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7년 4월 21일(금)
장소 : 남해 일원
반월당(08:00 출발) - (167.0km. 2시간 14분) - 남해대교.충렬사(10:14 도착. 관람 46분. 11:00 출발) -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11:07 도착. 관람 1시간. 12:07 출발) - (11.8km. 22분) - 남해읍에서 점심(12:29 - 1: 29) - (3.9km. 6분) - 보물섬마늘나라(1:35 도착. 관람 40분. 2:15 출발) - (9.8km. 15분) - 용문사(2:30 도착. 관람 50분. 3:20 출발) - (12.3km. 22분) - 가천다랭이마을(3:42 도착. 관람 1시간. 4:42 출발) - (191.5km. 2시간53분) - 반월당(7:35 도착)
*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남해 충렬사(南海 忠烈祠.사적 제233호.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열(忠烈)이란 액호(額號)를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온 이 사당이 창건된 것은 인조 때 일이었다. 이충무공이 관음포 앞바다에서 전사한 직후 그의 유구(遺軀)가 한 때 이곳에 안치되었는데, 1632년(인조 10) 이곳 유림들이 그 옛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그 최초의 사당이다. 그 후 공이 순국한지 일주갑(一周甲)이 되던 해인 1658년 (효종(孝宗)9) 통제사 정익(鄭익)이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지으니 이것이 충렬사의 중건(重建)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63년(현종(顯宗) 4) 이 사당은 통영 충렬사와 함께 사액(賜額)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 현재 사당 곁에 있는 충무이공묘비(忠武李公廟碑)이며, 1661년(현종 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그 비문을 쓴 이비는 1663년에 통제사 박경지(朴敬祉)등이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참고로 해 둘 것은 옛날 이 충렬사 곁에 호충암(護忠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가까운 화방사(花芳寺)의 승도 10명과 승장(僧將)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충렬사지(忠烈祠誌)」에 의하면, 이것을 수직(守直)하던 승장 유습(裕習)이란 사람의 꿈에 이충무공이 현몽한 내용의 일화가 실려 있다. 유습이 밤에 잠이 들었는데 공(公)이 나타나 그를 꾸짖기를“ 너는 왜 산을 순시하지 않느냐”고 하여 깜짝 놀라 일어나서 여러 승려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산속을 돌아보니 사당 뒤에다 어떤 사람이 암장(暗葬)을 해 둔 것을 발견, 이튿날 이를 관가에 보고하여 조치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일화는 허튼 이야기가 아닌, 충무공의 영험(靈驗)이 그만큼 생생하게 이곳에 현현(顯現)하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충무공이 순국한 후 이곳에서는 자운 (紫雲)이란 승려가 매년 쌀 수백석을 가지고 노량바다에 와서 공을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올렸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자운은 임진왜란 초부터 충무공 휘하에 들어가 해상 의승장(海上 義僧將)으로 활약했던 승려로서 평소에 공을 흠모한 것이 순국한 뒤에는 그의 충의를 깊이 사모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 충렬사는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된 후 현재 경내에서는 사당 외에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등의 시설들이 보수 정화되어 있다. 그리고 사당 후원에는 충무공의 순국 직후 유구(遺軀)가 가장(假葬)되었던 자리에 가분묘(假憤墓)가 남아 있으며, 1948년 정인보가 쓴 것을 경남도청에서 세운「충렬사비(忠烈祠碑)」가 현지에 있다.
