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210-박이문-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물음
-철학자 (또는 시인) 박이문(교수님)은 1999년 가을 포항공대신문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물음'이라는 제목으로 글 여덟 편을 남겼습니다. (그리곤 70세 나이로 포항공대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죠.) 그 글을 다시 정리(&교정)해 보았습니다. 원문을 보고 싶다면 여기를 누르세요. 구닥다리 매킨토시를 이용해서 플로피 디스크에 담긴 글을 건네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1회: 뒤돌아보는 자화상
2회: 단 한번밖에 못 산다
3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4회: 속물과 귀족의 구별은 있다
5회: 모든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경이롭다
6회: 알 것은 많고 배울 것은 무한하다
7회: 아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8회: 그래도 할일은 한없이 많다
1회: 되돌아보는 자화상
거울 속에 보이는 백발의 내 모습이 믿어지지 않는다. 저런 흰머리가 정말 내 머리이며, 주름진 얼굴이 정말 내 얼굴인가.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의 꿈속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현실과 꿈이 헷갈린다. 어쨌든 내 머리카락이 백발이 됐으니 긴 세월이 지나갔다는 것과 내가 오래 살아왔다는 것만은 확실하고, 고희의 나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참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나는 해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언제 어느 순간에 죽음이 벼락같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삶에 있어서 삶의 하루하루, 한 순간 한순간은 하나같이 다 아슬아슬한 기적이다.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뒤돌아 반성해보는 일이 더 나은 생각, 더 정확한 말, 더 적절한 행동을 하기위해서 만이라도 중요하다면, 자신의 지난 삶을 전체적으로 뒤돌아 반성해보는 일은 앞으로 더 바람직한 삶을 살기위해서 중요하다. 이 같은 반성은 그때그때 언제나 필요하지만, 머지않아 마무리하게 될 삶을 의식하게 될 즈음에는 더욱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부여하는 차원에서 한층 더 의미 있다. 약 반세기의 교편생활을 마감하게 되는 마당에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정체와 의미를 반성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역사적으로 일제시대에 태어나, 칠년 동안 일제교육을 받았고, 해방의 흥분과 혼란기, 한국전쟁, 5.16쿠데타, 군사독재, 한국의 산업화, 근대화, 그리고 마침내 민주화라는 숨 가쁜 격동기를 지냈고, 시간적으로는 20세기의 10분의 7을 살았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나는 어떤 존재인가. 지금 거울 속에 보이는 대로 나는 백발의 한 남자이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검은 머리카락이 좀 남아있었고, 20년 전만 해도 검은머리가 꽤 많았으며, 30년 전에는 흰머리가 전혀 없었다. 7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머리 색깔만이 아니라 신장, 체중, 또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성격적으로 부단히 달라져왔다. 그러니 그 동안 줄곧 사용되어왔던 '나'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할 수 없다. 불변하는 실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나'라는 것은 그냥 말뿐이다. '나'라는 말을 둘러싼 생물학적 존재의 변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나'라는 고정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밖과 안으로부터 일어난 변화의 산물이다. 아니 변화 그 자체일 뿐이다.
나는 어떻게 변해왔는가.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려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칠순이라는 연륜의 거울 속에 비치는 백발의 내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나의 기억 속에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수많은 나의 과거의 모습들이 산만하면서도 희미하고 드문드문 끊어진 상태로나마 오래된 필름처럼 펼쳐진다.
푸짐한 어머님의 젖을 빨며 무한한 충족감을 느꼈던 어릴 적 기억이 오로지 느낌으로만 되살아난다. 네 살 나던 겨울 급성폐렴에 걸려 일꾼의 등에 업혀 몇 십리 되는 온양온천까지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 어떤 기계 앞에서 가끔 먹던 약 냄새가 아직도 역력히 기억에 살아남아있다. 사랑방에서 항상 탕건을 쓰시고 긴 담뱃대를 물고 계시던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뜻도 모르는 천자문을 억지로 배우던 기억도 떠오른다. 나는 새 양말, 속 옷, 색동바지저고리를 갈아입을 수 있는 설날을 기다리곤 했다. 제사날 밤이면 사당에서 이웃동네에서 오신 작은댁식구와 함께 지내던 새벽제사의식에 참석하고자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제사가 끝난 후에 잠을 깨고 골을 내곤 하면서도 제사 밥을 맛있게 먹던 일도 기억에 남아있다.
20리 밖에 있는 읍내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 앞에 걸터앉아 실려 가면서 뒤따르는 동네아이들을 내려다보던 날이 머리에 떠오른다. 멀리 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늦은 봄이면 야산을 누비며 새둥지를 뒤졌고, 여름이면 개천에 발가벗고 덤벅 뛰어들어 물장난을 즐기던가. 논두렁이나 연못에서 고기잡이에 열중하곤 했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논에서 미끄럼을 타면서 손이 얼어붙어도 추운 줄 몰랐다. 눈이 쌓이는 날이면 먹이를 찾아 산에서 내려오는 알록달록한 방울새를 산채로 잡으려고 마당 앞에 '탑새기'를 뉘어놓고 나한테 속은 새들이 그 '탑새기'에 채이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다. 시간이 흐르는 줄 몰랐고,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재미났다. 여름이면 모기에 물리고, 겨울이면 달달 떨어야할 때가 많았지만 그 때도 나는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형들의 뒤를 따라 어느덧 서울로 '유학'을 간다. 남보다 일찍 사춘기가 닥쳐왔다.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세상과 인생이 이상스럽게만 보인다. 어른들의 세계는 물론 중고등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폭력을 목격한다. 불공평한 사회, 사람마다 짊어져야할 운명을 의식한다. 사회의 부조리, 성인들의 부조리, 세계와 운명의 무게, 사람들의 무지에 짓눌림, 아픔, 분노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무력감, 격동적사춘기와 맞물린 실존적 고뇌에 빠진다.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큰 고민을 혼자 짊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덧 염세주의자, 아니 허무주의자로 변해간다. 생판 처음으로 교회에도 나가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에게는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문학에 눈이 떴고 시인, 사상가, 문필가가 되고자하는 막연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나는 책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 돌아와 가난, 막막하기만 앞날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들뜬상태에서 나는 시를 쓰고 문학을 논한답시고 다방에 드나들면서 담배만 피워대거나 판잣집음식점에 앉아 학생증을 맡기고 같은 또래의 문학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동숭동대학골목과 명동거리를 건들거리고 다녔다. 나는 살고 싶었다. 멋있고 뜨겁게 보람 있게 살고 싶었다. 감상적일 만큼 로맨틱한 나는 소설에서 읽거나 영화에서 본대로 멋있고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있었다. 젊음을 아름답게 살고 싶었다. 이런 욕망을 갖지 않은 젊은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느 덧 4년간의 대학생활이 후딱 날라갔다. 나는 더 이상 그냥 학생이 아니다. 나는 어느덧 성인이 되어 어둡고 답답한 세상을 혼자 살아가야했다. 시간은 가혹하다. 한번 지나간 과거는 결코 회복할 수 없고, 한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며 또한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하나의 선택을 했다. 옳고 보람 있는 삶을 살자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보람 있는 것인가를 알아야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것도 철저히 투명하게 알고 싶었다. 모든 것에 투명하고 싶었다. 그러니 배우고 알아야할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나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이 무렵 어느 날 오후 종로3가에 있는 단성사 앞을 지나갈 때 눈에 언뜻 띠었던 'No Time To Love'라는 미국영화간판을 보고, '그렇다, 저 말이 지금 내가 꼭하고 싶은 말이다'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바쁜 걸음으로 사람들의 틈을 비키면서 앎의 길을 향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달리 일찍 찾아온 사춘기를 맞아 12살부터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때 나는 이미 배움의 길을 위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기로 혼자 결심했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길은 이화여대의 불문학과에 통하게 됐고, 그것은 어느 덧 파리의 소르븐 대학으로 이어지고, 5년 동안 그 주변을 정신없이 배회했다. 그 길은 다시 대서양을 날라 북미대륙을 지나 도착한 남가주대학으로 연장됐다. 거기서 2년 반 뒤 학생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공과대학인 뉴욕 주 소재 RPI에서 뜻하지 않게 철학교수로서 길을 시작한다. 2년 후 보스턴의 시몬스여자대학으로 옮겨 23년을 재직하다가 한 학기 후면 포항공대에서의 8년 반을 끝으로 1952년에 시작한 교편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지금 내가 후학들에게 인생과 학문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2회: 단 한번밖에 못 산다
누구나 단 한번밖에 못 산다. 나는 지구상에 한번 태어나서 지구상에서 한번 살다가 지구상에서 한번 죽는다. 인생은 지구상에서만 존재하고 단 한번뿐이다. 죽으면 흙으로, 분자로 분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렇게도 집착해왔던 나/자아는 '말'에 지나지 않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 고정된 영원한 '나/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과정일 뿐이고 인생은 우주의 찰나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영생,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나의 삶과 미래의 나의 삶, 천당과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참다운 자아와 참다운 영생은 '나/자아'라는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자연에 흡수되어 자연의 일부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자체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존재는 개나 돼지, 나무나 풀, 흙이나 먼지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하나의 갈대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그냥 돼지나 그냥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돼지이며 생각하는 갈대이다.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은 자연과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지혜, 결단, 의지에 따라 바꾸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의 이러한 인지적, 의지적 능력도 자연의 우연한 일부산물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한 능력으로 자연과 자기 스스로를 변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그냥 자연과는 다른 이상한 자연, 자연 아닌 자연이다.
