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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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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목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루카 19장 41-44절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눈물의 의미>
눈물에도 여러 종류의 눈물이 있습니다.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 회한의 눈물, 감동의 눈물, 악어의 눈물, 환희의 눈물, 행복의 눈물...
오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중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과연 어떤 눈물이었을까요?
저 같았으면 아마 기쁨의 눈물,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당시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 예수님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존경의 표시로 입고 있던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지나가실 길 앞에 깔았습니다. 군중들의 손에는 환영의 표시로 푸른 올리브가지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군중들의 박수와 환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 사이를 예수님께서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같이 입성하고 있던 제자들은 예기치 못했던 군중들의 환호에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제자들의 얼굴 위로 기쁨의 눈물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눈에서는 슬픔의 눈물, 탄식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환호와 박수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있는 인간의 사악함을 예견하셨습니다. 지금은 저토록 환호하지만 불과 몇 시간 뒤에 던지게 될 싸늘한 조소와 돌팔매질을 미리 보셨습니다.
멀리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도시 예루살렘, 그 이면에 감추어져있는 부정부패와 타락과 권모술수를 보셨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과 교만함, 그로 인한 철저한 파괴와 멸망을 명확히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눈물, 그것은 대체로 솔직합니다. 가짜로 눈물 흘리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눈물은 진실, 진정성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에 감추어진 진실, 진심을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걸까요? 나를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은 오늘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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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김수만 신부-
이제 며칠 지나면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라고 할 수 있는 대림 시기가 다가옵니다. 시간이 유수 같음을 새삼 느끼면서 ‘나는 그동안 사제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반성하고 다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정말 바쁜 사람은 바쁘다고 하지 않는 법인데, 실제로는 제 부족함과 나태함 때문에 하느님의 일로 정말 바쁘게 살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이런 저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얼마나 슬퍼하실까?’ 생각하니 그 부끄러움 더해져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 다시 방향을 돌리는 회개를 위해, 그렇게 좋은 말씀과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변화하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정반대로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상황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백성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연민의 눈물에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을 통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내모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신앙인의 모습과 습관이 필요합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도 계속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똑같은 되풀이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알면서도 내 방식, 내 틀, 내 습관대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분명 예수님은 그 옛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신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복음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어려움과 갈등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의 많은 잘못된 방식과 욕심, 습관을 없애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의 편이십니다. 제1독서의 ‘마타티아스’처럼 우리도 항구한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 굳건한 믿음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청해야겠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눈물을 우리가 닦아드릴 차례입니다. 오늘은 그 누군가에게 눈물이 아닌, 기쁨으로 다가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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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사의 정점
-안문기 신부-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신 곳입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기록된 모든 것들을 완성하신 곳이지요. 이 구원의
역사를 위해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러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며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환영하는 인파를 보시면서도 곧 그들이 당신을 박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이룩한 이스라엘의 영원한 도읍입니다. 유다인들은
이 평화의 도시를 하느님의 구원이 약속된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두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죽음과 부활과
승천, 즉 그리스도의 영광이며, 둘째 단계는 교회의 시작, 즉 성령강림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세상의 복음화 기간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신앙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와 연결됩니다. 우리가 지상의 예루살렘에 살면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곳은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세사의 정점에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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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김찬선신부-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말씀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눈물을 흘리시며 하신 탄식입니다.
루카 복음에 따르면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첫 복음 선포를 하신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전도 여행을 하십니다.
말하자면 저 땅 끝 해남에서 전도 여행을 시작하여
전국을 돌고 돌아 서울을 향해 가시는데,
지금은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남태령에 와 계신 것입니다.
저는 자주 밤 등산을 합니다.
안산을 가든 북한산을 가든 꼭대기를 오르면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데 그 화려함이 눈부셔 감탄이 나옵니다.
어제도 저녁을 먹고 북악의 팔각정을 올랐습니다.
구름도 없고
찬 공기 덕분에 공해도 없어서 야경이 참으로 아름다웠고
일찍 연말 기분을 내는 조명들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묵상을 하면서 올랐기 때문인지
그 화려함 뒤에 있는 서울의 어두움이 떠올랐습니다.
30여 곳에 이르는 뉴타운 개발로 거리로 내몰리는 가난한 사람들.
그 대표적인 희생자들인 용산의 희생자들과 그 남은 가족들.
