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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클라이머의 삶
고산등반 열정을 등산 교육으로 돌린 이동윤씨 “졸업생 평생 애프터서비스에 힘쓸 터”
소 속 원광대 OB
한국산악회 기술위원 대한산악연맹 등반이사
코오롱등산학교 강사
등반 경력
1992년 키차트나스파이어 동벽 등반
1993년 에베레스트 남릉-남동릉 등반
1994년 동계 그랑조라스·드류·몽블랑 등반 탈라이사가르 북벽 등반 구소련 악수 북벽 등반 1
995년 가셔브룸4봉 북서릉 등반
95-96년 미국 동부 지역 암장·빙장 순례
여러 해 동안 흠뻑 빠져 해온 일을 어느 날 갑자기 훌훌 털어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고산등반은 한 번 발을 디디면 여간해서 빠져 나오기 힘들다고 경험자들은 말한다. 이는 목숨을 건 험난한 과정을 통해 등반가 1) 자신의 존재인식과 2) 더불어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등정 후 느끼는 성취감이 다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더욱 험난한 대상으로 빠져든다고 한다. 이런 벗어나기 힘든 고산등반의 세계에서 이동윤씨(李東潤·35·억센알파인 대표)는 기꺼이 몸을 빼냈다. 대학 초년생 때 스스로 정한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학창시절 그의 슬로건은 ‘내 청춘 산에 걸고’였다. 대신 20대까지만 큰 산에 몰입하고 서른을 넘어서는 사회인으로서 열심히 살기로 했었다. 자신과의 그 약속을 위해 고산의 세계에서 발을 빼낸 것이다. 그리곤 그동안 터득한 등반 기술을 새롭게 산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전해주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등산 행위를 통해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여러 해 동안 흠뻑 빠져 해온 일을 어느 날 갑자기 훌훌 털어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고산등반은 한 번 발을 디디면 여간해서 빠져 나오기 힘들다고 경험자들은 말한다. 이는 목숨을 건 험난한 과정을 통해 등반가 자신의 존재인식과 더불어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등정 후 느끼는 성취감이 다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더욱 험난한 대상으로 빠져든다고 한다. 이런 벗어나기 힘든 고산등반의 세계에서 이동윤씨(李東潤·35·억센알파인 대표)는 기꺼이 몸을 빼냈다. 대학 초년생 때 스스로 정한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학창시절 그의 슬로건은 ‘내 청춘 산에 걸고’였다. 대신 20대까지만 큰 산에 몰입하고 서른을 넘어서는 사회인으로서 열심히 살기로 했었다. 자신과의 그 약속을 위해 고산의 세계에서 발을 빼낸 것이다. 그리곤 그동안 터득한 등반 기술을 새롭게 산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전해주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등산 행위를 통해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 대학 시절 인수봉을 등반하는 이동윤씨.
전라도 출신으로 경상도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친구가 많지 않았던 그는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학교 뒷산을 오르곤 했다. 높이는 546m에 불과했지만 고향산 대덕산과 이름이 같아 마음 편해지는 산이었다. 횟수를 거듭하면서 자연스레 발길이 다른 산으로 옮겨진 동윤은 산행 중에 만난 전문 산악인들의 모습과 산서적에 나온 멋진 사진을 통해 큰 산에 대한 꿈을 키웠다. 몸은 늘 육산에 머물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하얀 산에 가 있었던 것. 87년 동윤은 가업을 잇겠다는 생각으로 원광대 농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찾아간 곳은 산악부실이었다. 그 순간부터 10년 가까이 동윤의 머릿속은 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교시절 육상 선수로 활동하고, 기계체조로 신체를 단련해온 동윤은 산악부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존재가 됐다. 바위 앞에서 동기들이 쩔쩔맬 때 그는 앞장서 오르곤 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지게질이 몸에 배어 있던 그에게 웬만한 무게의 배낭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새내기 시절, 그는 ‘바위 신동’이니 ‘제대로 된 후배가 들어왔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에무라 나오미의 <내 청춘 산에 걸고>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배낭에 적어놓는 등 슬로건 삼으며 지냈다. 대학생활 첫해 봄 대둔산을 비롯해 고향 산만 오르내렸던 그는 하계 등반으로 찾은 북한산에서 인수봉의 웅장한 모습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돈이 없어 고향집에서 감자 세 자루와 마늘 석 접을 가지고 들어간 북한산이었다. 감자에 질릴 정도로 먹는 게 부실했고, 술 마시고 산 노래 부르며 즐겁게 지내다 한밤중 느닷없이 ‘빳다 세례’를 받은 적도 많았다. 그러나 바위에만 다가서면 즐겁기 그지없었다.
