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뵈는 모래언덕에 해당화 붉게 피면…
비조봉~운주봉 1km는 섬 양쪽을 볼 수 있는 조망능선
떠나 있음은 우리의 가슴에 그리움을 낳는다. 섬은 그리움이다. 한겨울 푸른 바다 위에 하얀 눈을 뒤집어쓴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은 뭍과 떨어져 있어 그리움이 더한 것이 아니다. 때론 아무도 없는 눈 쌓인 해변에서 홀로 낙조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들은 가슴 미어지는 그리움을 앓는다.
덕을 쌓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덕적도(德積島). 온 섬의 80%를 소나무가 덮고 있어 솔향기 가득한 섬. 한여름에는 넘실대는 푸른 바다와 어울리며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그래서 누구나 다시 찾고 싶은 섬이다.
덕적도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해상에 위치해 있으며 해안선 길이가 37.6km다. 8개의 유인도와 34개의 무인도를 거느린 덕적군도(德積群島)중 가장 큰 섬이다. 덕적도라는 이름은 ‘큰물섬’이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물이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산세가 가파르고 임야가 대부분을 차지, 농경지는 전체 면적의 10% 미만에 불과해 주민 대부분이 바다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수백 년 노송 천여 그루 우거진 서포리
스마트호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오후 2시30분 덕적도를 향해 뱃머리를 돌린다. 이윽고 인천대교 밑을 지나 겨울바다를 가로지르며 쾌속으로 질주한다. 인천대교는 총연장 18.242km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긴 다리라고 하며 올 10월에 개통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토목공사의 기념비적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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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1932B71F4B42D47206)
- ▲ 산책로 노송과 비조봉.
맑고 푸른 하늘에 은빛 갈매기가 뱃전을 맴돌며 길잡이를 한다. 나는 갑판에 올라 멀어지는 항구를 바라보며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난다는 통쾌함과 미지의 곳으로 가 새로운 만남을 갖는다는 부푼 기대감으로 귓전을 스치는 겨울바람이 차가운 줄도 모른다. 오늘 따라 물결도 잔잔하여 고속 페리호는 제 속력을 내며 질주한다.
출발한 지 1시간. ‘덕적바다역’이라 쓰인 건물이 눈길을 끈다. 덕적도에는 며칠 전 20여 년 만의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슬레이트 지붕과 도로가에는 눈이 수북이 쌓였다. 고개를 넘어 면사무소를 찾았다. 덕적도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김신권씨(문화관광과 근무)는 다리에 깁스를 한 불편한 몸으로 덕적면 관광안내도를 건네주며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인다. 면사무소 앞 송림 속에는 덕적초중고교라는 명칭을 가진 학교가 있다. 한 학교에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있어 한 운동장에서 다같이 공을 차며 뛰놀고 공부하는, 이 섬의 유일한 학교다.
덕적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산으로 이루어졌다. 최고봉은 국수봉(314m)이지만 비조봉의 이름에 밀려 국수봉을 찾는 이가 그렇게 많지 않다. 종주산행은 서포리 해변에서 비조봉(292m)으로 올라 운주봉(231m)~기지국 철탑~국수봉~용담을 거쳐 갓수로봉까지 약 11km를 말굽형 산릉을 따라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해나간다. 대개 사람들은 밧지름 해변이나 서포리에서 비조봉을 오르거나, 면사무소가 있는 진리, 진말에서 운주봉을 거쳐 비조봉으로 오르는 코스를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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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벗개마을과 벗개방조제.
우리는 다음날 산행을 위해 서포리 민박집(그린비치)에 여장을 풀고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서포리 해변으로 낙조를 보러 나섰다. 300년 된 해송 1,000여 그루가 하늘로 솟구쳐 방풍림을 이루고 있다. 그 솔숲 아래 해당화 군락지가 있다. 지금은 겨울이라 가시 돋친 앙상한 가지뿐이다. 솔숲이 끝나는 곳에 눈 덮인 하얀 백사장, 그 너머로 붉은 태양이 영혼을 불태우며 하루를 마감하려 해안선으로 내려앉는다. 류수경 목사(위디 선교학교)는 황홀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열심이다.
낙조가 물든 황금물결 위로 조잘대며 앞을 다투어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나는 살며시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니 붉은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난다. 화가는 가슴에 5계절을 담고 있어 언제든 내 마음에 스케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눈을 감으니 해당화가 보이고, 눈을 뜨면 해송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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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쌓인 서포리 해안.
다음날 아침 6시30분에 헤드랜턴에 의지하여 발목까지 빠지는 설산의 비조봉을 오른다. 등산로 입구 간판에는 ‘서포리 산림욕장 등산로’ ‘비조봉 가는 길’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울창한 시누대 터널을 통과하여 작은 암봉에 올라서니 서포리의 고요한 아침 적막을 깨고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가파른 바위 계단을 오른다. 어둡고 많은 눈이 쌓여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조금 오르니 이마에 땀이 솟고 숨이 목까지 찬다. 어둠을 헤치고 눈에 미끄러지며 강한 새벽바람은 볼을 스치지만 일출시간을 맞추기 위해 숨가쁘게 비조봉으로 오른다.
정상에는 팔각의 비조정 서서 조망처 역할
출발한 지 40분 만에 서포리 해수욕장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10여 분을 더 오르니 새가 나는 형상을 닮았다는 비조봉(飛鳥峰·292m) 정상이다. 정상에는 팔각 비조정(飛鳥亭)이 있으며 망원경도 설치되어 있다. 정자 아래는 만고풍상을 이겨낸, 참으로 해학적으로 멋스럽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서쪽으로 손에 잡힐 듯 문갑도와 소야도가 흰 눈을 뒤집어쓰고 푸른 바다 위에 웅크리고 엎드려 있다.