補天浴日(보천욕일.補(기울 보) 天(하늘 천)浴(목욕할 욕) 日(해 일).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박정희 대통령 친필)
‘보천욕일(補天浴日)’이란 '하늘을 수리하고 해를 목욕 시킨다'는 뜻으로 정유재란 때 명나라 어왜도총관 전군도독부 도독의 신분으로 전란에 참가한 명나라 진린(陳璘) 도독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과 함께 승리를 이끌었지만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운명을 달리하자 장군의 공을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이 있다”고 보고하였고 보천욕일은 ‘어마어마한 공적’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중국 신화에서 비롯됐다. 이에 명나라 신종(神宗)황제가 이순신장군에게 명조(明朝) 팔사품(八賜品)을 하사하니 1966년 2월 4일에 보물 제440호로 지정이 되어 현충사에 보관하고 있다.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南海 觀音浦 李忠武公 遺蹟.사적 제232호.경남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
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들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 이에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그 후 순조 32년(1832)에 왕명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단과 비, 비각을 세웠다. 1965년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를 경내에 걸었다. 이락사와 관음포 앞바다는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의 공로와 충의가 담긴 역사의 옛터일 뿐 아니라 전쟁극복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성운해(大星殞海) :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
남해 용문사(南海 龍門寺. 경상남도 남해군 용문사길 166-11 (이동면))
원효대사께서 그 곳에 첨성각을 건립하고 선교의 문을 열어 그 명성을 떨치었으나 이후 보광사의 사운(寺運)이 기울자 조선 현종 원년(1660)에 백월대사께서 용소리 호구산에 터를 정하고 사찰을 옮기게 되었다.
이후 신운화상이 첨성각 근처에 탐진당을 세우고 상법화상이 적묵당을 건립하는 등 중창을 거듭하여 오다 현종 7년(1666)에 백월대사께서 대웅전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다.
이어 숙종 35년(1709)에는 염불암이 중창되었고 절의 맞은편에는 백련암 영조27년(1751)이 건립되었다.
조선 숙종 때에는 수국사로 지정되어 왕실에서 경내에 원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는 등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연옥 등, 촛대와 번 그리고 수국사금패 등이 유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용문사는 호국사찰로서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구해냈으며 그때 사용했던 삼혈포와 목조 구사통이 지금까지 보관되어있다.
지금의 사찰은 본사중흥 대공덕주로 모셔지고 있는 호은당께서 서기 1900년에 복원 중흥한 것이다.
소장 문화재로는 보물 1446호 괘불탱화와 보물 1849 대웅전 유형문화재 7전 지방문화재 2점 문화재자료 7점을 보관하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1996년부터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 운영되고 있는 용문사는 전법도량이자 불교계를 대표하는 천년지장도량으로 지금도 성불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 도량이다.
용문사천왕각(龍門寺天王閣.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0호.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용소리))
용문사는 조선 중기에 탐진당과 적묵당을 지었는데, 이곳 자리가 좋다하여 금산의 보광사 대웅전 등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고 절의 이름도 용문사라 하였다.
절의 입구에 있는 천왕각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지었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는데, 다른 절의 경우 마귀를 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은 부정한 양반이나 관리를 밟고 있다. 동쪽은 지국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비파, 칼, 용, 창 등을 들고 절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문지기 구실을 한다
남해용문사목조사천왕상(南海龍門寺木造四天王像.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8호)
용문사 천왕문 내 좌우측에 목조천왕좌상이 각각 2구씩 배치되어 있다. 향우측에 東方 指國天王, 南方 增長天王, 향좌측에 西方 廣目天王, 北方 多聞天王이 위치하며, 4구 모두 발을 아래로 내린 기형으로 발밑에는 잡귀 1구씩 각각 밟고 있다.
두부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몸에는 갑옷을 착용하였는데, 양쪽 어깨에서 발 아래까지 천의자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손의 지물로 동방은 琵琶, 서방은 龍과 如意珠, 남방은 長刀, 북방은 寶叉를 쥐고 있다.
사천왕상의 제작방법은 분할제작 기법으로 각 이음부분에 나무심을 끼워 처리하였으며, 때로는 철심으로 고정하였다.
상호는 방형이며 모두 분홍색이나, 다문천왕상은 적색을 띤 연한 검푸른빛의 육신색을 발라 구별하고 있다.
보관은 일부 장식들이 탈락한 것으로 보이나, 현재 증장천왕을 제외한 나머지 천왕들의 경우 무궁화를 장식하고 두 마리의 봉황이 서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각종 꽃으로 장식하였다. 증장천왕의 경우 보관 중앙에 날개를 크게 편 봉황 한 마리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꽃과 화염문을 장식하였다.
