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0] 윤영태(尹泳泰) - 고생과 축복 7. 3년간 전국 우수교역으로 선정 - 1
1 1976년은 “균형 잡힌 교회 기반 확보”란 표어를 정하고 장년, 부인, 청년, 학생, 유년 주일학교 등 균형을 조성하고 교회에 필요한 비품도 완비함으로써 교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2 목표를 세워 놓고 기도하고 노력하여 골고루 30여 명씩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제직회도 구성하여 교회 운영을 맡았고 새로 입교하신 최은하 부인 식구가 50만 원을 헌금하여 전국 교역 본부 중에서 제일 먼저 피아노도 구입하게 되었다.
3 1977년은 “안정된 교회 기반 조성”이란 표어를 세우고 교회로서 모든 면에 안정을 이룩하고 정상적으로 목회할 수 있는 기반을 닦고자 식구들과 결의하였다. 특히 청년 식구들이 중심이 되어 쉬지 않고 활동하므로 그 성과는 매우 좋아서 전국 최우수 교역으로 선정이 되어 협회장님의 표창패를 받게 되었다.
4 1978년은 “충성된 교회 풍토 조성”의 해로 정하고 1월 초순 장년회를 구성하여 회장에는 고찬수 씨를 선임하였다. 2월에 국제 부흥단을 맞이하여 100여만 원 들여 활동했지만 결국 전도되어 남아진 사람은 없었다.
5 그리하여 2월 12일 탄신 기념일을 맞이하여 21명으로 구성된 자체 청년 전도단을 조직하여 공휴일과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하여 마크를 착용하고 활동하여 전도 분위기를 계속 유지해서 식구들에게 관심도를 높였다.
6 지난해 보다 경제적 분야도 170% 증가 되었으며 성가대 창단, 성전 의자 구입 등 식구들의 노력으로 많은 일들을 했으며 약혼한 식구도 27명이나 되었다. 78년도에는 최우수 교역으로 선정되어 79년 5월 1일 협회 창립기념일 행사 때 협회장님의 표창패와 상금을 받았다.
7 1979년은 “결실의 해”로 정하고, 첫째 80년 2월 21일(음 1.6일) 선생님 회갑을 앞두고 각자의 신앙의 결실을 보아야겠고, 둘째 70년대의 10년간을 결산해 보아야 되겠고, 셋째 지난 2년간 전국 최우수 교역으로 선정되었지만 아직 미비점이 너무 많고 장성기에서는 무너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무너질 수 없는 확고한 승리적 기반을 닦기 위해서 완성적으로 한번 더 우수 교역으로 선정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며, 넷째 교역장 자신이 부임한지 만 7년이 되기 때문에 7년간의 총결산을 맺고 넘어가고자 함이었다.
8 전반기에는 획기적인 발전이 없어 초조했으나 9월 4일 신학교 졸업식 때 김영휘 협회장님께서 하면 된다는 말씀이 새삼 자극되어져서 귀임 후 총력을 다한 결과 79년도 협회 지시에 따른 평균 예배 식구 120명을 확보함으로써 우수 교역으로 선정되어 3연패를 하게 되었으며, 교역장은 협회장님의 표창패를 받게 되었고 울산 교역은 트로피를 받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지난해 누락되었던 15년 근속상도 함께 받게 되었다.
9 1980년도는 “축복받는 교회”란 표어를 세워 놓고 1차적으로 2월 21일(음 1. 6) 선생님 회갑잔치를 4일간 실시할 계획을 세웠다. 소요 경비는 최소한 200만 원 이상 예상되기에 기도한 끝에 식구 1인당 6,100원 이상 헌금하도록 결의하였다. 맨 처음 헌금한 식구는 국민학교 1학년생인 주일 학생 홍재영 어린이였다.
10 부모들이 염려하는 얘기를 듣고 자기가 제일 먼저 하고 싶다고 돼지 저금통을 뜯어서 꽃봉투에 넣어서 가져왔다. 그것을 본 부모인 홍광수, 권오삼 집사는 61만 원을 헌금했으며 식구들이 많이 참여하여 수입과 지출이 모두 초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