 1전 2푼(4.5그램)이고 화폐가치는 은 1냥을 기준으로 400문이었다(4문=쌀 1되).
한편 상평통보가 등장하게 된 사회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관 주도의 수공업이 무너지면서 자율적인 수공업이 발달해 물자의 교환이 빈번해졌다는 점, 특히 1645년 회령 지방을 시초로 국제적인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화폐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묘ㆍ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가 재정이 황폐해지자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상평통보는 호조, 상평청, 어영청, 훈련도감 등의 중앙 관서에서만 주조하였다. 그러나 상평통보를 제조하는 데 따른 원료의 부족, 시설의 미비, 기술의 미숙 등으로 주조가 활발하지 못하여 동전의 필요성이 높은 평안도와 전라도의 감영과 병영에서 동전을 주조하도록 하여 유통을 촉진시켰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폐인 상평통보의 기본 형태
상평통보 초주단자전 1678년에 발행되었다.
상평통보 초주단자전이 발행된 다음해인 1679년(숙종 5년) 9월에 조정에서는 상평통보의 규격을 변경하여 발행하였다.
당이전(當二錢)은 절이전(折二錢)이라고도 하며, 초주단자전보다 형태가 큰 대형전으로 중량이 2전 5푼(8.375그램)이었고, 교환율도 은 1냥당 상평통보 100문으로 변경되었다. 당이전은 뒷면 아래쪽에 ‘이(二)’자를 넣어 초주단자전과 구별했다. 초기에는 초주단자전과 함께 유통되었으나 점차로 초주단자전이 자취를 감추자 당이전이 상평통보를 대표하게 되었다.
당이전은 조정에서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을 증대하면서 1689년에는 은 1냥 당 800문이 될 정도로 가치가 폭락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추포를 방출하여 동전을 환수하는 한편, 1680년(숙종 6년)에는 지방 관서의 동전 주조를 금지시켰다. 이후 기간과 양을 한정하는 등 부분적인 제한을 두었지만, 1697년 과잉주조의 문제 등으로 중단될 때까지 상평통보는 꾸준히 발행되었다. 이후 상평통보는 발행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1731년(영조 7년) 빈민구제 자금 조달과 화폐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호조와 진휼청 등에서 다시 주조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당이전은 중앙에서 발행된 것으로 진휼청의 진자전, 병조의 병자전, 공조의 공자전, 정초청의 초자전, 훈련도감의 훈자전, 비변사의 비자전 등이 있다. 지방에서 발행된 것으로는 경기감영의 경자전, 함경감영의 함자전, 충청감영의 충자전, 경상감영의 상자전, 수원관리영의 수자전, 광주관리영의 기자전 등으로 팔도 전역의 주전소에서 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이전의 구분은 주전소를 나타내는 약자로 알 수 있는데, 호조는 ‘호(戶)’, 병조는 ‘병(兵)’, 훈련도감은 ‘훈(訓)’, 어영청은 ‘영(營)’, 강원감영은 ‘강(江)’과 같이 한 글자로 나타냈다. 그러나 예외도 있어 경기도의 광주관리영은 한양의 사방천리 안의 땅이란 뜻의 ‘기(圻)’자, 강화관리영은 물이름 ‘심(沁)’자 등과 같이 전혀 다른 약자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상평통보 초주단자전보다 규격을 크게 하여 발행한 당이전 위로부터 각각 원주관리영, 어영청, 전라감영에서 주조한 것이다.
한편 상평통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엽전(葉錢)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왔다. 이것은 개수만 헤아리면 되는 개수화폐로서 사람들이 계산을 할 때 한 닢, 두 닢으로 부른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엽전의 유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제작과정부터 알아야만 한다.
상평통보는 금속활자와 마찬가지로 나뭇가지의 원리를 이용해 대량생산을 했다. 우선 형틀을 만들 때 서로 연결이 되도록 골을 파서 통로를 만들어놓고 쇳물을 부으면 한꺼번에 여러 개가 주조되었다. 쇳물이 굳어지면 하나씩 떼어내어 연마하는데, 떼어내기 전의 모습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 같았기 때문에 엽전이라고 불렸다 한다. 또한 상평통보의 상평이란 말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을 줄인 것으로 “항상 평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의 화폐단위는 1관(貫)=10량(兩)=100전(錢)=1,000문(文)의 10진법을 사용했으며, 엽전(상평통보) 한 닢은 1문이었으며, 기본 단위는 량(兩)으로 하였다.
영조 때 발행된 것으로 예전에 비해 크기가 축소된 형태이다. 이보다 작은 것으로는 1807년(순조 7년)에 발행된 소형전이 있다. 상평통보 중형전(中型錢)은 1752년(영조 28년)부터 중앙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3개 부서와 지방의 통영에서 만들어졌다. 액면가치는 당이전과 동일했지만, 중량이 약 1전 7푼으로 당이전보다 줄어들었고 크기도 축소되었다. 또한 1757년에는 중량이 1전 2푼으로 더욱 줄었다. 이와 같이 크기와 중량이 축소된 데에는 주전의 원료가 부족했고, 한편으로 주조를 통한 이익을 높이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형전의 뒷면에는 천자문 이외에 오행인 금(金), 목(木), 토(土), 수(水), 화(火) 중의 한 글자가 표시되어 있는 것과 주조 연도인 임(任, 영조 28년)자가 표시된 것도 있다. 이와 같은 표시들은 수요가 늘어난 만큼 발생할 수 있는 불법 주조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중량과 크기에서 당이전보다 줄어든 상평통보 중형전 1752년에 발행된 것들이다.