착의는 肩甲 胸甲 腹甲 腰甲을 입었고, 머리 뒤쪽에서부터 발끝까지 대의가 늘어뜨려져 있는데 두부에 위치한 천의에는 대형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고 하반신 아래 부분에는 8자로 매듭지어 있다. 증장천왕과 다문천왕의 대의는 결실된 상태이다.
사천왕상 발아래의 생령좌는 따로 만들어 배치하였는데 악귀가 아닌 세속 관리인의 모습이다.
남해용문사봉서루(南海龍門寺鳳棲樓.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94호)
봉서루에는 「佛丘山鳳捿樓並序」(1720년)와 「靈山殿天王閣鳳捿樓重修記」(1833)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초창은 1720년에, 현재의 모습을 보이는 구성의 중창은 1833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용문사의 입구에서 일주문과 천왕교를 건너 천왕각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사찰 영내로 진입하는 주축상에 놓인 건물이 봉서루이다. 일주문에서 천왕각의 진입방향은 동남향의 축이며, 봉서루 이후의 사찰배치는 남향의 축으로 놓여있어 진입축과 배치축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위치에 놓인 건물이다.
봉서루는 정면 7간, 측면 4간의 팔작지붕으로 된 중층건물로서 누하진입형식의 공간구성을 하고 있으며, 높은 단차를 해결하기 위해 하층의 기둥을 높게 처리하였다. 이 하층의 기둥은 근년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주로 바꾸어 원래의 형상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하층 서측 후면의 석주 2기는 재래의 것으로 판단되는 석재로 3단으로 된 더럼형상의 기둥을 수직으로 쌓아 구성한 특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하층의 공간은 전면은 비어 있으며, 후면에서는 중앙의 통로를 제외한 공간에 창고공간을 마련하여 벽을 막았다. 상층의 바닥은 맞보형의 우물마루로 구성되어 있는 넓은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벽의 구성은 전면과 측면이 바라지 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웅전을 향한 후면은 개방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나, 근년에 교살창의 삼분합문을 달았다. 누의 중앙에는 1열의 기둥열을 두었다.
지붕가구는 무고주 7량의 구조로 비교적 규모가 큰 구성을 이루었고,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네 모서리에는 선자연이 잘 구성되어 있다. 공포는 조선 후기의 초익공 형식이다. 내진주에는 교두형의 첨자에 주두를 두었고, 종도리의 대공은 판대공으로 구성하였다. 보의 단청은 적지 않게 변색이 되었지만 원형을 알아보기에 어렵지 않을 정도이며, 연등천정을 새로 칠하였다.
남해 용문사 대웅전(南海 龍門寺 大雄殿. 보물 제1849호. 경상남도 남해군 용문사길 166-11 (이동면))
남해 용문사 대웅전은 중창기록과 건축양식으로 볼 때, 조선 현종 7년(1666)에 일향화상에 의해 건립되고 영조 47년(1773)에 중수가 완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기단은 지형을 고려하여 전면은 2단으로 높게 형성하고 배면과 측면은 1단으로 구성하였다. 기둥은 4면의 우주를 평주보다 크게 사용하였고, 전면과 후면 그리고 측면의 순서로 기둥 크기를 달리하여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팔각형 초석 위에 팔각형 활주를 세워 구조적 안정을 꽤하고 있다.
공포형식은 외 3출목 내 4출목이며, 주간포의 개수를 전·후면은 각각 2개, 측면에는 1개를 적절하게 놓아 공포간격을 조절하여 완결성을 높이고 있다. 공포는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강하게 주며, 살미에는 장식성이 강한 연꽃, 연봉을 초각하였다. 보머리에는 봉황과 용의 머리를 초각하여 18세기의 장식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건물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웅장하게 구성하여 전면에서 볼 때 장중한 느낌을 준다.
내부의 고주는 측면 기둥열에서 약간 후퇴시켜 불단 공간을 넓게 사용하는 18세기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가구는 1고주 5량가로 대량은 내부고주에 걸쳐 배면 평주까지 통부재로 연결하고, 좌우의 평방도 통부재로 사용하여 앞뒤로 벌어지는 응력에 대비하였다.
