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약이 환경을 살린다/ 요 6: 8-13
목사가 날마다 마음으로 죄를 짓고 산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간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는 고급 차를 타고 가면서 피던 담배꽁초를 밖으로 휙 던지는 사람을 보거나, 산과 들
을 함부로 파헤치고 사리사욕을 태우기 위한 시설을 하는 자들을 보거나, 놀던 자리에
온갖 쓰레기를 그대로 버려 두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
디지를 못합니다.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에다 유흥업소나 식당을 차려 놓고 오수
(汚水)를 계속 흘려 보내 냄새나는 시궁창으로 만들어 버리는 장사치들과 적당히 돈을
받아먹고 그들을 묵인해 주는 공무원들을 보면 울분이 터집니다. 자연 보존에 대한 확고
한 의지나 비전이 결여되어 있는 통치자나 팔당 상수원 하나 깨끗하게 지키지 못하는 행
정부를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 제 마음속에서 말로다 표현키 어려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
는 것입니다.
자연을 마구 더럽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저는 매일 아침 집 앞에 와서 돌멩이로 유리
창을 깨트리는 깡패를 보는 것 같은 심정을 느낍니다. 한두 번이라면 그래도 좋게 봐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마다 돌멩이질을 해서 유리창을 깨트린다면 제 아
무리 마음 좋은 사람이라 해도 그들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
님의 자녀라면 분노하거나 미워하거나 욕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저는 억지 성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화를 내고 욕을 해서 그들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면, 환경 파괴
가 줄어들 수 있다면 그렇게 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자연보호 - 21세기 최대 이슈
자연 보호는 우리 모두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자 자손의 건강과 행복과 직결되는 과제
요,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좌우할 21세기 최대의 이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문제를 소홀히 여기고 '오늘 즐기고 내일 죽자'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제
자신이 자제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교회가 어떻게 하면 자연 보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 하
고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 우리가 환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사
고와 태도를 바로 잡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 하나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자연 파괴는 소수의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떠들다가 말아도 될
정도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좋은 한반도의 자연이 얼마나 오염되고 파괴
되었는지 앞으로 20년 동안 국가 예산의 50퍼센트를 쏟아 붓는다 해도 완전한 회복이 어
려울 지 모릅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자연을 살리고 보존하는
것이 경제 발전이나 통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인 참여가 필요하겠다고 판
단했습니다. 제가 최근에 '기독교 환경 운동 연대'라는 한 시민 단체에 이사로 발을 들
여놓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이 시민 단체와 연대해서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금수강산'이라고 자랑하던 이 나라 자연이 왜 이렇게 심각하게 파괴되었을까요? 저
는 그 이유가 다른데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자연 파괴는 우리의 눈먼 탐욕과 무절제한
낭비가 불러들인 인재(人災)인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을 자제하지 못한 탓에 이 나라 산
하가 황무지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 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세
계의 자연이 인류의 탐욕으로 인해 황폐한 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쓰고
내버리는 이 낭비벽을 고치지 않는다면 지구가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입니다.
시중에 있는 서점을 한번 들러 보십시오. 지구의 환경 위기를 경고하는 책들이 얼마
나 많이 나와 있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 한두 권을 잡고 몇 페이지만 넘겨보십시오. 아
마 머리가 지끈거려 다섯 페이지 이상을 읽기가 힘들 것입니다. 듣기 좋은 소리는 하나
도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치 의사가 중병에 걸린 환자를 앉혀 놓고 '당신은 이렇게
죽을 것입니다.'라는 말만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지구의 환경 파괴가 심각하다
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형 선고에 가까운 그들의 진단과 예언을 심각
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이나 공기 오염이 심각하다 해도 그것 때문에 지
금 당장 죽는다거나 살아가는데 특별한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자연을 염려하는 전문가들은 충분한 근거를 가
지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예언이 아무리 현실적으로 실감이 안 난다
해도 10년이나 20년 뒤에는 반드시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20여 년 전에
과학자들이 지구의 온난화 현상에 대해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
람들이 그들의 말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이 경고하던 일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 이변도 사실
은 온난화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기 싫은 말이라 해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생사와 후손들의 안녕이 걸려 있는 이 중대한 문제를 남의
일 보듯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천만 종이 넘는
동식물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그 중 10퍼센트가 삼림 훼손이나
사막화 현상으로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약 백만 종 가량이 멸종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2030년대쯤에는 동식물 중 40퍼센트 정도가 사라져 버릴 것이라
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여 종의 새 가운데서 무려 4종류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 10종류 중에서 4 종류가 멸종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식물의 멸종이 인류의 운명에 얼마나 막대한 해를 끼치게 될까 하는 문제는 불
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지구상에는 약6천 70만 평방 미터의 삼림이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33퍼센트가
이미 훼손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서 수많은 삼림이 공장이
나 주거지로 탈바꿈했습니다. 특히 열대 우림은 지구의 산소 공급량의 절반 이상을 감당
하는 귀중한 삼림인데, 매년 남한 면적만큼 파괴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속도대로라
면 2천년쯤에는 열대 우림의 80퍼센트 정도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구
의 허파가 병들어 20퍼센트의 기능밖에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1분에
20 번 숨을 쉬던 사람이 단지 4 번밖에 못 쉬게 된다면 과연 그가 정상적으로 살 수 있
겠습니까? 지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지구의 위기는 곧 바로 그 속에 사는 인류
를 비롯한 모든 동식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무서운 적이 될 것입니다.
