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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을 어떻게 쓸것인가
수필의 종류
수필이라면 크게 중수필과 경수필 두가지로 나누고 있다.
중수필은 주로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는 론리적이고 객관적인 수필, 비개성적인것으로 비평적 수필, 과학적 수필과 같은것을 말한다.
중수필은 현재 연변문단에서는
아침마다 강변을 산책하는
“이런 시당국에는 돈벼락이나 쏟아져라”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조명하면서 예리한 필체로 질타했다고 해야 할것이다.
중수필과 같은 경우에는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며 그래서 민감한 작품으로서 아무나 쉽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중수필과 달리 경수필은 우리 문단에서 흔히 다루는 작품이다.
경수필에는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을 소재로 가볍게 쓴 수필로서 감성적, 주관적, 개인적, 정서적인 특징을 지니는 신변잡기를 말한다.
경수필인 경우에는 흔히 감정과 정서로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예술적인 표현을 결부하여 문학적인 차원에로 이끌어내는 글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쉽게 말하면 경수필은 정서적인 글이며 작은 이야기에서 받은 큰 감동과 느낌,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정화되여 나온 거짓 없는 감성을 적어내는 글이다.
우리가 흔히 생활중에서, 혹은 사업을 하면서 받은 사건들에서 받은 느낌들을 적고 있다.
경수필에는 다시 서정수필과 서사수필로 나뉘고 있지만 흔히 쓰는 수필은 서사수필이기에 서사수필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수필을 써본 이라면 누구나 수필은 진실해야 한다는것은 알고 있을것이다.
수필이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것들을 담담한 필체로 적은 글이다. 그런 느낌이나 체험에는 거짓이 없다. 허나 오늘날 적지 않은 수필들을 보면 문장의 솔직함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수필들이 많다. 수필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기 먼저 자기 자신에 얼마나 솔직했는지를 돌아보는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수필은 우선 작가 자신과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과 대화하는데 무슨 거짓이 필요할가?
자신의 솔직한 감정한 감정은 감추고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하여 수필을 쓴다면 그 수필이 언어가 아무리 아름답고 짜임이 잘 되였다고 해도 그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에 솔직하지 못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수필을 쓴다면 우리 독자들은 그런 글을 읽기보다는 차라리 초등학교 교과서를 읽는것이 더 편할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들은 대개 보면 사회의 윤리나 도덕에 틀을 맞추는 글이니 교과서처럼 따분하기만 하여 좀처럼 읽혀지지 않는다.
고부사이의 불화로 집은 매일 초상난 집 같은데 시어머니에게 어떻게 잘해준다는 수필을 쓴다면 그건 남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감수할수 없으며 고부 사이의 사랑이란 어떤것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수필을 쓴다면 그 글을 읽는 이들은 금방 그 속에 숨겨진 거짓을 발견하게 되는것이다.
미모의 여인을 보고 남들은 어떻게 군침을 흘리는데 자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남자가 있다면 정인군자라고 우러러 보기보다는 차라리 그 사람을 보고 당신은 혹시 고자가 아니세요 하고 묻고 싶어진다. 여인을 갖고 싶은것은 남자의 본능인데 그 본능까지도 속이면서 살아야 하는것은 우리 사회가 용납하지 않고 도덕에 목을 매워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 결코 그것을 거부해서는 아니다. 한국의
일본의 작가 와타나베 쥰이치의 “위험한 사랑에 목숨을 걸어라”는 수필집에는 “연애를 하면 총명해진다”고 하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따져볼 때 인간은 연애를 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신경을 쓰고 연구하게 된다. 상대의 취미나 애호, 습관 등을 연구하게 된다. 상대에 대한 그런 정보가 있어야만 서로가 가까이 다가 설수 있는것이다. 음식습과는 작은 일 같지만 연애를 하려면 그것 하나 하나까지에도 익숙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소와 호랑이를 한 울에서 키우려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필을 쓰기 앞서 먼저 자신과 대화를 나누라고 권고 하고 싶다. 수필이란 솔직한 감정의 글이라면 자신과의 거짓없는 대화가 이루어질 때 그것이 좋은 글이 될수 있다.
2) 수필은 객적은 한담이 아니다.
수필은 솔직하게 적는 글이라고 하여 객적은 한담이나 늘여놓는 글은 아니다.
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 편집으로 사업할 때 연변의 어떤 수필회의 수필 20여편을 받은적이 있었다. 방송에세이 담당편집이였으니 방송국에 투고되는 수필은 우선 내가 심사하게 되여있었다. 헌데 유감이라면 수필이라고 커트는 멋지게 달았지만 그 많은 글에서 단 한편도 선정할수 없었다. 수필들을 보니 하나같이 객적은 한담이나 늘여 놓은 글들이였다. 자식을 사랑하여 어떻게 자신을 희생했다는 글이 아니면 남편에게 어떻게 정성을 바치고 어떻게 고생했다는 내용의 글들이였는데 문학적인 차원에 도달하지 못하고 객적은 한담으로 끝난 글들이였다.
동료들이 왜 그 수필들을 발표하지 않느냐고 묻기에 그때 대답한것은 단 한마디였다.
"수필은 아낙네의 넉두리나 객적은 한담이 아닙니다."