특히 대웅전 반자에는 바다를 상징하는 거북, 게, 물고기, 해초 등을 조각하여 바닷가 건축물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데, 이러한 모습은 해남 대흥사 천불전, 나주 불회사 대웅전의 빗반자에 나타난 물고기 장식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남해 용문사 대웅전은 평면구성과 공포의 표현기법, 상부 가구와 닫집 등에서 수려한 장엄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이러한 장엄의 극치는 18세기 이후 건립된 사찰 주불전의 특징적 건축양식으로 서남해안 지역의 건축경향이 동쪽으로 확장되며 발전하는 양식적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건축양식과 가구수법 및 포작의 장식성이 뛰어난 건물로 현존하는 남해안 해안지역의 사찰건축 중에서 흔치않은 귀중한 불교문화유산으로 건축사적 가치가 크므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의 가치가 있다.
남해용문사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南海龍門寺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66호.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이동면 용소리 868)
이 삼존불은 대웅전 중앙에 위치한 장방형 불단 위에 각각의 연화좌를 두고 그 위에 봉안되어 있다. 머리 뒤편 정수리 쪽으로 서너 개의 나발이 결손 되었거나 소매와 군의자락에 도금이 탈락한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세 구의 불상은 저부에 마련된 복장공이 모두 열려 있었고, 복장물 역시 대부분이 도난당한 상태였으며, 그중 경전 · 다라니 등이 불상 내부의 목 부분과 팔, 다리 쪽으로 끼워져 남아 있었다. 또한 양측 협시상은 저부의 복장공 외에 배면 중앙에 타원형의 복장공을 따로 만들어 다른 판재로 엉성하게 덧대어 마감되어 있었다. 배면에 마련된 별도의 복장공은 팔의 내부나 머리와 같이 좌상의 밑바닥에서 복장물을 채우기 어려운 것을 쉽게 처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남해용문사건양2년영산회상탱(南海龍門寺建陽二年靈山會上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7호.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용소리))
建陽2年(1897)에 조성된 작품으로 화면 중앙에 위치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전방 좌우측에 협시인 문수ㆍ보현보살과 사천왕 중 2구가 배치되어 있고, 그 상단에는 미륵·제화갈라·관음·지장보살 4구가 각각 2구씩 배치되어 있으며, 가장 상단에는 대제자상·8금강(4구)·사천왕상(2구) 등의 권속들을 꽉 차게 배치하고 있다. 권속들의 모습은 화면 아래에서 위쪽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하여 상승감을 주고 있다.
색채는 백색·녹색·적색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청색과 회색을 사용하고 있다. 본존의 육신부는 백색바탕에 굵고 가늚이 없는 먹선으로 윤곽선을 묘사하고 있다. 두부는 흑색을 머리는 흑색으로 바른 뒤 녹청선으로 가장자리의 윤곽선을 둘렀다. 우견편단식의 홍색대의는 가장자리에 화문을 장식하여 화려하게 처리하였고, 대의 이면은 청색을 발라 홍색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접히는 부분을 음영으로 표현하여 의습 자락을 나타내고 있다. 본존의 협시보살과 권속보살의 경우도 본존의 기법과 거의 흡사하며 방형 화면의 모서리진 4곳에 각각 배치된 사천왕상 가운데 하단 좌우측 가장자리에 전신을 드러낸 광목천왕(향좌측), 증장천왕(향우측)은 홍색·청색·녹청으로 배색된 갑주를 입고, 회색 구름위에 시립하고 있는 모습이 화려하다. 안면은 백색에 담갈색으로 음영처리를 하여 굴곡을 나타내고, 붉은 입술에 가늘고 짙은 먹선으로 파상형의 수염 형태를 반복하여 그렸다. 바닥과 천공의 여백에는 청색을 바르고, 화면 상하단과 중간에 구름을 배치하여 도상 간에 경계를 짓고 있다. 구름은 적운문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담황색과 회색의 농담을 사용하여 음영표현을 나타내고 있다. 현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표현기법이 전통화법에서 근대수법이 가미된 것으로 보이는 화기에 의하면 화원이 片手 蓮湖 奉宜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 관여하였으며, 시주자도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므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관리 함.