1990년 봄에 어떤 조사 기관에서 일본 동경에 거주하는 30,40대의 샐러리맨들을 대상
으로 앙케트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설문 조사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현
재 당신이 가장 불안하게 여기는 것 하나를 적으십시오." 그 당시 일본은 거품 경제를
걷어내느라 혹독한 시련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조기 퇴직이니 명예 퇴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고, 회사들마다 허리띠를 졸라매
는 방편으로 평생고용제를 포기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앙케트를 주관했던 단체에서는 실직이 제1의 불안 요인으로 꼽힐 것이라 예상을 했습
니다. 그러나 앙케트를 분석해서 보니 결과는 다소 엉뚱했습니다. 지구의 온난화가 최고
의 불안 요인으로 꼽혔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프레온 가스로 인한 오존층 파괴와 열대림
의 벌목, 지구의 사막화가 6, 9, 10위를 차지하는 등 불안 리스트 10개 항목 가운데 환
경위기와 관련된 것이 4가지나 올라 있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가 지금 얼마나 무서운 재난 앞에 서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
니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내일 죽을 테니 오늘은
신바람 나게 살자'는 식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 자연을 마
구 더럽히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한다면 절대 그래서는 안됩니다. 아
비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으로부터 이 땅을 물려받은 것이 아
니다. 우리 자녀들로부터 그것을 빌려쓰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은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
려줄 땅이 아니라 빌려쓰다가 다시 돌려주어야 할 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
과 숨쉬는 공기와 하늘과 산과 바다를 깨끗하게 보존했다가 후손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한테 있습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더
럽혀 그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남의 일 보듯
방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 환경이 깨끗하기로 유명한 스웨덴에서는 유리병 하나를 33번까지 재활용하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고 합니다. 유리병을 재활용하는 만큼 유리병의 생산이 줄어들
게 될 것이고, 깨진 유리병이 자연을 훼손시키는 일도 그 만큼 줄게 되기 때문입니다.
환경 보호에 대한 관심이나 열의로 말하면 덴마크나 스위스도 스웨덴에 결코 뒤지지 않
습니다. 덴마크에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음료수나 통조림 캔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
다. 공해를 일으키는 일회용 캔은 아예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
니다. 스위스는 지상의 낙원이라 할 정도로 이상적인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
다. 가만히 있어도 좋은 공기와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고, 아름다운 산과 점점이 흩어져
있는 호수의 낭만적인 정경을 만끽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연을 깨끗하
게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한시라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은 반 농담조로 이
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공해 문제를 다 해결했다. 아직 마음에 걸리
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교회당의 종소리이다."