그후 우연한 기회에 그 수필회 회장과 한 자리에 앉게 되였는데 그때 수필에 대하여 말하면서 유감을 표시하는것이였다. 그래서 수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어보니 수필 이론들만 잔뜩 늘여 놓는것이였다. 그 중에서도 수필은 필가는대로 적는 자유로운 문체의 글인데 왜 수필이 안되는가고 질문해왔다.
그래서 한마디한것이 선생님은 남의 객적은 한담을 즐겨 듣습니까? 하고 반문했었다. 하지만 내 말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서는 수필의 기교와 소재의 선정보다는 책에서 읽은 이론들이 더 믿고 있는가 싶다.
수필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것들을 담담한 필체로 적는 글이지만 그렇다고 객적은 한담이나 늘여놓는 문체의 글은 아니다.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몇이나 있을가? 호랑이도 자기 새끼를 아낀다고 하는데 자식을 위하여 자신은 어떻게 굶주리고 헐벗으면서 잘 키웠다는 그런 글을 쓴다면 읽는 이들은 아무런 감동도 받을수 없다. 그것은 부모면 누구나 체험이 가능한 글이고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도 부모의 마음으로도 충분히 감수할수 있다.
수필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것을 적은 글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다가 한마디 더 하고 싶다. 자신만의 독특한 느낌을 적는 것이 수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모든 사람들이 체험하고 볼수는 있지만 꼭 같은 사물을 같은 시각, 같은 각도에서 보았다고 해도 사람마다의 감수가 틀린다. 그 다른 사람과 다르고 틀리는 느낌을 적어 낼 때 객적은 한담이 아닌 독자와의 공유를 운운할수 있는것이다.
흘러가는 구름을 세사람이 보았다면 그 세사람의 감수도 각각이다.
례를 들어서 1은 어려서 힘들게 자랐기에 따뜻한 이불 한채도 없었다면 그 구름을 따스한 이불로 생각할수도 있고 2는 어려서 솜사탕을 사달라고 떼를 쓰다가 부모님들에게 혼난 일 있어서 그것이 상처로 남아 있다면 솜사탕으로 보일수도 있고 3은 부모처자를 고향에 두고 왔다면 구름을 보면서 고향생각에 젖을수 있는것이다.
나만의 감수를 적는것이 수필이며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독자들도 그 글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공유할 때 수필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할수 있다.
3) 수필은 필 가는대로 적는 글이 아니다.
몇년전 고등학교로부터 수필 강의를 해달라는 청탁을 받은적이 있었다. 그때 고등학생들에게 무엇을 강의할가 고민하면서 수필에 대한 이론들을 찾아서 읽었다. 물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재들도 뒤지면서 수필에 대한 이론들을 읽는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발견한것이 하나같이 수필은 필 가는대로 적는 글이라는데 눈길을 멈췄다.
결국 그날 2시간 수필강의 제목은 "수필은 필 가는대로 적는 글이 아니다"라는 제목이였다.
형식과 내용의 구애를 받지 않고 쓰는것이 수필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필 가는대로 적는 글은 아니다. 필가는 대로 적는 글이라면 그것은 남필이나 낙서가 될뿐 결코 수필이 될수 없다. 수필도 문학의 한 쟝르인것 만큼 단순한 서술이 아닌 예술적인 가공이 필요한것이다.
아무리 소재가 새롭고 생신하다고 해도 수필을 쓰려면 기교가 필요한것이다. 단순한 서술로만 끝난다면 그건 문학적인 차원으로 볼때 아무런 가치도 없다. 수필도 문학의 한 쟝르라면 예술적인 가공과 승화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수필창작 기교인것이다.
생신한 바다고기로 매운탕을 끓이려면 바다고기만 있어서 되는것이 아니다. 매운탕의 맛을 낼수 있는 각종 양념과 재료가 필요하다. 다른 재료나 양념을 넣지 않고 그냥 냉수에 끓인다면 그건 매운탕이 아니며 고기의 참맛을 잃게 된다는것은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다.
수필창작도 매운탕을 끓이는것과 같다. 좋은 소재지만 문학적인 차원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건 객적은 한담에서 끝나버린다.
수필강의를 하면서 수필이란 자신의 느낌에 대한 표현이며 독자와 그 느낌을 공유하는 글이 수필이라고 강조했던것은 수필 창작에 대한 기교를 두고 한 말이였다.
같은 사물을 보았지만 어떤 사람의 말에는 남들이 흥취를 불러 일으키고 어떤 사람의 말은 아무런 취미도 느끼지 못하는것은 사물에 대한 표현 형식이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수필은 시처럼 고도로 되는 언어의 함축도 요구하지 않고 소설처럼 이야기를 강조하지 않는다. 생활중에서 받은 느낌을 적는 글이다. 하지만 생활중에서 받은 느낌 전체가 수필이 될수있는것이 아니며 생활중에 한 모멘트를 수필로 적어야 하며 반짝하는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것이다.
예술 사진을 찍는데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찍는것은 사진사가 샤타를 누르는 그 순간에 포착되는것이다. 수필도 그런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4) 수필의 소재
밥을 지으려면 쌀이 필요하다. 아무리 뛰여난 요리사라고 해도 자료가 없이는 요리가 불가능하다.
수필을 쓰려고 해도 우선은 소재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필의 소재는 어디에서 오며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초학자라면 글을 쓰고 싶어도 무엇을 썼으면 좋을지 몰라서 망설여질때가 많다. 초학자라면 흔히 수필의 소재도 거창한 생활경력이나 사건에서만 오는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불치의 병이 걸린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던 이야기라던가 크게 사기를 당하거나 그런 이야기들을 잡고 수필을 쓰려고 한다. 물론 그런 이야기도 역시 수필의 소재는 되지만 흔히 이야기에 집착하게 되여 어쩌면 수필이라기보다는 수기를 쓰기가 십상이다.