남해용문사삼장보살탱(南海龍門寺三藏菩薩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2호.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용소리) )
삼장보살탱의 구성은 상하 2단으로 상단에는 세보살상과 권속들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각종 신중상들을 배치하고 있다.
먼저 상단의 경우, 중앙에 천장보살과 그 좌우에 합장형의 진주·대진주보살을 두고, 그 좌측(향우측)에는 지지보살과 용수·다라니보살이 시립하고, 우측(향좌측)에는 정형의 지장보살상 좌우에 도명과 무독귀왕이 합장하고 있다. 그리고 화면 위쪽에는 천부중, 신중, 명부중 등 제권속들의 상반신만 묘사된 채 화면을 메우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가운데 동자 2구외에 22구의 신장상이 상하 2열로 배치되어 있다. 화면 상하단과 보살상과 권속들 간에는 각각 구름을 배치하여 도상을 구분 짓고 있다. 화면 하단은 황토색으로 채색하여, 신중상들이 밟고 있는 지면을 표현하고 있다. 주조색은 주색·녹청·살색이며, 부분적으로 청색과 회색을 활용하고 있다. 삼장보살의 육신부는 살색바탕에 먹선으로 그은 뒤 다시 옅은 갈색 세선으로 윤곽을 잡고 있다. 그리고 눈썹과 콧수염, 턱수염은 짙은 녹청색으로 채색하여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용문사 대웅전 반대 측 벽면에 걸려있는 神衆幀(1897년)과 동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이 역시 규모(縱186.3, 橫255.5cm)가 비교적 큰 편이고, 19세기 삼장보살 도상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형성이 엿보여 문화재자료로 지정 함.
남해용문사건양2년신중탱(南海龍門寺建陽二年神衆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3호.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용소리))
화면 하단 중앙에 위태천을 중심으로 12신장상을 배치하고, 상단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좌우측에 배치하고, 그 주위에 천녀·천동과 제권속들이 둘러싼 모습이다. 색채는 주로 백색·적색외에 녹색과 청색을 사용하였다. 위태천·범천·제석천의 육신부는 백색에 붉은색이 약간 감도는 분홍색을 바르고, 부분적으로 담묵을 사용하여 음영을 표현하였으며, 윤곽은 먹선으로 처리하였다. 위태천은 갑옷을 입고 날개 달린 투구를 썼으며, 갑옷위에 표범무늬의 털가죽을 걸치고 있다. 가죽표현은 담갈색을 바른 뒤 담묵으로 범피문을 표현하고 얇은 백색선과 흑색선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범천·제석천상은 천부상의 착의를 하고, 어깨에 각각 녹색과 청색의 천의를 걸치고 있다. 그리고 착의표현에 있어 몰골법으로 문양이나 주름, 매듭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었다. 또한 하단부의 구슬장식 문양이나 갑옷에는 안료를 실제 구슬장식처럼 두텁게 발라 입체감 있게 표현하였다.
본 작품은 현재 상태가 다소 양호하지 못한 편이나, 建陽 2年(1897)에 조성된 작품으로, 19세기 신중탱화로서 규모(縱194.5cm, 橫213.5cm)가 비교적 큰 편이고, 작품제작에 많은 사람이 관여하였으며, 조형성이 엿보여 문화재자료로 지정 함.
용문사석불(龍門寺石佛.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8호.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용소리))
약 300년 전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 경내에서 발견된 보살상이다. 현재는 하얀 분칠을 한 상태여서 본래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원만하나 눈과 입이 작고 코가 큼직하여 다소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긴 상체에 넓은 무릎 등은 부피감이 풍부하고 탄력적이어서 보살상의 격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는데, 띠주름 무늬가 자연스러워 불상의 특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왼손은 배에 대고 병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대었는데 연꽃가지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
통일신라 후기의 원만한 특징이 표현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 내지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려한 건축양식과 가구수법 및 포작의 장식성이 뛰어난 건물로 현존하는 남해안 해안지역의 사찰건축 중에서 흔치않은 귀중한 불교문화유산으로 건축사적 가치가 크므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의 가치가 있다.