얼마 전 용산의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에 갔을 때 본
그들의 눈물과 그들의 저주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이들의 눈물에 대한 눈물이요,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이들에 대한 눈물입니다.
예수님께는 눈물을 흘리는 이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나
똑같이 안타깝고 애처롭고 그래서 그들 모두에 대해 우십니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은 내용이 다릅니다.
눈물을 흘리는 이에 대한 눈물은 그들의 고통에 대한 눈물이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들에 대한 눈물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눈물입니다.
죄지은 사람과 그의 악에 대해서까지 우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사람도 죄인도 죄악에 대해서 분노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죄악에 대해서도 분노할 수 없고
죄인에 대해 눈물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눈물을 흘리는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진복 선언이 얘기하듯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웃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의 눈물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눈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을 보는 눈이 가린 예루살렘이 너무 안타깝다 하십니다.
없는 자를 악이 바치게 만드는 가진 자의 죄악도 문제지만
악이 바쳐 악에 대해 악으로 되갚는 없는 자의 저주도 문젭니다.
사랑이 없을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이나
다 평화의 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에 눈이 가려 평화의 길을 모르건
분노에 눈이 가려 평화의 길을 모르건
그들은 모두 평화의 길을 모르고
결국 서로를 파멸하는 길을 갈 것입니다.
이 아침, 저는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다른 사람을 악 바치게 하고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지.
그리고 오늘 이 아침, 희망합니다.
이런 저에 대해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제가 되기를.
모든 이가 평화를 이루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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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화 얻는 길
-전삼용신부-
성당을 찾는 대부분의 예비신자들은 성당을 찾는 첫 번째 이유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살면서 무언가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이 분들은 믿음만이 마음의 위안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 분들 마음에 그런 의지를 심어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는 성령님의 열매, 즉 하느님의 선물이지 자기 스스로 얻어 누릴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며 아말렉을 멸하고 어떤 살아있는 것들도 남겨놓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말씀을 어기고 왕도 살려두고 살진 짐승들은 죽이지 않고 전리품으로 가지고 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주님이 계속 그 안에 머물러 계실 수 없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그에게서 나가니 악령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사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1사무 16, 14).
왕이란 모든 권력을 지닌 사람의 상징으로서 아무 두려움 없는 당당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악령이 들어오니 불안함에 떨게 되고 사실 왕권은 이제 다윗에게 넘어갑니다. 사무엘은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미래의 왕으로 점지합니다.
진리란 아주 단순합니다. 죄를 지으면 성령이 그에게서 빠져나가고 그러면 성령의 열매들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인데 이런 모든 것들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왕적 당당함과 평화’까지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으면서 왕직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데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는 사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게서 그 힘을 빼앗고 다시 그 맘에 불안과 두려움만을 남겨놓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안녕을 추구하였습니다. 그 평화를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모르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통해서가 아닌 스스로 평화를 구하는 사람은 그 평화를 잃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사제직, 왕직을 부여하시는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최후는 불안과 멸망뿐입니다. 사울과 같이 똑같은 전철을 뒤밟는 것이고 우리 개인 모두도 그리스도를 잃고는 어떤 평화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 봤는지, 혹은 누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시장에서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온갖 안 좋은 상상을 하며 동네를 다 뒤졌는데 바로 처음 잃어버렸던 곳에 태연이 쪼그려 앉아서 흙으로 장난을 치고 있더랍니다.
보통은 부모가 보이지 않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날 텐데, 그래서 어쩌면 찾기가 더 어려워질 텐데, 그 아이는 ‘여기 있으면 당연히 찾으러 오겠지!’ 하며 태연하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삼일 동안 태연하게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셉과 마리아는 피가 마르는 고통으로 아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어머니, 제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하느님을 왕으로 둔 아들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도 하느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와 마음의 평화를 주십사 매우 오래 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으로 ‘나는 주님의 자녀다. 그분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니 두려울 것이 없다.’해도 좀처럼 그 마음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커졌고 기도를 해도 그 때 뿐이었습니다. 이런 극도의 불안함은 한 3년 정도 지속된 것 같습니다. 신학교 들어와서 믿음이 더 강해졌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이런 불안함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땐 머리론 하느님을 받아들였지만 마음으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머리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굳은 신뢰입니다. 그런 믿음이 생기자 다음부터는 그런 고통스러운 불안함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살아가면서 항상 대범하고 평화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불안함을 통해서 더 평화를 절실히 원하게 될 수 있고 조금씩 믿음을 증가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이렇게 인사합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인사말은 당신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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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인해 더욱 굳어진 마따디아의 믿음
- 경규봉 신부-
안티오코스 왕은 유대인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기 위하여 부하들을 모데인 시로 보냈다. 그 도시에는 마따디아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느님께 충실한 사제였다. 그는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었으며, 하느님과의 계약과 율법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율법의 수호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훌륭하고 힘 있는 지도자였다.