그 해 가을부터 동윤에게는 금요일이면 막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이틀동안 바위에 묻혀 지내다 일요일 막차로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평일에는 여비 마련을 위해 막일을 하고, 산에 갔다 돈이 떨어져 지하철역에서 자는 등 몸은 고됐지만 늘 들떠 지내던 시절이었다. 큰 바위도 오르고, 이름난 클라이머들과 어울려 지내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고향 면사무소에서 단기사병으로 지내던 1년 반의 기간에도 인수봉의 유혹을 참지 못했다. 그로 인해 위수지역을 벗어났다가 서울역 광장에서 헌병에게 발각돼 곤욕을 치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튿날이면 다시 찾아오는 인수봉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일취월장 발전한 바위 기량은 얼음으로도 이어져 빙벽등반을 시작한지 두 번째 맞은 겨울인 89년 2월 초 남한 최대의 빙폭인 토왕폭을 오르기에 이르렀다. 요즘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비가 열악한 반면, 토왕폭이 주는 위압감은 한층 더했던 시절에 초보자나 다름없는 동윤의 완등은 대단한 것이었다. “가죽 등산화를 신고 정말 엉성한 장비로 오르긴 올랐지만, 깡다구 하나로 도전했다가 얼마나 애를 먹었든지 모릅니다. 등반을 끝낸 다음 한동안 스트레스를 받았으니까요. 자다가도 토왕폭이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곤 했을 정도였습니다.” 입대 전부터 유학재씨(트랑고스포츠 대표)와 신상만씨(충남대OB·98년 탈라이사가르 등반 중 추락사) 등 당시 한국산악회 주력 멤버들과 친분을 쌓아온 동윤은 90년 여름 제대 직후 한국산악회에 가입하면서부터는 전주에서 반, 서울에서 반 생활하다시피 했다. 학교 산악부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반반 비중을 두고 생활하자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93년 에베레스트 이후 벽 등반 추구 이렇게 열정적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선배들은 좋은 산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윤을 끌어들였다. 그 바람에 입학 후 10년만에 대학을 졸업해야했지만, 한 5년 동안은 남들이 평생 다닐 만큼 여러 차례 하얀 산을 찾아다닐 수 있었다.
▲ 에베레스트 웨스턴쿰에서 한국여성대원과 기념촬영한 이동윤씨(가운데)(왼쪽).
93년 봄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을 출발, 정상을 향하는 이동윤씨(오른쪽). 첫 원정은 92년 한국산악회 매킨리 원정이었다. 거벽등반을 추구했던 한국산악회는 당시 국내 산악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매킨리(6,194m) 남벽과 키차트나침봉(2,793m)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등반 기회가 좀체 오지 않았다. 매킨리 등반조로 남벽 아래에 도착하자 다른 한국 원정대의 사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추락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친 산악인을 구조하다 보니 수직고 3,000m 거벽인 남벽을 등반할 기간도 다 지나가 버리고, 식량도 다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매킨리는 손도 제대로 못 대본 상태로 다음 등반대상지로 옮겨가야 했고, 지원조로 참가한 키차트나침봉 등반은 루트 개척과 장비 수송으로 끝내야 했다. 어떤 산을 보나 오르고픈 욕망이 치솟던 시절, 표고차 1,000여m에 이르는 알바위봉인 키차트나침봉을 등반하는 선배들을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지원조인 신상만씨와 함께 선배들 눈치 못 채게 맞은편 암봉 중턱까지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93년에는 세계 최고봉 등반의 기회가 주어졌다. 전북산악연맹 원정대였다. 매킨리에서 돌아오자마자 합숙소로 들어간 동윤은 이후 1년간 체력을 다지며 세계 최고봉 등반에 대비했다. 에베레스트 원정 직후 탈라이사가르 북벽에 도전할 계획을 세워놓았던 그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에 열중했고, 그 결과는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곧바로 나타났다. 전북연맹팀뿐 아니라 BC에 모인 세계 각국의 원정대를 통틀어 막내였지만, 뛰어난 체력과 고소적응력을 발휘, 두 차례나 등정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날씨 운이 따라주지 않아 두 차례 도전 모두 남봉 직전 해발 8,600m 지점에서 물러서야 했다.
