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로 만든 영화 “연평해전” 후일담
=====이 자료는 메스컴에서 보도되고 기사화 된 내용, 영상물과
본인의 의견, 자료를 종합하여 정리 편집한 것임 =====
2002년 6월, 월드컵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그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해군들과 그들의 동료, 연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휴먼 감동 실화인 '연평해전' 영화 제작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했던 한 편의 감동 드라마 같았다. 제작에서부터 지난 6.24일 개봉까지 무려 7년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는 보통 영화 기간의 두 배를 넘는 기간이다. 제작비가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에 촬영이 미뤄졌고 또 투자배급사와 주연 배우도 거듭 바뀌었다.
이를테면 5·18 광주를 다룬 '화려한 휴가'에는 굴지의 대기업이 벌떼(?)처럼 투자했었지만 '연평해전'엔 어떤 투자회사도 달라붙지 않았다. CJ· 롯데· 쇼박스 등 문을 두드린 투자사로부터 모조리 거절당했다. 정치권의 눈치도 살펴야 했고 또 애국과 안보 코드의 영화는 흥행이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다. 좌파, 북을 추종하는 상업주의가 지배하는 영화판의 현실이 이랬다.
진해 앞바다에서 해상 전투신을 촬영했는데 먹고 자는 숙식비와 기자재 임차료만도 한 달간 5억원이 필요하였고 제작비도 바닥난 지 오래됐지만 악전고투 속에서도 배우·스태프들을 버티게 한 것은 단 하나, '꼭 만들어야 할 영화'라는 신념이었다.
예고편 동영상 http://tvcast.naver.com/v/456432
'대장금'의 한 상궁으로 유명한 배우 양미경(52)씨는 개런티를 한 푼도 받지 않고 출연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부상병을 돌보다 전사한 의무병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다. 양씨는 "꼭 만들어져야 할 영화인데 제작 난항이란 말을 듣고 안타까워서…"라고 했다. 양씨뿐 아니다. 120여명의 배우·스태프 전원이 사실상 거의 무(無)보수로 참여했다고 한다.
제작진은 크라우드 펀딩(인터넷 모금)을 시작해 7천여 명으로부터 몇 만원씩 후원받아 거금 20억여 원을 모았다. 그리고 '변호인'을 크게 흥행시켰던 “뉴(NEW)”가 새로운 배급사로 정해져 마침내 개봉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소액 후원자의 80%가 20~30대 청년층이었다. 응원부대를 자처하고 나섰던 청년들은 '2030 나눔서포터즈'를 조직해 영화 홍보와 제작비 기부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15년 전 이들은 초·중학생이었다. 연평해전에 아무런 부채(負債)가 없을 청년들이 앞장선 것에 제작진들은 참으로 놀랍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화면 자막에는 후원자 명단이 장장 12분간에 걸쳐 보여지고 있다.
김학순 감독과 씨나리오
모금 첫날, 한 고교생이 5000원짜리 문화상품권을 보내왔다고 한다. "당장 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쓴 고교생 사연을 보고 제작진은 눈물을 뿌렸다. "연평해전 당시 나도 육군 병장이었다"며 1억 원을 후원한 30대 사업가도 있었다. 모금에 참여한 수천 명 후원자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 영화는 꼭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영화가 언론·배급 시사를 통해 처음 공개됐을 때나 배급사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을 이유로 2주간 개봉을 연기했을 때 흥행 가능성을 크게 점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시선은 흥행 여부보다도 정치색 부분에 더 집중됐다. 영화에서 정치적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연평해전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처 방식을 문제 삼는 장면은 논란거리가 됐다. 국방부 시사, 국회 시사 등 특정 공간에서의 대규모 시사회가 연이어 열리자 영화의 색깔에 대한 의심 어린 눈초리도 이어졌다. 실제로 뚜껑이 열리자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보수성향이 강한 중년층 관객이나 단체 관객 중심으로 영화가 선택받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20대 관객이 흥행을 이끈 것이다. 개봉 이후 처음 1주일 동안 이 영화를 본 관객의 53%가 20대였으며, 22%는 30대였다. 이후 입소문이 퍼지면서 관객층은 좀 더 넓어졌다. 개봉 이후 지난 6.15일까지 관객의 44%가 20대, 23%가 30대, 21%가 40대였다.