이런 나라들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움과 아울러 한숨이 절로 납니다. 우리와 너무 비
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말로는 '금
수강산'이라고 자랑들을 하지만 그나마도 반 동강난 좁은 땅덩어리를 무슨 생각으로 그
렇게 훼손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공기와 물과 하늘과 땅이 다 못살게 되면 다른 나라로
집단 이주를 할 생각인지 아니면 온 국민이 집단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것입니까? 전 세
계가 환경을 보존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 마당에 열심을 내는데 우리 나라는 어
떻게 된 일인지 자연을 보존하는데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고 환경
을 살리는 바른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시행함으로써 국민을 올바르게
계도해야 할 정부조차 정신을 못 차리고 뒷돈을 받아가며 환경 파괴에 앞장서고 있다는
데 우리의 아픔이 있습니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성경에서 '환경 오염'이나 '자연 파괴'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말씀을 찾
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오염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깨끗하고 온전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오염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
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구도 그리 많지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들이라
해봐야 아무 데나 던져 놓으면 이내 썩어버리는 그런 것들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우리
는 그의 소유된 우주를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것과, 청지기로서 우리는 이 우주를 아름답
게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청지기로서의 본분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들려주십니다. 낭
비하지 말고 절약하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사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대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본 많은 사람들은 원근 각처에서 몰려들어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
습니다. 그 사이 시간은 많이 흘러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마 하늘
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은혜에 흠뻑 젖어 시장기를 전혀 못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
나 말씀을 다 듣고 돌아갈 즈음이 되자 그들은 비로소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예
수님은 그들이 배가 고파 기진 맥진 하는 것을 보시고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
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는 엄청난 이적
을 베푸셨습니다. 한 아이의 한끼 식사밖에 안 되는 양을 가지고 장정만 오 천 명에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만 명이 족히 넘는 엄청난 군중들은 배불리 먹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
로 모시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요6:15) 그 만큼 그 이적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겠습니
다.
배부르게 먹은 무리가 흩어져 가려고 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매우 귀중한 말
씀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
라." 여기서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말은 남은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넣지 말라는 뜻
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쓰레기 문제를 언급하실 만큼 환경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명령에 순종해서 무리를 헤집고 다니면서 그들이 먹다가 남긴 떡 조각을
모았습니다. 먹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보리떡은 그리 맛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게
다가 먹다가 남긴 딱딱한 부스러기라면 돼지한테나 던지고 싶지 절대 입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배고픈 군중이 먹고 남긴들 얼마나 남겼겠습니까?
게다가 거두려는 것은 온전한 덩어리가 아니고 부스러기들입니다. 실제로 거두어진 것도
겨우 12바구니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배낭이나 핸드백과 같은 가방을
휴대하고 다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천으로 만든 조그마한 주머니에다 음식물이나 여행
에 필요한 물건들을 넣어서 메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12 바구니라 해봐야 그리 대단한
양이 못됩니다. 그들이 앉아 먹었던 들판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면 개미나 새가 와서
먹어버리면 그만 일 정도로 하찮은 것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만 여명이 먹고 남
긴 것치고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조각도 버리지 말고 거두라고 하신 이유
가 무엇일까요? 성경이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본문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예수님 일행이 다음날 한두 끼니를 해결하는데 사용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
다. 떡 조각을 모아서 12바구니에 담아간 자들이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걸 가지고 가서 뭘 했겠습니까? 그냥 내버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
다. 틀림없이 그날 저녁 한끼를 해결하는데 썼을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재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밀밭을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먹
은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마12:1) 항상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예수님 일행으
로서는 비록 부스러기이긴 하지만 장정 13명이 한두 끼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양식을
거둔다는 것은 대단한 절약이었던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 해도 이와 같은 절약은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
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의 손안에 있습니다. 자기가 만드신 것들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한다면 그 모든 것
을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만 명 이상을 먹이셨던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런 위대하신 주님이 먹다 남은 떡 조
각들을 버리지 못하게 하셨다니 정말 뜻밖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먹다가 남은 부스러기라도 낭비하면 안 된다는 진리를 교훈하고 계
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인이시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의 것을 낭비하지 않음으
로써 낭비가 악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은 마땅히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
자 하는 자는 절약해야 합니다. 성경 그 어디를 봐도 있는 대로 흥청망청 낭비해도 좋다
고 말하는 구절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24장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벨릭스
총독 부부에게 예수 믿는 도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
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
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은 먼저 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각하, 구원받으시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을 것입니
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절제에 대해서 가
르쳤습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는 지금처럼 살면 안됩니다. 검소해야
됩니다. 가진 것을 절약하여 선한 일을 위해서 쓰며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 당시
왕이나 귀족들이 얼마나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살았는지는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일이었
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만약 제가 말
한 두 가지를 따르지 않으시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벨
릭스는 바울의 말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그를 물러가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울이 말한 심판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가 이제까지 누리던 사치스러운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벨릭스와 별로 다르지 않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고 말하면 할렐루야를 외치지만, "
구원받은 자라면 절약하고 절제하며 살아야 됩니다."라고 말하면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조금 적게 쓰고, 불편하게 살아도 자족하는 마
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정상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보십
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자라면 마땅히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약간의 부족과 불편이 있을 지라도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풍요로운 세상을 즐기려는 경향이 강한 현실에서 절제가 쉽지 않다는 것은 우리
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 바닥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탐욕이 웅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살아 있는 한 약간의 부족과 불편을
감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
심은 우상숭배니라." 바울은 탐심 곧 탐욕을 우상숭배라고까지 했습니다. 탐심을 십자가
에 못박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3절을 보십시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탐욕스러운 말은
농담이라도 우리 입에 담아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탐욕을 이길 수 있을까요? 탐
욕을 이기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절약하고 절제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약 - 자연보호의 첫 걸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에 시민권을 둔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임하시는 그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과 희생 없이는 그 나라의 완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나라를 위해 어떻게 헌신해야 할까요? 이 땅에 하나님
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물질로 헌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물질만 드린
다고 다 헌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마음껏 쓰고 남으면 드리는 것은 헌신이
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푼이라도 아끼고 절약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려야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을 보호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산을 아름답게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관리자입니다.