그 도시에서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의 지시에 따라 배교를 하고 우상을 숭배했지만, 마따디아와 그 가족 및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코 왕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왕의 부하들은 마따디아에게 왕명에 복종하여 우상을 섬긴다면 왕의 총애를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마따디아는 그러한 설득과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충실히 지켰다. 이런 와중에 어떤 유대인이 왕명에 따라 우상의 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치려고 하자 마따디아는 율법에 대한 열성이 북받쳐 올라 그를 죽여 버렸다.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기라고 말하는 왕의 부하까지도 죽이고 우상의 제단을 헐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성과 계약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을 불러 모은 후, 모든 재산을 버려둔 채, 산으로 피해 갔다. 정의와 율법에 따라 살려는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 또한 도시를 떠나 정착할 곳을 찾아갔다.
캄캄한 밤일수록 작은 별빛도 더욱 밝게 빛나듯이 악 가운데에 있을 때에 선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병고는 없어져야할 악이지만 병고를 통해서 병을 찾고 치료할 수 있다. 박해는 없어야 할 악이지만, 박해를 통해서 참된 신앙은 드러나고 널리 전파되며, 순교성인이 탄생한다. 하느님은 악을 통해서도 선을 끌어내시며 당신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신다.
안티오코스 왕의 박해로 인하여 마따디아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신앙은 더욱 굳세어졌다. 그들은 산중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겠지만, 하느님의 군사로서 우상을 타파하며 율법을 지키는 수호자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들로 인하여 배교자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것이고, 신앙이 약한 자들이 더욱 굳은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도시의 우상과 이교 제단이 제거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정화될 것이다.
우리가 때로 고통을 당하고, 여러 가지 악으로 인하여 신음할 때, 이러한 것들이 우리 자신의 문제를 찾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됨을 생각하자. 고통과 악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굳세어지며 우리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됨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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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나의 눈물
-상지종신부-
오늘 새벽 미사 중에 복음을 읽으면서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쳐들어와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다....."
마치도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며 한탄하시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2000년 후에 멀리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보시며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마수가 우리를 할퀴고간 것이 엊그제, 이제 조금 나아졌나 싶더니 이제는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성마저, 인간적인 정마저 송두리째 제물로 바치라고 달려드는 형국입니다. 함께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너 혼자만이라도 살아나라고 유혹합니다. 조그마한 사각 링안에 힘없는 사람들을 집어넣고 죽음의 경기를 부축이며 이를 즐기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분노를 넘어 인간적인 측은함을 가지게 됩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결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아름답고 소중한 인간으로 남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원수들과 타협하며 오히려 자신의 백성을 볼모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정부 당국자들과 자본가들의 몸부림이 안쓰럽게 다가옵니다. 함께 살아가는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하고,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사랑담긴 애절한 외침을 외면하고 죽음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일부터 사상 초유의 한국전력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최대의 국가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산업의 민영화를 반대하는 노동조합과 전력산업의 효율성 저하라는 미명하에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에게 전력산업을 제물로 상납하려는 정부 당국과 회사 측과의 한판 대결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만약 대결이 벌어진다면 그 다음 어떤 과정이 이어질지 불보듯 뻔합니다. 불상사를 막아야 할텐데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합니다.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타까운 현실 앞에서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의 길, 공존의 길을 걷기보다는 오히려 분열과 공멸의 길을 걸으려는 가진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의 눈물,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드러내 놓고 평화를, 정의를, 생명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자책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미약한 힘이나마 내어 놓았더라면, 우리 신앙인들이 조금만 더 복음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이 사회를 복음화시키기 위하여 헌신했다면 지금의 이러한 최악의 상황은 어느정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이 자리에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한탄의 눈물, 안타까움의 눈물을 거두시고 예루살렘 한 가운데를 향하여 걸어가신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비록 이 길이 죽음의 길이지만 곧 부활의 길, 참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의 외침을 쏟아내시는 예수님의 절규를 나의 것으로,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나 몰라라 외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외쳐야 하겠습니다. 이 외침의 반향이 아주 미미하다 할 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힘닿는데까지 외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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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그리스도의 평화
-김종섭 신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 그러나 긴장과 분쟁이 끝이 없는 곳,
그러기에 평화를 더욱 갈망하는 예루살렘입니다.