용문사명부전(龍門寺冥府殿.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1호.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용소리) )
용문사는 조선 중기에 세운 절이다. 처음에는 탐진당과 적묵당이 있었는데, 근처 금산의 보광사 보다 좋은 자리라고 하여 백월당 스님이 보광사 대웅전 등의 건물을 옮기고 ‘용문사’라 하였다.
명부전은 임진왜란 뒤에 세웠다고 전하나 지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지장전,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건물 안쪽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十王)을 좌우에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은 모든 인간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시왕은 지옥계의 심판관이다.
남해용문사목조지장시왕상(南海龍門寺木造地藏十王像.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6호)
두부가 민머리인 지장보살상은 상반신을 곧게 세워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양감있고 건장한 모습이다. 신체적 특징은 무릎이 높고 像底前後徑이 넓으므로 불신의 안정감을 더해준다.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우며 살집이 있고 턱 부위를 모나지 않게 표현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이마가 아주 넓은 편이고 눈썹사이에는 백호가 돌출되어 있다. 눈은 옆으로 길고 눈꺼풀이 두꺼운 편이다. 코는 콧날을 완만하게 하고 콧방울을 작게 나타냈으며, 인중은 뚜렷하고 넓게 패여있다. 도톰한 입술은 입술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띤 모습이며, 귀는 크고 두꺼우며, 귓바퀴가 뚜렷하다. 목은 짧은 편으로 3조의 융기선을 평행하게 처리하여 삼도를 표현하였다. 양손은 제1지와 3지를 맞대고 양 허벅지 위에 각각 두었는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양손의 손톱은 비교적 크며 손마디 조각도 뚜렷하게 처리하였다.
착의법은 상체에는 가슴 아래로 평행하게 보이는 승각기를 먼저 입고,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대의를 입었다.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진 대의는 목덜미에서 한번 접어서 양쪽 어깨를 덮고 흘러내렸으나, 오른쪽은 어깨부분만 감싼 변형통견식 착의이다. 대의는 양쪽어깨에서 3조의 주름선을 계단식으로 정연하게 표현하였다. 군의는 결가부좌한 양다리 아래로 넓게 드리워져있는데, 가장자리의 조각면이 매우 두껍다. 법의처리는 매우 두꺼우며 옷주름을 굵고 간략한 몇 조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좌협시 도명존자는 오른손에 석장을 쥐고, 우협시 무독귀왕은 합장은 한 채 각각 시립하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어깨가 넓어 당당해보이고 온화한 인상이다. 얼굴은 방형이며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시왕상들은 모두 등받이와 팔걸이, 족좌가 있는 의자에 앉아 정면을 향한 자세이며, 표현기법은 거의 동일하다. 두부에는 무독귀왕상과 같은 원류관 형태의 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홀(제5·6·7·8·9·10상)을 쥔 경우, 책과 붓(제1·2상)을 들고 있거나 손을 무릎 위에 걸친(제3상) 다양한 모습이다. 얼굴의 세부표현은 도명과 무독상과 거의 같은데, 입꼬리가 올라간 상태에서 백색 치아를 드러내어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은 매우 해학적이다.
착의법은 역시 상체에는 紅袍를 입었고, 하체에는 청색 혹은 홍색군의 위에 녹청·백록·청색 등의 요포를 걸쳤으며, 가슴부분에는 군의를 묶은 백색의 띠매듭이 발목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또한 가슴 중앙에서 부터 綬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화문을 도드라지게 장식하였는데 이는 따로 제작하여 끼워넣은 것이다.
의자는 각각 조립하여 구성하였고, 족좌를 따로 부착하였다. 등받이 양측에는 용두장식이 있고, 팔걸이의 양측에는 鳳凰頭를 장식하고 있다.
남해용문사괘불탱(南海龍門寺掛佛幀.보물 제1446호.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용문사 (용소리))
남해용문사괘불탱은 본존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상만을 배치시켜 삼존도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상을 위시하여 좌측(向右)에는 정면을 향한 채 똑바로 서서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 보살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向左)에는 좌협시보살상과 동일한 자세로 서서 연꽃가지를 받쳐 든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본존불상은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오른손을 길게 내려뜨리고 왼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올린 채 두 발을 좌·우로 벌려 연화좌를 딛고 서 있는 입불상으로, 둥글넓적해진 형태에 눈·코·입이 작게 묘사되고 미소가 잘 보이지 않는 경직된 표정의 얼굴은 수평으로 들어올려 각이 진 어깨와 더불어 18세기 후반 이후 불화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 특징이다.