수기와 수필의 차이점이라면 수기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원인, 경과, 결과의 순서에 따라서 상세히 적고 그 사건이 끝나면 함께 작품도 끝나는것이다. 허나 수필은 사건의 중심으로 다뤘다고 해도 사건이 끝나면 작품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받은 내 느낌을 솔직히 적어서 독자들도 같은 감수를 향수할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수필이다.
경수필을 쓸 경우에는 수필의 소재도 어느 한 사람의 전반 운명과 연관되는 그런 거창한 사건보다는 그냥 평범한 생활중에서 받은 느낌을 재치있게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아무리 작은 가시라도 손에 박히면 몸 전체로 통증을 느낀다. 그것이 수필이 아닐가 생각된다. 가시는 작지만 그것이 주는 통증은 몸 전체가 받게 되듯이 작은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읽는 이들에게는 큰 감동을 줄수 있는 그런 소재들을 선택해야 한다.
근간에 읽은 우리 문단의 수필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수필들은 채복숙이 쓴 “달팽이는 간다”와 로춘애가 쓴 “자축선물”이다. 두편의 작품들을 보면 모두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게되는 너무나 사소하고 평범한 이야기다.
“달팽이는 간다”는 퇴근 길에 버스역에서 선로를 기다리면서 그 앞에서 신발깔개와 같은 사소한 물품들을 파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작자는 할머니에 대한 정보는 단 하나도 없고 그냥 사소한 물품을 팔던 할머니가 언젠가부터 달팽이를 한대야 놓고 팔고있다는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작자는 대야에서 위로 기여오르려고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달팽이, 하지만 그런 몸부림과는 무관하게 대야를 벗어날수 없는 달팽이를 묘사하면서 우리들의 생활과 자연스럽게 연관시켰다. 할머니의 대야에 담긴 달팽이는 단순히 대야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였겠지만 어쩌면 그건 달팽이 인생 전부와 관계되는 일이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도 결국 달팽이가 대야를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평생을 허우적거려야 하는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였을가?
달팽이는 간다에는 어떤 사람들을 흥분시킬 그런 사건도 없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사건인듯 하면서도 자신의 삶의 자세를 돌아보게 하고 지나간 인생에 대한 회고를 하게 하는 작품이였다.
로춘애의 자축선물도 그렇게 인심을 감동시키는 이야기가 없다. 면허시험을 치면서 함께 차 학습을 한 동료가 한번씩 통과할 때마다 자신을 축하하여 스스로 선물을 사는 모습을 그렸다. 자축을 할 만큼 랑만적인 사람이라면 인생을 비관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작자는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한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타인에게는 늘 선물하지만 자신에게는 린색하다. 자신을 축하하여 선물을 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삶을 즐기는 자세라고 해야 할것이다. 동료의 그런 모습에 감염되여 작자도 면허를 따니 자축선물로 브랜드 양산 하나 사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두사람의 작품들을 보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그런 거창한 소재가 아닌 누구나 다 겪을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적었지만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수 있었는가?
평범한 일상에서 받은 인생철학을 끄집어 낼수 있었기에 두편 작품 모두가 생명이 있는 작품으로 되였다.
경수필의 소재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겪은 가장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서 받은 이야기를 선택하여 쓰면 독자들에게 한결 가까이, 따스하게 다가갈것이다.
5) 수필을 어떻게 쓸것인가?
우리가 살아오면서 해야 하는 모든 일은 기교를 필요로 한다. 밥을 먹는것과 같은 아주 간단한 일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숟가락을 이용하여 먹을수도 있고 젓가락을 리용할수도 있으며 손으로 그대로 움켜쥐고 먹을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손으로 움켜쥐고 밥을 먹는다면 유아가 아닐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머리가 이상한 사람으로 통하게 된다.
수필을 쓰는것도 소재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구슬이 열말이라도 꿰여야 보물”이라고 하듯이 수필의 소재를 찾아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남들은 그냥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그런 사소한 이야기도 좋은 수필로 될수 있는 것은 그런 사소한 소재를 어떻게 다듬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것이다.
흔히 초학자들의 수필들을 읽어보면 이야기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수필에서의 이야기는 감수를 적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데 작자가 독자들이 모를 것 같아서 설명에 집착하면 결국 수필의 미를 잃게 된다.
사건의 전반을 원인, 경과, 결과의 순서에 따라서 적을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대목을 집중적으로 묘사해야 한다. 한마디로 그 사건과 연관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자세히 다 교대할 필요는 없다.
우선 채복숙의 수필 “달팽이는 간다”를 보자.
달팽이는 간다
채복숙
회사앞 버스역에는 언제나 할머니 한분이 앉아 계신다. 자그마한 체구에 깔끔하게 빗어올린 머리, 쪽걸상 같은것을 놓고 앉아 뭔가 판다. 대충 보면 신발 깔개 같은 사소한 품목들이다. 할머니는 장사가 잘되든 안되든 관계없이 날마다 나온다. 언제나 느긋한 표정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것으로 보아 아마 장사보다는 사람 구경이 재미인것 같다.
“달팽이는 간다”의 서두다.