지난해 예루살렘에서 4개월 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평화’를
묵상하도록 허락된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봉쇄하는
장벽은 높아만가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 한길에서는 어린이들이
전쟁놀이에 한창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평화는 불투명하고 요원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다인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의 어린이들은 한 교실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종교, 문화를 배우며
함께 사는 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분명 평화의 길을 걷는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한 노력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공원에서 조그마한 한 어린이가 비둘기에게 빵을 떼어서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늘 세계 평화만 생각하는 아저씨가 그 광경을 보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지요.
“얘야, 지금 아프리카 같은 나라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다.
그런데, 너는 사람들도 못 먹는 빵을 새한테 던져주고 있구나.”
그러나 그 어린이는 보다 더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저는 그렇게 먼 데까지는 빵을 던질 수가 없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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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김찬선신부-
기뻐서 우는 울음.
슬퍼서 우는 울음.
불쌍해서 우는 울음.
감동해서 우는 울음.
또 어떤 울음이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울음에는 여러 가지 울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울음은 여러 가지이지만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감정이 존재를 압도할 때에야 나오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울음은 순수하고
존재를 정화하는 힘이 있으며
그래서 심지어는 참회이고 사랑입니다.
이성의 건조함으로 열정을 끄지 않고
의지의 억압으로 존재가 위축되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건
남에 대해서건
감성이 눈물을 따라 해야 할 참회와 사랑을 다 하는 것입니다.
죄 지은 자신에 대해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은 진실한 참회요
어린 자녀를 홀로 남겨두고 죽는 어미와 그 아이를 보고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은 순수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복음서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곳 한 곳 뿐입니다.
닥쳐올 재난과 예루살렘의 운명이 안타까워 눈물 흘리시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마냥 태평스러운,
그래서 회개와 평화의 기회를 놓치는 예루살렘이 더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시는 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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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보다는 협력
- 임영인 신부-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한 것들이 환경의 장애를 넘어서 살아가는 것을 두고 다윈이 그렇게 말했답니다. 사람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식량과 땅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인간을 경쟁자로 또는 적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있는 힘을 다해 그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윈의 주장처럼 우리 시대는 그렇게 싸워 살아남는 자들만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윈 비평가인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다른 이야기를 하더군요. 크로포트킨은 “인간은 한정된 세상에서 제한된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거친 환경과 싸우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연자원이 거의 없고 인구가 밀집된 영국에 살았던 다윈으로서는 삶을 ‘적자생존’의 원리를 통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 크로포트킨은 대지가 광활하고 인구가 드문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협력’의 교훈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윈의 말처럼 ‘적자생존’의 원리를 통해 살아간다면 살아남기야 하겠지만 얼마나 외롭고 불안한 삶이 되겠습니까?
진정으로 ‘가치 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웃과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며 서로를 보호하고 도움을 주는 데 참여할 줄 아는 사람이지 약자 위에 힘을 행사하는 강한 사람이나 겨우내 도와줄 이웃도 없이 혼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상호협력은 경쟁보다 더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진정한 평화는 경쟁보다는 협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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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라
-장재봉신부-
오늘 예루살렘 도성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울었습니다.
일깨우고 가르쳐도 소용없는 세상
알려주고 소리쳐도 받아들이지 않는 예루살렘의 종말이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날,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뵈었던 사도 요한도
슬피 울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바라본 세상이 암울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도 우울합니다.
신문을 읽어도
뉴스를 들어도 속 시원한 소식을 듣기 어렵습니다.
울고 싶다하고
울 수밖에 없다하며
한숨을 내쉬고
희망이 사라졌다는 경고음만 요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언제나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역행하고
세상 때문에 울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입니다.