인간이 그저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라는 사실은 이성의 거울에 비추어 알 수 있고, 인간이 동물, 식물, 세포, 물질과 다름없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은 과학이 보여주는 진리이다. 이성과 과학이 모든 대답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과 과학이 그려 보이는 세계보다 더 믿을만한 것은 아직 없다. 이성과 과학은 진리의 원천이다. 믿든 말든 사실은 사실이고 싫든 좋든 진리는 진리이다. 진리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요청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진리를 진리로서 인정하는 혜안이 필요하고, 이러한 혜안을 갖으려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직성,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성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의 인식이야말로 참다운 나의 발견의 유일한 바탕이며 뜻있는 삶의 원초적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영겁과 구별할 수 없는 우주의 시간에 비추어보면 인류의 역사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아득한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나의 삶은 일장춘몽에 불과하다. 그러한 순간도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반복될 수 없다. 삶은 살과 뼈, 피와 의식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개체로서만 존재하고, 개체로서의 삶은 일회적이다. 이런 점에서 세포에서 시작하여 벌레나 날짐승이나 원숭이나 인간의 삶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유일한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개체로서 살다가 개체로서 죽어 자연 그리고 우주로 회귀하여 영원한 순환의 궤적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 아무도 자신의 삶을 반복할 수 없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개체로서의 모든 생명은 단 한번만 산다. 영생이란 바로 이렇게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화하는 과정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눈을 떠보면 나는 이미 살아 존재하고 있다. 나의 존재는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나는 이유 없이 태어난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싫든 좋든, 이유가 있든 말든 나는 이유도 모르는 채 살아야한다. 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연히 어떤 특정한 때,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부모에 의하여 태어났다. 어느덧 유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지내고 어쩌다보니 어느덧 중년 그리고 백발노인이 되어 내 자신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볼수록 한 인간의 삶, 한 생명, 모든 존재는 아무런 궁극적, 초월적 의미가 없다. 사실 '궁극적 의미'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의미가 나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와 현상은 아무 궁극적 뜻 없이 그냥 있고, 그냥 변하고, 그냥 돌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내세와 천당의 부재, 아니 영원불변의 '나/자아'의 부재, 현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이고 이 지구에서 단 한번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한탄해야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내세와 천당이 없기에 현재의 삶은 더 절실하고, 단 한번밖에 살 수 없기에 현재의 이 삶이 한결 더 귀중하다. 보람 있는 삶을 사느냐 아니냐의 판가름은 오로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단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찰나 같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 해, 하루, 한 시간, 한 찰나는 그 하나하나가 더 절실할 수 있다. 단 한번만의 인생이 찰나같이 짧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심히 지내는 하루하루, 한 순간 한 순간은 무한히 귀중하고 낭비하기에는 잠시라도 너무나도 아깝다.
형이상학적, 초월적 인생의 목적이 없다고 해서 절망해야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만약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가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어 한없이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했을 것이다. 그러한 것이 부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인생의 목적과 의미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그 활동, 노력 자체에 있다. 인생의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서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 인간이 스스로 내부에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 존재의 우연성은 내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내 존재의 무의미성은 내 존재의 의미의 원천이다. 처음부터 나의 모든 삶의 과정이 필연적인 것이었다면 나는, 나의 존재는 하나의 무의미한기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원래부터 내 인생의 의미가 정해졌다면 나의 삶은 그냥 존재할 뿐 내가 사는 나의 삶으로서는 무의미하다. 인류가 한 종의 갈대로서 다른 종들의 갈대와 꼭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고 그 자체로서 무의미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류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야한다는 점에서 다른 갈대와는 다른 자연의 일부이고, 바로 이런 점에서 인류에게만 존재의 '의미'라는 말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존재의미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각자가 만들어낸 인생의 의미는 다름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의 구체적 과정들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정해지고 주어진 방법은 없다. 그것은 각자의 혜지, 선택, 결단, 의지에 달려있다. 인생의 의미가 단지 각 개인이 선택한 삶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의 인생의 의미와 마찬가지이며, 그렇다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되는 대로, 기분대로 살아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구체적으로 그 기준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항상 나올 수 있지만 성자같이 보낸 인생이 있고 개처럼 지내는 인간의 삶이 있으며, 예술작품 같은 인생이 있는가 하면 걸레조각 같은 인생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단 한번밖에 못살고, 단 한번밖에 선택할 수 없다면 나의 삶의 의미는 내가 현재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영원히 결정된다. 인생에는 재수가 불가능하다. 한번 망친 인생은 영원히 망친 인생이다. 삶에 대한 태도의 결정, 삶에서 추구해야할 가치의 선택문제 앞에서 한없이 숙연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일반적 기준은 없을까. '인간으로서 가장 떳떳할 수 있는 삶' 이외에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잣대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떳떳할 수 있는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권력인가. 부의 축적인가. 명성인가. 꼭 그렇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나쁠 게 전혀 없다. 그러나 권력자 가운데는 범죄자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고, 거부들 가운데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 허다하며, 명성을 누리는 이들의 뒤에는 감추고 싶은 그늘과 때가 많다. 쾌락인가. 쾌락을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공허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직업이 '인간다운 삶'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다움에는 직업의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직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태도이다. 자신의 신조에 따라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 철저하게 정직하고, 불꽃같이 타듯이 뜨거운 열정으로 살고자하는 태도이다. 똑바로 눈을 뜨고 소신대로 살자. 자신을 속이지 말라. 꺾이더라도 굽히지 말고 끝까지 꼿꼿하자.
3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돌은 그냥 있고 물은 그냥 흐르며, 풀과 나무는 그냥 솟아나고 자라다가 시들고 말라죽으며, 버러지나 짐승은 그냥 나르고 뛰며, 그냥 먹고 싸고 번식하다 죽는다. 어떤 돌 조각, 물방울, 풀, 나무, 버러지, 짐승도 자아에 대한 의식을 갖고 "나는 무엇이냐"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에 따라 그 시기와 심각성의 밀도는 다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아에 대한 의식을 하게 된다. 외부세상만을 보던 시선이 문득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되어, 엄마와 과자, 새와 토끼, 장난감과 책, 여자와 돈을 찾고 가려내던 생물학적 '내'가 갑자기 자신의 '나'를 찾게 되며, "나는 무엇이며,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희미하게나마 묻게 된다. 이런 물음으로 자연적 존재로서의 나의 삶에 금이 가고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긴다. 이런 상처내기는 동물학적 내가 인간학적 나로 변신하여 새로이 탄생하기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절차다.