할머니에 대한 소개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여기에는 할머니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없다. 간단하게 자그마한 체구고 깔끔하게 빗어올린 머리로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작자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교대하려는 것을 충분히 하고 있다. 우선 할머니가 팔고있는 신깔개와 같은 사소한 품목과 깔끔하게 빗어올린 머리는 서로가 대조된다. 할머니에 대한 묘사를 보면 생활이 어려워서 장사를 하는 분이 아니다. 느긋한 표정으로 장사보다는 오가는 사람 구경을 하는 모습은 할머니가 로년의 소일거리로 장사를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간결한 묘사지만 이런 묘사에서도 우리는 할머니는 단순한 할머니가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다. 한가하게 손군들이 재롱이나 부리는 모습에 미소를 짓거나 공원가를 어슬렁거리지 않으면 다른 노인들과 모여서 며느리 흉이나 보면서 남은 인생을 자대로 재어가는 그런 모습이 아닌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사소한 물품들을 파니 수입도 몇 푼 안되겠지만 그런 일을 하는 것으로 할머니는 그래도 아직 자신의 삶의 가치를 실현해가고 있다. 할머니가 팔고 있는 사소한 품목들도 할머니의 삶의 모습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발 깔개는 사람들의 눈에 띄우지 않는다. 그래서 그 흔한 브랜드에도 신발 깔개라는 이름은 아직 본 기억조차 없다. 하지만 신발 깔개는 또 우리에게서 없어서는 안된다. 먼 길을 가려면 우선은 발이 편해야 한다면 신 깔개가 그만큼 중요하다. 신발 깔개는 발의 편함과 함께 신발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고 겨울은 발을 따스하게 하고 여름이면 발을 시원하게 해주는 작용을 하고 있다. 일상 중에 사소한 것이어서 쉽게 스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일상에서의 신발깔개의 필요성이라고 할수 있으며 상징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에는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발은 몸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도 가장 높은 곳에 오를수 있는것이다.
미국의 가장 유명한 예수님의 동상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동상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면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올려다 보아야 한다. 종교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예수는 신이다. 그런 신이 인간인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 그 뜻을 리해하면 채복숙의 수필에서 신발깔개를 굳이 언급한 의미를 알수 있을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할머니가 판매하는 상품들에 품목이 하나 더 늘었으니 그것이 바로 달팽이이다. 자그마한 법랑 대야에 달팽이 몇마리가 들어있다. 대야 언저리에는 잎 채소가 몇장 걸쳐져 있다.
언제부터인가 할머니가 품목 하나 더 늘인 것도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띄우지 않는 달팽이다. 달팽이는 끼니마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희귀동물도 아니다. 일년에 한번이나 두번 정도 생각나면 먹고 생각나지 않으면 구태여 찾아서 먹지 않아도 아쉬움이 남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도리어 할머니의 삶의 자세와 하나의 풍경을 이루어주고 있다. 타인의 눈에 확 뜨이지 않지만 자신의 삶의 궤적에 따라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은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오고 있었다.
달팽이를 팔면서부터 할머니의 로점은 흥성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갸우뚱하고 한없이 신기한 눈길로 달팽이를 쳐다보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같이 한손에는 핸드빽을 들고 한손에는 채소 구럭을 든 바쁜 아줌마들도 있었고 지어 키가 껑충한 사내들마저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지켜본다.
오늘도 내가 타야 할 14선 버스는 10분이 되도록 오지를 않는다. 퇴근시간인지라 사람들은 벌써 짜증을 내는 눈치다.
‘5선 버스는 벌써 세번째로 오고 있는데 14선은 오늘 또 웬일이야. 어디에서 막혔길래…’ 저녁이 늦어질것 같은 근심에 나는 언녕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길이 또 달팽이에게 가 멎었다.
달팽이는 여전히 부지런히 우로 기여 오른다. 그네들은 인간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가?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도 불만을 털어 놓는 사람들과 하루종일, 어쩌면 한평생을 허우적거리면서도 대야를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그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 달팽이가 비교가 된다. 인간은 아무리 거센 몸부림을 쳐도 달팽이가 대야를 벗어나지 못하듯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깨고 새롭게 부상한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만족보다는 불만을 더 쌓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여직껏 한번도 달팽이가 그 대야를 나온걸 본적이 없다. 물론 정말 대야 밖으로 기여 나온다면 할머니가 도로 주어 넣을것이다. 하지만 달팽이는 그렇다고 하여 결코 대야밑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때가 없었다.
단순한 달팽이의 움직임이 아닌 삶에 대한 민초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수 없다. 인간은 움직여야 한다. 살아있기에 움직여야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다만 그 움직임의 차이가 있다. 허황한 꿈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꿈인 것은 모르고 그냥 불가능이란 단어만을 떠올릴 때 인간은 최소한의 몸부림까지도 멈춰버린다. 자신의 무능함보다는 타인에 대한 불만이나 운만을 탓하는 인간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하얀 촉수를 하늬거리며 부지런히 기여 오르는 달팽이를 보며 나는 저들은 달팽이인 주제에 왜 저렇게 애를 쓸가 하고 부질없는 생각에 잠겨본다.
우에 있는 못가본 다른 세계로 나가 보고싶어서일가? 호기심? 대야가 너무 좁아서 큰 물에서 놀고싶어서일가? 큰 포부? 대야가 자신의 발전을 속박한다고 생각하는걸가, 아님 원래 그냥 그렇게 기여 나가는것밖에 몰라서일가? 행동의 관성? 아니면 일탈을 시도?