만일 관리자가 동산을 어떻게 잘 가꾸고 보존할까를 생각하기보다 자기 탐욕을 좇아 마
음껏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고 노는데 만 정신이 팔려 있다면 그 동산은 망가지고 말 것
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절제하고 "남은 조각을 버리지 말고 모으라."는 예수님의 절약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절약하는 사람 치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거나 자연을 함부로 해치
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절약한다면 머지 않아 우리의 병든 자연이 아름
답게 치유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약은 자연 보호의 첫 걸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것 하나
라도 절약하면 자연보호에 엄청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화장지를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콧물이 약간만 나도 한꺼번에 화장지를 두세 장씩 뽑아서 쓴 후 바
로 휴지통에 던져 넣지 않습니까? 그러나 독일 사람들은 한번 쓴 화장지라도 호주머니에
접어서 넣어 두었다가 여러 번 사용하여 너덜너덜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버린다고 합니
다. 한 사람이 하루에 휴지 1 장씩만 덜 뽑아 쓰면 무려 4천만 장을 아낄 수 있습니다.
4천만 장이면 100매 짜리 고급 화장지 40만 통에 해당되는 물량입니다. 40만 통을 아끼
면 몇 그루의 나무를 살릴 수 있는 지 저는 정확히 모릅니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수치
를 알고 싶어서 환경부에 문의를 해 보았습니다만 별 뾰족한 대답을 못 얻었습니다. 자
기들도 그런 계산은 안 해봐서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환경부에서 일하면서 환경
보호에 대해 구체적인 연구를 하지 않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받아 제 마음이 착잡했
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우리 교회가 작년 한해 동안 전기를 얼마나 많이 썼나 하고 조사해
본 일이 있습니다. 사랑관과 믿음관, 복지관, 소망관 이 네 곳에서 1년 동안 쓴 전기료
는 대략 9천만 원 정도였습니다. 전기료로만 거의 1억에 가까운 돈을 지출한 셈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기를 조금만 더 아껴 쓰면 10퍼센트 정도는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
으로 따지면 천만 원 정도를 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나 우리 어린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고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그
만큼 더 투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전기를 천만 원 어치 정도 적
게 쓰면 그만큼 발전량을 줄일 수 있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발전소를 가동하는 과정
에서 발생하는 오염도 그만큼 줄게 될 것입니다. 일거삼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입
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교회에서 전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낭비가 심한지 모릅
니다. 집회 시간이야 당연히 불을 켜 놓아야 하겠지만 모임이 폐한 후에는 마지막으로
나가는 사람이 불을 끄고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조차 안 하는 것입니다.