'나'라는 일정한 즉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객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십여 년 동안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끊임없이 줄곧 변화해왔는데도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복돌이'로 불러왔다. 나/복돌이는 누구냐? 복돌이는 한국인이며, 어디 어디에 사는 아무개의 아들이며, 포항공대 일학년생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만족스럽지 않다. '한국인', '아무개의 아들', '포항공대 학생'은 복돌이의 우연적으로 결정된 자연적, 제도적속성이지 복돌이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돌이'로 불리는 나는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개체임에 틀림없다. 나는 아버지, 똘똘이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 아무도 내 대신 먹고, 자고, 배설하고, 고민하고 살고 죽을 수 없다. 만일 다른 인간이 나를 대신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나를 대신하는 것이지 결코 나 자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복돌이는 도대체 누구, 아니 무엇인가? 나는 우선 살과 뼈, 피 등 물질의 특정한 집합으로 규정될 수 있고, 이러한 물질적집합이, 세포나 더 나아가서 특정한 유전자로 분석될 수 있다면, 그 유전자는 다시 분자, 전자, 쿼크 등 한없이 미세한 물리적입자로 서술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물질과 근본적 차이가 없고 따라서 구별되지 않는다. 내가 이처럼 물질로 환원된다면 나의 유일성은 전혀 허상이다. 이처럼 가시적 즉 현상적 '나/복돌이'의 탐구가 불가능하다면 '나/복돌이'의 본질은 비가시적 즉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유명한 인간정의는 인간의 본질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가시적이며 가변적인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현상이 아니라 비가시적이며 비가변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라는 신념을 전제하고, 이 신념은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가지 속성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극히 서양적인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그러나 진화론, 정신분석학, 특히 오늘날의 첨단과학에서 볼 수 있듯이 실증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정신 특히 이성의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는 최근 해체주의, 더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그에 훨씬 앞서 동양의 불교나 도교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적 차원에서도 이원론적 형이상학은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과학이나 철학은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서로 분간할 수 없이 연결되어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백 보를 양보해서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인정하고,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을 '정신'이라는 특수한 속성으로 규정하더라도, 정신적 존재로서의 나/복돌이의 유일성을 규정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지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복돌이라는 말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 낱말이 유통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음을 입증한다. 나/복돌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나/복돌이는 앞서 보았듯이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물리학적차원에서 실증적으로 지각되거나 형이상학적차원에서 사념-적으로 직관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대상은 아니다. 그런 대상으로서의 나/복돌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복돌이는 형이상학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영원히 고정된 객관적실체가 아니라 각기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나/복돌이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내면적으로 반성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유동적인 주관적 경험 자체이다. 나/복돌이의 경험은 시간을 거치면서 항상 변하면서 새롭게 축적되는 만큼, 나의 경험의 내용은 수시로 변하는 그때그때의 경험의 총체이다.
경험의 총체로서의 나/복돌이는 세 가지 사실을 함의한다.
첫째, 나/복돌이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나/복돌이를 둘러싼 구체적인 물리적, 사회적, 이념적 및 실천적 관계로서만 규정될 수 있는 구체적인존재라는 것이다. 구체적인맥락을 떠난 경험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복돌이는 곧 나/복돌이가 한 지각적, 심리적, 행위적 및 생산적 경험의 총체이다.
둘째, 모든 나/복돌이들이 각기 갖게 되는 유일성이다. 모든 경험은 특정한 시간, 공간 그리고 구체적인현상을 떠난 경험은 상상할 수 없는데, 모든 시간, 공간 그리고 구체적인현상은 항상 변화하며 절대로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궁극적으로 모든 나/복돌이들이 각각 자유스런 존재라는 사실이다. 경험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물리적 반응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대한 해석이며, 해석은 인과적 현상이 아니라 주관적 관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총체'로 규정할 수 있는 나/복돌이는 처음부터 존재하거나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나/복돌이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다. 나/복돌이는 밖으로부터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복돌이 자신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인간의 본질이 자유라면 유일한 개개인의 본질 즉 정체성은 그가 실천한 자유의 독특한 내용, 양식, 결과 즉 그의 구체적인삶이다. 나/복돌이의 정체성은 곧 나/복돌이의 자유이며, 그에 따라 살아온 구체적 삶의 총칭이다. 자유는 선택을 함의한다. 그렇다면 나/복돌이의 정체성은 곧 나/복돌이가 선택한 가치, 태도, 행동, 활동의 총칭이다. 한 인간만이 자유롭고, 정체성은 인간에만 해당된다. 자유가 인간의 증거라면, 정체성은 개인으로서의 각기 나/복돌이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근거이고, 각기 나/복돌이의 정체성은 곧 그가 선택한 삶이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아무도 선택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은 책임을 동반하는 만큼 언제나 불안과 고민을 동반한다. 불안과 고민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으로 태어나기위해 치러야할 통과의식이며 대가이다. 고민할 때만 비로소 나는 그냥 동물로서의 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나를 의식할 수 있고 이러한 확인을 할 수 있을 때만 나는 나/복돌이의 유일성 즉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고민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대치되어야한다. "나/복돌이는 누구/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나/복돌이는 곧 나/복돌이의 고민이며, 그 고민의 깊이와 밀도이다"라는 명제라는 것이다.
왜 인간은 고민해야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행복한 돼지보다는 불행한 소크라테스의 삶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냥 물질, 그냥 짐승이 되기 싫기 때문이다. 왜 나/복돌이의 정체성이 중요한가. 대답은 단순하다. 나/복돌이가 다른 수많은 인간과 상품처럼 대치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상품과 같은 물건이 아니라 유일한 실존적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확인할 내적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주체다. 주체가 섰을 때만 나의 자유를 확인하고, 자유는 선택을 요청하고, 선택은 고민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고민이 없는 정체성은 있을 수 없다.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가치, 그것이 함의하는 어떤 원칙에 따라 행동하되, 부단한 자기반성을 통해서 경우에 따라 용감하게 그 원칙까지도 바꾸면서,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이다. 그러므로 고통 없이는 주체를 세우고 지킬 수 없다. 누구나 불행한 소크라테스보다는 행복한 돼지가 되고자하는 유혹에 항상 빠지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자하는 한 고통과 고민을 도피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라. 온 몸이 찢어지듯 고민하라. 너무 늦기 전에 고민하고 선택하라. 때가 지나면 아무리 고민해도 소용이 없다. '나'의 주체는 곧 나의 고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4회: 속물과 귀족의 구별은 있다
정체성이 분명한 경우에만 나는 인간으로서 실존한다할 수 있고, '나'의 정체성은 '나'의 주체적 선택을 전제하기 때문에 '나'는 살아가는 동안 부단한 선택을 피할 수 없다. 선택이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자유를 피할 수 없고, 자유가 책임을 함의하기 때문에 선택은 고민을 동반한다. 이런 점에서 인생은 곧 고민이다. 인생이 곧 고민이라는 사실만은 나의 자유스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운명이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자신의 자유, 선택, 고민만은 선택의 밖에 있다.
나는 해가 가면 나이를 먹고, 학교에 다니게 되며, 대학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대학에 간다면 어떤 대학의 어떤 학과를 지망할 것인가, 대학졸업 후에는 어떤 직장으로 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아무도 도피할 수 없다. 나이가 더 들면 결혼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결혼을 결정할 경우 어떤 상대자와 할 것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결단을 내려야한다.