아니야, 모르겠다.
인간도 달팽이가 대야에서 기여 오르려고 몸부림치듯이 움직여야 한다. 오늘은 내일보다 낫을 거라는, 새해는 금년보다 좋아질거라는 희망의 끊을 놓지 말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쉽게 자탄에 빠지고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쌓아가고 나이 타령이나 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자신의 존재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14선 버스가 왔다. 사람을 얼마나 많이 박아 실었는지 문 열기조차 곤란하다. 버스 안 승객들은 이제 발 놓을 자리도 없는데 문은 왜 여냐고 기사에게 불만을 내뿜는다. 하지만 버스 밖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비집고 오르려고 아등바등 한다.
퇴근시간이면 아무리 기다려 봤자 버스마다 초만원일것이 분명한지라 나도 사람들 틈에 끼여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다.
드디여 버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무거운 짐을 가득 진 사람처럼 허걱허걱 가다가도 몇발자국 못가 빨간 불을 만나서 한참 쉬고… 하여간 그래도 그냥 앞으로 간다.
달팽이는 대야에서 위로 기여 오르려고 허우적거리지만 “나”는 발 들이밀 곳도 없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시루 같은 버스에 몸을 싣고 나의 일상을 향해 뛰어야 하는 것이다. 한 점 망설임이나 주춤거림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퇴근 시간이면 버스의 초만원에 대한 불만보다는 차라리 뭔가를 할 수 있음을 즐겁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문득 버스가 달팽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마다 이 시내에서 허걱거리며 다니는 버스, 다른 세계에로 가보고싶어서도 아니고, 포부가 커서도 아니고 일탈을 시도하는건 더구나 아니다. 그냥 그러한 사명이 주어졌기에 그렇게 가고 있는것뿐이다.
그럼 버스안에 가득 찬 이 사람들은…?
결국은 나도 달팽이다. 내 삶의 궤적에서 날마다 바쁘지 않으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달팽이이다. 때론 기뻐하기도 하고 때론 불만하기도 하고, 때론 일탈을 꿈꾸기도 하면서도 지구를 에워싸고 도는 저 달처럼 부지런히 내 삶의 궤적에서 움직인다.
달팽이가 부지런히 기는것처럼 인간도 그저 사는거다. 부지런히 기여가면 뭔가 새로운것에 접할수 있을것 같아, 뭔가 더 많은것을 가질수 있을것 같아 기대감을 안고 부지런히 간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운명에 매여 있는것 같다.
뭔가 하지를 않으면 시간을 랑비하는것 같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남에게 뒤떨어질것 같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남보다 밑질것 같고… 그래서 언제나 뭔가를 하려고 시도하는 인간들, 그래서 현대인은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운명의 큰 손은 그런걸 알려고도 하지 않는것 같다.
그러고 보니 달팽이를 파는 할머니가 현자인것 같다. 하하하~
내 보기에 할머니는 방관자이다. 그래서 현자인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이상 할머니도 달팽이에 불과할것이다.
달팽이는 간다. 나도 간다. 어디론가에로…
인간은 달팽이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달팽이처럼 쉬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이여야 한다. 달팽이도 살아 있는 동안에 움직이고 인간도 살아있으니 몸부림이 필요하다.
세상에 현자는 따로 없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만이 그의 가족에게는, 그리고 사회에도 현자로 되는 것이다.
작자는 달팽이를 파는 할머니를 현자라고 승화시켜주고 있다. 어쩌면 남은 여생을 계산하면서 하루하루를 허무하게 보내기보다는 그 짧은 인생이나마 자신이 할 일을 찾아서 즐기는 방관자 같은 할머니가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되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현자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수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이상 할머니도 달팽이에 불과할 것이다.”고 한다. 현자인 할머니는 달팽이 같은 삶이나마 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그 달팽이보담도 못한 인생을 살고 있을까?
서두에서 등장했던 할머니가 결말부분에서 다시 한번 묘사되면서 수필은 한층 고조를 이루어 주었다.
“달팽이는 간다. 나도 간다. 어디론가에로.”라고 수필은 끝나고 있다.
인간은 매일, 시시각각 떠난다. 몸이 침상에 누워있어도 마음은 어디론가를 떠나고 있다. 어디론가 간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삶의 자세다. 그 몸부림이 멈춰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다.
달팽이가 아닌 인간이지만 달팽처럼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이 아닐까?
채복숙의 수필을 읽는 동안에 가장 깊이 느낀 것은 우리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는 소시민적인 생활의 깊이를 판것이다. 수필은 궁극적으로 생활철학이 담겨야 한다면 소시민적인 삶의 자세를 스케치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가?
2000천자밖에 안되는 수필이지만 작자가 우리들에게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달팽이나 그것을 파는 사람들, 혹은 퇴근길에 버스를 기다리면서 짜증내는 사람들, 붐비는 버스를 비집고 올라야 하는 일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늘 있는 일이다. 허나 이 수필이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는 것은 작자가 수필을 쓴 기교와 수필의 짜임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달팽이와 인간의 삶을 연관시킨것이다.
달팽이, 그것을 팔고 있는 할머니, 버스를 기다리면서 짜증을 내는 사람들, 그리고 나, 붐비는 버스들은 서로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달팽이를 보면서 받은 느낌, 그 느낌 자체가 바로 우리 삶의 모습이고 현장인것이다.