357호를 공격했던 북괴군 함선(전차포 탑재)
알다시피 제2연평해전이 터진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 폐막 전날(6월 29일)이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목숨 건 사투가 벌어져 정장 윤영하 대위 외 4명은 전투 중 전사하고 100여발의 총탄과 파편을 맞고 응급실에 실려 왔던 박동혁 병장이 나중에 전사하여 6인의 고귀한 영령이 조국을 위해 산화했다. 또 19명이 부상했고 참수리 357호는 침몰했다. 장병 6명이 산화했지만, 이날 우리의 관심은 온통 터키와의 월드컵 3·4위전에만 쏠려 있었다. 정부는 북한 눈치를 보며 사태를 축소하느라 쉬쉬했고, 온 국민이 애도(哀悼)는 커녕 붉은 티셔츠 차림으로 거리 응원을 벌였다. 다음 날 김대중 대통령은 영결식 참석 대신 월드컵 결승전을 보러 도쿄로 날아갔다.
황도현 중사 유가족
'참수리 357호'의 6용사들과 가족들은 기관원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그 후로도 6년 동안 죄인처럼 묻혀 있어야 했다. 천안함 폭침이 분노와 충격을 주었다면, 제2연평해전은 우리를 그저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만든 것이다.
6. 25 전사자 3만6574명 이름을 3일간 부르는 미국..... (신문기사 인용)
62주년 6·25 정전기념일(7월 27일)을 이틀 앞둔 6. 25일 미국 워싱턴D.C.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공원'에서 이름들이 하나씩 불렸다. "William Adams, 맬컴 아크리지, 프레드 알드리지, 테오도르 앤블, 덴버 앤더슨, 로버드 앤젤리타, 도로시 발라드, Donald Button…."
6·25전쟁 전사자들이었다. 산화한 전우들을 한 명, 한 명 부르는 노병(老兵)의 숨소리는 조금씩 거칠어졌지만, 가슴속 감동은 더 커졌다. 6. 25 참전용사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행사에서 처음으로, 그것도 전쟁이 끝난 지 62년 만에야 불러보는 이름들이었다.
60년이 지나도, 아니 100년, 200년이 지나도 미국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전우들을 결코, 한사코 잊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국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쳤기 때문에 조국은 그들을 기억해 줘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렇게 그들의 이름을 불러 보자.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그 당시에도 북한의 도발은 미리 감지되었었다. 북한의 모든 통신은 실시간 감청되고 분석되고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북한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는 게 우리의 통상적 대북도발 대응 억제책이었지만, 연평해전 시점에서는 이런 보고가 국방수뇌부에서부터 완전히 무시되었다.
-월드컵 분위기를 망치지 않게 긴장관계를 조성하지 말라-
-1차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2함대 사령관 박정성 제독은 좌천되었다가 강제 예편되었다-
(해전 이후 북한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고,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가 이를 적극 수용한 모 양새가 되었다.)
-북괴선이 NLL을 넘으면, 경고 및 기동차단을 하고 발포 전까지는 절대 사격하지 말라는 교전수칙, 그들이 발포하면 100% 우리가 당하게 되어 있다. 남산 위의 소나무 철갑도 결코 못 당한다.
적의 고속정에 설치된 탱크 포탄에 조타실이 날아가고, 초반에 정장이 쓰러진다. 아비규환 속에서 부상을 무릅쓰고 처절한 교전이 펼쳐진다. “난 배를 살릴테니 넌 사람을 살려” 한중사의 명대사이다. 이것이 곧 연평해전이다. 북한은 1차 연평해전을 통하여 화력의 열세를 실감 하고 탱크 포탑을 고속정에 설치하여 우리를 무지막지 타격하였다.