내가 대학을 가야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어떤 대학의 어떤 학과를 가느냐에 따라, 어떤 직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혼이냐 독신이냐에 따라, 나의 인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대학으로 진학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는 시골에서 농부로서 혹은 공장에서 노동자로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고, 대학에서 어떤 학과를 지원하느냐에 따라 나는 평생 가난한 시인으로 살거나 고급관리나 첨단과학자가 되어 물질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살 수 있으며, 어떤 직장을 택하느냐에 따라 나는 학자로서의 조용한 삶이나 사업가 혹은 정치가로서의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다. 결혼하느냐 독신으로 사느냐에 따라 나는 남편, 아버지로서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거나 고독하지만 고고하게 살 수 있다. 모든 주위 사람들, 모든 상황에 어떤 태도로 어떻게 대처하며 사느냐에 따라 나는 선하거나 악한 사람, 점잖거나 속물적 인간이 될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나의 선택의 총체는 곧 나의 정체성이다. 선택이 언제나 그때그때의 특정한 가치의 선택이며, 한 사람의 이러한 가치의 선택은 그 사람의 궁극적 가치, 이상적 인간상 즉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전제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의 인생관을 반영한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의 삶의 목표를 정해야 하고, 그에 비추어 가야할 대학, 전공할 과목, 몸담아야할 직장, 결혼 혹은 독신생활, 배우자 등 구체적인선택들로 나의 정체성 즉 내가 바라는 고유한 나 자신의 삶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결정할 객관적 근거가 없고, 어떤 삶, 어떤 정체성 즉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객관적 근거를 절대로 댈 수 없다는데 있으며, 이 문제는 한 종류의 정체성을 선택함은 그 밖의 모든 종류의 정체성을 포기해야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어렵고 심각하다. 나는 한편으로는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고 싶다. 대학교수가 되어 결혼도 하고 비교적 안정된 행복을 누리고 싶지만, 시인이 되어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자유분방하게 작품을 쓰고 가능하면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대로 살고 싶기도 하다. 나는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일하고 경우에 따라 목숨도 바치는 삶의 고귀한 의미를 인정하지만, 돈을 벌거나 권력을 잡아 남을 지배하면서 나의 물질적, 동물적 욕망을 마음껏 채우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는 동시에 두 가지를 다 선택할 수 없고, 선택은 언제나 하나만의 선택이라는 사실이 선택을 한결 더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학교, 학과, 직업, 결혼 등의 선택은 근본적인선택이 아니라 도구적인선택이다. 관리나 대학교수가 노동자나 농부보다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으며,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가나 고관들의 삶이 재산을 많이 모은 사업가의 삶보다 더 귀하다는 근거도 없다. 교수로 상징되는 지식의 개발이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그만큼 빈곤하고, 돈을 벌어오는 사업가들이 존재하지 않는 한 정치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농부가 농산물을 생산하고, 공장노동자들이 공산품을 제조하지 않으면, 교수나 정치가는 생존할 수 없다. 여러 가지 활동자체, 직업적으로 분야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서로 상호의존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어떤 활동, 어떤 직업, 어떤 사람들이 더 가치가 있고 바람직하고 더 고귀한지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관점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대학진학, 대학에서의 전공, 직업 등의 선택은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 원초적, 근원적 선택이 아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공부, 똑같은 직업을 갖고 있어도 그들의 인생관,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관은 전혀 다를 수 있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학교, 과목,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그들의 인생의 인생관,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관은 완전히 일치할 수 있다. 우리가 택하는 삶의 구체적인 길과 방법은 우리가 내적으로 추구하는 무엇인가 궁극적인가치를 실현하기위한 수단이며 방법이고, 과정이며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궁극적 목적이 똑같다 하더라도 각자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 성장한 배경, 가정적, 사회적, 역사적 상황이 다른 만큼 그러한 목적 및 가치를 실천하기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과 절차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또한 달라야하며, 따라서 한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학교, 과목, 직장의 선택은 다른 사람에게는 다를 수밖에 없고 또한 달라야한다.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인생관을 갖고 있더라도 그 두 사람이 선택하는 학교, 학과, 직장, 배우자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선택이 인생의 근본적인선택도 아니며, 그런 선택에 동반되는 고민이 근본적인고민도 아니다.
학교, 학과, 직장, 배우자의 선택이 불가피하고 중요하지만, 그 선택은 인생에 대한 더 총괄적인비전, 인생의 총체적의미에 대해 각자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원초적 선택을 전제하고 반영하며, 역으로 이러한 근본적 가치관의 원초적 선택이 위와 같은 구체적 선택들을 결정한다. 선택과 선택에 동반되는 고민은 불가피하지만,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가치관 즉 이상적 삶, 가장 인간다운 삶에 대한 비전의 선택이며, 인간이 겪는 가장 근본적인고민은 인간으로서 어떤 종류의 가치관 즉 이상적 삶의 비전, 즉 '나/복돌이'가 궁극적으로 어떤 인간으로서 가치를 선택해야하는가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치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바라야할 무엇인가를 뜻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 나는 돈환처럼 쾌락만을 추구하고 싶은 동시에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해 금욕적으로 봉사하고 싶은 충동을 갖고 있다. 나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하고 권력을 누려보고 싶지만, 그러한 것을 억제하고 학자로서 무한히 넓은 정신의 세계에서 진리만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도 갖고 있다. 나는 죽으면 그만이니 아무리 저속한 방법으로라도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와 반대로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위신을 잃지 않고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지만 '고귀한 품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조를 지키고 살아야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나의 욕망, 나의 가치관이 항상 서로 상충한다는데 있다. 나는 학자의 길과 사업가의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으며, 쾌락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나는 동시에 저속하면서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어떤 삶을 선택해야할 것인가. 근본적 문제는 막상 따지고 보면 상반되는 욕망, 가치, 인간의 속성 가운데에 어떤 것이 더 옳고,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궁극적으로 아무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는데 있다. 가장 궁극적 인간의 실존적 고민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궁극적 잣대는 '저속성/고귀성'이라는 정신적/도덕적 속성이며, 저속한 삶보다는 고귀한 삶이 더 바람직한 즉 가치 있는 삶이며, 하늘과 땅이 다같이 아름다운 자연이더라도 하늘은 땅보다 역시 더 높고 푸르며, 높고 푸른하늘이 땅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하다. 이러한 사실은 생각하고 반성하는 이에게 자명하다. 생각해봐야한다.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보자.
우리 시대는 쾌락만을 좇는 속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럴수록 속물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신적 귀족이 되어야한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나/복돌이'는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자면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해봐야한다.
5회: 모든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경이롭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대부분 진짜 놀라움이나 진정한 감동이 없이 흘러간다. 철이 나면 날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그렇게 된다. 보통 우리는 특별한 의식 없이 그냥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코를 킁킁거린다. 산이나 구름을 보거나, 천둥소리와 TV방송을 듣거나, 구린내나 향수냄새를 맡거나 해도 마찬가지다. 상대성원리를 배울 때나 노자의 철학을 읽을 때, 장가시집을 가거나 애를 낳거나 죽음을 당할 때도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은 모든 상황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움직이고 물리적으로 그냥 반응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깨어있으면서도 잠들어있고,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리 팔팔하게 활동하고, 아무리 떠들고 다녀도 마찬가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모든 그대로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자명하다.
그러나 정말 잠을 깨서 살아나고, 정말 눈을 떠서 사물을 보고, 정말 귀를 기울여서 소리를 듣고, 정말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무엇인가에 대해 절실한 느낌을 갖고, 정말 머리를 써서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이 우리에게 느닷없이 닥쳐올 수 있다. 이 때 산은 산으로 보이지 않고, 방송소리는 방송소리로 들리지 않고, 구린내는 구린내가 아니다. 삶과 죽음은 전의 삶과 죽음이 아니고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며, 산은 산이 아니며, 물은 물이 아니고, 그 아무 것도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자명하지도 않게 된다. 나 자신이 알 수 없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바뀌고 한없이 이상해지며, 느끼고 생각할수록 그 자체가 그지없이 놀랍고 신기하다.