우리는 구름을 헤치고 찬란하게 떠오르는 일출을 맞이하고 운주봉으로 향한다. 비조봉에서 내려서는 암릉길에는 눈과 얼음이 얼어붙어 아이젠을 착용해야 했다. 섬 산행을 얕잡아보고 스틱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 많이 후회스럽다. 비조봉에서 운주봉까지는 약 1km로 섬의 양쪽 모두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 좋은 능선길이다. 아침 햇살에 바다는 황금빛으로 물들고 건너다보이는 비조봉은 수줍은 새아씨 얼굴처럼 붉다. 아직은 햇살이 들지 않은 바닷가 어촌의 아침은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롭다.
쭉쭉 뻗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 밧줄을 동여매놓은 등산로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어느새 운주봉이다. 나무로 된 팻말에 ‘운주봉 231m’라고 씌어 있다. 정상에는 눈 쌓인 빈 의자가 지친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조망이 좋다. 동편으로는 이개마을과 목섬(똥섬)이 발아래 그림처럼 펼쳐지고, 서편의 서포리 마을도 함께 조망할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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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밧지름 해변의 비경.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운주봉의 암봉길을 어렵게 타고 넘으니 평평한 등산로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솔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간간히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그림 같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산보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걸으니 맨발지압코스 설치물이 나온다. 하늘을 가린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마련되어 있어 여름철 이곳을 찾는 이들이 산림욕을 하며 휴식을 취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사거리 안부를 지나 기지국 철탑 아래에 선다. 서포리에서 올려다보았던 그 웅장한 철탑이다.
철조망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이곳부터는 가파른 등산로에 작은 잡목이 우거지고 눈까지 쌓여 표시 리본이 없으면 등산로를 놓칠 수도 있겠다. 가끔씩 매달아 놓은 빨간 리본이 톡톡히 길잡이 노릇을 한다.
북쪽 사면을 밧줄을 잡고 내려서는데 눈이 발목을 덮는다. 한겨울 심설산행을 나온 기분이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니 통신탑은 작아 보이고 비조정은 아예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갑도 넘어 울도는 실루엣으로 나타나 한 폭의 수묵화 그대로다.
잡목지대를 통과하여 짐승의 족적 하나 없는 아무도 가지 않은 눈 쌓인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 걷는다. 눈 위에 발자국이 내 그림자와 함께 따라온다. 내가 곧게 가면 발자국도 곧게 따라오고, 내가 비틀거리면 따라온 발자국도 비틀거린다. 내 인생 삶의 족적을 뒤돌아보는 듯하다. 남은 삶에 덕을 쌓으며 올곧게 걸으라 말하는 듯하다.
이 계절에 남도 섬산에서 눈 쌓인 길이라니…
전파기지국(철탑)에서 2km를 나아가 눈쌓인 임도를 굽이굽이 돌아 내려서니 2차선 포장도로가 나온다. 벗개 마을에서 북리로 넘어가는 도로다. 지금은 눈이 많이 쌓여 통행이 불가능하지만 섬 일주 도로와 연결되는 도로다. 이곳에서 국수봉까지는 1km이고, 용담 갓수로봉까지는 아직 5.5km가 남았다. 4시에 떠나는 뱃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겠다.
이곳에는 도로 양편으로 비조봉과 국수봉으로 오르는 입구에 커다란 등산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국수봉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을 올라선다. 조망이 시원스럽다. 조망 좋은 곳에서 벗개 마을을 내려다본다. 덕적도에서는 가장 큰 들판이 있는 곳이다. 벗개 방조제를 쌓아 농경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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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내린 섬마을 촌가.
국수봉에 도착하니 우뚝 솟은 철탑에 철조망이 있어 정상은 오를 수 없다. 정상에는 당나라 소정방이 제를 올렸다는 제단이 있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이곳 이정표에는 바갓수로봉 4.45km, 비조봉 4.61km 으로 표시되어 있다.
철조망을 끼고 바갓수로봉 쪽으로 나아간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철탑이 있는 막사에서 개 짓는 소리가 요란하다.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한참을 걷다가 우리는 안부에서 우포 경로당이 있는 벗개마을로 하산했다.
서포리로 돌아와 소나무가 울창한 ‘서포리 웰빙산책로’를 다시 걷는다. 솔향과 노송들의 어우름이 자꾸 발길을 붙잡는다.
승합차를 타고 부두로 가던 중 송림과 백사장이 아름답다는 밧지름해변에 들렀다. 해변 입구 갈대숲 우거진 양지바른 곳에 선 아담한 슬레이트 집은 어느 가난한 화가의 화실 같아 마음에 가벼운 충동을 느낀다.
송림이 우거지고 갯벌과 백사장이 조화를 잘 이룬 이곳의 해변은 한여름이면 숭어와 우럭, 농어까지 무더기로 잡히고 가을이 오면 망둥어 뛰노는 모습이 가관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겨울바다에는 사람도 고기도 없다. 발자국 하나 없는 눈 쌓인 백사장은 공연이 끝난 뒷자리처럼 그렇게 공허할 뿐이다.
나는 덕적도를 떠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솔향기 가득한 바람 부는 모래언덕에 해당화 붉게 피면 고운 님 손목 꼭 잡고 다시 찾아오마고.
/ 그림·글 곽원주 cafe.daum.net/ksejung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