6)짧은 글에 긴 여운을 남겨라.
가끔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인가면서 수필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청을 받으면 나의 말은 단 한마디다. 단숨에 읽혀지고 오래동안 사색하게 하는 수필이 좋은 수필이니 명수필이니 뭐니 하는데 매우지 말고 그런 수필들을 찾아서 읽으라고 한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듯이 수필도 읽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서 달라진다. 하지만 독자의 공통한 특점이라면 단숨에 읽고 오래동안 사색하게 하는것이 좋은 글이고 명작이 되는것이다.
수필도 함축이 필요하다. 장황한 설명보다는 상황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감수만 적으면 되는것이지 지루한 이야기를 늘여 놓는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독자들은 그런 설명을 바라고 수필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연변의 한 중견 시인이 책에 발표된 자신의 수필을 보내오면서 한번 봐달라고 했다. 그때 수필을 읽고 전화로 그 수필에 대한 혹평을 해버렸다. 수필의 편폭만 해도 6천자에 달했는데 독자가 이미 다 알고있는것을 다시 교대하고 설명하면서 좋은 소재를 억망으로 만들었던것이다. 멈춰야 할 곳에서 필을 멈추지 못했으니 결국 수필이 아낙네의 넋두리로 끝나버렸던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발표된 작품을 보일 때에는 칭찬을 바라는 마음에서였지만 그 시인은 내 말을 이해하고 그후부터 수필을 간결하고 함축되게 쓰기 시작한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수필은 시처럼 고도의 함축은 필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소설처럼 상황에 대한 장황한 서술하는것도 아니다.
수필도 함축이 필요하며 결말에서 여운을 남겨야 한다. 그 여운을 따라 독자들로 하여금 사색하게 되고 함축된 내용을 풀이하면서 느낌을 찾게 하는것이 수필이다.
수필에서의 장황한 사설은 군더더기만 되여 수필의 아름다움을 흐리게 한다.
짧은 글 속에 긴 사색의 여운을 남기는 그런 함축된 수필이 좋은 수필인것이다.
독자와 공감하라
수필은 작고 사소한 일상을 통해 삶에 대한 깨달음의 글이고 체험에서 느낌을 적어내는 글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나에게는 아무리 크고 고통스러운 사건이라도 어떤 깨달음이 없고 느낌을 적어 독자들과 그것을 공감할수 없다면 결국 생명이 없는 글이 된다.
간단한 례를 들어 내 자식이 청화대학에 입학했다고 하자. 내 가문에서는 그것보다 더 큰 경사가 없을것이고 그 벅찬 감동과 기쁨은 한마디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수필로 적을 때 애가 어떻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아이를 위해서 내가 어떻게 고생했다는것만 적는다면 독자들에게 어떤 느낌을 줄수 있을가?
내가 그런 글을 읽었다면 단 한마디 일것이다.
“좋겠네.”
만약 그 대답이 아니라 한마디 더 해야 한다면 “청화대학 그 집 애가 하나뿐인가?”일것이다.
그 기쁨과 즐거움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할수 있는 모멘트를 잡아내지 못하면 결국 그렇듯 큰 감동이라도 독자와의 공감은 불가능한것이다.
내가 중병에 걸렸거나 큰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면 그 아픔과 고통만을 소상히 적는다면 역시 “거참 안됐군.”하는 정도로 끝나 버릴것이다.
느낌을 적지 못하고 사건에만 집착하여 사건으로 끝나면 독자들과의 공감이 아니라 도리여 반감을 야기시키기가 더 쉽다.
중병으로 병원에 주원했을 때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내 아픔은 순간임을 알고 삶에 대한 또 다른 희망을 본다면 의미가 달라질것이다.
작품분석
그럼 아래에 회원작품을 놓고 직접 분석해보자.
불여귀---돌아감만 못하다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가다가 한 아파트단지 앞에 내놓은 벽시계가 욕심나 이리저리 보고 있는데 한 아줌마가 마침 그곳에 그릇과 잡동사니들을 버리려고 나왔다. 같은 중국동포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필요한 것을 가져가라면서 무작정 나를 자기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언니 이사를 가요?’
‘아니, 고향으로 돌아 가려구.’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오려구.’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돈 벌 욕심에 한국에 나왔는데 남편이 저 꼴이 됐으니 다 내 탓이지 뭐.’
한쪽에 쭈크리고 앉아서 아무 반응이 없는 중년의 한 남자를 보면서 언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었고 커피잔 몇 개를 얻어가지고 해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그 침침한 지하방을 나섰다.
어느새 하늘에서는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나도 청룡산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언니는 가까운 친구한테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인민페 20만원을 빌려줬는데 친구의 한국 사위가 불법장사를 하다가 한방에 날려버렸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남편이 언니를 집에서 쫓아내자 언니는 할 수없이 돈을 꾸어 한국 행을 했다.
당황하고 미안했던 남편도 뒤따라 한국에 나왔는데 두 달 만에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갈비뼈 몇 개가 끊어지고 다리 한쪽이 부러져서 병원신세를 지게 되였고 아내가 간병을 하게 됐다.