“다른 팀들은 날씨 나빠 캠프에서 움직이지 않을 때도 등반을 강행했습니다. 해발 8,500m 넘는 높이에서 가슴팍까지 차 오른 눈을 헤치자니 곧 한계에 이르더군요. 게다가 눈보라까지 몰아치는 바람에 매번 등정 시간을 놓친 거였죠. 그런 상황에서도 두번째 도전 때는 정상까지 밀어붙일까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하산길에 비박할 걸 생각하니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아마 날씨만 좋았더라면 강행했을 겁니다.” 마지막 제3차 공격 때 실패하고, 사우스콜 캠프에 내려와 있는데, 이튿날 아침 다른 원정대원들이 줄지어 남동릉을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한 번 더 시도하면 정상에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장님에게 한 번 더 등반하면 안 되겠냐고 무전을 통해 물었다가 욕만 엄청 먹었습니다. 대장은 사고를 우려했던 거죠.”
동윤은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두 차례나 등정 기회를 얻을 정도로 활동도 활발했지만, 8,000m급 거봉 노멀루트 등반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 인수봉에서 피나는 훈련을 통해 갈고 닦았던 기량을 발휘할 기회도 없고,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짜릿한 상황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른 팀들이 등반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셰르파들을 앞장세운 등반이 성공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었다. 귀국 후 공사장을 전전하면서 푼푼이 돈을 모은 동윤은 이듬해 1월 동계 알프스 등반에 나선다. 선후배들로 구성된 원정대였다. ‘벽을 향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나선 등반이었지만, 고생만 실컷 하고 귀국해야했다.
첫번째 도전한 벽은 그랑조라스 북벽이었다. 어차피 처음 접하는 벽, 기왕이면 신 루트로 오르겠다고 마음먹은 동윤은 후배 두 명과 함께 재패니스쿨와르 오른쪽 벽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중단쯤 올랐을 때 위에서 떨어진 낙석에 후배 두 명이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한 명은 얼굴이 크게 찢어지고, 또 한 명은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팔을 다치고 말았다. 그런데도 구조헬기가 뜰 수 없는 상황이어서 어렵게 어렵게 자력으로 탈출해야 했다.
샤모니에서 며칠 쉬면서 멀쩡한 후배와 함께 드류 등반에 나섰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 무작정 올려치다 보니 그들이 오른 봉은 드류가 아닌 능선 상의 무명봉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귀국할 때까지 기간이 남자 이번에는 몽블랑 등반에 나섰다. 에귀디미디를 출발, 정상에 올랐다 보송빙하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이번에는 무사히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하산 도중 선배 대원이 빙하에서 아이젠이 벗겨지면서 무려 150m나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척추를 다치는 큰 부상이었다. 헬기로 구조된 뒤에도 응급실 신세 1주일 등 10여 일 동안 치료를 받아야하는 중상이었다. 가셔브룸4봉 후 학창시절 약속 지켜 이렇게 큰 일을 겪었음에도 그의 등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 해 4월에는 인도의 난봉 탈라이사가르 북벽에 도전했다. 그 등반에서도 참담한 상황을 겪어야했다. 벽 중단까지 고정로프를 설치한 뒤 전진캠프로 내려서자마자 눈사태를 맞고 말았다. 다행히 대원 한 명이 몸에 지닌 칼로 텐트를 찢어낸 쪽에 눈이 많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깊었어도 전원 몰살당할 뻔한 위급한 상황이었다.
▲ 탈라이사가르 북벽에서 눈가루 세례를 받은 이동윤씨(왼쪽). 키차트나스파이어 등반을 마치고 방문한 요세미티 국립공원(맨오른쪽이 이동윤씨)(오른쪽). “다른 대원들은 하산하자마자 등산화를 벗고 텐트 안에 들어갔지만, 저는 등산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게으른 덕에 신발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거죠. 눈사태로 장비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개 떨듯이 떨다가 베이스캠프로 내려오는 것으로 등반을 마쳐야 했습니다. 어찌나 아쉽던지 철수 준비를 마치고나서도 다음 도전을 위해 정찰 삼아 맞은편 봉을 올랐다 내려오기도 했죠.”
그가 처음으로 정상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 등반은 94년 여름 악수(5,217m)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산악회로서는 92년에 이어 두번째 도전한 중앙아시아의 침봉이다. 그 등반에서 신상만과 파트너를 이룬 그는 평균경사 87도에 표고차 1,500m의 거벽을 4박5일만에 돌파하는 데 성공, 세계 제3등을 기록했다. “구소련 산악인들이 초등한 트로시치넨코 루트였습니다. 하단부는 거의 다 오버행으로 이루어져 있어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이틀은 줄에 매달려 자고, 또 이틀은 바위턱에 엉덩이만 걸치고 자자니 잠이 모자라 애를 먹었어요. 물이 흐르던 크랙이 이튿날 아침이면 얼어붙는 게 가장 곤욕스러웠습니다. 무게를 줄이느라 식량을 최소화하다보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런 상태로 등반하다보니 저녁이면 몸이 파김치가 되곤 했는데도 밤새 추위에 떨다가 해만 들면 다시 몸에 힘이 솟아났습니다. 젊음도 젊음이지만, 열정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 악수 등정을 마친 뒤 베이스캠프에서(맨 오른쪽이 이동윤씨).