이제 나는 잠을 깬다. 처음으로 나는 산과 바다, 사람과 동물, 삶과 죽음, 내 자신과 남들, 컴퓨터와 책상을 본다. 처음으로 나는 바람과 물, 구름과 새들의 노래 소리, 나 이외의 사람들, 동물들, 초목들, 현상들, 사물들의 언어를 듣는다. 처음으로 나는 꽃과 쓰레기, 인간과 동물, 산과 바다, 땅과 하늘, 달과 별들의 냄새와 향기를 맡는다. 처음으로 나는 모든 것들한테서 깊은 감동을 받고, 흐뭇한 희열감을 체험한다. 나는 비로소 존재하고 비로소 살아난다.
산과 나무와 동물이 있다는 사실, 부모가 있고 내가 그 부모들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내가 존재하고, 성장하면서 살아가야한다는 사실, 꽃과 한 폭의 그림이 아름답다는 사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한다는 사실, 나나 네가 큰소리도 치고 고상한 말들을 하다가도 어느 연령이 되면 개나 돼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에 잡히고 몇몇 특별한 사람들을 빼놓고는 모두 그런 짓을 한다는 사실, 부모가 죽고 때가 되면 나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 인간이 한편으로는 자연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인간과 싸우면서 긴 역사를 거쳐서 살아남아 문명을 일궈왔다는 사실, 내가 닭이나 돼지나 소를 잡아먹는다는 사실, 풀을 먹고사는 메뚜기를 개구리가 잡아먹고, 그런 개구리를 뱀이 먹고산다는 사실, 모든 생물이 교배를 통해서 번식한다는 사실, 산과 바다, 식물과 동물이 살아있다는 사실, 무엇인가의 존재가 보이고, 무엇인가의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 그러한 것에 대한 느낌, 감동, 생각이 있다는 사실, 지구, 달, 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우주가 있다는 사실, 자연현상이 정확하고 엄밀한 수학적 언어로 재현될 수 있는 과학적 법칙이 있다는 사실, 아니 라이프니츠와 하이데거의 말대로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었을 터인데도 도대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찌 놀랍고 경이롭고 신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어쨌든, 한 차원 높은 차원에서 그 대답이 보여주는 사실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물음이 다시금 제기될 때 모든 것은 더욱 경이롭고, 신비로우면서 아름답고, 당혹스러우면서도 황홀하다.
의식하고, 느끼고, 감동하는 모든 것이 경이로운 것은 이 경험이 나에게는 처음이기 때문이고, 이 모든 것이 신비로운 것은 그 경험대상이 궁극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 것이 어떤 질서와 조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고, 이 모든 것이 황홀한 것은 그 존재, 그 존재의 질서와 조화가 다같이 우리들 속에 깊이 숨어있는 어떤 요청을 충족시켜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도대체 어째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가. 지금까지 나는 산과 바다가 있고, 동물과 인간이 있고, 아버지와 자식이 있으며, 탄생과 죽음이 있다는 사실, 내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고, 새가 버러지를 찍어먹고,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사실에 한번도 놀라본 적이 없었는가. 지금 나는 처음으로 이러한 놀라움을 경험한다.
인류가 생각을 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존재의 기원과 목적, 우주의 구조와 운명의 원칙, 사물현상의 속성과 법칙, 수많은 개별적 존재나 현상들의 인과적 관계, 인식에 있어서의 의식과 그 대상의 논리적 관계, 인간과 동물, 나와 너의 존재 원인이나 이유, 도덕적 혹은 미학적 경험과 가치에 대한 설명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종교적, 철학적 그리고 과학적 이론도 위와 같은 사실, 현상 그리고 경험에 대해 만족스런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지금 나는 더욱 모든 존재, 현상, 경험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투명하게 정확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이 무질서한 혼돈 같아 보인다. 그러나 경이롭고 신비스런 모든 존재, 현상 그리고 경험 속에서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이 막연하나마 전제하거나 주장하는 것들 중에서 어떤 질서와 조화를 피부로 직관한다. 그러기에 나는 언뜻 보아 혼돈 자체만 같아 보이는 모든 것들 속에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질서를 느낀다.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어쩌면 그 가운데서 가장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어째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도대체 무엇인가가 있느냐의 물음 그 자체이며, 어쩌면 이 물음보다도 더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러한 물음을 던지는 인간, 인간의 의식, 인간의 지적능력인 듯하다. 그 원인이나 이유를 정확히 의식하거나 설명하거나 파악할 수 없지만 나는 이런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그냥 저절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적, 정서적, 미학적 충족감을 체험한다. 그러기에 지금 나는 모든 존재, 현상, 경험에서 황홀감에 도취된다, 눈을 씻고 크게 떠서 사물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귀를 깨끗이 후비고 사물들의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코를 깔끔히 풀고 사물들의 냄새를 처음으로 맡았기 때문이다. 피부로 깊이 처음으로 감동하고 지적으로 투명하게 처음으로 직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뜻에서 잠을 깨고 진정한 뜻에서 살아있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 올 때까지도 나의 머리, 눈, 귀, 코로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나는 공학박사, 대학교수, 큰 회사의 사장, 장관이 되었어도 나의 의식이나 감각, 아니 나 자신의 존재를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열심히 책, 돈, 권리만 보고 살아왔다. 나는 백발이 되어 죽음이 가까운 나이가 됐지만 아직도 자연, 우주, 그리고 존재와 그러한 것들의 궁극적 의미를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보통 우리는 이처럼 동물같이 살다가 죽다가 물건과 같이 존재하다가 없어진다. 코 밑 잎만 보느라 나무를 못 본 채 나무를 보았다고 착각하고, 잡음만 듣고도 음악을 들었다고 잘못 믿으며, 퀴퀴한 구린내만 맡고 치즈냄새를 맡지 못하고서도 치즈냄새를 좋아한다고 헛 믿는다. 있는 대로 보지도 못하고, 소리 나는 대로 듣지도 못하고, 냄새나는 대로 맡지 못하는 우리는 진정한 경이, 신비,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없는 한 우리는 정말 느낌이 없이 존재하며, 느낌이 없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깨어있으면서도 잠들어있고,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다. 잠을 깨고 살아나자.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세상이 나를 보며, 내가 귀를 청소하고 사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사물들이 또한 내게 귀를 기울인다. 코를 대고 존재의 체취를 맡으니 또한 존재가 코를 대고 나의 체취를 맡는다. 모든 것은 무한히 이상하고 신기하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맡으면 맡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렇다. 감동이 깊으면 깊은 만큼, 생각이 투명하면 투명한 만큼 한결 더 그렇다. 정말 모든 것들이 마냥 신기하고 경이롭다.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새로 보자. 귀를 깨끗이 씻고 소리를 새로 듣자. 머리를 식혀 새로 생각해보자. 세계는 지금과는 달리 무한히 신기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황홀한 감동의 원천, 투명한 인식의 대상으로 바뀔 수 있다.
6회: 알 것은 많고 배울 것은 무한하다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랄 만큼 신비스러운 세상의 방대한 모든 것이 나의 호기심을 무한히 자극한다. 그것이 나를 지적 잠에서 깨워 눈을 뜨게 한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 그리고 나 자신의 의식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 현상, 사건, 생각들 하나하나가 한결같이 나의 지적욕망에 불을 지펴 그 모든 것을 알고 배우고 싶은 심정으로 몰아넣는다.
이웃 아가씨의 이름은 무엇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감은 언제부터 그리고 어째서 저렇게 아름다운 색깔로 변하게 됐는가.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으며, 이 동네를 벗어나면 어떤 동네가 있고, 바다를 건너면 어떤 사람들이 어떤 나라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궁금하다. 밤과 낮이 어떻게 바뀌는지, 비가 왜 오는지, 원자나 유전자의 구조와 그 존재원리는 무엇인지 알고 싶다. 어째서 꽃은 아름답고 쓰레기는 추한가? 뉴턴의 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원자의 물리학적 구조, 유전자의 생명 공학적 구조, 인간복제의 원리도 알고 싶다. 아득한 옛날부터 나의 조상이 살아왔고 내가 태어난 한국의 역사, 유럽문명의 원천인 그리스의 문화, 인류의 역사도 알고 싶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저곳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 도서관에 꽂혀있는 저 수많은 책들 그리고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저서들이 어떤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가를 알고 싶다.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사회학, 예술, 물리학, 생명공학, 수학 등 모든 학문을 모두 샅샅이 배워 알고 싶다. 진리, 미, 선, 앎 등 숱한 개념들의 정확한 의미도 밝히고 싶다. 하나님의 존재여부, 윤회의 사실성도 알고 싶다.
