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드리는 작은 꽃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eb.pbc.co.kr%2FCMS%2Fnewspaper%2F2015%2F04%2Frc%2F567114_1.0_image_1.jpg) |
▲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들의 시신들. |
라크루 신부
1909년,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들은 온통 억새로 가득했다. 라크루(M.Lacrouts) 신부는 억새를 헤치며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제주의 거친 바람이 라크루 신부의 머리며 수단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라크루 신부의 심정도 거친 바람에 펄럭이는 수단 자락과 같았다. 그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원순 제주목 검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라크루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사제이며 제주본당 주임 신부이다. 1900년 라크루 신부가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신자들의 신심과 호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한불조약 이후, 천주교 포교 허락이 내려지자 성당은 치외법권의 성역이 되었다.
이를 악용한 일부 신자들의 경거망동이 주민들과 부딪치며 급기야 1901년, 피비린내 나는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이 발생했다. 난리는 신자들의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수세에 몰린 라크루 신부는 중국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에게 다급히 지원을 요청했고, 산지항 앞바다에 프랑스 함대가 진을 치고 섬을 봉쇄하면서 끝이 났다.
제주 거리는 신자들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나마 목숨을 건진 신자도 목포로 피란을 갔고 형편이 안 되는 신자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1000여 명에 육박했던 신자 중 30여 명만이 라크루 신부 곁에 남았다. 산처럼 쌓인 신자들 시체를 거두는 라크루 신부의 심정은 피를 토하듯 비통했다.
그러나 신자가 아닌 제주 주민들의 피해도 매우 컸다. 프랑스 함대는 출격에 대한 피해 보상을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고 정부는 피해 금액을 고스란히 제주 주민들에게 떠넘겼다.
어마어마한 보상금액은 주민들을 알거지로 만들었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반감은 더욱 깊어졌다. ‘신축교안’은 너나없이 제주 사람 모두에게 큰 상처였고 고통으로 남았다.
라크루 신부는 마음을 추슬러 얼마 되지 않는 신자들과 부모 잃은 신자들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성영회(聖孀會)’를 만들었다. 거리를 떠도는 비신자 아이들도 거두었다.
규모가 커지자 그는 ‘제주여학당’으로 발전시켰다. 신자들을 학살한 이들의 아이들을 돌보자 주민들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라크루 신부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영세한 보육 시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신식 여학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학생을 모집하기가 어려웠다. 이미 개신교 선교사가 세운 여학교가 있었다.
개신교 신자들은 공공연히 ‘천주교 신자들은 사람들의 눈알을 도려내고 어린이들의 골수를 빨고 다닌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내어 그나마 회복되어 가는 천주교인들의 평판에 찬물을 끼얹었다.
다급해진 라크루 신부는 아이 있는 가정마다 직접 방문하여 수업료도 무료이고 공부에 필요한 교과서, 학용품 모두 무료라고 선전했다. 덧붙여 신학문이 여성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일깨워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주 주민들은 여전히, 언제 또 끔찍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 천주교인들에게 싸늘했다. 안타깝게도 라크루 신부는 학생 모집에 실패하여 절망하고 있었다.
그가 애절한 심정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고종의 사위이며 개화파의 일원으로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 온 박영효 영의정을 알게 되었다.
박영효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 천주교 여학교 설립에 매우 긍정적이었다.
게다가 박영효는 제주목 검사 최원순에게 8살 된 영특한 딸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귀띔도 해주었다. 라크루 신부는 날개를 얻은 것 같았다. 사실 좀 더 영향력 있는 고위 공직자의 자녀들이 학교에 온다면 일반 주민들은 거부감 없이 따를 것이었다.
더욱이 최원순 검사는 탁월한 판단을 지닌 사람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고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들이 그를 많이 찾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eb.pbc.co.kr%2FCMS%2Fnewspaper%2F2015%2F04%2Frc%2F567114_1.0_titleImage_1.jpg) |
▲ 친구들과 놀고 있는 8살의 최정숙(맨 오른쪽). |
최원순과 박효원
최원순 제주목 검사의 집 마당으로 라크루 신부가 들어섰다. 집은 크지 않았으나 반듯하고 정갈했다. 하인이 라크루 신부를 최 검사의 사랑으로 이끌었다. 바로 그때 최 검사의 큰딸 정숙이 어머니 박효원 곁에서 놀다가 라크루 신부를 보게 되었다.