어려울 때 위로를 얻고
힘이 들 때에도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이 평안을 알았더라면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안다면
세상은 한탄하며 허덕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둡습니다.
때문에 우리 안에 심어진 복음의 빛으로 녹일 때입니다.
캄캄합니다.
때문에 복음의 빛을 비출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외롭고 괴로운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 줄 시기입니다.
울고 있는 사람이
참으로 기쁠 수 있도록 사랑의 웃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게 물음표 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평화로운지’를 묻도록 해야 하니까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느낌표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사랑은 저렇게 행복한 것이구나!’라고
느끼게 해 줄 수 있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작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되어
‘울지 마라’고 달래는 마음이 되고
‘함께 가자’고 내미는 손길이 될 때,
우리 예수님 울음이
‘뚝’ 그칠 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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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라고 외치며 걸었던 길의 종착점인 예루살렘에 흘린 눈물
-정강엽 신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e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속한 사회는 철저히 개개인들의 권력관계에 근거해서 서 있다. 이 권력의 구조망에 이미 얽혀 있는 개인들은 철저히 순종적인 개체들로 양육된다. 그리고 권력 구조는 바로 이 개체들에 의해 그 맹목적 순종이 확대된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어떤 사회의 부정의나 환각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그 사회의 지도자보다는 오히려 그 사회의 대중들이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사회의 어떤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일종의 방관일 수도 있고 체념일 수도 있겠다.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점으로 가득찬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의 문제점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깨어있도록 해서 그 문제점을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에서 만나는 예수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분의 생애는 바로 무지몽매한 우리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삶이었던 것이고 그 깨우침의 근본은 하느님을 우리 삶안에 제대로 세우는 것이었기에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깨어나라고 외치며 걸었던 길의 종착점인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수가 본 것은 여전히 ‘무지’로 가득찬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그들의 집단환각 상태에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린다. 너무나 기가 막힌 현실에 아마 입이 열리지 않았던 것같다.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너무 기가 막힘에 눈물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현대에 서울이나 워싱톤에 예수가 다시 오셨다고 했을 때 우리의 삶의 양상을 보시면 과연 예수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예루살렘보다 더 심각한 실어증에 걸리시지 않았을까?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무지를 위해서 기도하실 수 있으셨다: “아버지…. 사실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루가 23:34).
과연 지금 서울에서 워싱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실어증을 풀어드릴 수 있는 깨어남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예루살렘의 언덕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그분의 눈물어린 마음을 염두에 둘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던지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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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람의 길
-서현승 신부-
‘사람’이셨던 예수님의 성격을 이따금 상상해보곤 합니다.
적어도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적들을 통해서
상상해볼 수 있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성품이나 성격은 참으로 자유롭게 사셨던
분임을 금방 알 수 있을 듯싶습니다. 특히, 좋고 싫은 것이 분명했던, 똑 부러지는성격이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너무도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악의 세력에는 단호히 저주를 퍼부으면서까지 거부하셨던 모습들을 봅니다. 성전에서의 장사치들을 쫓아내는 장면이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노라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악’을 싫어하셨는지
잘 드러납니다. 또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운명을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과 단죄의 말씀에 가깝습니다만,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을 통해
드러나듯 예루살렘의 운명을 너무도 안타까워하신 당신의 심경을 드러낸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 하느님이시지만 참된 사람이기도 하셨던 예수님을
예루살렘은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 이름이 의미하는 ‘평화의 길’을 가지 못하는
그곳에서 예수님은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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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알았더라면···
-정애경 수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신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는 예루살렘,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이 장차 당하게 될 재난을 예고하신다.