태생과 죽음, 무한과 유한, 영원과 순간, 아니 존재자체를 알고 싶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것들의 궁극적 의미도 알고 싶다. 한마디로 나는 모든 것을 철저히 투명하게 알고 싶다. 정말 세밀하고 정확하게 알고 싶다. 알기위해서 한없이 그리고 철저하고 정확하게 배우고 싶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지도 알고 싶다.
나는 그 동안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많은 학자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었고, 그들의 책을 읽고 배워왔다. 그들의 지식은 방대하고 깊다. 들어야할 강의제목, 읽어야할 책의 양, 그런 강의와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위해서 쏟아야할 시간과 바쳐야 할 노력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세상의 비밀과 존재의 의미를 알기위해서 나는 무한히 많은 시간을 강의시간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하고, 무한한 시간을 독서하는데 바쳐야한다. 남들한테서 그리고 책에서 배울 것이 끝없다. 나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것들을 보고,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한테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수많은 날을 학교에서 공부했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가 되었고, 교수가 되었다. 지금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다 배우고 거의 알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적도 있다. 모든 것이 그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와 아울러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현상에 대한 뜨거운 지적호기심의 열도가 식어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런 느낌이 자주 든다. 나만이 이런 경험을 하고, 이런 의식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변화를 성숙, 지혜, 도통, 해탈의 징조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정신적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이를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지적미숙으로 평가절하 한다. 이런 태도는 보통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긴 사상사를 통해서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모든 것을 배우고 알았다고 확신하고 모든 진리를 빠짐없이 소유했다고 확신했으며, 종교인들은 절대적 신, 영혼, 초월의 세계까지를 알았다고 자신하고 그것을 믿어왔으며, 현재에도 그러하다. 이러한 철학자나 종교인들에게는 더 이상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있을 수 없고, 따라서 앎, 진리에 대해 더 이상 타오를 열정이 남아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모든 신념은 자명하고 확실하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실들이 결코 나에게는 확실하지 않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앎과 그들이 믿고 있는 진리도 불투명하다. 내가 배운 것이 아무리 많고 내가 아무리 깊은 것을 느꼈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지 사실일 수 없다. 잠깐만 돌이켜보아도 내가 듣고 읽어 얻은 지식의 양은, 뉴턴의 말대로, 모래밭의 무한에 가까운 모래의 양에 비해 단 한 알의 모래알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모래알에 대한 나의 앎의 깊이는 아무리 깊어도 수박겉껍데기의 깊이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신을 차려 눈을 똑똑히 뜨고 보면 세상에는 아직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할 만큼 배워야할 것이 무한히 많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야 할 만큼 현상들에 대한 앎의 깊이는 무한히 깊다. 아직도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시피 하며,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신념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의, 많은 고령자들의 잘못된 생각처럼 또는 믿는 대로, 많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의 환상적 신념처럼 나 또한 모든 것은 아닐지 몰라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잘못 믿어왔고, 많은 것의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자부해왔지 않았던가. 아직까지 나는 지적으로 안이하게 살아왔지 않았던가. 이제 조금만 반성해보면 나의 호기심은 생각보다 부족했고, 나의 앎에 대한 정열은 스스로 자부해왔던 것보다 시들했고, 나의 진리에 대한 탐구력은 스스로 자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철저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보면 볼수록 볼 것이 너무 많고, 들으면 들을수록 들어야할 이야기가 너무 많고,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들어가야 할 진리의 깊이는 너무나 깊다. 배워야할 것들의 무한에 가까운 양을 생각하면 내가 배운 것은 무에 가깝고, 참된 앎의 빛의 무한에 가까운 광명에 비하면 내가 갖고 있는 앎의 빛은 아직도 암흑에 가깝다. 우리는 거의 모두가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존재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생각과 설명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배우고 알아야하겠다. 세상이 너무 어둡고 인생이 너무 헷갈린다. 그러므로 나는 더 배우고 더 알아야하겠다. 아직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배움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무한한 기쁨을 배웠으며, 앎이 나에게 주는 무한한 환희를 알았다. 배움의 기쁨은 진리를 접하는 기쁨이며, 앎의 환희는 진리의 빛을 경험하는 환희이다.
배움과 앎은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에 대한 강렬한 지적 호기심, 진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전제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없이 방대하고 다양하며 깊다. 나는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다 배우고, 한꺼번에 그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정말 새로운 배움과 앎에 내 호기심이 집중되고, 나의 지적추구가 철저해야한다.
호기심이 흩어져서는 안 되겠다. 앎에 대한 정열이 해이해져서는 안 된다. 진리에 대한 충성이 식어서는 안 된다. 배움과 앎을 위해서라면 식사, 잠, 마누라, 자식을 잊을 수도 있어야한다. 앎을 위해서 가족, 나라를 버릴 수도 있어야한다. 진리가 가져오는 기쁨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어야한다. 지적역사를 통해서 이런 이들이 적지 않았다. 투명한 세계, 진리를 위해서 인생의 도박을 걸었다고 자부했던 나 자신을 뒤돌아보며 나는 내 삶에 충실히 집중하지 못했고, 내 자신에 충분히 철저하지 못했던 사실을 뒤늦게 후회스럽다고 의식하고 부끄럽게 느낀다.
배울 것은 끝이 없고 알 것은 무한한데 나는 별로 배우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채로 머지않아 이 세상, 한없이 신기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을 떠나야하는 사실이 아쉽다.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다시 배움과 앎의 길을 선택하고, 그 때에는 이번과는 달리 정말 후회 없이 그 길을 투철하고 충실하게 걸어보리라. 배움은 길이며, 앎은 빛이다. 진리는 오직 그 길과 그 빛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배움과 앎의 길이 끝없이 펴져있고, 찾아야할 진리는 무한하다. 진리는 기쁨의 원천이다.
지식정보시대는 언뜻 보기와는 달리 인간의 호기심에 진리가 아니라 돈과 돈을 위한 경쟁에 쏠리고, 배움과 지식이 도구로 전락해가고 있는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의 급증과 정보교환의 범람으로 세상이 더 어둡고, 삶이 더 헷갈린다. 그럴수록 모든 것을 정말 알아 투명하게 밝히고 싶은 욕망에 나는 사로잡힌다.
7회: 아무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하나를 보면 둘이 안 보이고, 한 소리를 들으면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하나를 읽으면 다른 것이 읽히지 않는다. 어떤 것을 보고 한 사람은 산이라 하는데 다른 사람은 물이라 하며, 어떤 소리를 듣고 이 사람은 음악이라 하는데 다른 이는 잡음이라 하며, 어떤 낱말의 뜻을 놓고 '개'라 하는데 다른 이는 '소'라 한다. 산과 물이 따로따로는 보여도 그 둘이 전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고, 바람 소리와 음악 소리를 따로따로는 들어도 그 둘이 합쳐서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으며, 한 낱말과 한 문구의 의미가 따로따로는 이해되어도 그것이 합쳐 이룩된 문장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래도 저래도,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이것도 저것도, 이 경우 저 경우도 따지고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인류는 역사적 경험과 삶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알았다고 믿어왔다. 선배와 선생님의 신념이 옳은 것 같고, 점술가들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이 보인다. 과학자의 설명이 정확해보이고, 깊은 진리에 대한 철학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종교인들의 신앙이 더 심오한 설명을 해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예수의 말이나 노자의 주장, 기독교의 설교, 부처의 가르침, 공자의 생각이 한결같이 옳은 것 같다. 나나 너나 사람마다 개인적으로는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위와 같은 것을 배워서 세계와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우리의 배움은 과연 옳은 것이며, 우리의 앎은 정말 진리인가.