생전의 윤영하 대위와 영화속의 주연 모습
최전선을 경계하는 고속정은 참수리급(170ton 승조원 27명 정도)이라는 상당히 낡고 무장이 빈약한 배이다. 배가 작기 때문에 전진 기지라는 시설을 바다에 띄어놓고 야간에는 이곳에서 정박하게 된다. 정장은 대위급, 편대장은 소령급인데, 연평해전의 주역이었던 357정은 윤영하 대위가 정장이었다. 원래 해군은 군기가 엄격하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듯 배가 출항하면 선장이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된다. 사고라도 나면 치명적이고, 달리 외부 도움을 받기가 어려우므로 상명하복의 규율을 엄격히 적용할 수밖에 없다. 윤 대위는 별명이 독쟁이라고 할 만큼 엄격하게 승조원들을 훈련 시켰다. 훈련이 엄격하면 불만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따뜻한 일상에서는 부하들을 어루만지던 해사 출신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둔 진정한 덕장이기도 했다.
한국영화를 보며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 영화를 잘 만든다"라는 감탄이다. 명량의 해상 전투 장면이 고전적 전투라면 연평해전은 현대적 해상전을 아주 사실감 나게 재현하고 있다. 첫 촬영은 2008년 1월, 서울 홍익대 거리에서 시작됐다. 참수리호 조타장 한상국 중사가 부인을 위해 결혼식 반지를 구입하는 장면이었다. 운명의 그날, 한 중사는 허리 관통상을 당하고도 끝까지 방향타를 놓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41일 만에, 귀항 도중 침몰한 참수리호 조타실에서 방향타를 단단히 움켜진 자세 그대로 발견됐다. 그 후 한 중사 부인 김한나씨( 2013년 7월 31일자로 광주시 공무원으로 채용됐음)는 "(영웅을 냉대하는)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며 이민을 떠나 사람들 마음을 울리기도 했다.
메가폰을 잡은 것은 해군 병장 출신 김학순 감독이다. 그는 "참수리호 6용사의 영화는 왜 없느냐는 지인의 질타가 가슴을 때렸다"고 제작 이유를 밝혔다. 김 감독뿐 아니라 제작진 상당수가 해군·해병대에서 복무한 것이 눈에 띈다. 윤영하 소령 역의 주연 정석원(28)씨부터 해병 수색대 출신이다. 원래 영화의 주인공은 오른쪽 다리가 절단된 상태에서 전투를 지휘한 부정장 이희완(당시 중위: 현재 합동참모대학에 교관으로 재직)소령으로 하려 했으나, 살아남은 사람이 주인공 일 수 없다고 한사코 고사하였다고 한다.
교전 이후 대한민국은 북한의 책임을 묻지 않고, 우발적 사건이라고 사태를 마무리 하였다. 영결식에는 김대중 대통령은 물론, 총리도, 국방부 장관도, 합참의장도 참가하지 않았다. 정부에서 일부러 가지 못하게 했다. 마침 군 출신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참가하였다. 방송도 이 사건을 더 이상 떠들지 않았다.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일부 좌파단체는 참수리 537호 장정들의 불필요한 대응이었다고 비판하였다. 노무현도 서해해전을 기념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기간 동안 연평해전 전사자는 잊혀진 채 외면당했다. 전사자는 보상금으로 최저 3천만 원에서 최고 8천만 원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인양한 참수리호와 전사자 형판 (2013년 6.21일 2함대사 견학 시 촬영)
7월 26일 현재 누적 관객수는 593만 921명, 그간 메르스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올 여름 극장가에서 예상을 뒤엎는 흥행으로 고속 순항 중이다. 지난 6.13일까지 일일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하였는데 14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인사이드 아웃'에 그만 1위 자리를 내줬다. 하지만 개봉 23일 만에 올해 한국 영화 최초로 500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의 로운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
이후 연평해전을 계기로 해군은 낡은 참수리급 대신에 최신 유도탄 고속정(400t급)을 배치하고 있다. 1호는 윤양하 함이고 차례로 6명의 전사자 이름을 붙인 고속정이 진수 되었다. 이 배를 윤영하 급이라 명칭한다. 늦게나마 교전수칙도 수정되어, 이에 따라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 시 5단계 대응에서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3단계 대응으로 개정되었다. 적이 때릴 때 까지 쳐다보면서 기다리던 어처구니없는 조항이 마침내 바뀐 것이다.
향후 도발하면 지휘 세력은 물론, 지원세력의 원점까지 타격하겠다는 군부의 의연한 결의를, 정말이지 실제로도 한 번 봤으면 이 더운 여름 복날에 정말로 속이 후련해질 것이다.....
|
첫댓글 人人事事焉無緣/인인사사언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