우리는 왜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아차리지 못할까? 그것은 아마도 좀 더 편안하게 잘살고 싶은 욕심으로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는 이 사회는 현재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린다.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킬까? 내년에 경기는 좀 풀릴까? 월급은 얼마나 오를까? 앞으로 닥쳐올 세상살이를 걱정하느라 지금 이 시간에 주어진 구원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과거를 후회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예전에 이렇게 했더라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었는데, 진작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건강에 좀 더 신경 썼더라면 등등 세상의 것을 후회하는 데 많은 시간을 빼앗겨 현재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 ‘오늘 하루를 주님의 뜻대로 잘 살아야지.’ 하면서도 잠재되어 있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의 후회는 결국 내 발목을 붙잡아 오늘을 잘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 시간에 찾아오신 주님을 외면하면서 ‘언젠가는 오늘보다 나아지겠지.’ 하며 자신을 위로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어진 것은 오늘이란 현재뿐이다. 내일 이 시간에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야고 4,14ㄱ)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그러므로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오늘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히브 3,7-8)고 하셨다. 그동안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삶의 방향을 주님께로 바꾸고,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롭게 되도록 하고,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면 지금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 된다. 오늘 나를 찾아오신 주님과 함께 지낸다면, 오늘 하루를 주님의 마음으로 열심히 산다면 그 하루하루가 모여 나의 일생이 행복해지고, 마침내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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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편안함에 젖어 이웃의 아픔에 눈감고 살아가는 우리
-최금자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개최되었던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EIDF)의 ‘생명과 평화의 아시아’ 코너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여러 편을 소개했습니다. 그 중에서 ‘작은 새’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이라크 전쟁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습니다. 작품은 미국의 무차별 폭격으로 이라크의 선량한 시민들이, 특히 어린이들이 폭격으로 또는 불발탄을 가지고 놀다가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폭격으로 세 아이를 잃고 절규하는 아버지, 불발탄인지 모르고 만졌다가 한쪽 팔을 잃은 아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파편이 눈동자에 박혀 실명 위기에 놓여 있는 딸의 수술을 기다리는 아버지, 자식의 고통을 대신 겪는 것이 낫다고 절규하는 부모들. 이라크 사람들은 ‘언제까지 이 전쟁으로 신음해야 하는지, 평화로운 시절이 다시 올 수는 있는지’라며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가난한 백성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예루살렘이 원수들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될 것임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평화의 길을 멀리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삼는 이 시대의 강대국들에게, 또한 일상의 편안함에 젖어 이웃의 아픔에 눈감고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주님의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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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백광현 신부-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오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오늘뿐이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도 오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이라는 현재를 쾌락을 향유하는 유일한 시간으로
이해하라는 뜻의 쾌락주의와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오늘이라는 현재는 구원을 체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이기기 위한
메시아의 유일한 무기는 당신이 지녔던 가난과 겸손과 겸양뿐입니다. 이것은
참된 평화 안에서 충만하게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평화가
평화의 도시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참된 평화의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세상이 평화의 길인
당신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를 한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교만함과
아집으로 가득 찬 세상은 예수님을 참된 겸손과 평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도성 파괴에 대한 예언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도성인 우리 자신도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평화의 길을 걸어가지 못할 때 원수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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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영준 신부-
혹시 최근에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주일 저녁마다 눈물을 지을 일이 생깁니다.
주일 저녁에 해외 입양아와 친부모가 상봉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그렇게도 눈물이 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동생을 입양했기 때문에 그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족이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미사는 퉁퉁 부운 눈으로 미사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우실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비유라는 방법을 통해 쉽게 설명해 주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잘못되는 자녀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우시는 부모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단을 요구하는 표징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해주십니다.
특히 이방인도 아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람들,
더욱이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 사람들이 잘못된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셨겠습니까?
예수님의 눈물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어린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부러 쉽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을 잡고,
결국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모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이 아니라
그 말씀에 감화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하는 단순한 신앙인의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옛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저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세속의 탐욕에만 젖어 살아간다면, 예수님은 그 옛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듯이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 눈에 눈물 대신 웃음꽃을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성심에 눈물이 아닌 웃음을 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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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뚝!