일년간 부부가 병원에서 헤매다가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살림이 쪼들려 다시 남편을 끌고 한국으로 나왔다. 남편은 일을 못하고 집에서 아내 돌아오기만 기다리다가 당뇨병에 우울증까지 걸려 이제는 약을 먹지 않고는 밤에 잠도 자지 못한다
고 한다. 그런데다 60살에 가까운 언니도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서 매일 일을 못하다 보니 죽게 일해도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는 고향에 있는 본가 시골마을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면서 남편의 병을 치료하면 좋으련만 자식 둘이 당잘 결혼해야 할 상황이라 돈이 필요한데 저금은 없고 …….
몇 달 전에 협회모임이 있어서 한 동포화가한테 통지를 하려고 전화를 했는데 그 화가의 누이가 전화를 받으면서 동생이 뇌졸중이 와서 지금 병원에서 생사를 다툰다는 것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한 남자후배가 있었는데 너무 고독하여 병이 날 것 같다고 하더니 어느 가을날 온돌에 낙엽을 가득 뿌려놓고 그 위에서 하루 밤 자니 좀 나아진 것 같다는 소리를 듣고 미친 놈이라고 욕한적 있다. 그런데 그 후배가 두 달 후에 중풍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비가 모자라서 고향에 있는 부모가 집을 팔아서 돈을 마련해 가지고 한국으로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힘든 육체적 노동과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서 병든 나무처럼 푹푹 쓰러져 가는 중국 동포들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나도 한국에 나올 때는 자식의 대학공부 뒤 바라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아들애가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했는데도 그 다음 순서인 장가 보내기 위한 돈을 마련하고 그것이 마련되면 아들애의 집장만 아니면 자가용구입….등 때문에 한국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얼마를 더 벌어야 되며 또 얼마 동안 한국에 있어야 그것이 가능할 지. 중국동포들의 한국행은 밑도 끝도 없는 미궁의 연속이다.
어느새 청룡산 유아숲 정상에 이르렀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여전히 불어치고 있는데 숲 속 저 멀리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혹시 저속에 두견새의 울음소리도 있지 않을 가 하는 생각에 문득 이유의 시조가 떠올랐다.
불여귀(不如歸) 불여귀(不如歸) 하니 돌아감만 못하거든
어엿분 우리 임금 무슨 일로 못 가신고
지금의 매죽루(梅竹樓) 달빛이 어제런 듯하여라.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타국으로 쫓겨난 촉 나라 망 제가 촉 나라로 돌아가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죽었는데 그의 영혼은 두견이라는 새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불여귀’(不如歸)라고 들린다고 한다. 새가 된 망 제는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으며 목구멍에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현대어 풀이로는 불여귀가 돌아가지 못함이 아니라 돌아감만 못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의 53만 명의 동포들이 비행기티켓만 있으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고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는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제의 신세가 되여 타향에서 불여귀를 부르짖으면서 돌아감만 못하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건지. 이 시각 지구의 어딘가 에서는 불여귀 불여귀 하면서 자규 (단종이 매죽루에서 자규시를 읊은 곳)가 구슬프게 울고 있을 것 같다.
재한조선족들의 애환을 다룬 한편의 수필이다. 어쩌면 이대로 투고해도 발표가 가능할수도 있겠지만 배운다는 의미에서 작품의 문제점과 그 해결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우선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끝나버렸다. 읽고 나서 느낌이란 “참 안됐네.”뿐이다. 그 이상의 어떤 감동도 찾을수 없다. 재한조선족들의 그 보다 더 큰 애환을 당하는 사람들도 얼마던지 있으니 굳이 그만한 일에 눈물을 흘리면서 동조해야 할 리유는 없다.
아직 장가도 들지 않은 20대 아이가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손목이 끊어난 것을 생각해보라. 장애자가 된것만도 한 입으로 다 말을 못하겠는데 불법체류라는 리유로 보험처리가 안되고 사장도 치료비까지 거부한 일이 있다면 뭐라고 해야 하는가?
둘째로는 사건과 사건 사이에 연관성이 없이 억지로 꾸며내는 느낌을 주고 있다. 전도적서술에서 순서적서술로 넘어가거나 련상수법을 사용할 경우에는 상호간의 연결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남의 아픔을 듣고 청룡산에 가고 거기서 다시 불여귀를 떠올리고 53만 재한동포들이 비행기티켓만 있으면 갈수 있는 고향에도 가지 않고 망제의 신세가 된다는 것이 어떤 련관성을 갖고 있는가?
수필을 읽고 나서 제일 처음 받았던 인상을 솔직히 적는다면 “세상에 리유없는 무덤이 없다.”였다.
한마디로 이 수필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의 직접 체험한 일이 아니고 독자들에게 타인의 신세타령을 전하려고 필묵을 아끼지 않았다는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느낄수 있으랴?
그렇다면 이 수필를 한번 정리해보도록 하자.
우선 이 수필에서 군더더기를 제거해야 한다.
몇 달 전에 협회모임이 있어서 한 동포화가한테 통지를 하려고 전화를 했는데 그 화가의 누이가 전화를 받으면서 동생이 뇌졸중이 와서 지금 병원에서 생사를 다툰다는 것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한 남자후배가 있었는데 너무 고독하여 병이 날 것 같다고 하더니 어느 가을날 온돌에 낙엽을 가득 뿌려놓고 그 위에서 하루 밤 자니 좀 나아진 것 같다는 소리를 듣고 미친 놈이라고 욕한적 있다. 그런데 그 후배가 두 달 후에 중풍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비가 모자라서 고향에 있는 부모가 집을 팔아서 돈을 마련해 가지고 한국으로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힘든 육체적 노동과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서 병든 나무처럼 푹푹 쓰러져 가는 중국 동포들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나도 한국에 나올 때는 자식의 대학공부 뒤 바라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아들애가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했는데도 그 다음 순서인 장가 보내기 위한 돈을 마련하고 그것이 마련되면 아들애의 집장만 아니면 자가용구입….등 때문에 한국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얼마를 더 벌어야 되며 또 얼마 동안 한국에 있어야 그것이 가능할 지. 중국동포들의 한국행은 밑도 끝도 없는 미궁의 연속이다.