한편 조선시대 상평통보의 유통은 화폐가 포화나 곡화 같은 물품화폐를 대신하여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평통보의 보편적인 사용은 경제, 사회적으로도 점차 많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먼저 농업사회에서 상업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고리대금업이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일반 국민 역시 다양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어 지배계층의 특권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대원군이 발행한 상평통보 가운데 액면가치가 가장 큰 고액전으로 뒷면에 ‘호대당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상평통보 1문의 100개와 맞먹는다 하여 당백전(當百錢)이라고 불렀지만, 실질가치는 5~6배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종전까지의 화폐가 물품화폐의 성격을 이어받아 화폐의 소재가치로 액면금액을 정해 발행하였기 때문이다. 가령 엽전 1개가 1문이면 엽전 2개 분량의 재료로 만든 돈은 2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소재가치와 명목가치가 일치되었을 때 화폐로서의 신용이 안정되는데, 당백전은 이런 면에서 사람들의 불신을 재촉하게 되었다. 당백전이 발행되었을 때, 국민들은 상평통보 100개에 해당하는 당백전 1개가 실질적으로 상평통보 5~6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했다. 또한 이와 같은 소재가치와 명목가치의 불일치는 불법 주조가 성행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당백전은 불과 6개월 사이에 1천 6백만 냥이 발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상평통보 총 유통량이 1천만 냥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당백전이 발행되자 상평통보는 시중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물가가 폭등하였다. 당백전이 처음 발행된 1866(고종 3년)에는 쌀 1섬에 7~8냥 하던 것이 불과 1~2년 만에 44~45냥으로 폭등해, 일반 국민의 생활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1868년 10월 당백전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유통되고 있던 당백전은 상평통보 1문전과 교환되었으며 환수된 당백전은 철재로 전용되었다.
당백전과 같은 고액권의 발행 논의는 이전에도 화폐부족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있었지만 대원군에 의해 처음 실현된 것이다.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270여 년간 방치되어오던 경복궁을 중건해 왕실의 위엄을 되찾고, 쇄국정책을 위한 국방비 조달과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당백전은 불과 2년 만에 사용이 금지되는 단명한 화폐로 사라졌고,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감을 더욱 깊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원군이 발행한 상평통보 가운데 최고액권인 당백전 뒷면에 ‘호대당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883년(고종 20년)에 서울과 지방의 주전소에서 발행되었다. 상평통보의 5배에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당오전(當五錢)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소재가치는 2배에 불과했다. 또한 실제 유통에서는 상평통보 1개에 당오전 5개로 교환되어 당백전과 함께 물가폭등을 야기한 대표적인 악전으로 꼽힌다. 관리들은 이를 악용해 국민들로부터 상평통보로 세금을 받아서 국가에는 당오전으로 납부하는 방법으로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1866년에 이미 당백전의 실패를 겪었으면서도 당오전 발행을 강행한 것은 당시 극도로 나빠진 국가의 재정 때문이었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민씨(閔氏) 정권은 한정된 주조원료를 가지고 보다 많은 유통가치를 만들어 궁핍에 허덕이는 국가재정에 충당할 목적으로 당오전을 주조하여 발행하기로 한 것이다.
조정은 당오전의 주요 원료인 동을 생산하기 위해 동광 개발에 주력하였다. 당시 동광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 24개소인데 1883년 규모가 큰 갑산동광에서는 160톤, 후창광산에서는 100톤의 동을 채굴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내의 동광 개발을 위해 일본의 기술과 자금을 도입하였으며, 그래도 모자라는 원료는 일본 등지에서 수입하였다.
한편 당시 유통되던 일본 화폐와의 교환비율도 3배 이상 하락하였다. 당오전이 유통되기 이전에는 1 대 2.5이던 것이 당오전 유통 이후 1 대 8까지 하락하였다. 또한 일본인이 한국인과 합작하여 불법적으로 주전에 개입하는 등 당오전 발행 이후 화폐의 유통질서는 극도로 문란하게 되었다.
당백전과 더불어 물가폭등의 주범이 되었던 당오전 1883년 강화관리영에서 주조한 것이다.
1892년부터 1894년까지 평양에서 주조된 조악한 동전이다. 조정은 1890년 평양에 전환국(典圜局)을 개설하고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에게 주전사업을 명하였다. 민병석은 질이 나쁘고 조잡하며, 형태가 작고 뒷면에 ‘평(平)’ 자가 찍힌 당오전을 대량 주조하였는데, 이것을 이른바 평양전이라고 불렀다. 민병석은 이 평양전을 시중에 유통시킴으로써 엄청난 폭리를 취하였다.
특히 평양전은 소량의 구리에 아연, 주석, 철 등을 혼합하여 주조한 후 그 표면을 동색이 나도록 도금하여 소재가치는 종래의 1문전 상평통보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품질이 좋은 당오전 1개를 녹이면 평양전 5개를 주조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는 당오전과 1 대 1이었으나 그보다 낮게 평가되었기 때문에 유통질서가 극도로 혼란해졌다. 그리하여 물가가 폭등하는 등 국민의 생활고가 더욱 심해졌지만 당시 평양주전소는 일본으로부터 동 83만 2천 근을 수입하는 등 평양전의 주조를 멈추지 않았다. 평양전은 국민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발행되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해 평양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감에 따라 비로소 주조가 정지되었다.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에 의해 주조된 평양전 2년여 동안 발행되어 유통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다.
첫댓글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림이 모두 배꼽으로 표기되어서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