-장재봉 신부-
지난 주일, 자신의 소명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았던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났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모두 이루시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오늘 그것을 뗄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사도 요한은 그 좋은 하늘 나라에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울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그 자격을 갖추셨다”고 한 원로가 위로합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우리 눈물을 닦아주시는 곳이라는 걸 이사야 예언자는 벌써 옛날 옛적에 말씀하셨지요.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이사 25,8).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약속과 말씀은 꼭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멋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눈물은 예수님 덕분에 멈출 수 있었는데, 예수님 눈물은 어떻게 멈춰드릴 수 있을까요? 어린양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받으시니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저마다 수금과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바쳐드렸습니다. 그 귀한 금 대접에는 우리의 기도가 가득 담겨 있다고 하지요?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도 모자람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당신 사랑으로 빚으신 우리의 기도를 이토록 귀하게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시던 우리 예수님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할 수가 있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가 힘이 있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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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시선으로
-이재화 신부-
교구청 관리국에서 일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세속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하게는 사제로서 익숙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어떤 가치관으로 일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강론 중에 교우들을 향해서는 너무나 쉽게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큰소리로 말했지만 막상 일을 하면서는 세상 논리가 더 크게 보이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호소하면 주교님은 항상 “필요하다면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방식으로 복음 정신으로 일합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주교님께서 현실 감각이 떨어져 쉽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할수록 그 말씀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평화(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하느님의 길’이 아닌 ‘세상의 길’을 선택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예수님은 분명히 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다양한 길을 보여주며 이것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고 설득력 있게 속삭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그 속삭임에 이끌려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세상의 길’로 걸어가곤 합니다. 그 길의 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고자 하는 결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당신 ‘평화(구원)의 길’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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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길
-이회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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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윤경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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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카 19:41-44]은 예루살렘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장차 당할 재앙을 내다보시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는 탄식의 말씀을 들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토록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은혜를 내리셨지만 그 사정을 외면하는 결과가 어떠한 비극으로 끝나는 가가 드러나 있다.(예루살렘의 뜻 : 평화의 도시, 유일신을 믿는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는 도시, 유대교, 그리스도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이슬람교 등, 유대인, 아랍민족의 공존 등).
이것은 또한, 예수께서 지상에 대한 엄격한 심판자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의 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여러 번 몸소 방문하시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시지 않았다면,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눈물을 흘리시면서 까지 장차 당할 멸망을 슬퍼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 교훈이 있다.
1)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벌주기를 더디 하시고 오랫동안 참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였고, 하느님이 보낸 자들을 돌로 쳐죽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마침내 자기 아들까지 보내주시어,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일러주었지만, 이를 거절하는 예루살렘의 죄를 마음 아파하시며 우시기까지 하시는 모습을 볼 때, 오늘의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외면하는 우리를 향해서도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
2) 예수님의 사랑의 호소를 볼 수 있다 : 예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강제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호소를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호소를 받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엄숙한 책임으로 그의 종말에 가서 나타나고 있다면 주님의 호소에 내 마음의 문을 얼마나 열어놓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3) 복음의 이야기는 인간 스스로 하느님을 알고도 외면하는 죄의 고의성을 드러내고 있다 : 사람의 마음의 문은 외부에서 열 수 있는 손잡이가 없음으로 안에서 열지 않으면 안돼는 것인데 사람들은 말씀과 기적들을 통해서 간곡히 호소하시는 예수님을 마음의 문을 닫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4) 결국 그리스도를 고의로 배척한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그때부터 40년이 지난 기원 후 70년(로마의 티투스장군에 의해)에 말씀대로 폐허가 되는 재앙을 당하는 역사적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호소를 거절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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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당신에게 평화 있기를
-이기양 신부-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경우를 몇 군데 볼 수가 있습니다. 친하게 지냈던 라자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는 대목이 있고(요한11,35), 잡히시기 전날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시는 장면도(마태26,38)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예루살렘 도시를 보시며 한탄의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19,42)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그 순간에도 예루살렘은 무척 잘 꾸며지고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겉모습뿐이었고 이미 하느님을 떠나서 한 걸음 한 걸음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으셨지요.