최정숙은 1902년 2월 10일 최원순과 박효원 사이 2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정숙의 어머니 박효원은 제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가의 딸로 마음 씀씀이가 깊고 넓어 최 검사 못지않게 주민들의 신망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정숙은 라크루 신부를 보자 어머니 뒤에 숨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검고 긴 치마를 입은 남자는 키가 무척 컸다. 짧은 머리는 옥수수처럼 노랗고 눈은 소 눈처럼 크며 수염은 길고 풍성하여 얼굴을 모두 덮었다.
정숙은 너무도 낯선 사람의 등장으로 겁이 났다. 어머니는 정숙의 등을 쓰다듬어 안심시켜주고 부엌으로 나갔다. 평소 자상하고 무엇이든 잘 알려주던 어머니가 그늘진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나가자 정숙은 걱정도 되면서 무척 궁금하였다.
어머니는 남편 최 검사로부터 박영효 어른이 정숙을 학교에 보내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박영효가 처음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 사정을 잘 모를 때 최 검사 내외가 많은 도움을 주면서 퍽 가까워졌다. 어머니는 여자도 남자만큼 배울 수 있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제주는 봉건 사상이 강해 남녀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었고 여성 천대 사상이 유별났다. 어머니는 여학교가 여럿 생겼다는 소문도 들었다.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고 질문하는 요량도 남달라 상대방을 진땀 나게 하는 정숙을 어머니는 내심 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 학교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최 검사가 천주교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천주학쟁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흉흉한 기운이 아직 거리에 남아 있었다.
또한 최 검사는 정부에서 학교를 인가할 때 지도하는 수녀가 학생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고도 말했다. 사실 이 부분은 일본이 장차 계획한 식민지 교육에 종교가 걸림돌이 되지 못하도록 일찌감치 교육과 분리시킨 의도적인 지침이었다.
그렇게 부인 박씨를 안심시켰지만 최 검사도 고민이 많았다. 박영효는 최 검사에게 일본인 학교는 일본인들의 자녀가 중심을 이뤄 얻는 것보다 차별을 배울 것이니 어차피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비록 천주교이지만 신문물의 종주국이어서 얻는 바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최 검사도 수긍하는 바였다.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개화 서당들이 많았지만 일어강습소들과 늘 다투고 비방하기 일쑤여서 교육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실로 불안한 사회였다.
작은 꽃
1909년 10월 18일, 가을 하늘이 맑고 높았다. 정숙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학교 가는 첫날이라며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따주고 고운 옷도 입혀 주었다. 지금 가고 있는 학교가 정숙은 너무 궁금하였다.
어젯밤 아버지가 내일 가게 될 학교의 이름이 신성여학교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버지에게 그 뜻을 묻자, 원래 뜻은 ‘새벽하늘에 빛나는 별’인데 학교 책임자인 라크루 신부가 알려준 뜻은 ‘길 잃은 자를 인도하는 성모 마리아의 별’이라는 것이었다.
정숙은 새벽에 빛나는 별도 근사한데 길 잃은 사람을 인도하는 성모 마리아는 누구일까 궁금해서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았다. 학교에 가면 알게 되겠지, 혹시 학교에 계시는 분일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어서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정숙은 아버지의 손을 재촉하듯 끌었다.
신성여학교 마당에는 부모 손을 잡고 온 여학생들이 소문보다 많았다. 정숙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누가 성모 마리아일까 하고 둘러보았다. 그때 집에 왔었던 라크루 신부가 보였다.
그 곁에 하얗고 커다란 왕관을 쓴 수녀 두 분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정숙에게 다가왔다. 라크루 신부의 요청으로 서울의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온 김 아나타시아 수녀와 이 곤자가 수녀였다.
정숙은 수녀들의 손을 잡고 여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면서 성모 마리아가 누구냐며 소곤소곤 물었다. 수녀들은 깜짝 놀라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계속>
필자의 말
자선이란 얼마나 풍요로운 말인지,
빈곤이란 말은 두렵다.
희생은 남이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입으로 머리로 가슴에 십자가를 그으며
그리스도를 닮기 열망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워하고 망설이고 외면한다.
최정숙 베아트리체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스도처럼
아무 조건 없이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폈다.
그리스도를 통해 배운 자선과 희생과 빈곤을
평생을 통해 실천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매일 넘어지고
바닥까지 미천해지는 삶을 이어간다.
그래서
최정숙 베아트리체의
빛나는 업적을 나열하기보다
인간적 고뇌와 좌절과 고비마다
주님께 의지하고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미약함에 중심을 두었다.
그의 절망을 위로해 주시고 감싸 안으신
주님을 함께 만나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