알고 보면 똑같은 것을 놓고도 내가 본 것과 네가 본 것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 선배와 선생의 지식은 흔히 서로 맞지 않는다. 같은 자연현상을 놓고도 점술가들과 과학자들의 설명은 흔히 상충한다. 똑같은 자연현상을 놓고 점술가들은 어떤 영적존재의 조작으로 설명하는데 반해서 과학자들은 기계적 법칙의 작동으로 설명한다. 죽음과 삶, 영혼과 영원에 대한 생각에서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흔히 어긋난다. 한 편에서 그러한 것들의 실재성을 믿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과학 안에서조차 물리적 현상에 대한 뉴턴의 삼차원적설명과 아인슈타인의 사차원적설명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철학 안에서도 실체에 대한 플라톤의 이원론적 관념론은 노장의 일원론적 자연주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종교 안에서도 기독교가 주장하는 절대적 인격신이 불교에서는 전적으로 부정된다. 서로 모순 되는 두 가지 주장이나 설명을 다같이 옳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절대신, 영혼, 천당을 믿고 어떤 이는 그런 것들을 믿지 않는다. 절대 신의 존재와 부재는 양립할 수 없고, 영적세계와 현상적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입장은 그런 것이 없다는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인류, 아니 우주의 역사가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되고 어떤 이는 오로지 무한한 변화를 통한 무한반복에 불가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생각, 어떤 믿음, 어떤 설명이 옳은가. 누가 그리고 어떤 근거에서 둘 가운데 어떤 쪽이 옳은가를 결정할 수 있는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앎, 만족스럽게 설득할 수 있는 설명이 발견되지 않는다. 모순 되는 두 가지 신념 중 어느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확고한 근거를 갖지 못하는 한 그 어느 쪽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있다는 주장이나 없다는 주장이나 다같이 말이 되지 않는다. 윤회설을 믿는 일이나 믿지 않는 일이나 다같이 말이 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이데아이론이나 노자의 무위사상도 말이 되지 않으며, 창조론이나 진화론도 다같이 말이 되지 않는다. 헤겔의 목적론적역사관도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종교를 믿어도 안 믿어도 다같이 말이 되지 않으며, 유물론도 유심론도 역시 말이 안 된다. 공간과 시간의 무한성과 유한성에 대한 신념은 모순 되지만 그런 개념들은 이래도 저래도 말이 안 된다. 모든 것이 말이 된다는 말이나 말이 되지 않는다는 말도 다같이 말이 되지 않는다. 모든 개별적인 것들의 하나하나가 한결같이 말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통합한 전체에 대한 주장들은 한결 더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알았다. 나는 산과 들을 보고, 먼 나라, 먼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수없이 들어왔다. 나는 물론 한글을 쓸 줄 알고, 위상수학, 양자역학, 유전자, 컴퓨터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다. 나는 중국의 역사, 아프리카의 지리에 정통하며, 수리경제이론에 밝다. 나는 플라톤, 노자의 철학에 정통하고, 첨단문학이론이나 사회학적 이론에도 밝다. 나는 세계의 모든 종교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나는 세계의 역사에도 훤하다. 나는 인간을 의학적, 생물학적, 화학적 그리고 물리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고, 생명체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과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지식이 아무리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에 대한 단편적이고 파편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정말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앎이며,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함의하는 우주현상에 대한 총체적 앎이며 포괄적 설명이다.
세계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설명만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본 특정한 부분에 대한 모든 설명이 한결같이 말이 되지 않는 이유는 어떤 문제나 현상에 대한 여러 설명이 서로 모순 된다는 사실을 넘어, 아니 그 이전에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유의 단서는 모든 신념, 설명 그리고 주장은 필연적으로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찾을 수 있다. 좀 더 따지고 보면 절대자 하느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혼,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물질의 유무를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앞서, '하느님', '영혼', '물질', '영원' '무한','존재', '있다', '없다'라는 큼직한 말의 의미조차 한없이 애매모호하고 불투명하다. 그런 낱말들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해도 저렇게 해석해도 정확하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낱말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투명한 상태에서 어떻게 그것들의 존재유무에 대한 설명과 주장의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을 따질 수 있겠는가. 낱말들의 정확한 의미는 이렇게 해석하거나 저렇게 해석하거나 말이 잘 되지 않고, 말이 잘 되지 않는 의미를 가진 언어로 표현한 신념, 설명, 주장은 한결 더 말이 되지 않는다. 알고 보면 그것들은 셰익스피어의 표현대로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한 백치들의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고, 엄격히 따지고 보면 그런 말에 담긴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신념과 주장 즉 앎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봐도 말이 안 되고 저렇게 들어도 말이 되지 않으며, 이렇게 읽어도 말이 되지 않고 저렇게 해석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동물들 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말이 되지 않는다. 빌게이츠가 억만장자인데 반해 수억의 인간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건강과 재능을 갖고 태어났는데 다른 이들이 불구와 저능아로 태어나는 사실도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우주 속에 일어나는 하나하나 모든 현상들을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지적추적은 절벽에 부딪치고 나의 지적욕망은 허탈한 좌절감만 남긴다. 나의 궁극적인욕망은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의 형이상학적 '의미', 종교적 '뜻'을 찾는데 있다. 모든 객관적 현상이 과학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설명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들의 궁극적 의미, 초월적 뜻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모든 것, 현상의 궁극적 의미, 뜻은 무엇인가? 높은 정신의 경지에 도달한 종교인과 철학자들이 그러한 의미, 뜻을 깨달았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나에게는 그들의 말도 말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의 총체적인 궁극적 의미, 뜻이 부재하는 상황에 나는 무한한 공허감에 사로잡힌다. 모든 것이 말이 되지 않고, 모든 것이 말이 되지 않는 자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보아도 그 형태가 분명치 않아 잘 보이지 않고, 들어도 그 소리가 흐려서 잘 들리지 않으며, 읽어도 그 뜻이 깊거나 애매모호해서 그 뜻을 분명히 세밀하고 엄밀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배우고 알면 알수록 그 깊이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모든 것은 그 하나하나가 더 이상하고 더 궁금해지며, 보고, 듣고, 이해하고 싶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고, 귀를 기울여 들으면 그럴수록 모든 것은 그만큼 더 희미하며, 머리를 싸매고 읽어도 읽은 것의 의미는 분명치 않고, 생각을 짜서 이해하려 해도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정말 보이고, 정말 들리고, 정말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래도 저래도 세계와 인생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 정말 말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
8회: 그래도 할 일은 한없이 많다
알든 모르든 죽을 수 없고, 의미가 있든 없든 살아야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은 곧 부단한 행동이며, 싫든 좋든 우리는 살아있는 한 언제나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하여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아무 것도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알려고 애써야하고, 아무 것도 말이 되지 않으니까 무엇이라도 말이 되게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또 총체적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말이 되지 않아도, 그래도 할 일은 한이 없다.