예수님의 통찰력대로 예루살렘은 기원 후 70년 경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서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멸망의 과정 중에 백만 명 이상의 유다인들이 학살을 당하였으며,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태24,2)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건물이란 건물은 모조리 무너지고 말았지요. 겨우 성전 벽의 일부분만이 남아 한 때의 영화를 전해 주고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19,42)
물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평화, ‘샬롬(Shalom)’을 뜻합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의 평화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 ‘팍스(Pax)’였습니다. 무력으로 내리 누르고 힘으로 강제하여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예루살렘은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메시아 역시 로마와 같은 무력으로 자기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고 메시아인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바라고 고집했습니다. 로마를 쳐부수고 로마보다 더 큰 힘으로 자기 민족만의 평화를 염원했기에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하느님의 평화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곧 폐허가 될 성전 건물이 안타까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곧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유다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유다인들이 결국에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이지요. 실제로 열두 지파로 나뉘어져 있던 이스라엘은 다윗왕을 맞아 통일 왕국을 이루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번영을 누리고 태평성대를 이어갔지만 솔로몬왕 이후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왕국이 분열되어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멸망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살이를 하고 있던 바빌론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지요. 그리하여 전해져 온 생명과도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으고 정리하는데 그것이 ‘성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몇백 년이 지나지 않아서 다시 안타까운 길을 가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신 그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70년 경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1948년 지금의 자리를 찾기까지 약 2500년이라는 긴 기간을 안타까운 광야에서 망국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보다 세상이 주는 평화를 그리워했던 결과는 이렇게 큰 시련과 멸망의 아픔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비단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즈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여기저기에서도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했을 때와 세상이 주는 평화를 원했을 때의 결과는 천지차이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알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께 <성경 쓰기>, <신심서적 100권 읽기>, <기도 학교>, <이웃돕기> 등 많은 방법들을 제시했고, 그 방법을 잘 따라와 맛을 들인 분들이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였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거듭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 쓰기를 하면서 주어진 삶이 고맙고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는 체험을 했던 기억들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심서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을 때의 넘치는 감사, 기도 안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기에 거기에 머무르기를 갈망했지요. 또, 이웃돕기를 통해서 아홉 개 구역 전 신자들이 그동안 체험했던 보이지 않은 하느님 사랑을 이웃돕기를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욕망을 채우려고 애쓰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만 다른 것들에 매달리게 되지요. 돈이나 자식, 건강이나 외모 등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런 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태웁니다. 돌고 돌아 돈이라는 말처럼 돈은 내 주머니에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말지요. 거기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자식이나 건강, 외모도 마찬가지이지요.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젊음을 지켜 보려고 기대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자식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때가 되면 어린 새가 어미의 둥지를 떠나듯이 애지중지 키우던 자식도 떠나고 빈자리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 따라 변해가는 세상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시대가 이리도 불안하고 힘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줄 수 없는 것에서 평화를 고대하고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가 무력으로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갈망했던 것과 같지요. 그러나 그런 거짓 평화는 결국 무력으로 망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 안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갈증도, 상처도, 고립도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신자이면서도 거짓 평화에 연연해 한다면 오늘 예수님의 안타까운 눈물이 그 사람에게도 그대로 해당될 것입니다.
참 평화는 주님 안에 있으며 오시는 주님을 고대할 때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한탄하셨던 것은 참 평화를 가지고 오셨지만 유다인들의 관심이 다른 데에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처형하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유다인들은 2500년이 넘게 시련과 광야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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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길
-이찬홍 신부-
복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단순히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바라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시는 눈물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마음에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성전 파괴에 의해 심각한 피해, 재난, 생명을 잃는 그 무시무시한 재앙에 힘들어할 사람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목숨과도 같은 하느님의 성전이 파괴될 위험이 다가 왔는데도, 그 무사 안일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는 그 무디어진 마음에 안타까워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실제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얼마 되지 않아, 곧 70년경에 멸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이 패망한 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이 파괴되어 의지할 곳 없어 가슴아파하는 심경을 노래한 시편이 있습니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위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놓고서
우리를 잡아 온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 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고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위의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지내면서 불렀던 노래로서 시편 137편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루살렘에 살았을 때에는 그 특별함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예언자들이 ‘회개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예루살렘이 망한다.’ 라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온갖 불의와 우상 숭배, 타락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외면하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네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항상 지켜 주실 것이라는 거짓 예언자들의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결국 그리하여 그들은 예루살렘의 함락이라는, 바빌론 유배라는 비극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예루살렘의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오죽했으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너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고, 내 오른 손이 말라버릴 것이다”하고 말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정말 소중한 곳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전이요,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요, 마음의 고향입니다. 이렇게 소중하고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임에도... 막상 예루살렘 안에서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루살렘의 의미와 고귀함을 온 마음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이 패망해 버린 후에, ‘아 하느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버리다니,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경배를 드릴 때는 참 좋았는데... 왜, 거짓 예언자들의 말만 믿고 그리 안일하게 살아갔는지...’ 라는 반성을 하였지만... 그토록 시편 137편을 읊었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패망을 예견하시며 눈물을 흘리시지만.. 이런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아 그러지 말아야 했었는데...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깨달았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는 ‘아 옛날이여,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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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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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엘리자벳 수도자를 위하여 화살기도 드리겠습니다. ~
오늘의 말씀을 새기며 묵상에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