그에게 94년 한해는 운동화 신고 다닌 날보다 이중화 신고 지낸 날이 더 많았던 해였다. 알프스에 탈라이사가르에 악수까지 다녀왔으니까. 처음 원정 나갈 때는 고향 면장님이 점심값도 주시고, 동네 할머니들께서 옆구리에 감춰놓았던 돈도 꺼내주시더니, 하도 자주 나가니까 “또 가냐?”고 되묻더란다. 동윤은 이듬해 95년 여름에는 가셔브룸4봉(7,925m) 원정에 나선다. 한산 각 지부에서 선발한 대원들이 참가한 막강한 팀이었다. 그 등반은 목표인 서벽 대신 북서릉으로 루트가 바뀌고, 루트 개척과 지원조로서 등반을 마쳐야했지만, 그로서는 원없이 등반에 몰입했던 원정이었다. 50일간의 등반기간 중 그가 베이스캠프에 머문 날짜는 불과 8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나머지 기간은 루트를 뚫고, 줄을 깔고, 캠프를 만드느라 북서릉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공격조가 등정을 포기한 다음에도 홀로 해발 7,000m까지 올라 루트에 깔려 있는 고정로프와 무려 200개가 넘는 카라비나를 걷어 내려오는 괴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고산등반에 몰입하던 이동윤은 귀국 후 깊은 고민에 빠진다. 20대까지만 큰 산을 다니고 이후에는 국내 산에 만족하기로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미국 여행을 떠났지만, 그가 방문한 뉴욕에서 만난 사람 역시 대학 산악부 동기생들이거나 뉴욕산악회 산꾼들이었기에 산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가을과 봄은 샤왕컹크, 겨울에는 마운트 헌터 일원의 빙장에서 주말을 보내며 지내야 했다.
등산이 삶의 질 높이는 데 도움됐으면 8개월간 산에만 다녔지만 귀국하면서 새로운 생활을 위한 결심을 굳혔다. 이제부터라도 소홀히 해온 사회생활에 충실하면서 국내 산에 만족하되 새롭게 산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지내자고 다짐한 것이다.
이후 그는 여러 해 동안 등산장비 제조업체와 판매업체에 근무하며 장비시장의 흐름과 상황을 파악해오다 지난해 4월 자그마하게나마 자신의 업체를 창업하기에 이르렀다. 대학산악연맹 87학번의 구호인 ‘억센’과 ‘알파인’을 합성, 억센알파인이라 회사이름을 짓고, ‘니크아웃(Nik Out)’이란 브랜드의 의류제품을 만들고 있다. 소량이더라도 편안하게 산행을 도와줄 수 있는 의류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 지난 겨울 나선 용대 자연휴양림 가족 여행.
서포터로서 여러 차례 산행을 해온 대암산악회 회원인 최향순씨(35)와 97년 2월 결혼한 뒤 세 살배기 딸 도란이와 함께 화목한 생활을 해오고 있는 그는 생업에도 열심이지만, 96년 미국서 돌아오면서 다짐한 결심도 잘 지켜나가고 있다.
“요즘은 최첨단 장비가 많이 나와 짧은 기간에 기량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단기간에 갖출 수는 없습니다. 포도주도 어느 정도 숙성 기간을 거쳐야 적당한 향과 맛이 우러나듯이 산도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전사고도 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어설프게 산을 배운 사람들에게서 주로 일어난다고 봅니다. 제가 등산교육에 뛰어든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등산 지식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등산을 전문등반 하나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위해 도보산행, 캠핑생활 등 등산을 총체적으로 알려주고 싶습니다. 등반행위가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그가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로 활동한 것은 94년 초 동계반부터였다. 처음부터 정규반, 동계반, 암벽반 가리지 않고 교육에 몰두해왔고, 안전등반강습과 알파인스쿨을 통해 한국대학산악연맹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열중하고 있다. “월화수목금요일 닷새동안은 가족과 사회생활에 충실하되 나머지 이틀간만큼은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물론 산을 통해서죠. 아직까지는 철저하게 지키고 지내왔는데,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대학산악부 후배들을 비롯해 이제 산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졸업 후에라도 평생 애프터서비스가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윤길수 Yun kil soo 1958.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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