총체적인 진리가 없더라도 부분적인 진리는 무한하고, 궁극적으로 말이 되는 것이 없더라도 피상적으로 말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무한한 시간이 없더라도 유한시간은 무수하며, 절대적인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더라도 상대적인 것은 허다하다. 영원한 삶이 불확실하더라도 유한한 삶만은 분명하고, 근원적 의미를 깨달을 수 없더라도 잠정적 의미는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부분적인 것을 조금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것 속에 존재하며, 부분적 진리를 떠난 총체적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 무한한 단 하나의 시간은 유한한 그러나 무수한 시간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상대적인 것을 떠난 절대적인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불확실한 것이 없는 한 확실한 의미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떠난 총체성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경험적 속세를 떠난 천당은 생각할 수 없으며, 고통스러운 무상한 이승을 떠난 열반의 영원한 저승은 상상할 수 없다. 영원과 시간, 무한과 유한, 저승과 이승, 천당과 속세, 보편성과 상대성, 깨달음과 무명, 지식과 무식, 전체와 부분, 진리와 무지, 선과 악, 의미와 무의미, 충만과 허무, 빛과 어둠, 우주와 자연, 자연과 인간, 무위와 행동은 그 어느 쪽 하나를 떼어 생각할 수 없이 무한하고 또한 유한하며, 단순하고 또한 복잡하게 서로 뗄 수 없이 얽혀있고 서로 뒷받침해서만 존재하고 의미를 지닐 수 있는 크나큰 하나인 동시에 무수한 다수이다. 너와 나, 우주, 자연, 인간은 다같이 그리고 한결같이 무한 속의 유한인 동시에 유한 속의 무한으로, 저승 속의 이승인 동시에 이승의 저승 속에서, 빛의 어둠인 동시에 어둠의 빛으로, 절대자의 상대자인 동시에 상대자의 절대자로, 자연의 인간인 동시에 인간의 자연으로, 마음의 몸인 동시에 몸의 마음으로, 삶의 죽음인 동시에 죽음의 삶으로, 깨달음의 무명인 동시에 무명의 깨달음으로, 충만의 허무인 동시에 허무의 충만으로, 무위의 행위인 동시에 행위의 무위로, 의미의 무의미인 동시에 무의미의 의미로서만 존재한다.
보기에 따라 각자의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아무 것도 없는 [空](공)이지만 또한 달리 보기에 따라 그것은 충만한 [存在](존재)이며, 느끼기에 따라 모든 존재와 행동은 속이 텅 빈 무의미한 [虛無](허무)이지만 또한 보기에 따라 그것은 속이 꽉 채워진 황홀한 [意味](의미)를 지닌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차피 우리가 언제인가 죽어 한줌의 흙으로 사라지는 존재라면, 몸과 마음으로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일은 아무 것도 없지만, 또 달리 생각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일은 한없이 많으며, 우리와 우리 이외의 모든 존재자체, 그러한 존재로서의 존재의 구체적 기쁨과 의미는 오로지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수많은 일들 속에서만 체험될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궁극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이제 우리는 무엇인가의 구체적인 나름대로의 투명한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되었고, 얼마 전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절대적으로 해야 할일이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우리는 작지만 나름대로 할일이 한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할일이 있으며, 그러한 것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알고 보면 사소하지만 그래도 할일이 무한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시시하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로 충만해있다.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더라도 수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러한 것들을 더 배워야한다. 더 보고, 더 듣고, 더 읽고, 더 생각할 일이 있고, 그 뜻을 조금 더 파악하기위해서 한번 읽었던 책을 또 한번 다시 읽어야 할일이 있다. 가봐야 할 미술전람회, 들어야할 음악회, 빠져서는 안 될 강연회가 있다. 자연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감상할 일이 있으며, 인간의 놀라운 지적 및 도덕적 능력에 감탄과 경의를 표현해야 할일이 있다. 저녁때가 되면 고달파도 빠져서는 안 될 영어학원, 컴퓨터학원이 있으며, 걸러서는 안 될 서예, 그림, 음악공부가 있다. 방을 깨끗이 치우고, 창문을 열어 맑은 공기를 갈아 넣고, 책상을 말끔히 정리하고, 밀린 편지를 쓸 일들이 있다. 화분에 물을 주고, 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메마른 논에 물을 대야 할일이 있다. 남편이 잡아온 오징어의 배를 따서 통풍이 잘되는 곳에 말릴 일이 있다. 시장에 가서 반찬거리를 사다 남편이 직장에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저녁상을 준비해야 할일이 있다. 밤이면 너무 늙기 전에 부부가 해야 할 사랑이 있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젖은 기저귀를 빨아야 한다. 애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박사학위를 받거나 고시에 합격해서 수입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자리를 차지하도록 뒷바라지해야 할일이 있다. 연로하신 할아버지의 시중을 들고, 병석에 누어계신 어머님을 간호해야 할일이 있다. 실직한 친구의 고통을 달래면서 슬픔을 함께 나눌 일이 있고, 친지를 문상가야 할일이 있고, 친구의 자녀결혼식에 부조금을 갖고 참석해야 할일이 있다. 치과의사한테 가서 충치를 빼고,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 뱃속의 종기를 도려내야 할일도 있다.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불러야 할일이 있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야 할일이 있다. 멀리 출장가야 할일이 있고, 상관한테 인사가야 할일이 있다. 깊이 생각해봐야할 철학적문제가 있고, 따져봐야 할 종교적문제가 있다. 준비해야할 강의가 있고 마감에 맞추어 써야할 원고가 있다. 멀리서 온 친구를 만나러 공항에 갈일이 있고, 술김에 잃고 온 수첩을 찾으러 다시 지하철을 타고 식당까지 갈일이 있으며, 카센터에 가서 차를 수리해야 할일도 있다. 깜박 켜둔 채 나온 전기 불을 끄러 집으로 돌아가야 할일이 있고, 밀어두었던 쓰레기처리를 해야 한다. 자선사업에 참여할 일이 있고, 인권, 여권, 동물권운동에 참가할 일이 있다. 환경운동에 나서야하고, 생태계보호에 발 벗고 나서야 할일이 있다. 쓸개까지 썩은 정치가의 실태를 들춰내며, 돈만을 위해 무자비한 자본가의 정체를 캐내야 할일이 있다. 영웅심리에 도취되거나 패권을 위해 선동하는 위선적 이념 가들의 허상을 벗기고, 꾀, 거짓, 사기, 도둑의 도덕적 병마에 걸린 우리 모두의 양심의 정체를 진단하고 치유해야 할일이 있다. 괴변으로 지성을 교란시키려는 오만한 철학자의 주장의 오류를 정직한 논리로 지적해야 할일이 있고, 독선적 설교로 지성을 모욕하고 투명한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는 광신적 신자의 환각을 깨우쳐야 할일이 있다.
보이지 않는 총칼로 우리를 지배하려드는 크나큰 외세를 경계해야 할일이 있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시민의 복지를 짓밟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타도하기위해 거리에 나서 화염병을 던져야 할일이 있다. 각계각층,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작고 큰 폭력에 시달리는 수많은 어린이들, 노약자들, 부녀자들, 노동자, 농민, 평사원, 말단 공무원, 학생, 교원들에게 도움의 손을 뻗쳐야 할일이 있다. 가난으로 눈물이 글썽한 달동네의 주민들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물질적 도움을 주어야 할일이 있고, 장애인, 정박아들의 상처를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어주어야 할일이 있다.
보이는 세상이 넓다면 지구는 더 넓고, 지구가 보이는 세상보다 더 넓다면, 물리적 우주는 방대하며, 물리적우주가 방대하다면, 사유의 세계는 무한하다. 넓어 보이는 세상에서 할일이 많다면, 보이는 세상보다 더 넓은 지구에서 할일은 그만큼 더 많다. 넓은 지구에서 할일이 많다면, 지구보다 더 넓은 우주에서 할일은 한층 더 많으며, 우주에서 할일이 그렇게 많다면, 무한한 사유의 세계에서 할일은 더욱 무한하다. 내 눈앞에 우뚝 선 푸른 전나무가 높고 아름답다면, 내 마을 앞에 늠름하게 선 저 산은 더 높고 아름답다. 산이 높고 아름답다면 하늘은 훨씬 더 높고 더 아름답다. 하늘이 높고 아름답다면, 사유의 세계는 무한히 높고 무한히 아름답다. 눈을 바로 뜨고 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높고, 조용히 느끼고 생각해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숭고하고 성스럽다. 그 높고 숭고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올라가는 길은 한없이 길고 고되지만, 그만큼 환희와 의미로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해준다. 이같이 환희와 의미로 채워진 존재의 정상이 넓고 높음에 비해 우리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할 일은 너무 많아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