집회가 끝난 뒤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불을 그대로 켜 놓고 가버린 것을 한
두 번 본 게 아닙니다. 물론 교회에 청소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언제 일일이 따라 다니며
불을 끄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일전에는 교역자들을 나무랐습니다. 교인들이 전기를 아
끼는 습관이 안되어 있으면 교역자라도 남아서 끄고 나가야 될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저는 교회에 있는 제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는 책상 위에 있는 스탠드 하나만을 켭니
다. 천장에 붙어 있는 전등은 할 수 있는 대로 켜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둑어
둑해지는 저녁 무렵에는 반 정도만 켭니다. 물론 손님을 맞아야 할 때는 전부 다 켜기도
하지만 그가 가고 나면 다시금 스위치를 내립니다. 우리 모두가 전기를 조금만 아끼면
일 년에 천만 원 이상을 절약하여 보다 선한 사업에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환경을 보전하는데 한 몫을 감당하게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도 마찬가집니다. 화장실에 가 보신 분들은 '1분간 물을 트는데 12원입니다.'라는
레테르가 붙어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손이나 얼굴을 씻을 때
수도꼭지를 계속 틀어 놓은 채 비누질을 하거나 씻습니다. 무슨 특별한 나쁜 의도가 있
어서라기보다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을 그렇게 마구 낭비
해서는 안됩니다. 썩은 한강 물을 사람이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정제하는데 화학 약품과
전기가 얼마나 많이 사용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물을 적게 쓰면 쓸수록 그만큼 자연
보호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조금 더 넓은 주택을 선호하는 경
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보다 주거지를 5평만 줄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50평
에 살던 사람은 45평에 살고, 20평에 살던 사람은 5평이 지나치면 1평만 줄여 19평에 살
아보자는 말입니다. 다섯 평이 아니라 한두 평만 줄여도 그 효과는 대단할 것입니다. 줄
어드는 평수만큼 난방용 연료를 절약할 수 있고, 청소하는데 사용하는 물도 아낄 수 있
고, 집 크기가 줄어드는 만큼 자연을 덜 침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 이 땅에 반딧불이 다시 돌아올까요? 언제 서울 하늘에서 하얗게 솜털처럼 피어
오르는 뭉개 구름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언제쯤 개구쟁이들이 발가벗고 개천에 들어가
서 물놀이를 하고, 미꾸라지 잡느라고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깔깔대는 모습을 보면서 살
수 있을까요? 언제 쏟아질 듯이 황홀하게 반짝거리는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정담을 속삭
일 수 있을까요? 우리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관리하라고 맡긴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난지도처럼 냄새 나는 쓰레기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의 미명 아래 수많은
산하를 파헤치고 공장을 지어 폐수를 흘려보낸 결과 생태계가 엄청나게 파괴되고, 땅과
물과 공기 어느 것 하나 오염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
다. "내일이야 어찌되든 오늘은 즐기자." 라며 자연을 함부로 훼손시키고 더럽힌 결과
하나님의 동산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차립시다. 가정에서부터 작
은 것 하나라도 절약하고 절제하려고 몸부림칩시다. 어린 자녀들이 왜 그렇게 화장지를
함부로 없앱니까? 왜 교회나 공공 장소의 화장실에 들어가서 적당하게 쓰면 될 화장지를
마구 풀어서 내버립니까? 그런 행동을 어디에서 배웠겠습니까? 가정에서 배운 것입니다.
가정에서 화장지 한 장이라도 아끼도록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쓰레기 분리 수거함을 설치해두고 환경보호에 힘써 왔
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지켜보면 어른으로부터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이르기까지 아직도
분리수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분명히 '종이류'라는 글씨가 선명하
게 붙어 있는 것을 보면서도 비닐 봉지나 플라스틱과 같은 것을 던져 넣는 것입니다. 환
경보호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일 하나조차 무시하고 살다가는 우리 모두 이 땅에서 더 이상 살아 남을 수 없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보다 몇 배로 크고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선진국들이 환경을 보호하
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20년 후에 우리 자녀들은 통일이 안되었다고 우리 부모들을 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좀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부모를 저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
나 탁한 공기와 악취 나는 물과 온갖 오물로 뒤덮인 쓰레기 하치장 같은 이 땅을 물려준
그것 때문에 우리를 원망하고 저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유의 주인 되신 예수님은 먹다 남은 떡 부스러기조차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아끼고 보존하는데 앞장서셨던 것입니다. 지
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
라." 죽어 가는 자연을 살리고 보존하는 길은 절약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절
약 정신을 본받아 절약을 생활 속에서 실천합시다.
그러나 우리만 잘해보려고 하는 선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의 절약 정신을 알려야 합니다. 그들도 자연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야 합니
다. 우리 후손들에게 썩은 강토를 넘겨주면서 '금수강산'이라고 떠벌리는 사기꾼이 되지
않으려면 온 국민이 한 마음이 되어 자연을 살리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병든 한반도가 치료될 수 있습니다. 금수강산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
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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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