좌협시보살상은 보관을 쓰고서 여의를 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석가모니불의 좌협시인 문수보살상이라 추정된다. 머리 크기에 비하여 어깨가 좁아지고 작아진 발로 인하여 위축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팔에 걸쳐 흘러내린 길고 굵은 천의자락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우협시보살상 또한 좌협시보살상과 표현이 유사하다. 그림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다.
이 괘불탱은 인물의 형태 및 표정, 신체 비례 등에 있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의 전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직된 듯 조화롭고 세련된 표현기법을 보여주어 18세기 중반 이후 불화 연구의 자료적 가치가 크다.
남해용문사목조(南海龍門寺木槽.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7호)
표면에 목리가 뚜렷하고, 일부 균열이 있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통나무 가운데를 파서 만든 구유형태의 紙槽로 양끝에는 각각 37cm, 47cm의 턱받이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중 한곳은 턱받이 밑에 부착된 세로부재에 직경 7.5cm의 원공이 관통되어 있다. 용기 내부의 중앙 바닥에는 배수를 위한 직경 5.5cm의 원공이 뚫려 있다.
남해용문사건륭이십오년명운판(南海龍門寺乾隆二十五年銘雲板.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8호)
운판의 형태는 정상부의 보주형 장식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원형의 당좌를 중심으로 외곽을 화염형으로 처리하였다. 일반적인 운판의 형태가 구름모양을 띠는 것과 달리 이 운판은 화염형에 가까운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좌우보다 상하가 긴 형태이다. 앞뒤 면 모두 당좌 주변에 돋을새김 문양을 장식한 양면식 운판이다.
당좌의 상부에는 梵字 삽입 원권문 3개가 삼각형 구도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정상부와 좌우에 매달기 위한 구멍이 각각 1개씩 모두 3개가 뚫려있다. 당좌는 이중 원형 테두리를 둘러 구획하였는데, 당좌 내부에는 별다른 彫飾이 없고, 테두리 안에는 도식화된 蓮唐草文이 시문되어 있다. 그리고 당좌 주위의 여백에는 궐수문과 구불구불한 선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데, 운판이라는 유물의 성격으로 볼 때 도식화된 운문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당좌의 둘레에는「乾隆二十五年庚辰五月日」과「晋州百泉寺」라는 명문이 점각되어 있다. 그리고 배면의 문양구성 역시 당좌 테두리 내에 연당초문이 생략되었을 뿐 전면과 동일하며, 「道光十七年丁酉二月日買得」과 「南海竜門寺」라는 점각 명문이 새겨져 있다.
남해용문사부도군(南海龍門寺浮屠群.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5호)
부도1·2·3은 석종형으로, 胴體 1장과 대석 1장 총 2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동체는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종 모양이다. 부도1의 지상에 노출된 기단석은 팔각형이나, 각 변의 길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체를 얹은 대석 둘레에는 복련 단판연화문이 둘러져 있으나 다소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부도3(洗淡堂一行大師)은 종신의 상단과 하단에 연화문이 돋을새김으로 뚜렷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상륜은 꽃잎이 살짝 벌어진 연꽃봉 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부도4는 총 9기의 부도중 제일 작은 규모로, 기단석 1장, 胴體 1장, 옥개석 1장 총 3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동체는 중간이 배가 불룩한 원통형 기둥 모양이며, 옥개석은 방형으로 각 모서리가 약간 반전하고 있다. 옥개석 중앙 부분은 가운데가 둥글게 파여있고, 그 가장자리가 약간 파손된 상태이다.