이만한 정도의 사연은 누구나 갖고 있는것이니 굳이 독자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설명해야 할 리유는 없을것이다.
수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정화되고 또 정화된 가장 순수한 감동과 느낌을 전하는 글이지 누구나 겪을수 있고 알고 있는 사실들을 다시 설명해주는 글이 아니다.
이 수필에서 “벽시계, 거동을 못하는 남자의 눈빛, 고향을 그리다가 두견이 되여버린 망제와 나”를 연관시킨다면 이야기가 달라질것이다.
가장 중요한 모멘트는 벽시계에다가 두어야 할 듯 싶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녀인에게는 더 이상 벽시계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을 안고 고향으로 가야 할 리유가 없고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 버렸다. 그런데 나는 그 시계가 필요해서 주어왔고 시계는 새 주인을 만나 다시 자신의 사명을 하게 된다. 시계가 주인을 만나면 존재의 가치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버리면 그냥 쓰레기로 되는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몸은 불구가 되였지마 고향에 돌아가면 남자는 어떤 의미로 될가?
그리고 언젠가 한국이란 곳에서 나도 하나의 버려진 벽시계가 될수도 있지 않을가?
한국에서 버려진다고 고향에 가서도 내가 딛고 설 곳이 없을가?
망제는 나라를 잃고 돌아갈 곳이 없어 두견이 되였지만 지금 내가 두견의 노래를 듣는 것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어떤 느낌을 독자들에게 줄수 있을가?
녀인의 사정을 소상히 적는것보다는 스쳐버리고 버려진 벽시계와 누워있는 남자와 내 삶을 연관시키면 좋은 글로 될수 있는 것이 아닐가?
맺는 말
수필도 필경은 창작인 것 만큼 종적 횡적으로 되는 다각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수필을 쓴다고 하여 수필집만 찾아서 읽을것이 아니라 시, 소설은 물론 심리학, 정신분석학, 인물전기와 같은 책도 함께 읽어야 할것이다.
시에서는 함축된 언어와 표현을 배울수 있고 소설에서는 스토리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되고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을 알아야만 독자들의 심리를 파악할수 있다.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읽은 책은 어느 한곳에 국한되여 있지 않다. 성경만 7번을 통독했었고 불교성전도 몇벌을 읽었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부터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도 보고 괴짜심리학은 물론 현대사회학, 파브르곤충기, 에모토 마사루의 작품들까지도 읽고 있다.
자비에라 홀랜더가 쓴 “해피 후커”를 읽으면서 뉴욕 최고의 고급 콜걸이 쓴 책이 7천만 독자를 갖게 된 리유들을 찾았었다. “해피 후커”란 우리말로 “행복한 창녀”라는 뜻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독서는 빼놓을수 없는 하나의 수업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많은 책들을 읽어야 하고 독서도 해야 하고 만권의 책을 읽는것보다는 한권의 책도 완전히 리해하고 그 책의 진수를 찾을수 있을 때 자신의 작품도 군더더기가 없는 좋은 글이 될수 있을것이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동포문인회라는 타이틀을 달고 회원으로 활약하고 있다면 스스로 아마추어란 생각을 버리고 프로가 되여야 한다는 마음 가짐으로 글을 쓰기를 바란다.
한국인들이 중국조선족들에 대해 많이 알고 리해하는듯 하지만 진정으로 리해하고 포옹할수 있는 한국인은 얼마나 되는지를 사색해보아야 할것이다. 동포문인회 회원이란 이름을 갖고도 아마추어로 생각하고 어디에 글 몇자 발표하는데만 급해한다면 전반 조선족문단에 죄인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중국조선족들을 리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들, 그 한국인들이 중국조선족 문학에 대해서 깊이있게 료해하기보다는 동포문학이란 책을 읽게 되면 그것으로 중국조선족문단을 진맥하는 자대를 재이게 될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한국 친구가 사람이 귀하고 천한 것 차이가 무엇인가를 묻기에 사람의 귀천은 직업이나 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대답한적이 있었다.
동포문인회 회원들도 그런 자세로 글을 쓰기를 기원한다.
동포문인회라는 이름에 손색없는 수필을 기대하면서 부족한 글이지만 내 수필 몇편을 올리겠으니 오늘 강의 내용의 참고로 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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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간 내서 정독 하겠습니다
애독해 주십시요
이번에 숭늉이란 필명으로 활동하시는 김종화님이 대한민국 수필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제가 사무국장을 잠시 맡았던 3사문학회를 태동시키신 분이지요.
그분과 평소 나누었던 대화에서 간혹 수필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상기 강의 내용과 맥락은 거의 같은 것 같습니다.
저도 고교시절 산문으로 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대타로 출전하여 홈런을 친 우연한 기회로...
지금은 마음을 비우고 공부만 열심히 했더니 마음이 무언지 까먹어
껍데기 손질만 요란한 짝퉁이 되었네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운글 쓰는 시인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