그리고 대석 1장, 胴體 1장, 옥개석 1장 등 총 3장의 돌로 구성된 부도5는 커다란 자연석 암반 위에 설치하여 암반이 지대석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다. 대석은 상하로 구분하여 상단은 원형으로 다듬고, 하단은 4각형으로 처리하여 각각 문양을 새기고 있다. 중간이 불룩한 6각형의 의 동체는 종신의 길이가 폭에 비해 긴 편이며, 동체 상하단에 역시 문양을 새기고 있다. 옥개석은 평면 4각형으로, 옥개석 중앙에는 둥근 복발이 얹혀있고, 복발에는 음각 파문이 새겨져 있다.
부도6·7도 석종형 부도로, 총2장(대석 1장, 동체 1장)로 구성되어 있다. 동체는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형식으로, 종신의 길이가 폭에 비해 긴 편이다. 종신 상하단에는 문양이 둘러져 있는데, 상단은 양각, 하단은 음각으로 처리되어 있다. 상륜은 보주형태를 띠고 있다.
부도8은 기단석 1장, 대석 1장, 동체 1장, 옥개석 1장 등 총 4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석은 자연석을 사용했으며 땅 속에 묻혀있다. 대석은 8각형으로 다듬었으며, 옥개석은 사각의 지붕 모양을 하고 있다. 옥개석 정중앙에는 목을 쭉 빼고 있는 자라(혹은 거북이)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부도8의 경우 胴體에 명문이 일체 없으나, 그 옆에 별도의 標石(解塵堂天海大師族錄碑)이 있다. 이 표석 전면에 걸쳐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비교적 얕게 새겨져 있으며 비·바람에 많이 마모된 상태이다.
부도9는 기단석 1장, 종신 1장로 구성되어 있고, 기단석은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대석은 없다. 동체는 아래로 내려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형태이며, 동체 상단에는 11엽의 단판연화문 양각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상단 정중앙에는 보주형태의 상륜을 설치하고 있다.
보물섬마늘나라(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남해대호 2443)
경남 남해군 이동면에 위치한 전국 유일의 마늘 박물관이다.
예로부터 유명했던 남해마늘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 다른 지역과의 차별화를 위해 38억원을 투입하여 총 부지면적 7,520㎡의 규모에 1, 2층으로 이뤄진 1,025㎡ 규모의 전시관을 세웠다. 전시관에는 제 1·2전시실, 영상정보실, 세미나실, 중앙정원, 마늘 명품관 등을 마련하여 마늘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으며 2005년 5월 12일, 제1회 보물섬 마늘축제 개최에 맞춰 개관하였다.
보물섬 마늘나라 마늘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 자료 수집·활용, 품질향상을 위한 실증시범과 체계적인 마늘연구를 통해 보물섬 남해마늘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알려 나갈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전시관 앞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마늘 조형물은 보물섬 남해마늘의 우수성을 알리고, 농업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미래 마늘 산업의 성장을 소원하는 의미심장한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남해 가천마을 다랑이 논(南海 加川마을 다랑이 논.명승 제15호.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777번지 등)
"다랑이 논"은 선조들이 산간지역에서 벼농사를 짓기 위해 산비탈을 깎아 만든 인간의 삶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 형성된 곳으로 "가천마을 다랑이 논"은 설흘산과 응봉산 아래 바다를 향한 산비탈 급경사지에 곡선형태의 100여 층의 논이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배후의 높은 산과 전면의 넓게 트인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빼어난 농촌문화경관을 형성하고 있어 경관적(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가천마을의 유래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없으나 대대로 마을에서 살아온 김해 김씨, 함안 조씨 가(家)에 전해오는 자료로 미루어 볼 때 신라 신문왕 당시로 추정되어지고 있으며, 미륵전설과 육조문에 대한 전설이 고려시대 이전에 삶이 시작되었고, 400여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 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설흘산 봉수대(烽燧臺)는 이미 그 전에 이곳 가천마을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전해오는 마을의 옛 이름은 간천(間川)이라 불리어 왔으나 조선 중엽에 이르러 가천(加川)이라고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2년 농촌진흥청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었다.
논, 산림 및 바다의 자연적 요소와 가천암수바위, 밥무덤, 설흘산 봉수대,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섬)와 같은 문화적 요소는 명승적 가치를 한층 높이고 있다.
<참고 자료 : 문화재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